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현장 > 교회와 현장
교회와현장 (2018년 10월호)

 

  그리스를 ‘간’ 보다
  

본문

 

그리스에 다녀왔다. 여행을 기다리면서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렸고, ‘그리스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 같은 유쾌한 여행도 기대하였다. 물론 모든 예고편은 기대를 저버렸다. 겨우 4박 5일간 주마간산으로 돌아본 어설픈 그리스 순례에서 깨달은 것은 아는 만큼 본다는 진실이었다. 그것도 터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도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관심사의 배경이 된 그리스는 이국적 분위기 때문에 여행을 마친 후 여러 달이 지난 지금까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다. 남유럽 발칸의 최남단인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여기에 딸린 지중해 연안의 여러 섬들은 지리적으로 남다른 차별성이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인문적 차이이다. 반도를 좌우로 서쪽 이오니아해는 서방교회인 이탈리아와, 동쪽 에게해는 이슬람 문명인 터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는 문명 그 자체를 잉태하였고, 신화 세계의 신들 이야기와 철학사의 대명사와 같은 인물들을 낳았다. 도시국가를 운영한 민주주의 시스템도 그리스를 모태로 하며,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출신이었다. 그리스의 눈부신 하늘과 바다, 그 사이에서 자라는 올리브 나무들 역시 모두 빛나는 푸른색이다. 사람들이 숙제하듯 이곳을 찾는 이유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문은 불행하게도 우리의 관점을 비껴갔다. 여행의 주제인 ‘신(新) 사도행전’에서 알 수 있듯이 초점은 유럽에 복음을 전한 첫 사람 바울 사도에게 맞춰져 있고, 그가 남긴 교회사의 뿌리들, 특히 정교회의 유산을 답사하는 데 여행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는 어디든 정교회가 있고, 대부분의 국민은 정교회 신자이다. 무려 국민의 98%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스라는 이름과 동시에 떠오르는 위대한 문화유산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유적으로 이야기책을 통해 신화로만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르바로 대표되는 그리스인은 자유를 갈망하던 과거의 주인공이다. 이것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교회 신앙이고, 삶의 현장과 밀착한 정교회 전통
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여정은 성지순례로 압축된다. 옛 비잔티움에서 시작해 터키-그리스 국경인 입살라로부터 성서의 지리적 배경으로 유명한 네압볼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그리고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메테오라와 파트라까지 순례에 포함되었다. 미리 그리스식 인사법을 익혔다.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우스 조그라포스(조성암) 대주교는 그리스 사람이면 누구나 40일 동안 이렇게 부활인사를 한다고 했다.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첫 기착지는 옛 비잔티움인 터키 이스탄불이었다. 이곳은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이슬람 세계의 한복판에 정교회 총대주교좌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배운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5대 교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인데, 이중 서방에 위치한 로마교회를 제외하면 네 교회가 동방교회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중 콘스탄티노플교회는 위상이 동등한 가운데 네 교회를 대표해왔다.
점령자의 땅에서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지켜온 총대주교청에는 신앙적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이스탄불 시내의 성 게오르기오스(게오르규)교회인데, 지난 2,000년의 영광과 순교의 사실이 예배당은 물론 총대주교의 집무실 건물 벽마다 모자이크로 기록되어 있었다. 두 건물은 1989년 그리스정교회 신자 앙겔로포우로스의 전적인 헌신으로 말끔히 재건되었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는 3억 명에 이르는 세계 정교회 신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이들을 영적으로 대표하는 존재이다. 정교회의 1대 총대주교가 사도 안드레라면, 이를 승계한 바르톨로메오 1세는 270대이다. 한국정교회가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우리 일행은 대접견실에서 총대주교를 예방할 수 있었다. 로마 교황과 같은 권위적 장치는 없었지만, 다만 그를 둘러싼 온유함이 가슴에 닿았다. 우리가 배운 대로 인사드리자, 그는 “알리토스 아네스티”라고 화답하였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1054년 동방과 서방의 교회대분열,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 수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교회의 우뚝한 존재감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래서 평화를 수호하려는 교회로 남았을 것이다. 총대주교는 기독교 교회의 일치와 종교 간 평화를 강조하였고, 무엇보다 열흘 후로 예정된 남북정상 간 판문점회담을 상기하면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세계 정교회 최고 수장의 당당함,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하는 스스럼없는 환대, 일일이 전해준 총대주교의 선물인 작은 비잔틴십자가는 두고두고 동방교회의 따뜻함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준비해 간 한국 전통문양을 담은 단청십자가를 건넬 때 그가 받자마자 십자가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극적이었다. 곁에서 이를 건네받은 비서 요아킴 사제도 황송하다는 듯이 입을 맞추었다. 몸에 밴 경건처럼 느껴졌다.
