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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의 초고령 사회가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다가오고 있다. 그 시대는 여러 가지 불행한 전망을 머금은 채 달려오고 있다. 불행하다고 하는 까닭은 인간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성과 연관된다. 노인의 경우 자식이나 타인에게 짐이 되고 자존감을 상실한 존재가 될 확률이 살아 있는 시간과 함께 커져간다. 그뿐만 아니라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는 그 시대에 대한 전망을 더 우울하게 한다.1) 또한 은퇴 이전 사람의 경우 일자리를 인공지능이나 로봇 또는 통제시스템에 내주고, (아직 논의 단계인) 기본소득 등에 의지하며 최저 최소의 생활을 해야 하는 잉여인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심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특히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의 비중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자본과 권력의 음습한 결탁 결과로서 사회적 불안지수를 그만큼 높이고 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피해갈 수 없을 이러한 미래를 우리는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 이것은 한 개인에게 국한된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와 연관된 문제이다.
자본과 권력은 경쟁과 생존을 앞세우며 4차 산업혁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강조하면서 장밋빛으로 채색하고, 그것으로 초래될 어두운 그림자들은 숨긴 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10월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그 1차 회의에서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 따르면,2 그가 추진하는 ‘사람 중심의 경제’는 일자리와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3대 축으로 삼는다. 또 그것은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취약계층이 변화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정책적 배려를 하고, “일자리 파괴, 디지털 격차 등 또 다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우려를 잊지 않는다. 이것들은 좋은 일자리와 함께 그 연설의 초점인 혁신성장의 쌍생아다. 그러나 그 연설이 전제하는 ‘지능정보사회’에서 좋은 일자리가 다수의 몫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3 그렇다면 소득주도의 성장도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인 인공지능과 로봇의 ‘deep learning’ 능력은 알파고를 이긴 알파고 제로와 중국 의료면허시험에 합격한 인공지능 로봇 샤오이를 통해 입증되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개발이 현재로서는 인간을 보조하고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력 증대를 목표로 한다고 하지만, 그것들의 개발 목표와 사용이 거기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은 단순한 짐작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지금까지처럼 진화하고, 그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능정보사회에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공지능과 인간의 경쟁이 일반화될 것이다. 모두가 예상하듯이 이 경쟁으로 대부분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되고, 전문직을 비롯한 사무직 종사자들 다수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기술 습득과 직업 전환의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지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사회가 부양할 수 있는지에 바로 4차 산업혁명의 성패가 달려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일자리 상실로 인한 사회의 전체적 소비력 감퇴는 인공지능과 로봇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력의 지속적 증대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갈 미래 세대에게 인공지능과 경쟁하며 생존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과학기술 친화적 교육과 동시에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와 인간다운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지식정보사회는 소수 자본-권력자들이 우월한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로봇)을 매개로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지배하는 사회가 될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물론 짤막한 연설에 모든 것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미래 사회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거기서 볼 수 없음은 참으로 아쉽다. 그 연설에서 말하는 ‘사람 중심의 경제’가 “경제정책의 중심을 국민과 가계에 두고, 경제성장의 과실을 국민들이 함께 누리는 경제”라면 이는 20세기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 중심의 경제’는 올바른 방향 선택이라고 본다. 더욱이 지금까지도 그러한 경제정책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그것은 상당한 호소력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연설이 추구하는 미래 사회에서 ‘사람 중심의 경제’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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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한 정치 과정을 『사기 열전』 가운데 경제에 관한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화식열전은 오늘날의 말로 바꿔 말하면 자본증식에 관한 열전이다. 화식열전은 첫머리에서 정치를 논하며 『도덕경』 80장을 일부 인용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나라들이) 정치의 최고 경지에 이르면, 이웃 나라들이 서로 마주 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서로 듣는다. 백성은 각각 자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자기 옷을 아름답게 여기고 자기 풍속을 편안해하고 자기 일을 즐거워하며 늙어 죽기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이를 (정치의) 책무로 여겨 근래의 풍속을 막고4 백성의 눈과 귀를 가린다면,5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老子曰 至治之極 鄰國相望 雞狗之聲相聞 民各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業 至老死 不相往來 必用此為務 輓近世涂民耳目 則幾無行矣)6
노자의 이 말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이 상태에서 최상의 정치가 이루어지면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 그치고, 각자는 자신의 삶을 최상의 자기실현으로 여기게 되므로 (교류를 위한) 왕래가 불필요해지리라는 전망이다.7 그러나 사마천은 그러한 전망을 권력의 강제와 우민화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으로 평가한다.
