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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짐승들과
같이 지낸 예수
그는 목사였다 슬픈 날이 많았고 우린 친구가 되었다
전구를 갈려는 사람들은 의자에 올라선다 터지는 호두처럼
선반엔
접시들이 쌓여 있다
가면을 엎어 둔 것처럼
서로의 코를 안고
어쩌면 모자를 썼겠군요
비가 올 줄은 몰랐군요
당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우산을 부엌까지 끌고 올 줄도 몰랐죠
마루가 당신에 젖을 줄은
당신의 뒤가 주전자처럼 끓을 줄은 몰랐죠
폐병에 걸린 주택
창문으로 들어온 헛가지들
번진다 재채기를 하며
눈알을 또각또각 떨어트리며
빛은 없고 별은 있다
이마에 수은을 들이부으며 온다
너는 슬프다는 말을 왜 그렇게까지 하니
그는 목사였고 슬픈 날이 많았다 우린 친구가 되었다
전구를 갈려는 사람들이 의자에 올라선다
당신
어쩌면 모자를
어쩌면 선반을
어쩌면 가면을 썼겠군요
당신
젖은 커튼을 툭툭 뜯으며
끓으며
터지며
안으며
호두처럼
- 성동혁, <수은등>
부르르 몸 흔들어 물기를 터는 새처럼 가벼워져서 천공을 날고 싶어 하는 친구여. 오늘 당신의 곁에 찾아가는 청년 예수. 새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예수. 당신이 그를 만나면 새가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고 별이 될 것이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샘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 했지. 당신이 아름다운 건 눈물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슬픔이 많은 친구여. 활명수를 마시면 막힌 가슴이 뻥 뚫릴까. 답답한 가슴을 쥐어뜯으며 전류가 찌릿찌릿 흐르는 모기채 같은 ‘문제’에 걸려 발버둥치는 당신. 위기에 빠진 당신에게 어떤 친구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빛이 없으면 전구를 갈아 끼워 불을 밝혀야 한다네. 캄캄한 밤중에 장님놀이를 하는 아이들이여. 이제 그만 그 놀이는 멈추어다오. 실질적인 민중의 삶을 개선하려고 뛰어들지 않고, 슬픔의 바닥 원인을 해결하려 들지 않고, 현란한 말장난이나 값싼 은혜, 낙낙한 내세 꿈몰이를 하면서 밥벌이나 하는 종교인들. 그들은 결국 지배자, 권력자의 비위나 맞추는 간신배나 마찬가지다. 자본가들의 엄살에 조응하고 아첨하면서 몇 푼의 달란트 데나리온 콩고물 부스러기나 바라는 자들. “개가 짖는다. 미친 개 한 마리가 기침하면 미친 개 열 마리가 짖는다. 미친 개 일만 마리가 짖으면 미친 개 천만 마리가 호들갑을 떤다. 테레비에 라디오에 신문에 코메디에 개핵 개핵 캑!”(김기홍, <똥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
말끝마다 개혁이다, 국민이다 입에 담아 올리지만 그들의 관심거리는 다만 자신들의 권력, 자기 자식들과 일가친척만을 위한 재물 축적에 열을 올린다. 개혁이다, 복지다 대중을 속이며 결국 자기 잇속이나 챙기는 몹쓸 인간들. 높은 신분에는 안절부절 쩔쩔매면서 가난한 이웃들의 슬픈 사연은 외면하고 업신여긴다. 일자리를 만들어주지도 않으면서 게으르다, 놀기를 좋아한다, 거짓말을 퍼뜨리고 농락을 일삼는 자들. 귀족 노동자다 뭐다 정규직을 공격하면서 위협하고 어떻게 해서든 노동조합을 와해시킨 뒤엔 모든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싶어 하는 자본가들. 남의 애가 울든 말든 알 바 아니라며 뒷짐을 지고서 거드름 피우는 부자들.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날려 부서지고 마을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그들의 탐욕은 무한대로 판을 벌이고, 그들을 멋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이 별, 우리 사회는 마침내 인간성이 무너진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말 것이리라. 거짓과 욕망을 감추기 위해 모자와 가면을 쓴 자들을 부디 조심하라. 그들이 벌이는 사기극에 그만 속아 넘어가야 한다. 그들의 엄살스럽고 쩨쩨한 경건, 그들의 벼룩 간만한 선행은 결국 우리를 속이고 잡아 죽이려는 낚싯밥에 다름 아니다.