성 게오르기오스성당은 정교회를 대표하는 곳답게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동방 정교회의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이곳에는 ‘믿거나 말거나’ 예수가 채찍에 맞을 때 붙잡으셨다는 돌기둥과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돌려받은 제37대 대주교 성 크리소스토무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동방교회의 대표적 교부인 크리소스토무스는 지나간 옛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그는 정교회 교인들의 예배와 삶을 이끌고 있다. 정교회는 연중 40주를 크리소스토무스 예전으로 예배드리고,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에도 성인의 예식에 따라 “오, 주님! 우리를 용납하옵소서. 우리가 기쁘고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을 받아주옵소서.”라고 먼저 선언한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이어진 버스 여정은 단지 국경 때문이 아니라 창밖으로 보이는 자연환경의 차이 때문에 두 나라의 간격을 알 수 있었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낀 비옥한 터키를 벗어나자 그리스의 산야는 야박하다고 느낄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먼저 본 터키와도, 나중에 접하게 될 이탈리아와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키 작은 나무들로 듬성한 돌산은 황량하였고, 뒤이어 만난 도시는 분잡하였다. 낭만적인 기대를 점점 더 접게 만들었다.
그리스에 오자 가이드가 가장 강조한 것은 ‘에그나티아 대로’였다. 바로 이 길을 사도 바울이 걸어갔다고 하였다. 유럽 대륙에 도착한 첫 지점은 네압볼리 항구였는데, 그리스어로 ‘신도시’라는 뜻이며, 터키가 통치한 이래로 지금은 ‘까발라’로 불린다. 바울은 네압볼리에서 에그나티아 대로를 따라 빌립보로 향했다. 우리는 로마 시대에 건설한 그 길로 다니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큰 성 빌립보는 네압볼리에서 서쪽으로 16km 거리에 있었다. 빌립보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었다. 오래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지금은 흔적으로만 존재하지만, 얼마나 대규모였는지 원형극장과 함께 바실리카(교회) 터만 무려 네 곳이나 남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바울이 갇힌 감옥 터였다.
유럽의 첫 교회는 빌립보에서 시작되었다. 빌립보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승전 기념으로 건설한 식민도시였다. 군사도시였기에 유대인이 살지 않았고, 그래서 회당도 없었다. 사도의 행적에 따르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릴 곳이 없어 강가로 나갔고, 거기서 만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루디아’는 유럽의 첫 기독교인이 되었고, 루디아의 집은 유럽 선교의 첫 번째 거점이 되었다. 그 근처에는 여전히 간기테스강이 흐르고, 조금 전까지도 강가에서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제가 세례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
교회 바닥은 당시의 지도와 지명을 모자이크로 구성하였고, 둥근 천장과 사방의 벽은 바울의 빌립보 사역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성화로 설명하고 있다. 그림을 통한 역사 증언은 바울의 첫 현장인 네압볼리도 마찬가지이다. 항구 초입에 있는 니콜라스 정교회 앞에는 2,000년 전 바울의 도착을 알리는 대형 모자이크 벽이 있는데, 사도행전 16장의 감동을 금빛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울의 환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오라마’(환상)였다. 밤에 바울은 오라마를 본 후 지체 없이 소아시아 일정을 포기하고, 마침내 바다 너머 새 대륙으로 향하였다. 영어로는 ‘오라마’를 ‘비전’(vision)이라고 번역하는데, 비전이란 단어가 이렇게 역동적인지 그리스 여행 내내 생각이 맴돌았다.
