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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이번 겨울이 아주 추운 겨울은 아니었지만, 깊은 밤 사람들 눈을 피해 길고양이 밥을 주러 나가는 길은 충분히 추웠다. 혀끝으로 “쯧쯧” 소리를 내며 슬리퍼를 끌고 나가면 어디선지 한두 마리씩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삼색이도 오고, 새끼 바둑냥들, 노랑이도 온다.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나란히 앉아서 내 움직임이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밥그릇에 밥을 부어주고 물그릇에서 얼음을 떼어낸 후 따뜻한 물로 갈아준다. “많이 먹어.” 하고 이번에는 내가 멀찍이서 먹는 모 습을 지켜본다. 어디서들 추위를 견디고 지내는지, 기특하고 대견하다. 이어폰을 꽂은 중년의 남자가 어깨를 들썩인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다행이다. 뭐라 하지 않아서.
길 건너 빌라촌에서 발정 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물 한 모금 이 아쉬운 길 위의 삶인데, 무엇이 저렇게 간절하게 울어대게 만드는 것 일까? 저 작은 몸에 사는 것이 저 혼자라면 저렇게 울 수 있을까? 자동차 바퀴가 한 번 그 위로 지나가면 그대로 부서져 버리고, 여차하면 사람들 발길에 차여 숨조차 쉴 수 없는데, 내가 일주일만 밥을 안 주면 생사를 넘나들 텐데, 그런데도 저렇게 운다. 저 혼자는 저렇게 울 수 없다. 저 혼자라면 저렇게 살려고 발버둥칠 수 없고, 저 같은 삶을 또 만들어내려고 저렇게 울어댈 수 없다.
아그작아그작 고양이 밥 씹는 소리, 아응아응 고양이 울어대는 소리.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어느 중 이 노래했던가? 나는 떨어지는 오동잎의 고요함도, 굽이굽이 흐르는 작은 시내의 명랑함도 누리지 못한 채 대도시 변두리, 별도 없는 하늘 아래 헐벗은 고양이들과 함께 있다. 저 고단한 목숨들도 나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몸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리고 고통을 느끼는 몸은 그 고통을 감싸주는 누군가로 인해 따뜻해진다. 고통이 심해지면 사람은 사나워지거나 절망하지만, 저 길 위의 목숨들은 사나움도 절망도 모른다. 사람보다 훨씬 믿음이 깊은 존재들이다. 한 옴큼의 사료가 아쉬운 존재들이지만, 실은 한 옴큼의 사료보다 훨씬 더 큰 믿음에 몸을 실어 살아간다. 그래서 알 수 없는 힘에 겨워 저렇게 제 할 일을 하는 작은 목숨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겠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겨울나무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파리 하나 남지 않은 겨울나무, 알 수 없는 그분은 이 추운 계절에도 한결같이 많은 목숨을 보살피고 계시다.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느님이 입히신다고 했던가? 하느님은 왜 나약하고 덧없는 목숨들일수록 아름답게 만드셨을까? 말 못하는 짐승과 너무 정들이지 말라고들 하고, 또 짐승에게 쏟을 정력이 있으면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똑똑한 사람들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과 정을 나누고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인생에서 소중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불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길 위의 목숨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모르는 존재들, 우리의 꿈과 고독과 나약함을 함께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로부터 오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모르는 존재들과 나누는 사랑은 어쩌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 말로 우리 존재를 넓혀주고 살아있는 만물을 연결해주는 것이 아닐까?
2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에는 죽음 이후의 삶, 나를 넘어선 삶에 대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대개는 육체의 쇠락을 실감하면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곁에서 보면서 그런 질문을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은 삶의 어느 순간 우리를 일깨워 죽음 너머 무언가 있고, 내가 나 혼자가 아 니라는 강한 의식을 갖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 너머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고, 나를 넘어선 실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눈을 돌린 채 삶의 대부분을 허비한다. 순간적으로 자각할 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식은 흩어지고, 우리는 영의 목소리에 따라 살지 못 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가르침이 사실로 판명날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영이 가르쳐주는 바대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고대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우리보다 분명하게 표현했다. 하느님을 향한 욥의 항의는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주제를 잊을 정도인데,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면서 욥은 자연의 순환에 대비하여 인간 삶의 유한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무는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피어나 움이 거듭거듭 돋아납니다.
