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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읽기 14
성서情談 (2017년 4월호)

 

  백마 탄 왕자가 눈이 삐었냐? 너에게 오게
  

본문

 

“그건 기본이고요”
내가 대학시절 다니던 교회는 서울 변두리 극빈층이 모여 사는 지역에 있었다. 따로 대학부를 나누지 않고 모두 모아 청년부라 했는데 다 출석해도 고작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다. 그러다 보니 담당 교역자가 따로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담임목사님이 시간을 쪼개서 그냥 지도(?) 하시는 상황이었으니 교육적 프로그램이라는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튼 이런 조그만 변두리 교회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청년기의 성과 사랑.”
이 놀라운 주제로 특강을 연 것이다. 지금도 이런 제목을 교회에 걸면 안 된다고 길길이 난리 치실 장로님들이 없지 않은데, 무려 30 년 전에 그것도 교육과는 도무지 가까울 것이 하나도 없는 척박한 교회에서 외부 강사씩이나 초청해서 특강을 연 것이다.
토요일이었다. 본래 많지도 않은 청년들이기도 해서 참석자는 겨우 열 명을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뒤쪽에 칭얼대는 어린애를 포대기로 업은 여자 집사님이 애를 달래며 왔다 갔다 끝까지 서서 들으신 것이 기억난다. “이미 결혼했는데 그럼 전 어떻게 하지요?”라는 정말 진솔하고도 절절한 질문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아무튼 강사 목사님은 명동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었다. 그 교회는 우리 교단도 아닌 다른 교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어디로 봐도 우리와 레벨(?)이 맞지 않는 분이셨는데, 어떻게 우리 교회 같은 곳에 특강을 오셨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적어도 특강료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본래 2시에 시작해서 4시에 끝나기로 한 특강이 6시를 넘길 때까지 쉼 없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내 인생에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는데, 고백하자면 그날 그 목사님의 특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목사님이 청소년기의 성과 사랑에 대해 뭐라 말씀하셨는지는 솔직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난 완전히 딴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중간에 예를 들기 위해 곁다리로 말씀하신 것이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것들을 붙잡고 끙끙 씨름했다.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거였다.
“지금 이 교회당만 한 서재 가득 책이 있었는데, 그중 한 이천 권가량을 컨테이너에 실어서 가져왔죠.”
그분이 스무 살 때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시면서, 부모님과 살던 미국 집에 당신이 소장한 만 권 정도의 책 중에서 이천 권을 골라서 가져오셨단 말씀이었다. 사실 이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고 본론은 따로 있었는데, 난 만 권과 이천 권 사이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미국 에서 엄청난 부자였구나.’ 또는 ‘우리 교회당만 한 서재가 있었다고?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잘난 척은!’ 같은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이 직접 사서 모은 책이 만 권이나 된다는 것 때문이었고, 그것이 불과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의 일이란 것 때문이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만 권의 책을 사서 그때마다 서재에 꽂았다면, 모두 다 읽지는 못했다 해도 대강 읽은 것만 해도 몇 권이야? 아니 그냥 제 목만 읽어도 몇 시간은 걸리겠다.’
그때 난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수가 될 거라는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공부를 해보겠단 야심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은 몇 권이지?’
스물두 살 나는 목사님 말씀에서 옆길로 새서, 태어나서 그때까지 읽은 책들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헤아려봤다. 수학정석 책 말고, 만화책 말고, 교과서 말고, 순수하게 그냥 읽은 책들을 다 헤아렸다. 심지어 『콩쥐 팥쥐』처럼 큰 글씨에 두꺼운 종이로 그림이 멋진 동화책도 개수에 넣었다. 몇 번 넘기면 휘리릭 끝나는 책까지 몽땅 다 셌는데도 글쎄 백 권이 채 안 되는 게 아닌가.
그때의 멍한 충격은 지금도 내 마음 한 켠에서 떠나질 않고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날 난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 1년에 백 권을 읽자. 그러려면 한 주에 두 권씩 읽으면 된다.’고 결심했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결심을 잘 지켰고, 그 첫해와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몇 년의 주춤거림과 부침을 빼면, 다행히도 그날의 결심에서 퇴보하지 않았다. 감사할 일이다.