빌립보에서 빠져나온 바울은 부랴사랴 데살로니가로 향했다. 사자상으로 유명한 암비볼리와 바울이 설교한 바위가 있는 아볼로니아를 지나서였다. 그리스는 가는 곳마다 아주 작은 소예배실이 눈에 띄었다. 거의 1인 기도실처럼 보이는 공간이 마을 어귀마다 있었고, 예외 없이 다양한 성화들을 배경으로 촛불과 꽃을 보관해두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통사고 현장처럼 보이는 지점마다 추모의 마음을 담아둔 작은 교회 모형을 세워두었다.
에그나티아 도로는 데살로니가로 이어진다. 해변의 광장에는 에게해를 바라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우뚝 서 있고, 도심에는 도로의 분기점마다 옛 비잔틴 시대의 소규모 교회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 데미트리우스교회를 방문했는데 그 앞에서 성물가게들이 발목을 잡았다. 진열된 십자가와 동방교회 성물들은 인근 아토스 섬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손가락 세 개를 펼친 모양의 아토스는 그리스 일부이나 자치적인 신권 공화국으로, 오직 남성 수사만 머물 수 있는 동정녀 마리아를 위한 섬으로 불렸다.
성 데미트리우스교회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기독교 공인 이전에 순교한 역사적 인물들은 성화상으로 존재하면서 지금도 그리스인들의 삶의 염려와 평안을 위한 간구에 개입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길은 바울의 길과 합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그리스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리스정교회는 성화상, 즉 이콘을 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지순례에 앞서 미리 정교회를 배우기 위해 찾아간 한국정교회에서는 동방교회의 이콘 유산을 강조하며, 감상법을 일러주었다. 한국정교회 대주교좌인 니콜라스대성당은 그리스 못지않게 성전의 둥근 천장과 온 벽을 성화상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눈부시게, 어떤 이에게는 산만하게 느껴질 것이다.
임종훈 주임사제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성화의 주제와 의미, 배치 순서를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예배당 안 성화의 구도에도 원리와 질서가 있음을 그때 들었다. 흠숭과 경배는 아니지만,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가 절실하였다. 우리가 터키 이스탄불과 그리스 전역에서 성화를 마주했을 때 비교적 익숙하게 여겨진 것은 이러한 사전 이해 덕분이었다.
조성암 대주교가 쓴 『영성예술』은 정교회 이콘 전통에 대한 두 권의 해설서인데, 여기에는 교회의 유산으로 전래된 이콘은 물론 최근 한국인 성화 화가가 원형을 모범으로 삼아 그린 현대적 이콘도 여럿 수록되어 있다. 얼마 전 니콜라스대성당은 아테네미술대학의 소조스 야뉴디스 교수를 초빙해 이콘 수업을 한 후 전시회도 열었다. 그리스인 대주교는 마치 한국에 온 이콘 홍보대사처럼 느껴졌다.
동방정교회는 복음서 저자인 누가를 최초의 이콘 제작자로 부른다. 엘 그레코가 그린 누가의 초상화는 그가 역사가일 뿐 아니라, 화가임을 증언하는 듯하다. 그림 속 누가는 자신의 책 안에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려 넣고 있다. 복음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누가는 그런 까닭에 모든 화가의 수호자로 인정받는다. 베뢰아에서 만난 키가 큰 사도 바울 입상은 유난히 그의 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에는 동네마다 경건한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정교회의 예술가들이 빚어낸 백미는 중부 테살리아 평원에 우뚝 솟은 수도원들이다. 그들은 고독한 영성을 표현하였다. 유네스코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수도원들을 1988년 세계복합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는데, 얼마나 까마득한지 밧줄 끝에 매단 바구니로 물자를 공급한다.