뿌리가 땅속에서 늙고 줄기가 흙 속에서 죽었다가도
물기만 맡으면 움이 다시 돋아 어린 나무처럼 가지를 뻗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아무리 대장부라도
죽으면 별수없고 숨만 지면 그만입니다.(욥 14:7–10, 공동번역)
욥은 죽음 이후의 삶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사람은 죽으면 차가운 땅속 저 밑 스올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은 산 자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후손의 몸 안에서 살아남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 성서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고 그에게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욥의 항의는 삶의 연대성, 생명의 하나 됨에 대한 이러한 자연적・집단적 인식을 넘어서 개인의 삶의 영속성에 대한 예민한 자각을 보여준다. 짧은 신체적인 삶을 넘어서 더 이상의 생명이 있을까? 죽음 너머 무엇이 있을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윤회를 믿는 초기 브라만교나 힌두교, 원시불교는 모두 사후에 인격이 해체된다고 가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개체는 허구이고, 현존하는 요소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으며, 죽음은 이 집합의 해체이다. 이러한 윤회사상은 자연생명의 순환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몸의 회복을 믿는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은 사후에 개체 인격이 존속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영혼불멸을 믿었던 그리스인들과 달리 히브리인들은 인간 안에 무슨 불멸의 요소가 있어서 사후에 인격이 존속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
포로 후기의 절망적인 사회정치적 상황, 의인은 고난을 받고 악인은 승승장구하는 상황 속에서 결국에는 선이, 의인이 승리하리라는 기대가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나중에 보응사상에 기반한 최후의 심판사상과 결부되어 보편적인 죽은 자의 부활사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의인들,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묻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을 이끌었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된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과 그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이 믿음은 구약성서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포로기 이후의 사회정치적 경험, 외국의 신화적 표상들의 수입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되었다. 초기 기독교가 발생한 1세기에 이 믿음은 비교적 널리 퍼져 있었지만, 당시로선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에세네파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믿음을 예수에게 적용했다. 예수는 부활하여 그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요 11:25) 이 되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그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 되셨고,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이 모든 이야기의 첫 시작이다.
3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지 며칠 후, 즉 30 년 봄 유월절 직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 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까지 올라왔지만, 예수가 붙잡혀 처형당한 후 뿔뿔이 흩어져 절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예수가 ‘살아 있다’는 불가사의한 체험을 한 것이다. 이 신비한 체험을 처 음 한 이는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 같다. 이후 이런 특이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연쇄적으로 나타났다. 바울은 얼마 지나 지 않아 ‘오백 명 이상의 형제들에게 동시에’ (고전 15:6) 이런 체험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 사건은 맨 처음 갈릴리에서 일어났고 (막 14:28, 16:7, 마 28:16–20, 요 21장), 예루살렘과 그 근방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마 28:9–10, 눅 24:13–53)
죽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 이 사건은 그 체험에 대한 고백적인 증언이 전해졌을 뿐,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체험과 그에 대한 소식으로 인해 예수와 그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중에 가장 일차적인 것이 ‘하느님이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켰다.’ (롬 10:9, 행 2:24)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부활’ 표상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체험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해석들은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주관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 체험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무력하고 비겁했던 남은 자들이 수치와 죄책감이라는 부정적인 심리상태로부터 벗어나 용기 있는 인간으로 다시 서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예루살렘에 집결했고, 누가 사도행전에 의하면 거기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예루살렘에 모인 것은 그곳이 이스라엘의 성지였고, 종말적 사건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테지만, 이와 동시에 예루살렘에 자신들을 데리고 올라오신 예수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현현 체험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해석이 나오게 되는 출발점이자, 남은 자들이 예수의 죽음의 충격을 내면적으로 해결하는 첫걸음이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와 그의 죽음의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타난다. 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개념이나 표상에 기대서 생겨난 것들이 많다. 가령 이사야 52–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을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를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든 지, ‘고난받는 메시아’로 이해하는 것 등이다. 아마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속죄’ 정식이 탄생했고, 또한 예수의 수난에 대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이야기(막 14–15장)가 성립했을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승들과 상대적으로 독립해서 형성된 전승들도 있었다. 