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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9월호)

 

  「복음과 세계」(福音と世界) 편집 동향, 2018년 5-7월
  

본문

 

2018년 5월호–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마르크스 탄생 200년을 생각하다
일본 신쿄출판사(新教出版社)의 월간 신학잡지 「복음과 세계」(福音と世界) 5월호는, 1818년 5월 5일의 카를 마르크스 탄생을 기억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마르크스 탄생 200년을 생각하다’라는 특집을 다루었다. 마르크스는 절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협력하에 『자본론』 등에서 탁월한 경제, 사회 비판을 전개한 ‘지성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그가 남긴 사상의 파도는 근대 일본은 물론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기독교계에도 거세게 닥쳐왔었다. 그것은 특히 학생기독교운동(SCM) 등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관계를 둘러싼 뜨거운 논의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다. 우리 기독교사 안에서도 이동휘, 이대위, 현순 등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경계선을 넘나든 이들의 이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천황제 파시즘이 강고했던 그 시절, 이러한 논의들은 탄압 속에서 어깨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전후(戰後) 일본에서는 아카이와 사카에(赤岩栄) 목사의 공산당 입당선언 등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1970년 전후의 학생운동 시기에 그 관심은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청년단체의 출현과 대중의 외면으로 일본에서조차 마르크스주의의 지적(知的) 권위는 저하되었고, 분단 체제하의 한국에서는 여전히 탄압의 대상이었다. 1991년의 소련과 동구권 붕괴의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마르크스는 죽었다.”라는 말마저 회자된 지 오래다.
마르크스가 죽은 시대, 우리는 폭주 중인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를 겪으며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하여 마르크스가 지니고 있던 근본 통찰을 다시금 곱씹어보아야 한다는 목소리에 고개만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복음과 세계」는 이 주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여러 관점에서 정리함과 동시에, 기독교가 각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본 것이다.
첫 번째로 “마르크스주의 존립에 기독교는 어떻게 관여해온 것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일본 공산당 의장과 중의원을 역임한 후와 세츠조우(不破哲三)가 “마르크스·엥겔스의 종교관에 대하여”라는 글을, 호세대학(法政大學) 교수이자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엥겔스와 기독교”라는 글을 썼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구 유럽의 기독교가 쌓아온 지적 유산에 기반하여 창출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정반대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수용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졌을까?”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페리스여학원대학 다케다 다케히사(武田武長) 명예교수는 “신학과 사회주의–칼 바르트의 경우”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서는 근현대를 대표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해석하여 자신의 신학에 녹여갔는지 소개했다.
세 번째로 논의를 구체화하여, 현대 페미니즘을 새롭게 꽃피게 한 데에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있었음을 도쿄외국어대학 오다와라 린(小田原琳) 준교수가 “「카리브해와 마녀」의 물음–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하다”라는 글을 통해 다루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다양한 영역으로 파생되어갈 수 있다는 비판적 잠재력을 확인시켜 준다.
네 번째로 종교와 국가 등의 영역을 초월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성’에 대해 다루었다.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신학부 시노헤 쥰야(四戸潤弥) 교수는, “대학에서 이슬람을 가르치며 『자본론』에 이르다”라는 글을 통해 이슬람의 관점에서 『자본론』 독해의 가능성을 모색해보았다. 그 위에서 다시금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각각 제시하는 사회변혁의 비전이 어떻게 다른지도 재확인하고자 했다. 캐나다 퀸즈대학의 데이비드 라이언 교수도 “기독교적인 혁명가들?–마르크스주의의 혁명관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를 둘러싸고”라는 글을 통해 여전한 사회적 불평등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세계정신에 다시 한 번 주목하였다.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으로 건너간 마르크스가 목격한 자본주의는 열 살 소년들까지 탄광에 몰아넣던 살인적 체제였다. 노동자는 기계처럼 취급받으며 지옥과 같은 삶을 반복했다. 그때의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었다면, 자본주의는 지금껏 생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등장하자 자본주의는 정신을 차렸고, 끝 모르고 질주하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이 변화하였듯이 말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노동조합을 인정했으며, 최저임금제를 받아들였고, 만연한 착취 구조를 개선해 나갔다. 수정자본주의로서의 지속적 변화 과정을 재촉한 마르크스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바꾸어 나간 자극제였다.
반면 그의 사상을 차용해 혁명을 주도한 레닌–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은 마르크스의 ‘애민’(愛民)적 요소를 망각한 채 독재와 숙청을 자행하며 고립화되어 갔다. 그 사이 마르크스주의의 자극을 내면화한 자본주의는 오히려 세계적 확대를 이어갔으며, 마르크스의 껍데기만 도구화하던 공산주의 사회는 몰락하였다.
과거 학부 시절 수업시간에 한 교수가 “공산주의의 반대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한 학생이 당당하게 “민주주의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이처럼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는 모르겠다. 공산주의의 반대 이념은 자본주의다. 그 자본주의는 ‘트럼프’를 통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 베트남도 실상은 자본주의화된 전체주의 사회이며, 북한이 이를 따라가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식 자본주의’에도 의문은 가득하다. 재벌 중심의 한국 자본주의가 여전히 뿌리 깊은 모순과 과제를 안고 있듯이 말이다.
100년 전, 일본 장로교회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는 ‘협동조합정신’을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오랜 대립을 극복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정신의 공통분모를 잘 조화시킨 동양의 조그만 협동조합 운동가는 미국을 감동시켜, 1930년대에 미국 협동조합의 비약적 성장을 자극하기도 했다. 가가와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잇길’(middle way)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사상을 ‘우애의 경
제학’(brotherhood economics)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마르크스 탄생 200년을 맞은 2018년에, 일본 기독교계가 낳은 위인 가가와 목사와 그가 제안한 제3의 길 곧 ‘협동조합의 정신’을 다시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과는 벌써 국교를 수립했고, 이제는 한 민족인 북한과 새로운 화해협력을 모색하려는 한국의 기독교계는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이나 비판적 성찰을 과연 얼마나 담아내고 있는지 의문이다.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의 생각(사상)과 마음을 우선 알아야 하지 않을까?