두 번째는 목사님의 퍼포먼스였다.
“모두 다 일어나세요. 예, 지금 다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그 말에 우린 쭈뼛쭈뼛 일어섰고 목사님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에 하나라도 해당하는 사람은 다시 앉으세요.”
그러고는 목사님이 죽 서류를 읽어나가듯 읊으셨다.
“워드 프로세서를 칠 줄 아는 사람? 돈이 지갑에 차곡차곡 넣어져 있는 사람? 아니면 버스표라도 넣어져 있는 사람? 집 책상 위에 책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사람?”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분들은 이때가 1990년 초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86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XT , AT 할 시 절 말이다.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타자기로 타자를 쳐서 보고서를 내는 것이 꽤 고급스럽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워드 프로세서’란 말조차 낯선 그때 세 명은 마지막까지 끝내 앉지 못했다. 목사님은 누구든 앉을 수 있는 말 (“아침이든 저녁이든 아니면 밥 먹을 때라도 하루에 한 번은 기도하는 사람?”) 로 모두를 앉히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누가 오겠습니까.”
목사님은 결혼과 연애 얘기를 하신 거였다. 상대방이 그렇게 구질구질한 사람에겐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거였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기본이고요.”
그때 난 이 말이 다르게 들렸다. 온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백마 탄 왕자가 눈이 삐었냐? 너에게 오게.’

금수저, 은수저, 그리고 흙수저
젊은 청년들의 좌절이 만들어낸 ‘수저론’은 틀린 말이 아니다. 금수저, 흙 수저 얘기가 퍼진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사회현상이 갑작스레 생긴 것 같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그랬고, 슬픈 얘기지만 인간사가 시작되면서 언제나 그랬다. 바뀐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혹 바뀌었다면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상처의 경중이 바뀌었을 뿐이다. 귀족이 귀족을 낳고 평민이 평민을 낳는다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지만 달리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은 아무 역사책이나 들추면 수두룩하게 나온다. 지금은 귀족도 천민도 없어진 사회라지만, 누구의 말마따나 그런 혈통적 귀속 신분이 권력과 금력이란 다른 외피를 입고 대를 이어 지속되는 또 다른 귀족–평민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런 것은 그렇다 치자.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두 고 뭐라 하실까 하는 거다.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하셨나? 아니면 그냥 머 리 숙이고 굴종하라셨나? 그도 아니면 눈 감고 외면하면 된다, 조만간 심판이 온다고 하셨나?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고 기독교 역사를 살펴봐도 경우가 다양하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지금도 각 교회 지도자 들이 각기 다르게 말한다. 이러다 보니 더 요령부득 (要領不得) 이다. 그런데 금수저, 흙수저 얘기와 너무나도 똑같은 것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수저가 아니라 그릇으로 말했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같다. 바울이 한 말인데, 그는 당대 ‘권력’이랄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리새인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 (행 22:3) 그야말로 세계시민의 입장에서나, 유대인의 입장에서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이런 비유를 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말하고자 했던 바는 분명하다.

사람은 구별이 있다. 그것을 차별로 바꾸어 영속화하고 억누르는 사람, 세력, 무리, 집단들은 어디에나 있다. 어쩌면 그건 인간들의 죄악된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디모데야. 넌 네가 누구냐보다, 네가 어떤 자질 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지 마라.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너를 쓰시느냐 안 쓰시느냐를 가르는 핵심이다.

우린 바울이 말한 ‘그것’, ‘그 핵심’을 안다. 바로 ‘준비’이다. 그릇들은 쓸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거다.
어떤 이는 그릇의 ‘깨끗함’을 강조하는데, 뒤에 말하겠지만, 그건 조금 다른 얘기이다. ‘깨끗해져야 한다’면서 한도 끝도 없는 완벽한 상태를 만들라는 것은 그냥 절망하란 말보다 더 가혹하다. 사람이 얼마나 깨끗해 야 정말 깨끗하단 말인가? 스스로 그걸 결정하고 맘 편히 있을 사람이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얼마나 선하고 착하고 열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분량에 맞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고 그리고 쉬운 말로 그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제자야.” 네가 금수저이든, 은수저이든, 아니면 힘든 흙수저이든 준비하란 말이다. 그릇은 깨끗함을 준비해야 그 속에 음식을 담는 것처럼, 우리 사람들은 자기에게 걸맞은 그 상황에 맞게 준비해야 한다. 등잔이라면 기름을 준비 하면 된다. 조금 흠집이 났어도, 때가 묻었어도 기름이 가득 차 있으면 훌 륭한 등잔이고 또 흔쾌히 쓸 수 있는 등불이 된다.
바울은, 또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잘 쓸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잘난 양반들은 펄펄 날아다니는 데 난 만날 기다리기만 해? 준비만 열나게 하고? 후보선수로 땀을 몇 섬 흘렸지만 결국 타석에 서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이 노릇을 얼마나 언제 까지 해야 하느냔 말이야?