가령 Q 전승 (마태와 누가에만 공통적으로 나 오는 예수의 어록전승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전승) 이 그런 경우인데, 여기에는 수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 (의 죄) 때문에”라는 이른바 ‘속죄’ 정식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부활’ (정확히는 ‘일으킴을 받는 것’) 표상도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이 전승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활동에 대한 예수의 좌절감이 깊어지고, “박해받는 예언자”라는 예수의 자기 이해가 드러난다.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자” (사람의 아들) 라고 부른다. 이러한 Q 문서의 영향은 예루살렘 교회로까지 확대되어 거기서도 지상 예수의 방랑전도 방식을 모방하고, 목숨을 걸고 그 뒤를 따르고, 그 비극적 인 예언자의 운명을 따른다는 에토스가 강렬하게 지배했다. 무엇보다도 Q 문서 전체를 보면 예수가, 마치 엘리야(왕하 2 : 9 이하)나 에녹(창 5 : 24 )과 같이, 죽음을 넘어 하늘로 올려지고 “오실 그분”으로서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당초 죽음을 넘어선 예수를 표상하는 방식이 한가지 형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든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Q 전승이든, 아니면 전 마가 전승이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적극적인 초월화 경향이다. 결국 예수의 신격화를 가속화하는 과정이 일어났을 것이고, 당연히 그것은 역사적 예수와는 일정한 거리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 원시교회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을 테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그런데 이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초월적 해석 가운데서 단연 정점에 해당 하는 것이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해석이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성육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 즉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이 유일한 방식으로 역사 속의 육을 입은 한 인간이 되셨다는 고백에 이르렀다. 빛이시고 생명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조촐하게 장막을 치고 거하신 다는 것이다. (요 1:14 )
다른 복음서들에서 예수의 선포 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하느님나라”라면, 요한복음서에서 거기 해당하는 말은 “(영원한) 생명”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 하느님의 통치의 시작에 ‘대해서’ 선포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생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생명”이다. “생명”은 요한복음서에서 구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이 말은 구원과 관련된 다른 모든 개념을 포괄하며, 종교적 의미에서 “거룩” 그 자체를 가리킨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바로 그 “거룩”, 생명 자체라는 것을 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복음 11 장에는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픔에 빠져 있고, 마리아와 위로하러 온 이웃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진 예수는 눈물을 흘린다. 예수는 슬퍼하고 있는 누이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11:25, 이하 사역) 마르다는 믿지 않았고, 예수는 믿지 않는 그녀를 향해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사로야, 이리 나 와라.” 하고 외친다.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인 채 나온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삶과 죽음을 넘어선 궁극적 생명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 자신이 만물을 살리는 영원한 생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외에도 이제 곧 십자가 위에서 영광받고 올리워질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는 장면에서도 동일한 계시가 이루어진다. 예수가 이제부터 잠시 떠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려달라고 예수에게 매달린다. 예수는 그런 제자들을 향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라고 말한다. 영원한 생명과 거기 이르는 길이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것 이다. 또한 빌립이 예수에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14:8)라고 말하자, 예수는 “빌립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4:9–10)라고 말한다.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투명하게 하나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인 예수에 대한 태도가, 즉 신앙이냐 불신앙이냐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 영원한 생명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그를 받아들이면 죽었어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삶과 죽음을 비롯하여 우리의 존재 자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이 성육을 통해 사람이 되었고, 그가 우리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바꾸어놓는다. 이 성육한 유일한 생명이 믿음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이 생명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졌고, 십자가의 길이 아니면 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서는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다. 이처럼 예수라는 구체적인 한 인간에게 집중하면서 동시에 그를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 “영원한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요한복음서의 신앙은 초대 기독교 안에서도 낯설게 느껴졌고, 지나치게 예수를 신격화한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이처럼 과격한 초월화 경향 때문에 실제로 요한복음서는 신약성서 정경 안에 들어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비교적 늦게 정경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단 정경에 포함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받게 되자 요한 신학은 주류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게 되었고, 삼위일체론이라든가 그리스도 양성론 같은 대표적인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증거본문이 되었다.
