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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계 22:1-2)
1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푸른 잎새가 인간을 구원한다.”라고 노래했다. 그의 시구대로라면 하루가 다르게 산과 들에 연한 초록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이 5월에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은 잎이 돋기 전에 꽃부터 먼저 흐드러지게 피워내고 이제는 꽃이 진 자리에 부드러운 연초록 아기 이파리들을 내밀고 있다. 돌아보기만 하면 푸르름이 곳곳마다 약동하고 있어서 나누어 받을 마음과 여유만 있으면 아무 값없이 마음속 가득 푸름으로 채울 수 있다. 굳이 산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산은 오르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기 위해서도 있다. 오히려 오르지 않고 바라보아야 산이 지닌 푸름과 높음, 넉넉함을 잘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굳이 아름드리 크고 잘생긴 나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의젓하게 세월의 바람을 맞고 있는 나무면 족하다. 흐드러진 풀 속 찡그린 바위틈에서 부끄러운 꽃 한 송이를 피워내는 한 떨기 관목, 물속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늙은 버드나무, 향기로운 들국화를 옹기종기 발아래 둔 채 가지를 떨며 서 있는 늙고 구부러진 소나무,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숲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쓰러진 나무를 떠올려보라. 어느 것이고 소리 없이 내 마음속에 들어앉아 내 마음의 나무가 되기에 족하다.
색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색이 초록색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원래 인류가 초식동물이어서 그 옛날 풀을 먹고살던 기억이 우리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원시종교에는 생명나무, 우주목의 상징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옛 사람들은 세계의 중심, 우주의 중심에 우주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그 나무로부터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나누어 받고 이어나간다고 믿었다.(엘리아데, 『종교형태론』, 이은봉 역, 서울: 한길사, 1996, 356-365.)
옛날 인도에는 거꾸로 선 거대한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나무는 뿌리를 하늘에 박고 하늘을 향해 뿌리가 끝없이 뻗어나가며 땅을 향해서 가지가 뻗어 내린다. 그래서 하늘의 빛을, 땅을 향해 뿌려준다.(위의 책, 363-366.) 플라톤이 전하는 인도 전통에 의하면 인간 역시 거꾸로 선 나무로서 그 뿌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고, 가지는 지상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이 거꾸로 선 거목에 대한 상징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이 초월과 신들의 세계로부터 빛과 자양분을 받아 유지되고 자라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인간이 초월을 향해 존재함으로써, 아니 초월의 세계와 자신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우주 전체를 거꾸로 자라는 거대한 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생명나무와 불사를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무를 지키는 뱀이나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다. 불사의 생명을 지닌 생명나무는 가까이 가기 어려운 장소에 있고, 또 괴물이 나무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천신만고 끝에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괴물과 싸워 이겨야만 불사의 과실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서낭당의 오래된 큰 나무에는 산신령이 내렸다고 여겨져 둘레에 새끼줄을 치고 그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이외에도 나무와 관련된 의례나 상징, 이야기는 참 많다. 한스와 콩나무 이야기, 우리나라의 해와 달 오누이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크리스마스 때 트리를 장식하는 것도 인류가 오래전부터 지녀온 우주목, 생명나무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나무와 푸른 잎새를 보았을 때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생명력, 활력 같은 것이 그러한 종교적 상징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나무는 수직으로 서서 성장하며 잎을 떨구었다가 다시 잎을 맺는다. 나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원시 인류의 눈에 나무는 무한히 재생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무는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삶의 반복을 통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우주 전체의 리듬을 반복한다. 이 때문에 원시인의 종교적 심성 속에서 나무는 우주가 되고, 거대한 우주목에 대한 상징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2 그러므로 우리는 나무의 삶에서 우주와 자연과 생명의 이치를 배울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하늘과 땅이 서로 어우러지며, 어울려서 생명의 춤을 추고 생명의 노래를 부른다.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고 하늘과 땅으로 아름다운 잎새와 꽃과 열매를 빚는다. 흙과 햇빛과 물과 바람을 가지고 나뭇잎을 빚어내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와 곡식을 만들어낸다. 나무 한 그루에서 자연 생명활동의 중심이 드러난다. 나무는 땅속의 죽은 물질을 살려서 생명으로 꽃피워 낸다. 든든한 줄기와 푸른 잎새로, 오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그리고 향기와 풍성한 열매로 새롭게 탄생시킨다. 그래서 잎새와 꽃과 향기에는 햇빛과 물과 바람, 흙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무는 수억 년 생명진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힘껏 자신을 펼친다.