2018년 6월호–‘노동’에 희망이 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량 확산 속에서, ‘노동’이라는 것도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처럼 취급되는 세상이다. 이 시대에 ‘노동’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과연 ‘노동에 희망이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복음과 세계」 6월호가 던졌다.
특히 일본은 ‘버블’ 충격파가 오기 직전인 1990년대에는 ‘프리터’라는 말의 유행과 함께 ‘노동’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 바 있다.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가 합해서 생긴 신조어 ‘프리터’(freeter)는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노동’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개념이었다. 이로써 전형적인 정규 직장(샐러리맨이나 공무원 등)의 인기는 식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해가며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청년상’이 그 시대의 상징처럼 회자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기업 입장에서 프리터는 고용의 유연성을 확보해주는 고마운 존재였고, 버블 붕괴와 경기침체, 장기불황 등으로 인해 그들의 ‘노동관’은 빛이 바랬다. 2000년대 이후 격차사회론(格差社會論)은 그 점을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이제 많은 이들에게 노동은 그 어떤 확실한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며, 오히려 더 극단적 상황에 내몰려 있을지도 모른다.
2017년에 일본의 남성 3인조 가수 ‘DJ-KOH’는 <아르바이트 안 할 거야>(バイトしない)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 제목은 노동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담고 있다. 그들은 왜 이런 노래를 부른 것일까? 그것은 더 이상 노동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피동적인 노동방식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생산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처럼 노동의 개념이 변화하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복음과 세계」 6월호는 현대의 노동에 주목했다. 작금의 노동이 영위되는 구조나 에토스를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현장의 관점에 기초하여 다각적으로 노동의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시도했다.
우선 기독교가 그동안 쌓아온 노동관을 확실히 정리해보았다. 홀리네스(성결교) 계통의 일본기독교단 신학교인 일본성서신학교 교장 가사하라 요시히사(笠原義久)는 “성서의 노동관과 현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기저가 되는 창세기 2-3장의 노동관’, ‘구약과 신약 성서에 묘사된 노동’, ‘일한다는 것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하여’라는 등의 논의를 펼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노동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참 의미를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노동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그것이 유린당하는 각 현장에서 싸워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실제 노동현장의 시선에 기초하여 차별적 대우를 받는 외국인 기능실습생이나 노동력 부족의 현실 속에서 위험하고 고단한 노동 환경에 노출돼 있는 소위 ‘3D업종’(건설현장이나 노인시설 노동자 등)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를 살펴본다.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学) 인간사회학부의 시부야 노조무(渋谷望) 교수는, “빈자(貧者)에 의한 부(富)와 연회(宴會, conviviality)”라는 글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사회』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나눔의 경제학’(Sharing economy)과 ‘기본소득’(basic income, BI)의 도입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인간성이 제거된 노동, 물질화와 고도화로 점철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비물질적 생산의 가치를 새롭게 각성시킬 수 있을지 기독교인의 눈을 통해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인권협회 이사이자 외국인기능실습생 권리 네트워크 운영위원인 하타테 아키라(旗手明)가 쓴 “외국인 노동자 정책의 현재–기능실습생제도를 중심으로”와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 사회학부의 후카야 미에(深谷美枝)가 쓴 “복지를 일한다는 것–그 생생한 투쟁”이라는 글은 위의 관점이 일본 노동 현장에서 얼마나 실제적으로 요구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더 나아가 섹스 유흥산업 등에 종사하는 인권 사각지대의 여성들이 영위하는 노동의 정의는 그 경계선을 어떻게 설정하고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지 근본적 질문을 던져 본다. ‘SWASH’(Sex Works And Sexual Health)의 카나메 유키코(要友紀子) 대표가 쓴 “성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한다–‘여자의 해방’인가 ‘여자로서의 해방’인가”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카나메 씨는 “성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할 때, ‘성 노동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 노동에 대해서는 ‘여성’, ‘가난’, ‘여성보호’(혹은 여성자립)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나의 ‘노동문제’로 거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성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성 노동자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에서 ‘성 노동은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전망에 기초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견해가 전 세계에 편재하는 것은 세계 각국의 성 노동자들의 운동 가운데서 ‘구원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세요!’(Save us from saviours!)라는 슬로건이 제시되는 것만 보아도 분명해진다.”라고 지적한다. 본문에서도 ‘여성해방운동에서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면서, ‘성 노동 그 자체가 여성 젠더의 재생산’이라는 관점과 ‘성 노동의 문제에는 여성으로서의 당사자성(當事者性)이 있다’는 의견에도 주목해본다. 이 문제의 복잡성은 마지막 부분에서 글의 필자 유키코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에 잘 드러난다.

