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읽기 15
성서情談 (2017년 5월호)

 

  예수의 황당한 부탁과 무모한 사람들
  

본문

 

부활 승천, 그리고 야속한 부탁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없다.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허상을 쌓고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 흉내를 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다. 그렇게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상한 무리 중엔 심지어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흉내를 내려는 것이다.
특히 예수 당시에는 그런 메시아 운동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우리의 노력처럼 예수 출생을 전후한 이스라엘 지역에는 이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환으로 메시아 운동이 왕성했다. 심지어 예수 운동보다 더 큰 경우도 꽤 많았다. 하지만 그런 운동들은 결국 다 사그라져 소멸하고, 결국엔 예수를 믿는 우리의 이 운동(?)만 남았다.
왜 그럴까? 왜 수없이 많은 운동이 종교적 열정과 노력, 구체적 실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지 못하고, 오직 우리의 예수 운동, 즉 기독교만 남았을까?
그 답을 많은 목사나 신학자가 입을 모아 말한다. 그리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한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예수 운동인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핵심을.
그건 바로 예수를 믿는 초기 제자들의 행동이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 놀라운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건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일어나는, 기이하고도 인상적인 구경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아니 정확하게는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를 따르려는 제자들의 충심’ 곧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너무나도 무모한 마음이었다.
예수를 처음에 따랐던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세리처럼 그리 멋지지도, 저명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렇고 그런 메시아 운동처럼 이들도 자기 흥분에 따라나섰다. 스승 예수가 왕위에 오르면 한자리씩 차지하겠다고 저들끼리 다투고 미워하기도 했다.(막 10:35-41) 예수가 잡혀야 한다는 둥,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할 때, 의심스러워하거나 걱정하고 때론 무슨 영문인지 감을 잡지도 못하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마 16:21-23)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잡혔고, 제자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뿔뿔이 흩어졌다.
인간은 먹고살아야 한다. 그건 어느 때이든 진리이다. 도망친 제자들은 각기 제 살던 고향으로 간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숨는다.’ 그리고 잔잔해지기를 기다린다. 세월이 안정되기를 기다린다.
다시 어부 일을 하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버렸던 부모를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이 버리고 갔던 집안사람들은 그들에게 뭐라 했을까? 또 그들은 ‘열병과도 같았던 뜨거운 3년’을 어떻게 기억했을까? 후회했을까? 절망했을까? 예수라는 청년을 애초부터 만나지 말아야 했다고 탄식했을까? 아니면 예수가 자신들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든지 아니면 같이 도망쳐야 했다고 생각했을까? 그도 아니면 예수를 강제로 끌고서라도 광야로 도주해서 재기를 노렸어야 했다고 깊은 자책을 했을까?
이런 때에 예수가 나타난다. 분명 죽었을 텐데, 예수가 나타난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안다. 영혼이 온 것이 아니라, 죽은 원혼이 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의 말처럼’ 부활해서 온 것임을 안다.(눅 24:36-43) 영특하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도마만이 의심했을 뿐(요 20:24-29), 모두가 다 알았다. 예수가 정말 살아서 왔다는 것을.(요 21:12)
이젠 어떻게 할까? 다시 예수 운동을, 메시아 운동을 시작할까? 으쌰으쌰 힘을 합해볼까?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서 낙심하고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아 힘을 내라 북돋우며 “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으니 이제야말로 우리가 이길 것이 분명하다.”라고 천하 만방에 외칠까? 어쩌면 그럴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는 엉뚱한 말을 꺼낸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이러고는 당신은 그냥 가신단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같이 메시아 운동을 해야지 스승이 우릴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우두머리가, 지도자가, 갑자기 들고 있던 깃발을 내팽개치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부활했다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끝내주는 기적이 있는데, 그걸 다 버리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맘도 주변도 캄캄하게 어두운 그 저녁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는 그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한다.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예수의 말은 과도한 부탁이었다. 무책임한 말이었다. 자신은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멍에를 지게 하는 말이었다.
베드로에게 내린 이 ‘명령’이 내게는 ‘황당한 부탁’으로 들린다. 예수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한 것 같다. 위에서 내리꽂는 강한 명령이 아니라, 너희가 살 길은 이것이라고 설득하고 당부하는 부탁 말이다. 다만 그것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젠 너희만 해라.” 아니 “이젠 너희가 해야 할 차례다.”로 들리는 말이기에 너무 막막했다. 그리고 정말 예수는 가버렸다.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건 멋진 모습이 아니라 황당한 모습이고 암담한 모습이다. 영광의 징표가 아니라 무겁게 짓누르는 암담함의 표지이다. 더 이상 예수는 살아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는 숨이 끊어졌지만, 그의 말처럼 살아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여자들이 이른 새벽 예수의 무덤에 찾아갔던 거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건 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예수가 없고, 이젠 정말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거였다. 아마도 제자들의 심정은 무너졌을 것이다.

