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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현장 (2018년 6월호)

 

  함흥에서의 3・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본문

 

함흥 3·1운동
함흥에서의 3・1운동 준비는 1919년 2월 25일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만세시위는 3월 3일 함흥 장날에 시작되어 6일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을 주동자들의 재판 기록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2월 25일 원산 광석동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인 이순영(李順榮)은 함흥 중하리예배당(함흥남부교회)에 와서 함흥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초치하여, “현금(現今) 세계의 대세는 민족자결의 기운으로 향하고 우리 조선 민족도 열국 강화회의의 문제에 포용(包容)하게 함으로써 차제(此際)에 나아가서 조선독립의 청원서를 동(同)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급무(急務)”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 무렵 이순영은 2월 21일경 감리교 정춘수(鄭春洙) 목사로부터 3・1운동 준비 소식을 들은 그 교회 교인 이가순(李可順)의 권유로 이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도내 연락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영호(韓泳鎬) 영수, 김중석(金仲錫) 영신학교 교사, 최영학(崔榮學) 신창리교회 장로, 김광표(金光票) 전도사, 홍기진(洪基鎭) 장로, 이영식(李榮植) 집사, 오명근(吳明根) 집사, 이순기(李舜基) 함흥기독청년회 서기, 이진명(李鎭明), 궁승덕(弓承德), 권승경(權昇經) 등이 모두 이에 찬동하고, 즉시 독립청원서 작성 용지에 서명 날인하여 이순영에게 주었다.
2월 26일 북간도 용정의 영신학교 교사로 있던 강봉우(姜鳳羽)가 함흥읍 신창리교회(함흥중앙교회)에 와서 교인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를 알리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2월 28일 중하리예배당에서도 위에 서술한 이순영과 비슷한 요지의 연설을 하면서 “단순히 청원서를 제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 내지에서 총독정치를 혐염(嫌厭)하는 반향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 정치에 감종(甘從)하는 것으로 오인할 우려가 있으므로 차제에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 전토에서 독립선언 발표의 기도가 있으므로 함흥에서도 독립찬성자는 차거(此擧)를 실행하자.”라고 역설하였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이근재(李根栽) 영신학교 교사, 이순기, 한영호, 김중석 영신학교 교사, 홍기진, 조영신(趙永信) 신창리교회 전도사, 조동훈(趙東薰) 영생학교 교사, 김려학(金麗鶴) 영생학교 교사, 임회영(林晦榮), 박성호(朴聖浩), 최명학(崔明鶴) 제혜병원 약제사, 김두석(金斗錫), 최영학(崔榮學), 이영식, 오명근, 권승경, 전창신(全昌信) 영신학교 여교사, 이성눌(李誠訥) 여학생 등이 이에 찬성하고 즉시 협의하여 3월 3일 함흥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준비위원으로 이근재, 조영신, 한영호, 이순기, 홍기진, 장도원 등을 선임하였다. 그러자 준비위원에 선정된 이근재 등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3월 1일 조영신을 원산에 급히 보내 서울에서 제작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이를 기본으로 하여 함흥에서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할 것을 결의하고, 그 작성은 이근재가 맡았다. 그리고 이영화, 한명식, 이봉선, 김치선, 이면오, 박희성, 도상록 등에게 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배포의 책임을 맡겼다.
3월 2일 조영신이 원산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이근재의 집에서 등사판을 사용하여 조선독립선언서 3,000여 장을 인쇄하고, 태극기 18개를 만들어 배포를 맡기고, 함흥의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결과 영생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함흥농학교의 전 생도가 독립선언발표운동에 찬동 가맹했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주동자에 대한 일제 경찰의 사전 검거가 있었으나, 만세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3월 3일 정오를 기하여 함흥면 대화정통(大和町通) 부근에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집합하여 한영호의 연락으로 이명봉이 그곳 석종점(石鍾點)의 집 옥상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대형 태극기를 흔들었다. 또 김기섭(金基燮), 조동훈(趙東薰) 등이 다수의 동지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산포하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선교사가 증언하듯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6일까지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선교사 맥래의 증언
맥래 목사(Rev. M. D. MacRae, 마구례)는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1898년부터 한국에 파송되어 당시 함흥선교지부를 책임지고 있었다. 함흥에서의 만세시위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목격한 그는 이를 영국 영사관에 알리고 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서 1919년 3월 20일 자로 다음과 같은 상세한 진술서를 실명으로 서명하여 발표하였다.

