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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냐고 물으면 차라리 웃을까
발달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대강 40대 후반 즈음이 되면 “난 왜 살지?”라고 고민한다고 한다. 이런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지나치는 인생의 과정’이라는 그들의 건조한 논평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인 김상용도 그랬는지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찾아온 것 같다.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 답답한 양반아, 왜 이렇게 살아?”라며 타박 섞인 힐문을 하니, 그에 대해 멋들어진 답을 한 것이 바로 이 시가 아닐까? 알아들을 생각이 없는 자에게 그윽한 삶의 깊이를 구구절절 말해봐야 입만 아프니 그저 웃는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 시는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이다. 한시의 상징성도 있고, 번역의 난감함도 있어 시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억지로 풀면 대충 이렇다.
그대는 왜 이런 깊은 산골에 사는가?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구나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복사꽃 뜬 물이 아득하게 흘러만 가니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가 이곳이로구나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이백의 시는 김상용의 시에서 보이는 전원적인 수준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나, “왜 사는가?”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지는 못한다. 그가 그린 고졸하고 탈속한 삶의 모습이 부러울 뿐,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 세상 어느 누가 인간 존재 본질의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는가. 이는 종교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당연히 성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인간이 왜 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한다.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이는 정답이다. 군말을 붙일 생각은 없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삽니다.”라고 씩씩하게 말하는 청년들이 기특하기는 하나, 솔직히 진심인지 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뭔지 알고나 그렇게 답하는지 궁금하다.
대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단 말인가? 하나님이 가진 영광이 얼마나 부족하길래 나 같은 한심한 작자가 돌릴 영광까지 받아 챙기시려고 한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라는 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살아온 결과가 하나님께 누가 돼 그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생각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몇몇 분을 빼면,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이런 이율배반이 생기는 걸까?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외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정답’이고, 그 정답에 하나님의 권위까지 얹혀 있으니 이를 부인하거나 반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줄줄 외운다. 보통 그렇듯이 외운 답에는 진심이 담기지 않는다. 그저 탁 치면 툭 나오는 기계적 프로세스일 뿐이다. 그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렇게 살아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죄책감을 느끼든지, 그런 죄책감이 싫어 무념무상하게 “아하, 그래….” 하며 귓등으로 흘려듣는 것에 익숙하도록 스스로를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은 부담덩어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교회에 가서 ‘교인’ 노릇을 하고, 밖에 나가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산다. 매가리(?) 없는 예수쟁이들이 도처에 즐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고 그 목적을 위해 우리 인생이 달려가야 한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참 갑갑하다. 정답은 알겠는데 납득은 안 되는 상황이랄까. 솔직히 이 정도라면 이백의 <산중문답>만도 못한 수준이다. 정말 이대로라면 그냥 ‘로봇’ 아닌가? 하나님의 노예 로봇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나를 노예로 삼으려고 창조하셨다고는 눈곱만치도 생각되지 않는다. 내 멋대로, 맘대로 사는 모습을 너그러운 웃음으로, 푸근한 미소로 바라보시려고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성서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말이다.
주객전도를 모르는 사람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범박하게 둘로 나눠보면, 하나님이 두려워서 한껏 주눅 들어 끌려다니는 사람들과 아예 하나님 말씀에는 귀를 닫고 무늬만 예수의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둘 다 옳지는 않다. 너무 단순하게 나눴다고 뭐라 할지 모르지만, 스스로 한번 물어보면 느낌이 올 거다. ‘예수를 믿어 정말 행복하십니까?’라고 말이다.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게 되어 너무너무 행복해.”라고 말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학교 선배인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큰 성결교회 장로이다. 그 형이 예수를 믿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라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다. 물론 다른 분들도 많겠고 표현을 못한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진심으로 환호한 교인은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다.
선배는 남모르는 선행을 몇십 년째 해오고 있고, 해외 선교사들 후원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나라와 민족, 이웃을 위해 기도하기를 잊지 않는다. 생활은 상당히 자유롭게 살지만 방종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물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라고 답하지만 목적이 이끄는 삶이 주는 피곤함에 찌든 것 같지도 않다. 꼭 짚어 표현하자면 성서가 말한 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신 5:32) 삶을 사는 듯하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내 생각을 정리하면, 선배는 분명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산다.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말장난처럼 느껴지실 분들은 다음 몇 가지를 한번 생각해보시라.
하나. “교통법규를 지키려고 운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말은 진실이다. 교통법규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법규가 없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당연히 법규는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법규를 지키려고 운전대를 잡고 도로에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단 말이다. 차를 타고 운전하는 이유는 ‘법규를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어디론가 가려는 본질적 이유’ 때문이다. 때론 그냥 운전을 통해 머리를 식히려는 생각으로 차를 몰기도 하지만, 결코 교통법규를 지키는 멋들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운전하지는 않는다. 그런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조금 이상한 사람이다. 운전할 때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단지 필요한 일일 뿐이다.