그가 이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삶의 경향 때문이다.8 검소하고 자급자족하며 한정된 자기 공간에서 사는 삶이 역사에서 언제 있었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삶은 그러한 모습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왔다. 그러므로 떠나온 그 삶이 비록 이상향일지라도 이를 향해 삶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일은 단순히 ‘심오한 철학’을 설파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마천의 정치는 바로 그 흐름이 도달한 지점에서 출발하며, 정치는 5등급으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하는 자는 백성을 원인으로 하고, 그다음은 백성을 이롭게 하며 이끌고, 그다음은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고, 그다음은 백성을 (법으로?) 가지런히 하고, 가장 못하는 자는 백성(을 잡아끌며 그들)과 다툰다.9
잘하는 정치와 못하는 정치를 양극단으로 하는 이들은 정치의 방향을 놓고 크게 둘로 나뉜다. 정치의 시작을 백성에게 두는 정치와 군주에게서 출발하고 백성을 대상화하는 나머지 정치들이다. 현재도 대부분의 정치는 후자에 속한다. 정치는 목표를 설정하고 백성을 그곳으로 이끌려 한다. 다만 그 방법이 경제, 교육, 법, 강압(?) 등으로 다를 뿐이다. 사마천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화식열전의 주제인 경제문제를 이러한 유형들에 비춰 평가하면서 흥망성쇠의 역사 이해를 덧붙인다.
화식열전은 부(富)를 인간의 기본 욕구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렇지만 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예・의・염・치를 위한, 다시 말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이다.
창고가 차 있어야 예절을 알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 예는 (가진 것이) 있을 때 생겨나고 없을 때 버려진다.(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禮生於有而廢於無)10
정치는 ‘먹고 입는 것’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이 조건을 충족시켜 저 목적을 구현시켜야 한다. 화식열전은 직업의 ‘귀천’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예를 들기도 하지만, 그 기본 관심사는 집단적/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이 각각 부를 누릴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저해하는 요소로는 화식열전과 짝을 이루는 『사기』 서(書)의 “평준서”에 따르면 전쟁, 사재기와 독점, 오만과 월권, 토지 강탈, 사치, 위법, 자연재해, 물가고(高) 등이 있다. 따라서 화식열전(과 평준서)에 따르면 정치는 그 조건 실현을 위해 전쟁과 재해 대비, 정상적인/자유로운 생산활동과 원활한 유통(균수), 물가 안정(평준) 등을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러한 정치활동을 관통하는 사상적 기반이 정의와 평화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11 그렇다면 잘하는 정치는 백성의 기본욕구에 그 근원을 두고 백성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정의와 평화에 바탕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12 그러면 백성은 이익이나 교육, 또는 법이나 강제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예・의・염・치를 아는 백성이 되고,13 이는 인간다운 삶의 구현이라는 정치의 목표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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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정치를 이렇게 이해하면 그것은 마태복음 6장 24-33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과 멀지 않다. 이는 의식(衣食)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함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정의, 평화, 사랑, 생명을 내용으로 한다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4-33절은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다. 이 단락의 첫 구절(24절)은 누가복음 12장 22-31절(32절)과 분리되어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나오고 있어서 그 이후의 본문(25-33절)과 무관한 구절일 수 있다. 그러나 24절과 25-33절은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아래와 같이 구조적으로도 결합되어 있다.14 25절과 33절을 비교하면, 33절은 25절의 대안으로 기능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을 섬기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과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재물에 대한 ‘필요’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24 아무도 두 주인의 종이 되지 못한다.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이를 사랑하거나 하나를 존중하고 다른 이를 냉대
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며 또 재물(맘몬)을 섬
길 수는 없다.
B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
지 (무엇을 마시지) 몸을 위해 무엇을 입지 염려하지 말
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않냐 몸이 의복보다 중요
하지 않냐.
C 26 하늘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훨씬 귀하지 않으냐?