나무의 푸른 잎은 자연 생명계를 지탱해주는 가장 기초적인 양식이다. 풀잎이 없으면 모든 생물은 살 수 없다. 초식 동물은 풀잎을 먹고살고,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을 먹고산다. 동물은 죽으면 자기 몸을 풀잎의 양분으로 내어준다. 사람도 죽으면 산에 묻히거나 강물에 뿌려져 벌레 밥이 되거나 물고기 밥이 된다. 나무는 지극정성을 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뭇짐승에게 아낌없이 주고 아름다운 향기를 바람에 날린다. 나무는 있는 힘껏 자기를 펼치고 그 다음에는 자기 몸을 다른 생명의 밥으로 내어주는 생명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본래 생명은 生-命, ‘살라는 명령’이다. 살라는 명령 앞에서는 희망도 절망도 부차적이다. 좋든 싫든 조건 없이 살아야 한다. 모든 생명의 본질은 살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자기 몸을 다른 생명의 먹이로 내어줌으로써 자기를 넘어선 더 큰 생명의 물결에 합류하는 데 있다.
또한 나무는 스스로 하는 생명의 본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삶을 남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하나의 작은 씨알이 스스로 싹트고 스스로 자라서 나무가 된다. 또 이 나무는 스스로 꽃피고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자연 생명은 스스로 하는 삶이고, 스스로 그러함, 말 그대로 자연이다. 맹자는 한 농부에 관한 이야기를 한 편 들려준다.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다. 그는 밭에 씨를 뿌려놓고 싹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며칠 후 밭에 나가보니 고물고물 싹이 텄는데 생각만큼 빨리 자라지 않았다. 성급한 농부는 싹이 자라는 것을 돕겠다고 싹의 목을 잡아 뺐다. 온종일 그렇게 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아들에게 오늘 싹이 자라는 것을 크게 도왔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아들이 밭으로 나가보니 햇볕에 싹들이 다 말라죽어 있었다.(“공손추” 상, 『맹자』)
신약성서에도 예수가 한 비유 가운데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농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앗이 자라나서 싹이 트고 이삭이 패며 이삭마다 충실한 곡식이 익는다고 했다.(막 4:26-29)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가 하는 노동에 대한 묘사가 없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하는 노동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예수는 그저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앗이 스스로 열매를 맺지만 어떻게 그리 된 것인지를 그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 알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다시 수많은 씨앗으로 환생하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고가 있지만, 그래도 역시 생명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맹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 비유도 스스로 하는 생명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하느님 나라도 억지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인간들과 자연 생명의 어우러짐 속에서 저절로 되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스스로 하는 것이듯이 생명 세계 한가운데에 임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억지로 시켜서 하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자발성의 나라이다.
나무의 스스로 함은 강인한 생명력과 지극정성에서 드러난다. 높은 낭떠러지 바위 틈새에 남몰래 피어나는 들꽃의 맑고 고운 아름다움은 스스로 함의 지극한 표현이다. 총이나 대포로 위협한다고 들꽃을 피울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 하나 보아주는 사람 없어도 들꽃은 피어난다. 수억 년의 스스로 하는 외로운 몸짓을 통해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오늘날 고생물학자들은 진화와 생명의 비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부터 약 5억 년 전에 지상에 처음으로 겉씨식물이 생겨나고, 높이 10m가 넘는 울창한 삼림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공룡은 몸길이가 60cm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엄청난 식욕을 가지고 침엽수림을 먹어대서 약 3억 년 전쯤에는 몸길이가 50m까지 커졌다고 한다. 긴 목과 작은 머리와 엉성한 이빨을 지닌 거대한 공룡들은 겉씨식물이 주종을 이루는 거대한 숲을 있는 대로 먹어치워 파괴했다. 공룡과 겉씨식물의 씨앗 사이에는 공생관계가 없었다. 공룡들로 인해 겉씨식물인 침엽수림이 파괴되면서 꽃과 열매를 지닌 속씨식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씨식물은 아름다운 색깔과 자태를 지닌 꽃을 통해 곤충과 포유류를 끌어들여 이 동물들에게 꽃가루와 열매와 꿀을 주고 자신의 씨앗을 전파하게 했다. 곤충과 포유류를 통해 꽃식물들은 빠르고 다양하고 넓게 퍼졌다. 포유류는 처음에 곤충을 먹이로 삼았지만 곧 꽃식물을 주로 먹었다. 그리고 포유류는 배설물에 섞인 씨앗을 통해 꽃식물들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꽃과 속씨를 지닌 식물들은 엄청난 속도로 번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꽃은 ‘더불어 살자!’는 생명의 표현이다. 속씨식물의 꽃과 열매, 꽃가루는 함께 살자고 곤충과 포유류를 불러들이는 미끼이고 노력이었다. 그것은 상생으로의 초대였다. 꽃의 아름다움과 열매와 꿀은 공생하려는 생명의 의지에서 나왔다. 꽃은 상생으로의 부름이며, 더불어 살려는 아름다운 의지의 화신이다. 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같이 살자는 속삭임이기 때문이다.