요한복음서가 제시하는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은 당연히 종교적 배타성을 내포하며, 그것은 확실히 부담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조심스럽다. 그러나 어떠한 경험이든 절실하고 직접 적인 경험은 구체적이며, 다른 것들과의 고유한 차이를 내포한다. 이 구 체성과 차이야말로 경험이 추상적 이념이나 비인간적 구호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런데 이 ‘차이’가 현실에서는 쉽게 배타성으로 전이될 수 있고, 그것은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다원주의적 설명으로 넘어가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다. 배타적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배타적이 되지 않기 위해 ‘차이’를 포기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경험의 성격 자체가 그렇게 다원주의적으로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 이다. 기독교의 배타성과 그로 인한 숱한 어리석음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 의 진실성을 회복하는 방식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서를 탄생시킨 기독교인들은 예수라는 우물에서 생명의 물을 마셨고, 그래서 오로지 예수만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겼다. 요한공동체의 이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경험이 그렇듯이 한계가 있지만, 진실은 언제나 구체적인 한 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따라서 예수 밖에 구원의 길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과 상관없이 요한공동체의 그리스도 체험은 그 한계와 함께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초월적인 신앙에 이르게 한 요한공동체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요한복음서는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요한공동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인해 유대 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유대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고 때로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는 점이 ( 9 : 22 , 16 : 2 )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되고 있다. 이외에 요한공동체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에 대한 저항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는 가설도 있지만, 유대 회당으로 부터의 박해에 대한 설명만큼 견고하게 본문을 통해 뒷받침되지 않는 것 같다. 요한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재판정에 서서 증언을 해야만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신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일종의 피해의식, 소종파적이고 이원론적인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 박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어떤 사건과 상황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요 한복음서의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언어는 세부적인 추측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극단적인 박해의 경험이 더욱 그리스도만을 붙들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오신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하나의 새로운 우주, 거처할 집처럼 여기고, 그 안에 거하면서 그 안에서만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5
기독교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인간의 삶은 살아 있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마르다 에게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성육을 통해 사람이 된 이 영원한 생명이 존재의 의미를 영구히 결정한다. 기독교인은 이 유일한 생명을 은혜로 받는다. 이 생명은 십자가 위에서 주어졌고, 십자가의 길 위가 아니 면 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나고 죽는 것을 넘어서는 보다 근원 적인, 무조건적인 생명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선물이자 은혜이며, 이 선물이 없으면 살아 있다는 것이 한낱 먼지와 같다. 이러한 인식이 기독교에 뿌리 깊이 깔려 있으며, 그것이 요한복음서의 성육신 신앙을 통 해 가장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이 신 하느님께로 가는 문턱이며, 거룩한 시간과 공간으로 가는 전격적인 입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聖) 이 속(俗)의 세계로 들어와 만나는 역설적인 장소이고, 거룩한 시간이 속의 시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입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턱(limen)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이 일원화된 문턱이 지니는 특이성은 무엇인가? 이 문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 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약한 자리, 그곳이 바로 영원으로 가는 입 구,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거룩으로 가는 문턱, 세계의 중심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변두리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서 있을 때, 덧없는 피조물로서 나의 존재를 자각할 때, 그때야말로 역설적으로 나는 우주의 중심에 다가가 있는 것이다. 영구적 이고 확실한 안전을 확보하여 삶을 나 자신이 관리할 수 있다고 느낄 때 가 아니라,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고 그가 허락했던 숨결을 거두어갈 때 “예.” 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자각할 때, 그때 나는 우주의 중심, 영원한 생명에 다가가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서 하느님은 가장 약한 ‘육’의 모습으로, 십자가 위의 모 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켰고, 그것이 신적 존재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삶은 그러한 사랑, 세상의 낮고 약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성별되고, 살아 있는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 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3:16) 물론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지칭한다든지,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라고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 구체적인 한 인간에게, 그것도 가장 낮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것은 유한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근원 적인 긍정을 나타낸다. 물질 자체가 신성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정신성의 입장으로, 다시 말해서 이 세상적인 것은 일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정신주의적 태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구체적인 낙원을 동경하고 그 낙원을 이 세상에서, 지상에서 지금 이 순간에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점에서 성육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물질이 발전해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임한다.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영원한 생명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연약한 육의 모습인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생명이 선사되었고,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계시의 중요성은 이러한 역설적인 중심을 실제로 체험하는 데서만 발견될 수 있다. 내게 전해진 진리와의 만남을 통해 나 스스로 다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우주의 중심,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문턱인 십자가에 이르는 거룩한 순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이 우주의 중심은 리호이나키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회의 “시궁창” 속에서 발견된다. 많은 사람이 위를 쳐다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즉 “물질세계의 눈부신 화려함, 밤하늘의 현란한 네온사인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진정한 중심은 저 멀리 아래에, 사람의 삶에 필수적인 나날의 천한 일을 하는 육체적인 경험 속에 있다. 중심은 어둡고 천한, 낮은 곳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빛을 초월하는 빛에 감촉될 수 있다.”(『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265) 그러므로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아주 친밀한, 육화된 행동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육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듯이, 피와 살로 된 존재인 나 역시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육화된 행동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그럴 때 성육의 진실이 실제로 구현되고, 그 사랑은 진실한 것이 된다.
박경미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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