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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니담의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는 중세 유럽에서 자주 행해지던 동물재판 이야기가 나온다.1 중세 유럽에서는 법정에서 동물의 재판과 구형이 상당수 행해졌고, 그에 따라 정식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돼지가 유아를 먹어버린 경우처럼 동물이 인간을 공격했을 때 그렇게 한 것은 이해되는 바가 없지 않다. 방법은 달라도 오늘날 인간을 공격한 동물에 대해서도 그 비슷하게 하니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연의 법칙을 어겼다고 판단된 경우이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는 수탉이 알을 낳는 “가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죄”에 대해 수탉을 앞에 놓고 재판을 해서 산 채로 화형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스위스 바젤에서는 1730년에도 이렇게 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해부학 수준으로는 그런 변이를 설명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겠지만, 니담에 의하면 동일한 상황에서 중국 사람들이 대처한 방식은 달랐다. 중국에서도 수탉이 알을 낳는 변고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 이렇게 자연의 이법을 거스르는 일이 생기면 그것을 하늘의 유고라고 여겼다. 이때는 수탉이 아니라 황제나 지방장관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같은 경우에 대해 중국에서는 동물에 대해 재판을 행한 것이 아니라, 황제나 지방장관이 목욕을 재개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하늘에 제를 올렸다. 아무래도 유럽보다는 중국 쪽이 더 우아해 보인다.
이것은 자연의 이상 현상에 대한 동서양의 상이한 접근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니담이 예로 든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현상에 직면해서 그 신비 앞에 머리 숙이고 그 신비 자체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과학과, 자연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닦달하는 과학의 차이이다. 니담은 동서양의 과학과 관련해서 이 예를 들었지만, 나는 신학과 관련해서 화형당하는 불쌍한 수탉의 이미지를 자꾸 떠올린다. 신학을 하면서 삶을 화형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삶의 경이로움, 낯설음은 신학이, 학문이 오롯이 지켜내야 하는 것인데, 직업으로 신학을 하다 보니 그러지 못하고 삶으로서의 신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대학이라는 장소는 새로운 자극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을 수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삶과 세계를 향해 눈 감고 귀 막은 채 소위 ‘학술’로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더욱 오늘날과 같은 대학의 상황에서 직업이 아닌 ‘삶의 기술’로서의 신학은 대학에서 자취를 감춘 듯하다.
대학에 있으면 마치 썰물이 밀려가고 밀물이 밀려오듯이 학생들이 밀려가고 밀려온다. 해마다 새로운 학생들이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같은 고민을 반복하는 모습을 본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배워오던 신앙과 달라서 흔들리고 힘들어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일차적인 목표가 취업에 있다 보니 학점관리 외에 애초에 신학 자체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새로운 학생으로 얼굴은 바뀌지만, 그들은 말없이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 때문에 이 공부를 해야 하나요?”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제게 무슨 유익이 있나요?” 이것은 신학의 유용성에 대한 질문이다. 어차피 신학을 평생 전공하지도 않을 것이고, 취업준비로 바쁜 학생들에게 신학이나 인문학 교육은 무슨 실익이 있는가? 물질적 욕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둘 다 읽히는 질문이지만, 신학자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 안에 담긴 ‘인간 곤경’이다. 물질이 압도하는 세계 속에서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앳된 인간의 존엄이 그 질문에서 읽힌다. 아마 교단 신학교가 아닌 종합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 치고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이런 질문과 마주하지 않은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런 질문을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질문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학 자체가 실용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탄생한 배경과 그곳에서 다루었던 주제들만 떠올려보아도 알 수 있다. 중세 유럽 대학의 네 가지 학문분과는 인간 삶의 구성적인 실용적 요소들을 충실히 반영했다. 가령 법은 사회 제도의 근간이며, 국가와 사회의 행복, 평등과 정의 같은 것은 법을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 의학 역시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유용하다. 신학은 개인과 사회의 영적, 도덕적 건강을 위해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arts는 기초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학문분과 연구를 위해 기초적인 언어와 논리, 수학,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법학, 의학, 신학이 오늘날의 대학원 과정에 해당하는 전문분야라면, arts는 학부과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대학들은 특정한 공적 선을 위한 실천적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학은 처음부터 개인의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한 통로였다. 중세 대학은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징집 면제, 면세 등의 혜택을 받는 특권적인 기구였다. 소수만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법학, 신학, 의학과 같은 대학원 과정의 전문교육을 받으면 법조인이나 성직자, 의사가 되었고, 문법, 수사학, 수학, 논리학 등 기초과정만 이수해도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대학은 사회적 특권을 재생산하는 기구로 출발했다.