예수는 광야로 걸어나갔다. 광야란 어디인가? 들짐승들이나 사는 변두리, 외곽, 시골동네, 유배지, 천대받는 곳, 버려진 땅, 먹을거리 하나 없는 배고픈 땅. 예수는 중심, 제일, 중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공동체 이름에다 제일이다 중앙이다 갖다 붙이지 못해 안달들인지. 예수는 저들의 거짓된 유혹을 뿌리치고 바람 부는 땅 들짐승들의 곁에 같이 머무셨다. 들짐승들의 모든 목소리는 울음이며 고함, 함성, 비명이렷다. 짐승은 배고픔의 슬픈 탄식으로 밤을 지샌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그 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막 1:12-13)
빛은 없고 별만 깜박이는 광야. 들짐승은 슬프다는 말을 그렇게까지 오래 하는가? 벌레들과 새들은 왜 그렇게 울고 또 우는 건가? 신음이 곧 울음, 허기진 울음소리여. 게다가 광야에서 만나는 사람도 들짐승을 닮아 눈물콧물바람으로 흐느껴 우는구나. 그렇다. 슬픔을 아는 사람만이 슬픔을 위로하는 법이렷다. 깊이 울어본 사람만이 서러운 사정을 돌아볼 줄 안다. 슬픔의 곁에 오래 머문 사람만이 슬픔의 곁에 찾아와설랑 오래 동무해주고 함께하는 것이다. 예수가 들짐승의 곁에 함께 지낸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하여 터벅터벅 광야로 걸어나가 첫 번 그날처럼 들짐승들과 함께 머문 청년 예수. 사막의 그리스도를 정성껏 시중든 것은, 이번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이 아니라 천사들이었다. 이름 모를 천사들, 세월호의 돌아오지 않은 천사들이 그곳에 찾아와 예수와 함께 머물렀던 것일까?
광야, 사막 길,
유혹의 사원
내 지나온 날 생각하며 이 길을 걷고 있네
돌아보면 아름다웠던 희미한 그 기억들이
저기 손짓하며 나를 부르네 저만치 웃음 지며
바람으로 달려와 내 어깨 위에 어느새 손을 얹네
아련히 떠오르는 얼굴 얼굴 얼굴들
내 이제 가는 이 길에 거센 비바람 불고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고 빈들에 홀로 서 있네
날은 저물고 초저녁별 하나 저만치 내려와
어두운 세상 길벗 되자고 내 온 맘을 사로잡는
그리운 사랑의 빛으로 오네
내 다시 가야 할 이 길이 멀고도 험할지라
내 앞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동무하고 걸어가면
저 언덕을 넘어 황금빛 들녘이 바람에 춤을 추네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드네
바람은 불어오고
햇살 머무는 은빛 강을 건너 저 언덕을 넘어
나는 가려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을 찾아가려네
- 이무하 노래, <길>
어두운 세상 길벗 되자고 걷는 길. 여기는 광야, 낯선 황무지. 거센 비바람치고 멀고도 험한 막다른 길. 결기를 세웠던 마음을 무참히 흔드는 유혹. 험산준령 길보다 괴로운 것은 흔들리는 마음 길….