D 27 너희 가운데 누가 염려한다고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C 28-30 또 의복에 대해 너희가 무엇을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
가 어떻게 자라는가 잘 살펴보라.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광을 두른
솔로몬도 이 꽃들 가운데 하나만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
는데 너희는 훨씬 더 하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B 31-32 그러므로 무엇을 먹지 무엇을 마시지 무엇을 입지 하며
염려하지 말라. 이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
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
함을 아신다.
A 33 그러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
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D 27절은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것은 자기 보존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도 하나님이 보존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 각각 목숨과 몸에 필요한 물품이지만,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의 구체적인 예는 C 26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새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하는 자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한 공급자가 아니다. 새를 기른다는 것은 먹이를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는 C 28-30절에서 들의 꽃이 입은 영광의 예를 들어 또다시 뒷받침된다.
이러한 인식이 염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B 25절 → B 31-32절)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아신다는 앎이 그 가능성의 현실화에 도움을 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알고 또 충족시킬 수 있는 분이기에 그
렇다.
인식의 전환과 함께 이러한 앎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행위의 지향이 바뀔 수 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향해서!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삶의 방향을 이렇게 바꿀 때, 그 실천적 내용은 무엇인가? 살며 걱정하는 일들과 무관한가? 아니다! 오히려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뜻과 주권이 실현된 나라, 곧 정의, 평화, 사랑, 생명을 내용으로 하는 그의 의(=질서)가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정의는 분배 정의가 없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 정의는 맘몬과 지배권력의 정의이지 온전한 의미의 정의일 수 없다. 만나 사건이 시사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분배 정의 실현을 토대로 한다. 이와 다른 현실에서 사람들은 염려와 걱정 때문에 맘몬에게 사로잡히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주시는 먹거리 등 재화가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탐욕 때문에 불평등하게 나눠짐으로써 다수의 대중이 고통 아래에 놓인다.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불평등을 먹고 살기에 이를 확대하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더 맘몬의 종이 되어갈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그의 나라는,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를 모든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또 자본과 권력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그 안에서 삶은 예・의・염・치를 아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질서가 곧 ‘하나님의 의’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은 불평등의 제거나 최소화를 기본으로 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다운 삶을 결과할 것이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권고는 맘몬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정당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은 잘하는 정치와 멀지 않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 중심의 경제’를 추구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정치의 기틀이 마련되고 시행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인사(人事), 사드, 4대강, 위안부, 양심수, 남북문제 등에서 아직 신뢰할 만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단지 바람에 그칠까 염려스럽다.(각주 11 참조) 이것이 우파 그보다도 극우파들을 의식해서라면, 문재인 정부가 그 기초인 촛불민심을 신뢰하지 못한 탓이리라. 그래도 새해에는 잘하는 정치를, 정의와 평화가 토대인 정치를, 예・의・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사람중심의 정치를 기대하고 요구하자.
1 2017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노인 인구의 비중이 14% 이상)에 근접한 13.8%이고. 2026년에는 20%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오유미, “기대수명 90.8세의 정책적 함의와 대응방향,” 「Weekly Issue」 015호(2017/4): 1-8.] 이 자료에 따르면 통계청이 발표한 기대수명(2015년 기준)은 여자 85.2세, 남자 79세이다. 그러나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은 여성이 9.9년, 남성이 8.2년 각각 짧다. 오유미는 영국 의학 잡지 Lancet에 실린 논문을 인용하여 203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을 여자 90.1세, 남자 84.1세로 예측한다. 따라서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정책적 과제가 된다.
2 그는 4차 산업혁명을 ‘정보화 사회’에서 ‘지능정보사회’로의 이행으로 이해한다. 연설문 내용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과 기술의 혁신, 혁신적인 창업과 신산업 창출, 제조업과 산업의 지능화, 이를 위한 제도 개혁과 일정 기간 규제 없는 규제 샌드박스 도입, 인력양성을 위한 교육 개선, 사회구조 변화 등을 포함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 고용노동부의 비정규직 고용 동향에 따르면, 2016년 하반기 비정규직은 임금 근로자의 32.8%에 이르고, 자영업자는 2016년 전체 취업자에서 임금 근로자와 무급 가족종사자를 제외한 21.2%이다.(전체 근로자 2623만 5000명 중 임금근로자는 1962만 7000명, 자영업자는 557만 명이며, 이 중 임금근로자는 정규직 1318만 3000명, 비정규직은 644만 400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현재의 왜곡된 고용 구조는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제조업과 산업의 지능화’로 인해 비정규직화와 실업이 확대되면서 더 악화될 것이고,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4 輓(만)은 ‘끌다, 애도하다’를 뜻하는데, 이를 ‘애도하다’로, 近世(근세)를 근래의 풍속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근세를 애도하다.’가 된다. 위의 ‘막다’는 이를 문맥에 맞게 바꾼 것이다.