당사자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때, 단지 그만두고 싶다는 그 생각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그만두고 싶었던 일들(일 자체 혹은 사건들, 관계성 등–역자 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개선이 가능한가 하는 지점까지도 함께 생각하면 좋겠다.

기존의 노동 관념과 다양한 직업 현장이 충돌, 대립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는 지금,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생명과 자부심, 기쁨과 희망을 연결시킬 수 있는 노동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
여기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 한국에서는 ‘노동’(勞動)의 ‘움직이는 행위’를 단순히 물리적 차원을 의미하는 ‘동’(動)으로 적는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노동’(労働) 혹은 ‘일하기’(働き, 하타라키)라고 적는다. ‘사람이 움직인다’(人+動=働)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과연 우리의 ‘노동’과 ‘일’ 속에는 ‘사람’(人)이 존재하는지 자문하게 된다. 사람은 없어지고 기계만 남아 있지는 않는가? 노동자나 아르바이트생의 목숨 하나가 그저 기계 부속품의 사소한 고장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는가? 100년 전 ‘노동’(勞動)이 아닌 ‘노동’(労働)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외침을 다시 새겨듣지 않을 수 없다.

고베는 아시는 바와 같이, 통상 무역으로 번성한 항구이기 때문에 수많은 창고가 건설돼 있습니다. 그 시설은 실로 훌륭한 것입니다. …그 창고 자체가 귀한 가치를 지녀 창고를 지키는 사람마저 고용돼 있을 지경입니다. 반면 궁핍함 속에서 괴로워하는 노동자들은 애처롭게도 최근 고베항에 적재된 저 화물들을 오히려 부럽게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정말이지 사람보다 물질이 더욱 존중받는 시대입니다. 상리(商利)의 목적인 화물은 사람보다도 존중받고, 사람은 물건보다도 가볍게 다루어지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재화를 존경하는 현대 사회를 변화시켜,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로버트 실젠, 『사랑과 사회 정의의 사도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159.