예수는 광야로 걸어 들어간다. 예리코 유대광야, 요르단의 사막 모래. 와디 켈티라 불리는 계곡. 거기 유혹의 산 수도원이 있다. 예리코 북서쪽 방향 고원에 위치한 수도원. 예수가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뿌리쳤다는 이야기(마 4:1-11, 막 1:12-13, 눅 4:1-13)를 바탕으로 세워진 정교회 건물이다. 이곳 수도사들은 해마다 사순절이면 40일을 딱딱한 빵과 오아시스에서 건진 물만으로 근근이 버티며 예수의 유혹과 수난을 기린다. 이 수도원에 올라가 본 여행자들은 보았을 것이다. 그 척박한 사막 모래바람 부는 땅. 풀뿌리 하나도 자라기 힘든 황무지. 이런 광야에서 예수는 내면 깊숙이 밀려드는 속삭임,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악마는 속삭였다. “이보슈,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먹어보시오.” 예수는 악마의 떠보는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악마는 다시 예수를 앞세우고 거룩한 도성으로 걸어 올라갔다. 성전 꼭대기에 예수를 바짝 세운 다음 다그쳤다. “그렇다면 저 아래로 몸을 던져보시오. 성경, 성경 하니까 하는 소리인데 성경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걸 당신도 잘 알 것이오.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주리라.’ 이런 기록 말이오.” 예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절벽 끝에서 대답했다. “성경에는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당신이 아무리 나를 몰아세운대도 나는 어떤 두려움도 없소. 그리고 어떤 욕망도 내겐 없다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갈 뿐이오.” 악마는 다시 예수를 높은 산 정상으로 데려갔다.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했다. “땅에 엎드려 내게 딱 한 번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이 정도 땅덩어리면 떵떵거리고 으스대며 살 만하지 않겠소?” 예수는 악마에게 바짝 다가가 코앞에서 응수했다. “물러가시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나는 오직 하나님을 섬길 따름이오.” 그때서야 악마가 예수를 떠나갔다는 이야기.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 가슴 건너편으로 강물이 흘러가며 내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늘 세 가지 유혹 앞에 서게 된다. 첫째, 오직 빵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유혹. 빵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작정. 그것이 우리 인생을 망쳐버리고 삼켜버린다. 빵을 벌기 위해서는 현실이 어쩌고저쩌다 타령, 밥벌이 때문에 꿈을 접고 자유를 포기한 채 고개 숙이고 살아가는 우리들. 흉기보다도 무서운 것이 밥숟가락이라던가. 밥벌이에 젖어 살아가면 인생이 비루해지고 남루해진다. 그놈의 현실 타령을 하다가 그만 청춘은 사라져버린다. 누구 하나 꿈을 꾸지 않으니 사회 시스템을 바꿀 수가 없다. 그래 항상 보수의 세계에 젖어들어 노예로 살아간다. 한 치의 발전도 없이, 한 가지도 오류를 개선해가지 못하면서 말이다.
둘째, 허황된 요행과 행운을 바라는 유혹에 우리는 수시로 노출되어 있다. 또한 과대한 자기 노출과 으스대고 싶은 욕망. 그것을 부추기는 이른바 ‘SNS 세계’는 인간이 얼마나 이 유혹에 쉽게 빠져 사는지 증거가 되어준다. 오늘의 삶을 치열하고 오롯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요행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꿀을 발라 치장한 거짓된 삶. 화장기 가득한 거짓된 모습들이 인터넷상에서 떠돈다. 허방 짚고 헛다리 짚다가 오늘을 참신하게 살아내지 못하고, 그야말로 실속 없는 삶. 드라마 속같이 허황된 꿈이나 꾸다 보니 성실한 일상엔 눈길이 가지 않는다. 기적이나 행운을 구하는 이런 마음들이 하나님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아름답게 지으시고 각자 소중하게 지으셨다. 우리는 제각각 다른 결론으로 세상을 졸업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다양하게 지음받았다. 하나님이 온갖 모습이시듯 우리도 그렇게 다른 모습, 다른 삶으로 ‘무지개 우주’를 창조하도록 지음받았다. 일사분란 누구를 따를 것도 아니고 과하게 닮아갈 것도 아니다. 왜들 ‘오늘 하루’를, ‘오! 늘 오늘’ 같았으면 하는 그 오늘을 분투하며 살아내지 못하는 걸까?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듯 황망한 꿈을 꾸며 사는 걸까?