5 涂(도)는 ‘칠하다, 칠하여 없애다, 매흙질하다’를 뜻한다. 따라서 涂民耳目은 ‘백성의 눈과 귀에 매흙을 칠하다.’로 이해될 수 있고, 위와 같이 옮겼다.
6 則幾無行(즉기무행)의 ‘행’은 다양한 뜻을 같지만, ‘만근세도민이목’이 세상과 차단된 삶을 목표한다면 그것은 ‘돌아다니다’로 옮길 수 있고, 또 이렇게 옮기는 것이 문맥에도 어울린다.
7 여기에는 질서가 와해되고 전쟁이 그치지 않던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8 그는 다음과 같은 태사공의 말을 인용한다. “태사공이 말한다. 신농씨 이전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지만, 만일 시경이나 서경에 기록된 것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우나라와 하나라 이래 (백성의) 귀와 눈은 최상의 소리와 색을 즐기기 원하고, 입은 최고의 고기(窮芻豢, 궁추환)를 맛보고자 하며, 몸은 편안히 놀기를 좋아하고, 마음은 세력과 재능의 영예를 자랑하고 숭상했으니, 이러한 습속들이 백성을 물들게 한 지가 참 오래되었도다. 비록 집집마다 다니며 오묘한 이론으로 설명해도 끝내 교화시킬 수 없다.”[…而心誇矜輓(→埶)能之榮使의 使를 떼어내어 俗之漸民久矣와 결합시켜 읽고, 俗은 앞에 열거된 것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9 故善者因之,其次利道之,其次教誨之,其次整齊之,最下者與之爭
‘(백성을) 원인으로 하다’로 옮겨진 ‘因之’는 백성의 뜻을 따르고 실현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爭’은 잡아끌며 다툰다는 뜻을 갖는다.
10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 중 “도대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한 대목은 이와 동일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담고 있다. “너희 주인에게 물어보자. / 사람이 어떻게 용기있게 살 수 있는지. /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죄와 악행을 피할 수 있는지. / 먼저 너희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 그래야만 너희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 무엇으로 시작되는지 말할 수 있다. / 너희 배와 우리의 용기를 사랑하는 너희는 /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 먹는 것이 우선이고 도덕은 그 다음이다. / 먼저 가난한 사람들도 큰 빵덩어리로부터 자기 몫을 떼낼 수 있어야 한다.“
11 이것들이 ‘패왕의 일이다. 일에는 근본이 있는데, 그 핵심은 인의이다.’(霸王之事也 事有本 而仁義其要也-『관자』 “오보”) 이것은 맹자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12 이러한 정치는 ‘백성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관직에 있게 하고, …이룰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것은 구하지 않고, 오래 갈 수 없는 (정책)을 취하지 않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使民於不爭之官… 不為不可成 不求不可得 不處不可久 不行不可復).’ 이것은 ‘각자 자기가 잘하는 것을 하게 하고, …백성의 힘을 헤아리고, …백성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시키지 않고, …경박하게 일시적인 것을 취하지 않고, …그 백성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使各為其所長也… 量民力也… 不彊民以其所惡也… 不偷取一世也… 不欺其民也). 그러면 不偷取一世也는 자주 정책을 바꾸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偷取(투취)는 ‘몰래 훔치어 가지다’를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偷와 取를 분리시키고 偷를 ‘경박하다’는 뜻으로 읽는다.
13 관자는 “목민”에서 예・의・염・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나라에는 네가지 강령이 있다. …하나는 예, 둘째는 의, 셋째는 염, 넷째는 치이다. 예는 법도를 넘지 않음이고, 의는 스스로 디밀지 않음이고, 염은 잘못을 숨기지 않음이고, 치는 굽은 것을 따르지 않음이다.’ (國有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禮不踰節 義不自進 廉不蔽惡 恥不從枉)
14 19-21절과 22-23절도 주제는 동일하지만,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이 게시물은 대한기독교서회님에 의해 2018-01-30 19:26:19 성서와설교에서 이동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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