지리학자이면서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은 자연세계를 보면서 상호협동, 상생이 삶의 원리라고 했다. 크로포트킨은 동식물의 세계에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가 아니라 상호협동의 원리, 더불어 삶의 원리를 더 중요하고 일차적인 원리로 보았다. 그리고 계급투쟁 대신 상호부조의 원리가 인간 공동체의 삶의 원리라고 했고, 노동자만이 아니라 농민의 삶에 뿌리박은 혁명을 강조했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원리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영구혁명의 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P. 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김영범 역, 서울: 르네상스, 2005.) 상호부조야말로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을 포괄하는 삶의 변화의 근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한다.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이다. 하늘을 향해 팔을 뻗은 나무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만 같다. 하늘은 드높은 지존의 자리, 초월과 초극의 자리, 자유와 해탈의 자리이다. 뿌리 뽑힌 나무는 하늘을 향할 수 없지만, 살아서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하늘을 향해 힘껏 머리를 치켜든다. 땅속 깊이 든든히 뿌리내린 나무일수록 보다 높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모든 생명은 자유를 향한 꿈과 의지를 품고 있다. 하늘은 자유와 초월의 세계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할 때 나무의 넉넉함과 풍성함이 잘 드러난다. 나무는 하늘을 향한 그리움, 우러름이며, 땅속 깊이 근원을 향한 탐구이다. 나무 한 그루에 높음과 깊음이 있고, 초월을 향한 올라감과 근원을 향한 들어감이 있다. 나무에게서 땅의 두터움과 하늘의 자유로움을 볼 수 있다. 나무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난다.
3 성서의 처음과 끝에 생명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고 인간을 살게 하셨다. 하느님이 만드신 에덴동산 한가운데에는 선악과와 함께 생명나무가 있어서 인간이 늘 곁에서 보고 가까이할 수 있었다. 생명나무는 하느님의 생명, 우주 자연의 생명을 나타낸다. 생명나무는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의 생명이 하나로 통하는 우주 전체의 온전한 생명을 나타낸다. 이 생명나무는 누가 혼자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같이 그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고 함께 생명을 나누는 나무였다. 생명나무를 통해 온 우주와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으므로, 생명나무는 하나 되는 나무였다. 원래 인간은 이 생명나무의 근원과 이어져서 생명의 충만함과 풍성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창조받았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는 그룹과 화염검으로 둘러싸여 인간이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원래 생명나무가 인간과 더불어 있었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이 선악의 기준을 자신 안에 갖게 된 이후,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된 이후에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막혀버렸다고 한다. 생명나무, 생명의 근원은 분명히 있으되 인간은 그 푸르름을 직접 향유하고 기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다. 선악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토브’와 ‘라’는 도덕적인 선과 악을 나타내지 않고 그냥 ‘좋고’, ‘나쁨’을 뜻한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선과 악, 좋고 나쁨을 자기중심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뜻한다. 내게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게 나쁘면 나쁜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좋고 나쁨을 따지는 인간에게는 양심도, 이성도 구부러들게 마련이다. 200여 년 전에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갔는데 선과 악의 기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 추장에게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이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추장이 “누가 내 마누라를 빼앗아가면 악이고 내가 남의 마누라를 뺏어오면 선”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내게 이로우면 선이고 해로우면 악이라는 생각은 옛날 아프리카 추장만의 생각이 아니고, 이기적으로 사는 모든 인간의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모습을 말해준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누구나 선악과를 따먹어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린 아담들이다.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 생명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사실은 중심을 잃어버렸다. 생명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의 삶은 사막처럼 메마르고 폭력적이 되었다. 자연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탐욕과 집착에 사로잡힌 인간은 언제나 결핍을 느끼면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얻지 못한다. 생명나무에서 멀어진 인간이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을 해도 어느 틈에 ‘나’와 ‘내 것’이라는 의식이 끼어들어 내가 하는 일과 나 사이에, 나와 타인 사이에 엄청난 거리를 만들어놓는다. 무슨 일을 해도 바람에 흔들리는 연한 잎새의 명랑함을 누리지 못한다. 생명나무에서 멀어진 인간에게는 타인과 만나는 길이 막혀버렸다. 자기 밖의 다른 생명체들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과 행복한 마음의 상태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마음속으로부터 간절히 사랑을 원하면서도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간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이르는 길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일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그룹과 불칼로 둘러싸여 인간이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창 3:23-24) 죽음의 권세가 생명나무를 지키고 인간은 접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과 생명나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성과 속의 세계 사이의 경계이며, 낙원과 저주받은 땅 사이의 경계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이렇게 막혀 있던 생명나무가 마지막 때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마지막 때 어린양으로부터 수정과도 같이 맑은 생명수가 흘러나오고 그 생명수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늘어서 있는 환상을 본다. 그리고 만국 백성이 그 열매와 잎사귀로부터 생명을 얻고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모두가 왕 노릇하는 환상을 본다.