때를 기다리는 자
흔히 낚시하는 분들을 ‘강태공’이라고 부르는데, 기실 그 이름은 중국 주(周)나라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여상’(呂尙)에게서 나온 것이다. 여상 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여상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의 조상이 여(呂)나라에 봉해져서 그 지역 이름을 따서 그리 부르면서다. 조금 혼돈스럽게 동일인을 다르게 부르게 된 이유는, 지금과 달리 ‘성’(姓)과 ‘씨’(氏)는 본래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姓)은 혈통에 의한 개념이고, 씨(氏)는 지역에 기반을 둔 결사적 개념이다. 그래서 성은 변하지 않아도, 씨는 임의로 바꾸기도 한다.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살면서 그 지명을 따서 씨로 삼기도 하고, 관직을 받으면 그것 을 따서 쓰기도 한다. 공자(孔子)의 이름이 구(丘)라는 것을 아는 분 중에 도, ‘공’(孔)이 성이 아니라 씨라는 것까지 아는 분은 드물다. 공자의 선조는 상(商)나라 황족 출신인데, 상 황족의 성이 ‘자’(子)이기에 그의 성(姓)은 ‘자’(子)이다. 그러니까 공자는 ‘자구’(子丘) 또는 ‘자자’(子子)라고 불렸을 것이다.
아무튼 여상은 성이 ‘강’이고 씨가 ‘여’이기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불렸지만 같은 인물이다. 이런 그를 부르는 가장 대표적 호칭이 앞서 말한 ‘강태공’(姜太公)인데, 성이 ‘강’이니 ‘태공’이 이름인 것 같지만, 미안하게도 태공은 이름이 아니라, ‘할아버지’라는 보통명사이다.
사연은 이렇다. 중국이 상(商) 또는 은(殷)이라 불리던 시절, 후일 문왕(文王)으로 추존되는 인물이 세력을 끌어모아 은나라를 전복시킬 생각을 했 는데, 문득 자신의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했던 예언 같은 말이 떠올랐다. “장차 성인이 우리나라에 오면 그의 힘으로 나라가 일어날 것이다.” 그 말을 기억한 문왕은 널리 인재를 찾으려 다녔는데, 어느 날 위수(渭水)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여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우리 태공께서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입니다.”(吾太公望子久矣)라고 말하며 기뻐했다. 그렇게 등용된 여상은 문왕과 그의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나라를 건국한다. 그 나라 이름이 역사에 유명한 주(周)나라이다.
이렇게 ‘태공’(太公)은 문왕의 할아버지 고공단보를 지칭한 말로, 일반적으로 할아버지 또는 연세 드신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 즉, ‘강태공’(姜太公)은 ‘바란다’[望]는 말을 넣어 ‘할아버지[ 太公]께서 기다리시던[望] 인물’이란 의미의 ‘태공망’(太公望)이라는 말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이름도 다양한 이 인물이 유명한 것은 그가 주나라의 창업 공신이란 것이나 전설적 병법서 『육도』(六韜)의 저자라는 것보다도, 위수에서 ‘세월을 낚는다’며 낚싯바늘 없는 낚시질을 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렇게 기다리던 끝에 문왕을 만났고 결국 자신의 경륜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일도 많았다. 아내도 욕을 하고 가버리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웅크리고 있던 잠룡(潛龍)이 날개를 한껏 펴고 날아오른 것이다.

은혜의 바람을 부는 자
좋다. 디모데처럼 준비했고 또 태공망 여상처럼 기다렸다. 주야장청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은?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깨끗하게 그릇도 닦고 잘 준비했고,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도 그 누구도 오지 않는다면 이건 어찌 된 노릇일까? 혹시 이미 왔는데, 와서 한참 머물다가 가버렸는데, 그걸 모른 건 아닐까? 이 불안한 마음을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성서에는 놀라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사 6:1)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을 본다. 그 환상 중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패역한 백성을 위해 일할 일꾼으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찾아오셨고, ‘준비’된 이사야는, ‘기다렸던’ 이사야는 자신을 보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신다.
“글쎄, 이사야는 선지자니까 환상을 봤고 그 환상 속에서 분명한 응답 이 있었고요. 우린 환상을 보지도 못하고, 기도 응답도 없다니까요.” 맞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누구를 보낼지 묻고, 자신이 가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 바로 앞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사 6:5–7)