그러므로 대학은 공적이건, 사적이건 언제나 실천적인 관심으로부터 그 동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관심은 결코 사소한 것도, 천한 것도 아니고, 비지성적인 것도 아니다. 대학은 한 번도 순전히 상아탑적인 지식추구 집단이었던 적이 없고, 이에 대해 대학은 변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오히려 지식이나 예술 자체에 무슨 고유한 절대적 가치라도 있는 듯이 학술 지상주의, 예술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미심쩍어 보인다.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가 내포하는 고유한 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학자로서, 특히 신학자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째서 중요하며, 어째서 그것이 나 자신의 개인적 견해나 주관을 넘어서 무언가를 공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무슨 근거에서 이 일로 월급을 받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 특히 종합대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교육은 신학의 유용성에 대한 실용적인 질문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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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구체적인 표징으로서 세계 안에서 교회를 지속시키고 섬기는 일, 아마도 이것은 신학의 가장 일차적인 유용성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신학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점점 더 보편적인 삶의 언어와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증언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그렇다면 ‘삶의 기술’로서의 신학, 성서 공부는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사실 성서를 읽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나게 되는 세계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이다. 성서는 낯선 과거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성서의 세계는 낯선 외국어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행동방식도 다르고, 친숙하지 않은 특이한 개념들, 종교적・철학적 신념들로 가득 찬 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낯선 세계와 마주하는 것은 내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그것은 익숙한 나 자신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우리 시대의 ‘확실성’(certainties)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한다.2 낯선 세계와 마주하면서 거꾸로 익숙하던 세계를 낯설게 경험하게 되고, 현재의 세계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성서와 성서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런 차이에 대해 성찰하면서 나는 때때로 그들이 우리보다 좀 더 잘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신학공부는 나를 낯선 세계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 낯선 세계를 잘 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까다롭고 난해한 본문들을 다루려면 참을성이 필요하고 조심성 또한 있어야 한다. 해석을 할 때는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겸손함과 부드러움, 관용을 가지고 낯선 개념들과 관행들을 대하려면, 판단하기에 앞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타자를 잠재적인 스승으로, 즉 무엇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지에 관해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도록 나를 훈련시킨다.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실질적인 이익 중 하나는 낯선 세계를 이해하고 잘 대할 수 있게 해주는, 풍요롭고도 뛰어난 자원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의 문화적・도덕적 갱신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며, 사회 내에서 ‘덕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한 사회 내에서 덕의 형성, 그리고 도덕적 갱신은 과학과 기술, 경제 분야에서의 발전 못지않게 중요하다.