셋째,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한 애착과 집착, 숭배의 유혹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이 아닌 자본에 경배하고, 하나님이 아닌 권력을 추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팽팽한 빨랫줄처럼 그렇게 야물고 짱짱하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축 늘어지고 찌부러져만 간다.
“저 언덕을 넘어 황금빛 들녘이 바람에 춤을 추네.” 저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그만 스러지고 엎드리고 만다. 친구여, 다시 일어나 저 언덕을 넘어가자. 햇살 머무는 은빛 요르단 강이 흐르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자. 오늘을 살고 희망을 살고,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눔을 살기 위하여, 동무하고 걸어가자.
“교회들의 내부 장식은 예수가 고행했던 광야, 즉 거룩한 숲을 모방한 것이다. 높은 벽들은 거대한 나무의 몸통이고 넓고 둥근 천장들은 잎사귀들로 된 천개이다. 교회의 음악은 짐승들, 새들, 그리고 미풍의 노래를 대변한다. 타고 있는 향은 만발한 꽃들의 향기를 연상시킨다. 교회는 광야의 변변찮은 모조품이다.”(리처드 에이드리언 리스, “오직 시인들만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 「녹색평론」 147호)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성전이요, 희망과 결심의 사원. 그 자연 속 광야에서 우리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만나자. 문지방을 넘고 문고리를 열어젖히면 유혹의 사원 밖으로 펼쳐진 대자연이 보인다. 부드러운 대지의 속삭임. 바람이 불어오는 곳. 마른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이 유혹의 사원에서 나가 천지 만유 만물 속에 계시는 싱싱한 하나님, 성성한 주님을 만나자. 방안퉁수로 있으면서 먼 구름이나 말똥말똥 쳐다보던 당신이 이제 길의 사람이 되어, 순례자가 되어 한 발 두 발 사막 길을 걸어가누나. 그분과 자유의 춤을 추면서.
그늘진 땅에 울려퍼진
사랑 노래
너를 기억해 아만다
마누엘이 일하고 있는 공장으로
비 온 거리를 넌 달려갔지
활짝 핀 미소에 머리는 비에 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그를 만난 건 5분이었지만
그 5분 동안 삶은 영원해지네
사이렌이 울리고 일터로 돌아가야 해
그를 만나고 걸어가며 너는 주위를 환하게 밝히네
단 5분의 시간이 너를 꽃 피웠네
그는 산으로 떠났네
남에게 어떤 해도 끼쳐본 일이 없는데
그는 산으로 떠났네
그리고 단 5분 만에 산산이 부서졌네
사이렌이 울리고 다들 일터로 돌아가는데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고
마누엘 역시 돌아오지 못했네
너를 기억해, 아만다
마누엘이 일하고 있는 공장으로
비 온 거리를 넌 달려갔지
- 칠레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노래, <너를 기억해 아만다>(Te recuerdo
Amanda)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지혜자 자끄 뢰브는 말했다. “그는 언제나 남의 말을 듣고만 있는,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시편에는 “가엾은 이 부르짖으니 주께서 들으신다.”라고 약속하였다. 외로운 사람들은 말벗을 귀히 여긴다. 아만다와 마누엘은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고 속엣말도 나누는 사이. 일터에서, 딱 5분간의 짧은 휴식 시간에, 아만다와 마누엘은 만나 번갯불에 콩 볶듯이 입술을 나누고 또 마음을 나눴을 것이다.
실개천, 덤불숲, 공장으로 난 그 길에는 아만다와 마누엘의 사랑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가난한 사랑 노래.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예수의 갈릴래아 전도 장면.(마 4:12-17) 말을 들어주는, 감추고 싶은 이야기까지 다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과 이제 함께하는 것이다.