함흥에서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새벽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몇 명과 교사 한 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장날인데도) 가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함흥의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이날 일본인 소방서원들은 소화 진압용 갈고리를 휘둘러댔다. 그러나 아무도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3월 4일 12시 30분경에 한국인들은 다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듣자 일본인 소방대가 곤봉을 들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들은 또 곡괭이, 소화용 갈고리, 쇠뭉치, 단단한 몽둥이, 혹은 짧은 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때리고 갈고리를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해 갔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면서 소방서원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렇게 당한 사람들 중에 채규세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학생이며 한 한국인 경찰관의 동생이었다. 그는 큰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머리는 한편으로 돌려져 놓여 있었으며 머리 왼쪽의 심한 상처에서 나오는 피가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며칠 후 위독한 상태에서 석방되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두 일본인 경관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의 머리에는 맞은 자국이 역력히 드러났고, 왼쪽 얼굴의 맞은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왼쪽 다리도 또한 다쳐서 절름거렸고 고통 때문에 신음을 했다. 이 사람은 50살가량 된 기독교인이다. 며칠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에 아무런 처벌 없이 석방되었다. 그의 이름은 채학성이다.
그와 같이 경찰서로 끌려간 또 다른 사람은 비기독교계 학교의 학생인 박익호이다. 그의 두개골은 심하게 깨져 있었고, 며칠 후에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친구집으로 보내졌다.
바로 이날 7명의 한국인 남자들과 몇몇 소녀들이 받은 상처 때문에 비참한 지경이 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 장면이 연출되는 동안 경찰과 헌병들은 체포에 가담하지 않고, 다만 소방서원들이 무장하고 한국인을 체포하러 나갔으므로 일본인 소방서를 지키고 있었다.
목격한 바로는 한국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하기 위해서 막대기를 들거나 돌을 던지지도 않았으며, 일본인에 대해 욕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3월 6일에도 함흥의 가게들은 가게문을 열지 않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가축 시장 근처에서 다시 만세를 불렀고, 이와 함께 일본인 소방서원들은 다시 곤봉 등을 들고 돌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타당하고, 체포됐는데 그중에 변은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곤봉으로 뒤통수를 맞았고, 거의 죽게 된 상태에서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날도 한국인들은 돌이나 막대기를 들지 않았고, 심지어 욕설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변은관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치유될 가망성은 없었다.


재판과 조영신 전도사의 순국
일제 경찰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면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시위 첫날인 3월 3일, 2일 저녁 예비검속을 포함하여 주동자 46명과 학생 88명을 검거하였다. 그다음 날인 4일에도 시위대 가운데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대량 검거에 대한 항의 시위가 잇따르자 5일에는 일제 경찰이 주동 인물을 제외한 170명을 석방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은 가혹한 신문을 거쳐 3월 24일 이근재 등 41명을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에 기소했다. 이들의 변호는 한국인 변호사 허헌(許憲)과 판사로 있다가 1913년에 사임한 신석정(申錫定)이 맡았다. 함흥지방법원은 4월 21일 이들 41명 모두에게 징역 2년에서 태 90에 이르는 유죄를 언도하였다. 불행히도 그 판결문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이 1919년 4월 25일 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징역 2년–이근재(1)
징역 1년 6월–한영호, 홍기진, 조영신, 이순기, 이영화(5)
징역 1년–최영학, 김광표, 김려학, 김중석, 오명근, 조동훈, 이영식, 김치선,
곽선죽(9)
징역 10월–박성호, 이명봉, 권승경, 임회영, 김두석, 궁승덕, 이진명,
최명학(8)
징역 8월-김기섭, 한명환, 이봉선, 김면오, 박희성, 도상록, 김창신(7)
징역 6월–이성눌, 한림, 김성구, 서성모, 신태헌, 박의환, 한덕연, 조현구,
임의식, 이재백(10)
태(笞) 90–진병노(1)


이들은 대부분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고하였다. 그러자 경성복심법원은 7월 3일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다음과 같이 주동자를 제외한 사람의 형량을 약간 조정한 판결을 내렸다.