추방당하기 전 낙원에서의 삶에 대한 아담의 기억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 사이에 생명나무를 갈구하는 인간의 역사가 있다. 생명나무는 있던 그곳에 그대로 있지만, 아담은 이제 다른 곳에 있다. 생명나무는 이제 아담의 생명 한가운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밖에서 그를 괴롭힌다. 아담은 끊임없이 생명나무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그것은 언제나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담은 닫힌 낙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간다. 쫓겨난 곳으로 다시 들어가고자, 상실한 것을 다시 찾고자 저주받은 땅 위에서 고투한다. 그러나 낙원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칼날은 날카롭고 여차하면 그 칼날이 내리칠 것이다.
그런데 낙원의 문을 향해 최후의 결정적인 공격이 가해진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살해당하고 죽은 것이 가인의 역사의 종말이요, 인류 역사의 종말이라고 말한다. 불타는 낙원의 칼 아래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살아난다. 그래서 그가 살아난 십자가의 기둥이 이제 생명나무가 되고, 낙원 바깥에, 세상 한가운데, 저주받은 땅 위에 새로운 생명나무가 자란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나무 기둥에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솟아나오고, 생명에 목마른 자들은 모두 이 물로 나아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이 생명수를 마신 사람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골고다의 언덕은 낙원이 된다. 피 흘리며 파괴된 육체를 매단 이 십자가는 참으로 기묘한 생명나무이다. 처형대의 나무 기둥에서 초록 잎이 돋고 붉은 꽃이 피어난다. 저주와 죽음의 십자가가 부활의 생명 꽃을 피워낸다. 그리하여 첫 낙원의 닫힌 문 앞에 새로운 낙원의 생명나무가 자라며, 낙원이라는 이름의 희망은 아직도 우리에게 열려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위성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화약연기가 피어오르고,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 고통에 찬 부르짖음이 들린다. 전쟁과 폭력의 그림자는 여전히 깊게 드리워져 있고,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삶을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시편 104편의 시인과 함께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모든 이론은 회색빛이되 저 생명의 나무는 영원히 푸르다.”라고 말했다. 삶에서 멀어진 관념과 이론이 번뇌와 근심을 가져오지만, 4월의 나무들은 싱싱한 생명의 빛을 뿜고 있다. 4월의 벚꽃, 목련꽃이 한철 봄날의 옅은 꿈으로 우리를 초대하지만, 그래도 화려한 꽃그늘에 머물기보다는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는 것이 좋겠다. 버티고 선 바위 같은 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늘에 뿌리를 두고 하늘의 마음으로 만물을 살리는 생명나무가 내 안에서 자라나면 좋겠다.
함석헌 선생은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실하고 싶거든 위대한 배경을 가지라고 했다. 무한을 배경으로 가지라고 했다. 선하게 살고 싶거든 좁은 시냇가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무한의 바닷가에 서라고 했다.(“아름다움에 대하여,” 『서풍의 노래』 함석헌전집5, 서울: 한길사, 1983, 60.)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말로 아름답고 싶거든 산 위에 서야 하고 바다 앞에 서야 하고 하늘가에 서야 한다고. 산과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아름답지 않은 영혼이 없다. 5월이 머지않았다. 우리 각자가 눈부시게 싱싱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5월을 맞이하자.
박경미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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