피화당 안에 갇힌 운명
우리의 옛 소설을 읽다 보면 조금 갑갑한, 때론 무책임한 장면이 나온다. 지금 시각으로 볼 때 개연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이들 동화책으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진 <박씨전> 같은 것도 그렇다.
한양에 이득춘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금강산에 사는 박 처사가 그를 찾아온다. 이득춘은 대번에 박 처사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는 박 처사의 딸과 자기 아들 이시백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한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결혼처럼 아들의 의향을 묻지도 않았고, 박 처사의 딸을 보고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버지가 결정해버렸다.
얼마 후 아버지가 아들 이시백을 데리고 금강산에 가서 며느리 박 씨를 맞아 오는데, 문제는 그녀의 외모였다.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추물이었던 거다. 못생겨도 정도가 있지 기겁할 정도로 생긴 박 씨의 외모에 온 집안이 수군거리고 난리가 났다. 꼭 우둘투둘한 두꺼비처럼 생겼으니 말이다.
아버지 이득춘을 제외하고는 남편 이시백은 물론 집안 모두가 박 씨를 박대했다. 박 씨는 결국 집안 깊은 곳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여종 하나만 데리고 살았다. 그녀는 그곳을 “화를 피하는 곳”이란 의미인 ‘피화당’(避禍堂)이라 불렀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화를 피한다’고 생각한 그 ‘화’(禍)가 집안 식구들의 모진 구박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 진가는 조금 이후에 드러난다.
사실 박 씨는 천지음양의 조화를 깨우친 도술가였다. 그녀가 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끔찍할 정도로 못생겼던 것은 더러운 허물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때가 되자 그녀는 허물을 벗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남편 이시백과 같이 잘 지내게 된다는 것이 <박씨전>의 전반부이다.
<박씨전>을 역사소설이라고도 하는데, 그건 인조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는 병자호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서사는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사실대로 진행된다.
나라가 혼란스러워 청나라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온 나라가 초토화되고 백성들이 고초를 겪는다. 한양은 이미 오랑캐의 손에 넘어가 짓밟히고 말았다. 이때 청나라 장수 용울대가 한양 도성 안에 있는 이시백의 집에 쳐들어온다. 집안 내외는 모두 피란을 떠났으나, 박 씨와 그녀의 여종만은 바로 그 ‘피화당’에 있었다. 그야말로 박 씨 부인과 여종은 단박에 죽든지 사로잡힐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 사나운 청나라 장수 용울대가 박 씨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비로소 사람들은 ‘피화당’의 ‘화(禍)’가 바로 병자호란인 것을 알았다. 그곳으로 숨거나 달려온 자들은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승승장구하며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밀어붙이고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아낸 용골대(龍骨大)는 동생 용울대가 죽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란다. 분노한 용골대가 벼락처럼 한양의 박 씨 부인의 거처로 달려든다. 하지만 용골대 역시 박 씨의 놀라운 도술에 꼼짝 못하고, 결국 부인에게 거듭 사죄를 청해서 겨우 용서받아 달아난다.
그렇게 해서 용골대는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및 대신과 부녀자들을 잡아서 제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후반부를 읽다 보면, 앞서 말했듯이 갸우뚱하게 된다.

“아니, 박 씨가 나서서 청나라 군사들을 퇴치하면 되는데, 왜 안 그런 거지?”
“용울대는 목을 잘라 죽이면서 왜 용골대는 살려준 거지?”
“설사 용골대는 살려준다 해도, 소현세자를 비롯한 사람들을 끌고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었잖아? 왜 안 그런 거야?”