그늘진 땅에 사는 어부들, 그러니까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불러 당장 친구로 삼으신다. 그들은 냉큼 신발을 고쳐 신고 예수를 바짝 붙어서 따라갔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죽 신발은 사막의 모래가 머물지 않게끔 헐렁헐렁하지만 예수는 신발을 우지끈 당겨 매고서 맨 앞에 나아가 앞장을 섰을 것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슴 가죽으로 모카신을 만들어 신었다. 집집마다 가내 신발공장이었다. 신발은 여행자인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혼연일체. 모카신은 빛을 향해 걸어가게 하는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 속 테세우스는 아버지가 돌 밑에 감춰둔 신발을 찾아 신고 아테네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여기 예수의 풋내기 애송이 제자들도 튼튼한 가죽신발을 찾아 신고 갈릴래아를 떠돌기 시작했다.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 앞으로는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 성경의 요절이라 불리는 신명기의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 6:4-5) ‘너의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바브카’이다. 너의 마음을 다한다는 것.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뒤따를 수 없다. ‘사랑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하브.’ 사랑하지 않고서는 뒤따르며 고생길을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기에 가능한 일.
“그대는 나의 깊은 어둠을 흔들어 깨워 밝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줘. 그대는 나의 짙은 슬픔을 흔들어 깨워 환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줘. 부탁해 부탁해. 어린 횃불이 되고 나를, 마음속의 고향에서 잠자는 나를, 천진난만하게 사는 나를, 맥빠진 눈을 가진 나를 부탁해. 부탁해.”(시인과촌장 하덕규 노래, <비둘기에게>)
예수여! 내 사랑이여! 환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줘요. 부탁해요. 나를 앞장서서 이끌어주세요. 사랑이 노래하는 땅으로요. 짙은 슬픔, 천년만년 이무기가 구슬피 우는 땅은 내 마음도 슬퍼져요. 상이군인처럼 아픈 팔을 자꾸 내밀며 우리는 얼마나 애타게 기도하였더란 말인가. 경락 마사지를 받아도 풀리지 않는 피로가 수시로 덮쳤으나 제자들은 예수가 걷는 길마다 뒤따르며 사랑 노래를 불렀다. 개울을 따라 첨벙첨벙 걸으면서, 뚝배기 찌개 끓는 냄새도 같이 맡고 된장에 고추를 찍어 먹으면서, 조금씩 아릿거리는 그 맛을 같이 느껴가면서.
날씨가 쨍한 봄날임에도 왠지 마음은 가라앉고 서러워 울게 되는가? 그건 우리가 마음이 그늘진 땅에 살아가고 있음이겠다. 희망의 사람 예수를 따라가면 기운이 샘솟게 되리라.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기운이 펄펄 나게 하고, 똥 누고 가는 새처럼 홀가분해진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 내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겠다는데 누구를 탓하며 또 무엇을 원망하랴.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게 아니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드림’이고 ‘나눔’이다. 하나님이 나를 한없이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의 이름은 예수. 외롭고 가난한 우리의 말동무요 길동무로 우리와 함께. 비온 거리를 같이 달리다가 달콤한 ‘5분간 휴식’을 같이 누리는 분. 노동자들은 담배를 꺼내 태워 물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 곁에 다가가 어깨를 내어주시는 분.
임의진 | 시인이며 수필가이자 목사이다. 현재 <경향신문> 칼럼니스트로 ‘시골편지’를 장기 연재중이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5·18기념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성서연구를 인도하고 있다. 수필집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시집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동화책 세계위인전 『예수』, 『예수 동화 1, 2』 등을 펴냈으며 월드뮤직전문가로 <여행자의 노래>, <가스펠 여행>, <노르웨이의 길> 등 많은 선곡음반을 발매했다. 세계의 숨은 노래와 시를 찾아나서는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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