진리에 대한 복종과 겸손, 남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음, 관용, 참을성, 주의 깊음 같은 미덕은 신학과 인문학이 가르치는 지적 분과 안에 녹아들어 있고, 그 외의 사회과학이나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습득하기 어렵다. 유능한 개인으로 사회 내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재능 있는 개인들을 길러내는 것은 대학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고, 사실상 오늘날 대학교육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공적 기관과 기업, 서비스 분야에서 일할 노동력을 준비시키고, 상업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술 및 과학지식을 발전시키는 것 역시 오늘날 대학이 감당해야 할 책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회 내에 대학이 존재하는 보다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개인들과 시민들에게 덕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은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학교육은 지식전달이나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수가 학생의 도덕적인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당연시해왔다. 예전 대학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고, 채플이나 각종 행사, 개별지도 시스템 등을 통해 그런 도덕형성의 관계가 가능했다. 이러한 관계에는 상호적인 협동과 돌봄의 성격이 있으며, 때로는 동등한 우정의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그러한 우정의 관계는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나의 옛 선생님들은 실제로 이러한 돌봄과 협동, 우정의 관계를 몸소 실천하셨고, 그것은 지금도 내 안에 샘솟는 기억으로 살아 있다. 그분들은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가 지적이고 도덕적 영향이 통합된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통합된 관계를 온정주의로 치부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길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학이, 인문학이 힘을 잃은 것은 이 역할, 즉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포기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원래 대학, 라틴어로 ‘universitas’는 교수와 학생의 조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 자체가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오늘날 대학에는 공동체성이 없지만, 원래 대학은 공동체였고, 그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 안에서 돌봄과 도덕적 형성이 가능하며, 또한 그러한 도덕적 역할을 감당할 때 대학은 원래대로 공동체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대학교육이, 특히 신학교육이 지적・도덕적 덕의 형성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Q 본문의 복잡한 전승사를 재구성하고 현대의 문학비평 방법을 2,000년 전 문헌에 현란하게 적용하는 것이 단순히 철없는 지식분자의 개인적 취향, 아니면 바보 같은 짓거리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그런 공부는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공공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 자아도취적인 여가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와 같이 공리주의적인 문화가 과도하게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학술활동을 강력히 내세우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학술활동이 의미 있으려면, 그런 공부가 공적 행복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우리 시대에 신학을 하는 사람의 공적 소명은 보이지 않고, 측정 불가능한 인간적・사회적 재화를 사회가 공적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촉구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우리 스스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많이 벌어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세상이고,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물질적인 경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생활은 편리해지고, 과학기술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인간은 마치 지구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제가 발전하고 국가가 부강하게 일어설 때, 진정한 문명의 가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지 신학은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진정한 문명의 가치는 사람이 사람됨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제도적 보호이며, 인간의 존엄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자유와 평등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과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우리가 만든 이 모든 변화의 결과와 함의를 우리 자신은 알고 있는가? 신학은 이 질문을 놓쳐서는 안 된다.
거대한 물질적 힘은 우리가 살면서 의지할 전부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더욱 크고 위대한 어떤 힘의 구현이자 맥락이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물질적 힘과 그보다 훨씬 큰 어떤 영적인 힘은 오랜 역사 속에서 함께 뒤얽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하면서 우리 자신 안에 내적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신학은 이 두 힘 중 어느 하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긴장감을 탐색해야 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긴장의 파괴에, 물질적 힘의 압도적인 승리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가던 걸음을 늦추고 과거를 돌아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최첨단의 신학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신학의 유용성은 외견상 보수적인 데 있다. 이러한 보수성은 경제성장이나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가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 탐구하는 세계, 즉 하느님과 그의 계시자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고자 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존재로서 인간과 생명세계, 이 세계 속에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영원한 진리는 늘 푸르며, 결코 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적 고귀함을 지키고 보호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지구별의 청정함과 평화로움을 지키고 감시하는 일은 신학의 본령에 속한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정보와 자극에 의해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인간 정신이 짓밟히는 물욕의 시대에 신학은 어색하고 어렵고 또 보수적으로 들릴지 모르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어쩌면 신학의 이 고리타분함, ‘시대에 뒤떨어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첨단일지도 모른다. 신학은 늘 인간의 진정한 어려움과 함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신학은 자신만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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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들에는 영생에 대해 질문하는 율법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나온다.(마 19:16-26, 22:34-40, 막 10:17-22, 12:28-34, 눅 10:25-28, 18:18-27) 그런데 사마리아인 비유와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누가뿐이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는지 반문하고, 청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다.”라고 옳게 답한다.(눅 10:27)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답한다. 알고 있으니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에게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다. 이때 예수는 사마리아인 비유(예화)로 답을 한다.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 묻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서의 이 이야기는 아주 잘 짜여 있다. 내용 자체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짜임새가 있다. 가령 율법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은 것을 예수는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놓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해라.”라고 꼼짝 못하게 요구한다. 율법교사로 대표되는 잘난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강도 만난 사람은 언제나 내 옆에 있는데도, 손 하나 까딱 않으면서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오류이다.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관념적인 질문은 이웃이 되어주는 실천적 행동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 되기 쉽다. 예수는 누구나 범하기 쉬운 이 잘못에 대해서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가서 그렇게 해라. 그렇게 살아라.”