둘. “문법을 지키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꽤 많은 사람이 글쓰기에 두려움을 갖는데, 그 이유가 ‘띄어쓰기나 문법이 틀리면 어떡하지?’ 하며 전전긍긍하는 마음 때문이다. 글쓰기를 아는 내 입장에서 보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문법을 지키려고 쓰는 것이 아니다. 문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문법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문법은 지켜야 하지만, 그것은 글을 쓰고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일 뿐이다. 의사소통이 먼저이고 법칙은 나중인데도, 사람들은 법칙이 두려워 글을 쓰는 본질을 포기하거나 회피한다. 우선 글을 써야 한다. 틀린 문법은 나중에 고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고치면서 하나씩 배워 가면 그만이다. 정말이다. 나를 믿으시라.
셋. 맞다, 그래 바로 그거.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모습을 뽐내기 위해 차를 몰고 나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문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본질인 글쓰기를 망치는 사람들은 여럿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까지는 아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며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정한 규칙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고 규칙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 규칙을 지키려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참 이상해 보인다.
덧붙여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세상을 사는 이유가 나라에서 정한 법률을 지키려고 사는 것인지를 말이다. 법률을 우습게 알라는 것이 아님은 거듭 반복하는 말이다. 정말이지 우리가 국가 법률을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잘 살기 위해 법률이 필요한 것인지 한 번쯤 곰곰이 또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 사는 이유와 의미의 본질 말이다.
쯧쯧… 불행하지 않으려고만 하니 행복할 수 있나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면서 정작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살기 때문이다. ‘행복한 것’과 ‘불행하지 않은 것’은 동치 개념이 아니다. 같아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말이다. 비유하자면 행복하려면 ‘더해야’ 하지만 불행하지 않으려면 ‘빼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려는 것은 이런 식이다. ‘이러이러하면 괴로우니 하지 말아야 한다.’에서부터 ‘그런 일 때문에 불행해지니 그것을 없애자.’까지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꽉 지배하는 거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괴롭게 살 거다. 행복해지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지.”
“편식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어. 아프면 행복하지 않으니까.”
“위험한 일을 하면 안 된다. 다칠 수 있거든.”
이런 말 중에는 ‘긍정형’인 것도 있지만, 그 내면은 모두 다 ‘부정형’이다. 이러이러하니 하지 말라는 것이 온통 깔려 있다. 꼭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의 바탕엔 어떠어떠한 것이 두려우니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것을 하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행복할 수 없다. 세상엔 온갖 먼지가 있고, 아무리 드라이클리닝을 깔끔하게 해서 말쑥하게 차려입어도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 먼지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먼지를 매의 눈으로 잡아내서 몰살시키겠다는 그 놀라운 의지는 감탄스러우나 불가능에 도전하는 아둔한 짓이다.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이런 힘겨운 노력을 해서 얻을 결과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일 뿐이지 신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이다. 그저 그렇게 민숭민숭할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러저러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냥 중간이다. 그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피곤하고 우울하다. 억지 춘향 노릇을 하고 있으니 안 그렇겠나. 불행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쓴 결과가 그리 행복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기함할 노릇이다. 정말 알아야 한다. 불행하지 않은 것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사는 삶이다. 법규를 지키려고 움츠리고 두려워하는 삶이다. 이러이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착각이다. 조금도 행복감이 차오르지 않는다. 법규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강변할지 모르지만 틀렸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 그것이 대체 무슨 긍정적인 일을 했단 말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이는 때가 그런 때이다. 틀에 박혀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죽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무척 좋아하실 거란 착각에 빠져 미친 듯이 달려갈 때 말이다. 일탈하란 말이 아니다. 일탈보다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가 낫기는 하지만 그 경주마가 행복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 가린 경주마로 만드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전사 로봇으로 만드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고, 그것으로 무척 행복해하셨단다.(엡 1:5)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전도하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은 없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우니 그것을 전할 뿐이고, 부모님의 큰 사랑에 부응할 뿐이다. 그런 행동, 그런 부응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고, 부모님의 사랑을 다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리고 부모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인자한 눈길로 바라봐주신다. 성원해주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미치도록 열심히 해서 도식에 맞추어 꼭 맞게 갚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그분들을 흐뭇하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불행하지 않은 것은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고, 행복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열정을 쏟으며 나아가는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행복한 삶은 그 성취감에 흠뻑 젖는 것이다. 행복은 그런 능동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정말이다. 훗날 하나님을 뵈면 꼭 물어보시라. 누구 말이 맞는지 말이다.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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