징역 2년–이근재(1)
징역 1년 6월–한영호, 홍기진, 이순기, 조영신(4)
징역 1년–조동훈, 이영화, 김치선, 곽선죽(4)
징역 8월–김중석, 최영학, 이영식, 오명근, 김려학, 임회영, 박성호, 최명학,
김두석, 김기섭, 이명봉(11)
태(笞) 90–한명환, 이봉선, 김면오, 박희성, 도상록, 김성구, 서성모, 신태
헌, 박의환, 한림, 한덕연, 임의식, 조현구, 이재백, 강흥락(15)
무죄–김광표, 이진명, 궁승덕(3)


그러나 주동자로 지목된 이근재, 한영호, 홍기진, 이순기, 조영신 등은 형량이 1심 그대로였고,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요 유죄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 및 무죄가 선고된 사람을 제외한 이근재 등 20명은 법정 투쟁의 일환으로 다시 고등법원에 상소하였다. 그러자 고등법원은 9월 1일 이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는 판결을 내려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들 가운데 주동자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조영신 전도사는 1919년 가을 고문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걸렸다. 여러 달 동안 고생을 하였지만 치료도 받지 못하고 면회도 허락되지 않아 집에 알릴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이 위중해진 1920년 초 아들이 병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친이 그날로 상경하여 미 북장로회 선교사 쿤스(Edwin W. Koons, 군예빈)의 도움으로 일제 당국과 교섭한 지 11일 만인 1월 13일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곧바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14일 새벽 2시경에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의 소학교 중학교도 일찍이 졸업하고 평양 숭실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댈 수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귀가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중 신창리교회의 전도사로 피택되어 시무하던 중 3・1운동에 주동자로 참여하였다.
신실한 믿음과 효자로 소문났던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함흥에 알려지자 함흥지역 교회와 유지들이 부조하여 그의 시신을 친족과 함흥기독청년회(YMCA) 총무가 1월 18일 서울에서 함흥으로 운구하였다. 상여 앞에는 악대가 인도하고 수만 명이 뒤따르며 애도하는 가운데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일제 당국은 악대를 중지시키고 이 일로 몇몇이 힐문을 받기는 하였지만, 장례는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그의 죽음 소식은 「기독신보」 1920년 1월 28일 자에도 보도되었고, 1920년 8월에 열린 제4회 함남노회에도 상세히 보고되어 노회록에 실렸다.
함흥 유지 20여 명이 발기하여 그가 시무하던 신창리교회에서 7월 1일 그의 추도회를 열었는데, 이 사실을 「동아일보」 1920년 7월 7일 자에서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추도회개최(追悼會開催) 작년 3월 독립운동사건으로 검거되어 1개년 반(半) 선고를 받고 경성 감옥에서 복역 중 병을 얻어 금년 봄 서거(逝去)한 조영신(趙永信) 군의 추도회를 7월 1일 오후 9시 함흥 인사 20여 명의 발기로 신창리교회당 내에서 개최한 바, 모인 사람들이 남녀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한영호(韓泳鎬) 씨의 사회로 순서에 의하여 박성호(朴聖浩) 군의 조군(趙君) 약력(略歷) 설명과 김일(金鎰) 군의 추도사가 있은 후 조동훈(趙東薰) 군이 추도문을 낭독하니 회중이 동정의 눈물을 금하지 못할 뿐 아니라 김병우(金炳祐) 군은 다시 조군의 임종시 유언(이 뒷일은 어찌할까 누가 맡아 할까 삼대독자가 죽는구나)을 전하매 청중은 비상한 감동을 일으키고 11시에 애도가(哀悼歌)로 폐회하였더라(咸興).

2002년에 우리 정부는 그에게 3・1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 한국근현대사와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한말 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 『식민권력과 종교』 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8년 6월호(통권 7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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