그 유명한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는 무서운 장면’이다. 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무척이나 놀랐다. 시뻘건 숯불을 입에 대면 다 타버리는데, 아프겠다, 나라면 도망칠 거다 등. 물론 환상이니 꿈처럼 실제로 아프거나 지지직 소리를 내며 타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생생한 그 환상에 놀라서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사야는 그러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인 스랍이 제단의 숯불을 가져다가 입에 대는 것을 참았고(?), 그로 인해 ‘악이 제거되고 죄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본 대로 하나님이 드디어 물으신다. 누가 갈 것이냐고. 그리고 이사야가 담대하게 대답한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이 장면의 숨겨진 비밀이자 압권은 이사야의 처음 말이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을 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알았다. 자신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똑똑히 알았다. 자신이 예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代言)하는 존재인데, 대언하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천사가 제단의 숯불을 가져다 대며, 치유되었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한 것이고, 그런 치유에 화들짝 놀라지 않고 달아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사야는 알았다. 준비된 그는 잘 준비했지만 알았다. 자신의 존재 본질을 명확하고 똑똑하게 알았다. 우리는 부족한 자들이란 사실을, 우리는 죄인이란 사실을, 아무리 깨끗하게 준비하고 또 준비해도 문제투성이 의 인간이란 사실을 말이다.
종종 인생을 윈드서핑에 비유한다. “윈드서핑을 멋지게 하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서핑보드, 보드 위에 균형을 잡고 잘 탈 수 있는 기술, 그리고 서핑을 할 파도.
좋은 보드건, 흠집 난 보드건, 누구든 보드를 지니고 있다. 금 보드든, 흙 보드든 말이다. 맞다. 그건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 보드를 멋지게 탈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건 끝내주는 색깔의 기기묘묘한 보드를 지닌 사람이건, 낡고 색이 바랜 보드를 지닌 사람이건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배우고 익히는 것에 물린 어린 시절 알렉산더에게 “공부에는 왕도(King’s Highway)가 없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꼭 그렇다. 이 기술은 서핑보드의 멋들어짐과는 아무 상관없다. 알렉산더가 그렇고, 그런 왕자 나부랭이가 아니라 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금수저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땅히 지녀야 할 것들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노력했던 거다. 이렇게 서핑보드, 기술을 갖췄다면 마지막으로 서핑을 할 만한 높은 파도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 해변에 서서 보드를 들고 파도를 기다린다. 보드도 ‘준비’되 었고 기술도 연마해서 습득했다. 준비 완료다. 그리고 파도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도무지 내 해안엔 파도가 치질 않는다. 저쪽을 보니 누군가 기가 막히게 서핑을 하고 있는데, “쟤는 나보다 못나고 나보다 기술도 없는 애인데.” 하는 부러움과 질투의 마음이 생긴다. “대체 내 해변엔 왜 파도가 안 치는 거야?” 짜증을 부릴 수도 있고 버럭 화를 낼 수도 있다. 방법은 그냥 묵묵히 계속 기다리느냐, 아니면 보드를 들고 그쪽 해변으로 가느냐이다.
그런데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파도를 일으키려는 사람이다. 제힘으로, 제 손으로, 제 몸으로 파도를 일으키겠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실 세상에 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만들어낸다. 파도는 바람이 불어야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은혜의 바람은 하나님이 불어주셔야 한다.
이사야는 알았다. 하나님이 은혜의 바람을 불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연히 무작정 기다리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제 깜냥도 모르고 자꾸 파도를 일으키려 고 물보라를 팩팩 쳐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똑똑히 알았던 것이다. 만약 천사가 이사야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준비된 예언자 이사야는 좌절했을까? 왜 나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울분을 토했을까? 이토록 완벽하게 준비된, 그래서 다른 놈들보다 갑절이나 노력할 마음이 단단한 나를 왜 빼먹고 있느냐고 목 놓아 울부짖을까?
그럴 리 없다. 그에게 아무도 오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도 오지 않은 것 이 바로 자신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은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아닌 남이 이 세상을 잘 이끄는 것에 감사하고, 자 신이 나서서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됨에 안도하며, 은혜를 찬송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사야는 결코 자기 해변에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낙망할 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거다.
그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았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에 게 기회가 오든, 오지 않든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안단 말 이다. 그릇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어도 그다음은 그의 소관이 아니다. 그릇이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도 그것을 집어 쓰는 것은 주인의 마음이다. 그는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은혜의 바람을 불어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말이다.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2023년 4월호(통권 7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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