이런 의문과 질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박씨전>이 그렇게 맥 빠지게 된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다. 역사적 사실을 거스르지 않고 창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쫓겨 갔다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 청나라 장수가 용골대인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바꿀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박씨전>의 작자는 나름의 수완을 발휘했다. 멋지고 속 시원하게 청나라에 분풀이하기 위해 ‘용울대’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죽인 거다. 그리고 실존 인물인 용골대(龍骨大)는 죽이지는 않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애걸하는 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조가 항복하고 세자와 대군을 볼모로 잡아가는 것은 바꿀 수 없으므로,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설정하여 피화당 안에 있도록 한 것이다. 남성 주인공이라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도술을 부릴 수 있으니 역사적 사실까지 어그러지게 되지만, 여성이라면 그녀가 있는 곳에 쳐들어올 경우만 물리칠 수 있다고 꾸며서 역사적 사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만든 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고 찜찜하다. 그래서 작자는 이런 말을 박 씨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한다.

우리나라 국운이 불운하여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는 모두 하늘의 뜻(天命)이다. 운명이다.

그런 말로 임경업이 죽임을 당하고, 인조가 항복하고, 세자와 백성들이 볼모로 잡혀가는 등의 어수선하고 개연적이지 못한 것들을 단박에 처리한다.
이것을 운명론(運命論)이라고 한다. 운명론은 어느 정도 융통성은 있지만 결국 정해진 운명대로 흐른다는 결정론이다. 운명론은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의 몸부림일 뿐이란 뜻이다. 천지를 뒤집을 만한 능력을 지닌 박 씨 부인도 그랬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것이 뭐 어쩌겠느냔 말이다. 맥 빠지게도 말이다.