이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사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본문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다는 이웃사랑, 자선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고, 이 본문에서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 전통적인 유대인 지도자가 아니라 무시당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원수 사마리아인이라는 관점에서 이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삶으로서의 신학, 신학의 유용성에 대한 질문과 관련해서 이 본문을 약간 비스듬히 놓고 옆에서 한번 보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관념적이고 회피적인 질문을 “이웃이 되어주라.”라는 실천적인 명령으로 바꾼 것은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이고, 그렇게 기술한 것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누가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비판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본문의 결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생을 묻는 이 율법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와 마가, 누가에 다 나오는데, 사마리아인 비유는 누가에만 나온다. 학자들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예수가 바꾼 것은 원래 영생에 대해 질문하는 율법학자 이야기와 사마리아인 비유가 독립적 전승이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원래 따로 전승되었던 것을 누가가 한데 엮다가 범한 실수라는 것이다. 누가가 좀 더 기억력이 좋고 똑똑했다면 이 율법학자의 질문이 “이웃이 누구입니까?”였다는 것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잘 끌고 가서 사마리아인 본문에서도 그렇게 누가 이웃인지를 말했을 텐데, 원래 본문의 흐름을 깜박 놓쳐버린 채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본문들에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원래 율법학자 내지 부자청년 이야기와 사마리아인 비유는 독립된 이야기였고, 누가가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던 이야기들을 엮는 과정에서 실수했을 가능성 쪽에 무게를 실어준다. 현재의 누가 본문 자체를 하나의 결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좀 더 우아하고 깊은 본문의 의미와 본문의 실수 사이에 서 있다. 이 둘 사이는 별로 화해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이럴 때 나는 앞에서 예를 든 이야기, 수탉을 산 채로 화형시켰던 유럽의 동물재판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이 본문을 닦달해서 화형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서 본문을 한낱 불쏘시개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본문에 대한 이 두 접근 사이에 타협할 길은 별로 없다. 그냥 어느 한 쪽에 설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길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는 것이다. 이 둘을 섣불리 화해시키거나 종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모순과 대립을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삶에도, 신학의 논리에도 꼭 필요하다. 사실 자신과 다른 것, 반대를 의식하는 것은 신앙과 신학 둘 다에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으며, 그렇게 낯선 것을 인정할 때 신학이든 신앙이든 그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신학이든 신앙이든 내 안에 나를 비평하는 존재를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실은 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신학이 마치 신학 자체만의 고유한 영토가 있어서 그 상아탑 안에서 그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머무른다거나, 아니면 신앙이 신앙의 감격과 감동 안에 빠져 있다면, 신학이든 신앙이든 자기만족적인 지적 유희나 현실기만적인 자기최면에 빠져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둘 사이에서, 신학과 삶의 실천 사이에서 흔들리고 헷갈려하는 것은 신앙을 위해서도, 신학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둘은 항상 내 안에 나를 비평하는 존재, 나에게 낯선 존재를 하나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비평가가 없이 자기 논리에만 빠져서 쓰는 글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 모순과 갈등, 자기와 반대되는 생각을 의식하는 신학과 신앙만이 현실의 갈등과 견실하게 대면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신학은 그 자체만을 위한 신학, 신학놀이가 된다. 신학은 늘 믿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 왔다. 그러나 근대학문으로 신학이 자리잡으면서 학문 그 자체만을 위한 신학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신학적 주제의 많은 부분이 사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신학은 힘을 잃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세 대학의 주요 세 분과를 가리키는 ‘tri–vium’, ‘quadrium’, ‘otium’이라는 라틴어 단어들이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가를 보면 신학과 인문학의 변질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otium’이라는 명사는 중세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성찰하고 경탄하는 능력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otiose’, 즉 ‘쓸모없는’, ‘게으름’, ‘무익함’과 관련된 의미로 바뀌었다. 그리고 ‘trivium’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설득하는 인문학적이고 합리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대학의 기초과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trivial’, 즉 사소하다는 의미가 되었다. 또 중세 인문학 과정의 나머지 반을 가리키던 말 ‘quadrivium’은 오늘날 ‘drivel’, 즉 허튼소리나 시간낭비를 뜻하게 되었다.3