‘메테오라’는 ‘공중의 바위’라는 뜻이다. 아마 하늘에 닿으려는 염원이 봉우리를 믿음의 은둔처로 삼았을 것이다. 영적인 고독을 원하던 이들은 1336년 첫 수도원을 창설하였는데, 수도자의 공화국인 아토스산이 외적에게 자주 침략받자 내륙으로 옮겨왔다고 들었다. 한때 24개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13개이며 그중 6개만을 공개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대 메테오론수도원에는 포도주와 올리브 제작소, 순교자의 방, 예배실, 공중정원, 기념품 가게, 박물관 등이 있었다. 수도생활만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실 생활이 곧 목숨을 건 수도였다. 게다가 메테오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와 맞선 역사가 있다.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저항의 전설을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지금도 그리스는 독립전쟁 중이다. 불과 수십 년 전에는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그리고 지금은 경제적 자주를 위해 투쟁한다. 그리스는 2010년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세 차례 받았는데, 이는 세계 금융역사상 최대의 구제금융이었다. 외부로부터 강제된 개혁 프로그램은 8년 만에 종료되었지만, 그 결과 위기가 본격화한 2015년에 비해 경제규모가 25%나 줄어들었다. 그리스는 아직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감시를 받는다.
메테오라 기념품 가게에서 떡살 무늬처럼 보이는 원형틀을 구입하였다. 이미 오래전에 구한 비잔틴 유물과 유사했는데 그것은 워낙 낡고 뒤틀리고 시간에 그슬린 고물 또는 고전과 다름없었다. 실은 그 용도조차 알지 못했으나 이번에 두 물건을 비교하면서 실체를 알게 되었다.
떡살 무늬는 성찬 빵에 찍는 직인이었다. 원형틀 안에는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니카’(IC XC NIKA)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신다.’라는 뜻이다. 봉헌물인 빵 위에 직인을 찍는데, 그렇게 새겨진 도장 부분이 성체로서 거룩한 주님의 몸이 되었다.
성지순례 일주일 전, 마포 니콜라스대성당에서 부활절 월요일 성찬예배에 참석하였다. 늘 행하는 성찬이지만, 동방교회의 성찬은 특별하였다. 두 사람의 사제가 성체(빵)와 성혈(포도주)을 섞어 거룩한 수저로 일일이 떠먹이면서 행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흘릴까 봐 조심스레 붉은 수건을 받쳐주던 모습이 생생하다. 나중에 듣자니 성찬 준비 예식에만 1시간 가까이 기도와 축복, 조심스러운 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비록 성찬에서 배제되었으나, 예배를 마친 후 ‘안티도론’이라 불리는 축복받은 빵 조각을 받아 먹었는데, 적잖은 위로가 되
었다.
우리의 그리스 여정은 비좁은 고린도 운하를 건너, 옛 겐그레아 해변을 흘려 보고, 구 고린도 발굴지를 답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파트라 항구에서 대형 페리에 몸을 싣고 어둑어둑해진 그리스를 뒤로한 채 이탈리아 바리 항구로 향하였다.
돌아보면 본격적인 성지순례는 마포에 있는 한국정교회를 방문한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때마침 우리가 여행한 부활절기는 ‘부활의 교회’라고 불리는 정교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 똑같은 부활란을 선물받았다. 붉은색 물감을 들인 것이었다.
정교회의 부활절은 축제다웠다. 그곳에는 익살스러운 부활절 놀이가 있었는데 각자 부활란을 들고 서로 부딪치며 누구 것이 더 단단한가를 겨루는 것이었다. 부활란을 깨뜨리는 놀이는 예수가 죽음의 벽을 깨뜨리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행해진다. 마치 바위 무덤을 깨뜨리듯 서로 겨루는 것이다.
여행하면서 모든 정교회가 나라마다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한 교회 아래에서 같은 예배서, 같은 전례력, 같은 인사말, 같은 성인, 같은 절기풍속을 공유하는 모습을 느꼈다. 2,000년 전통은 박물화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정교회를 가리켜 정통교회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정교회 성찬예배 중 반복해 부르던 짧은 부활송이 마치 귀벌레처럼 여전히 내 귓속을 맴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시고 무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베푸셨나이다.”

송병구 | 색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십자가 168개 상징 찾아가기』가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