프로이트는 과거를 말했고, 라캉은 현재를 말했다.
운명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정해진 운수대로 팔자대로 살라 하면 누구든 발끈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발끈함과 달리 우리는 대부분 운명론을 마음속에 새기며 산다. 아니라고 부인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우리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인간의 심성, 감정, 인성이 대부분 유아기에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그의 학설을 두고 옳다 그르다 나름의 견해와 판단이 곳곳에서 충돌하지만, 어떻든 그의 주장은 대부분 경청할 만한 타당한 말들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그동안 주목하지 않던 정신, 마음을 분석해서 그 복잡다단한 것을 풀어내려고 한 선구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를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과거에 집착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어릴 적 일이 내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학설이 틀렸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어쩌면 과거의 불가항력적인 것들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는 괴로움과 끔찍함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에 몸서리를 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이렇게 프로이트는 우리 정신의 메커니즘을 우리의 과거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그는 과거를 주목하고 과거에 대해 말했다.
프로이트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라캉(Jacques Lacan)은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프로이트와 달리 현재에 초점을 맞췄다. 그의 복잡한 논리를 한두 마디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라캉은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한다고 보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느끼는 감정을 과거에 투사해서 얻어진 것이란 설명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과거의 감정과 기억을 지금 자기 마음속에 구성해낸다는 설명이다.
예전 대학 다닐 때 동맹휴업을 한 적이 있다. 캠퍼스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내 옛 친구들이 종종 “얀마, 너만 그때 혼자 영어시험 보러 바리케이드를 넘어갔었잖아.”라고 핀잔처럼 찬탄 섞인 소리를 하곤 했는데, 난 전혀 기억이 없다. 하지만 친구들 대부분이 다 그렇게 기억해서 말했다. 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악의나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닌 걸 알기에, 난 내가 바리케이드를 넘어 시험을 보러 갔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그랬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퍼뜩 TV 드라마를 보다가 기억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랩(Lap)실에서 헤드폰을 쓰고 열심히 영어발음을 따라 시험 치는 모습이었다. 그때 난 헤드폰 속에서 들리는 영어문장이 너무 빨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낙심하고서는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바로 그 장면이 기억난 것이었다. 분명 그때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나,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며 애를 쓰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나‘만’ 바리케이드를 넘어 시험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이 시험을 보러 간 것이 분명했다.
친구들 모임에서 다시 바리케이드와 영어시험 얘기가 나오자, 난 그 기억을 말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랬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 친구들의 기억은 어찌 된 것일까? 그들이 의도적으로 날 골리려고 한 것이 아니니 조작이나 고의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억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라캉은 이를 두고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한다.”라고 했다. 프로이트에게 찌든 사람들은 라캉을 읽으면 조금 밝아진다. 가능성이 열린다고나 할까.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현재를 주목하게 되니 말이다.
라캉은 이렇게 현재를 말했다. 과거에 얽매인 사람은 운명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고, 도무지 뚫고 나갈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현재에 주목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쉽게 두려움이나 모멸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현재란 때론 척박하고, 또 지금 살아가는 시간이긴 해도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과거이기도 하니 말이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어.”, “100세까지 산다는데 난 이러면 나중에 어떻게 살지? 굶어 죽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불안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과거는 결정이나 되었으니 잊으면 그만이지만, 현재는 지금 만들어가는 것이니 한없이 조심스럽고 괴롭고 피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예수는 미래를 말했다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다 과거 아니면 현재를 말했다. 그들의 시선, 고민과 노력이 모두 다 거기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를 말했다.
부활한 예수는 야속한 행동을 했다. 자신은 이제 간단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모여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한다.(행 1:4) 이런 황당한 명령을 어떻게 따른단 말인가. 예수가 죽임을 당하고 예수의 당이 핍박을 당하는 시절에 한 곳에 모여 기도하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라는 말보다 더 무모하다. ‘모이면’ 죽는다. 지금 혈안이 되어 반역자를 찾고 있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자신들의 얼굴은 온통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모이라니….
게다가 예수는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는다. 기다리란다. 대체 언제까지인지 말 좀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말은 없다. “몇 날이 못 되어”(행 1:5)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이 전부이다.
하늘에서 선물인 성령이 온다는데 그건 아무도 체험해보지 못한 거였다. 대체 그게 뭔지, 그게 와도 그건지 알 수도 없는데 대체 어쩌라고…. 그래서 불안한 제자가 묻는다. “주님 당신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행 1:6) 그런데 예수의 대답(행 1:7-9)은 설상가상이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걸 대답이라고 들은 제자들은 황망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그냥 휙 올라가 버리다니. 우리를 버리고…. 그래서 제자들은 한참을 넋을 놓고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랬는지,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라고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제자들은 믿었다. 예수의 말을 믿었다. 한번 배신했던 자들까지 모두 다 예수의 말을 믿었다. ‘기도하라고?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질문은 끝이 없고 의문은 꼬리를 물고, 야속함과 황당함이 교차하고 허망함이 엄습하지만 그래도 믿었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자신이 본 부활한 예수가 진실인지에 대한 의심까지, 한도 끝도 없이 머릿속에 달려들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믿었다. 예수가 말한 미래를 믿었다.
부활한 예수는 과거에 자신을 배신한 것을 책망하지도,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옹졸함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오직 미래를 말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것을 믿었다. 믿음의 선진들은 무모하게도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그 약속을 믿었다.(히 11:35-40) 그 예수 운동이 지금 우리를 이렇게 살게 했다.
예수와 무모한 제자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예수는 우리에게, 아니 나와 당신에게 무모한 제자들이 되기를 부탁한다. 간곡하게.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읽기”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유광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2023년 11월호(통권 77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의왕카카오톡 친구찾기   비아탑-시알리스 구입   woao50   노란출장마사지   myilsag   racingbest   24시간대출   대출DB   gmdqnswp   viame2   ViagraSilo   Gmdqnswp   miko114   채팅 사이트 순위   yano77   미프진약국 박스   캔디약국   LevitraKR   gyeongma   천사약국   MifeSilo   reu112   출장 파란출장마사지   koreaviagra   Mifegymiso   skrxodir   24parmacy   ViagraSite   무료만남어플   euromifegyn   시알리스구매   의왕 발 기 부진약   moneyprime   insuradb   우즐성   비아탑   마나토끼   돔클럽 DOMCLUB.top   onnews   24Parmacy   비아센터   미프진 후기   kajino   미프뉴스   drugpharm   vnnd33   비아탑-프릴리지 구입   euromifegyn   파워맨   미프진 약국   시 알 리스 후기   24시간대출 대출후   alvmwls   비아몰   만남 사이트 순위   alvmwls.xyz   비아센터   유머판   밍키넷 MinKy.top   미프블로그   tlrhfdirrnr   financedb   qldkahf   주소야   rudak   링크114   코리아e뉴스   최신 토렌트 사이트 순위   미페프리스톤   HD포럼   vianews   돔클럽 DOMCLUB   viagrastore   24 약국   bakala   poao71   합몸 출장   낙태약   viagrasite   코리아건강   비아마켓   skrxo   신규 노제휴 사이트   allmy   비아랭킹   althdirrnr   miko114   웹토끼   gkskdirrnr   healthdb   비아365   yudo82   링크와   실시간무료채팅   mifegymiso   미소약국미프진   미소약국   qmn320   totora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