인문학도 원래 상아탑 속의, 현실과 유리된 학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요소 없이 자기 안에 매몰되어 삶과 동떨어진 연구에 머물렀을 때 그것은 게으르고 무익하고 시시한 허튼소리를 뜻하게 된 것이다. 중세 인문학 과정을 가리키던 이 세 라틴어 단어가 오늘날 영어에서 우스꽝스러운 의미로 변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자기 안에 비평가 없이, 낯선 존재 없이 그 안에만 매몰된 인문학과 신학의 실상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낯선 존재를 가져야 한다는 것, 즉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낯설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이해해서 우리의 상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는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 그러니까 가서 행하는 것, 이웃이 되어주는 것보다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에도 결코 잘못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늘날처럼 전문화된 사회라면 더더욱 타당한 태도, 아니 더 나아가서 오히려 필요한 태도라고까지 할 수 있다. 율법학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가 하는 일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예수는 문제삼는다. 이 율법학자 이야기의 후일담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는 사실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두 번씩 나온다. 누가복음서의 경우 10장에 사마리아인 비유와 함께 나오고, 18장에 비슷한 이야기가 또 나온다. 18장에서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마가에서와 같이 부자 청년이 가장 큰 계명에 대해 질문을 한다. 그 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난다.
그런데 이 말이 참 중요하다. 사실 예수는 늘 우리 속에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분으로 계신다. 우리 속에 낯선 분으로 계신다. 어쩌면 이 부자는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일담을 모르지만, 아마 우리 대부분이 이 부자 청년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낯선 분이 되셔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분으로 계신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안에 그 낯선 분의 낯설음을 좀 더 명료하게 언어화해서 받아들이고, 그래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겸허하고 좀 더 우아한 태도를 배워가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이 글 맨 앞에 언급한 예처럼 수탉을 산 채로 화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문제삼는 것이 되고, 본문을 불태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비평가를 한 분 모셔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처지, 정당화할 변명거리가 너무나 많은 현재 우리 자신을 거듭해서 근원적으로 새로 문제삼고 바울이 말하듯이 늘 “보라. 새사람이 되었도다.”라는 감격에 찬 말을 할 수 있기 위함일 것이다.
어젯밤 꿈에는 하늘나라로 간 김수남 목사가 나타나서 내 원고에 문제가 있다며 정색을 하고 따지는데, 선한 눈매는 여전했다. 집에서 가까운 수유리 4・19묘지 부근 식당에서 굳이 밥을 사겠다며 내게 이 연재를 부탁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제 아픔도 괴로움도 없는 그곳에서 착한 별이 되어 가족과 친구들을 따뜻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연재를 마치며 특별히 김수남 목사를 생각하고 감사한다. 지금까지 1년여에 걸쳐 이 지면을 통해 독자를 만났다. 글을 쓰다 보면 정말 이런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 드는데, 누군가 읽었다는 말을 해주면 신기하고 고맙다. 내 나름으로는 우리 시대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 ‘확실성들’에 대해 성서의 세계가 어떻게 도전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우리 시대의 ‘기이함’을 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해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 “말씀과 성찰”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연재해주신 박경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1 조셉 니담, 이석호 외 역, 『중국의 과학과 문명 Ⅲ』(서울: 을유문화사, 1988), 308-310.
2 ‘certainties’(확실성)라는 말은 신학자이자 역사가, 문명비평가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사용한 말이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당연하고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은 얼마나 기이하고 낯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즉 과거는 현재의 기이함, 낯설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3 나이젤 비거, “대학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녹색평론』 114호: 139-140.
박경미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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