2018년 7월호–‘퀴어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광장에서 이른바 ‘퀴어축제’라는 행사가 열리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축제 참가자의 행렬을 막아선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반대 시위…. 이제 신학계에서도 ‘퀴어신학’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된다. 하지만 여전히 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조차 비교적 낯선 용어로 느끼기도 하며 단순하게 “그것은 동성애를 비롯한 ‘규범에서 벗어난’ 성(性)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 아닌가?”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퀴어’(Queer)라는 말은 단순히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성소수자들을 받아들이도록 하자.”라는 일종의 차별적 시선에 기초한 행위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향해 ‘이상하다’라고 손가락질하는 멸시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멸시어(蔑視語) 혹은 혐오어(嫌惡語)를 오히려 멸시받는 쪽에서 받아들여 ‘규범을 강조하는 쪽’에 통렬히 반문했다. 바로 그런 태도가 ‘퀴어적’인 시도의 출발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성적인 일탈’로부터 ‘규범’을 철저하게 다시 묻고, 그것을 뒤흔드는 투쟁인 셈이다. 그러면 이러한 ‘퀴어적’ 관점에서 ‘신학’이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복음과 세계」 7월호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져보았다.
우선 ‘퀴어’라는 말의 유래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처음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시도를 국제기독교대학(ICU) 젠더연구센터의 사사키 유코(佐々木裕子) 조교수가 “‘퀴어적’인 지성의 영위–주변으로부터 규범을 철저히 되묻다”라는 글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그다음, ‘퀴어’와 ‘신학’을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거기엔 어떤 과제가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도시샤대학 신학부 강사인 아사카 토모키(朝香知己)도 “퀴어신학의 정의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라는 글을 통해 이 주제가 결코 한마디로 정의하고 정리해낼 수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확장’되는 중인 신학 주제라고 본 것이다.
이어서 ‘퀴어적’ 관점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한 성서학 연구는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의 문제를 다루었다. 낙농학원대학 교수이자 일본기독교단 홋카이도교구 평화부문위원인 고바야시 아키히로(小林昭博)는 “‘예수와 퀴어’로부터 ‘퀴어적인 예수’로–퀴어 이론을 통한 성서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소개했다. 그는 ‘퀴어적 관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복음의 의미를 다시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퀴어적’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보았다. 먼저 일본기독교단 농촌전도신학교 강사 및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인 호리에 유리(堀江有里) 목사가 “교회를 둘러싼 퀴어적 가능성–‘분노’의 회복과 그 공동성을 향하여”라는 글을 통해, ‘차별을 지탱해주는 구조인 미세공격’에 주목했다.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라는 말은 하버드대학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체스터 프라이스(Chester M. Pierce)가 고안한 용어로서, 흑인에 대해 일상에서 행해지는 언어 차별과 모욕을 설명한다. 1973년 MIT 경제학과의 메리 로(Mary Rowe) 교수는 이 개념의 적용 대상에 여성을 포함시켰고, 이후 장애인이나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 전반으로 그 적용 범위가 넓어졌다. 미묘하고 모호하며 의도치 않게 무심코 뱉은 차별 발언 등이 이러한 미세공격에 해당된다. 따라서 차별 문제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공격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타인의 공격에도 둔감할 수 있다.
호리에 목사는 바로 그러한 미세공격이 무분별하게 횡행되는 곳이 교회 현장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 자체가 이미 성차별적 역할 논리와 젠더 규범이 가부장적, 그리고 남녀 구분의 논리를 바탕으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분노’의 표현이 다수가 포함된 공동체를 향해 표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분노의 공동체를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일본기독교단 센리세이아이교회(千里聖愛教会)의 가와에 유우지(川江友二) 목사가 “앞으로의 ‘성’(세이, せい)에 대해 말하자–살아(生, 세이)나기, 성(性)스러워지기, 성찰(省)하기”에서 교회 현장이 지나치게 ‘가족주의’(家族主義)에 빠져 그 시스템에서 소외, 배제되는 존재를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좀 더 존중되고 배려받는 사회 공동체 곧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향하여’라는 최종 과제를 제안하고 있다.
7월호 특집에 소개된 여러 글들도 저마다의 ‘퀴어신학’에 대한 다른 이해가 엿보이기 때문에 그 정의를 한마디로 모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질문은 기존 교회나 신학계에 파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동안 외면해온 많은 주제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예리한 지점들이 있다.

홍이표 |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교토대학(京都大学)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탄고미야즈교회 주임목사, 교토대학 강사 등을 거쳐, 현재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 그리스도교연구소 협력연구원으로 있다. 『믿음의 흔적을 찾아: 일본 간토 간사이 편』(공저), 『신학을 다시 묻다』(번역서) 등의 저서가 있다.

 
 
 

2018년 9월호(통권 7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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