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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시의 입술로 말하는 성서 13
성서情談 (2017년 3월호)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으랴
  

본문

 

친구와 나누는 마지막 밥상

하늘에 떠가는 구름들과 같이 바람은 자유롭지
꽃잎 위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때 묻음 없이
타오르는 태양 은은히 비추는 달빛과 같이
저마다 소중히 태어난 우리
우리는 모두가 고귀한 존재
자유롭게 자유롭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그저 바라봐
쉽게 단정 지은 일들 나와 너를 구속하고
쉽게 규정 지은 일들 나와 너를 얽매이고
쉽게 인정했던 일들 나와 너를 부딪치고
서로가 아끼며 보듬을 우리 따뜻한 눈으로 마주할 우리
사랑으로 자유롭게
- 김광석 노래, <자유롭게>


자유로운 영혼들, 고귀한 존재들이 마주 앉아, 한 상에 둘러앉아 밥상을 나누는 풍경.(막 14:12-26) 서로가 아끼며 보듬는 수많은 평화의 식탁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최후의 자유, 비장한 사랑을 나누는 풍경.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떨어진 폭탄들에서 살아남은 그림. 그런 식탁이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는 순간이다.
이 식탁을 끝으로 죽게 되리라 예견한 것은 예수였다. 그것은 정세 분석이 아니라 예수가 스스로 결심하고 각오한 미래였기 때문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날의 만찬상이나 다를 바 없었을 식탁 풍경. 그런데 예수의 식사 초대 인사말이 전날과는 많이 달랐다. 술과 떡(빵)을 높이 들고 자신이 흘릴 피와 찢길 살을 이야기한다. 공동체는 순간 당황하여 무슨 소리인가 눈이 와륵 떠졌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 15:15, 이하 새번역) 친구 예수는 여기에서 신이 아니라 사람이요, 이웃이다. 신격화에 안달한 나머지 처녀 잉태, 동정녀 운운은 여성 전체에 대한 무례이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상식에도 한참 모자란 구시대 신화적 유물 교리이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준 나눔 정신과 십자가의 희생은 그야말로 지극한 사랑과 정의를 향한 불굴의 행동의 결과이지 결코 죄사함, 속죄론, 죄 탕감 산업이 된 일개 종교의 탄생과 결부지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로운 바람이었던 예수는 친구들과 마지막 밥상을 마주하고 있다. 예수는 이에 만족하고 함께하는 즐거움에만 젖지 않았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집착하는 이는 많지만, 목표를 바라보고 걸어가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예수는 목표가 분명했다. 그것은 조여오는 와해 공작과 회유, 식민 지배자 로마와 성전체제의 위압과 탄압. 갈릴래아 사람의 아들이 나아가야 할 순교자적인 강직한 자세. 마치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궁을 둘러싼 쿠데타군 앞에서 남긴 방송의 마지막 멘트와도 같은 말을 예수 또한 들려주었을 것이다.

전투기가 상공을 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총격을 퍼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알게 합시다, 여기 우리가 있음을….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저들이 우리를 끝장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인민의 것, 노동자의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학살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를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존엄하고 더 나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 노래와 흥겨움, 열정으로 투쟁을 지원했던 청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해주십시오.(『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中에서)

쉽게 살지 않았다. 예수는 인생을 결코 쉽게 대하지 않았다. 이제 막 퍼온 밥처럼 뜨거웠던 친구 예수. 든든히 먹고 창공으로 날아간 새처럼 자유로웠던 친구 예수.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예수는 불평등과 맞서고 사회적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예수의 만찬은 불평등에 맞서는 가장 소소하고 가장 강력한 투쟁이었다. 끝까지 그는 밥상공동체를 고수했다. 그 기념을 오늘 우리가 성찬식, 성체 성사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십자나무에게 가는 길

마음 어지럽고 아플 때 / 나무에게 찾아갔다
신발을 사러 나온 사람처럼 / 서투른 발걸음으로
유배지에서 절룩대는 사내
이른 봄 진달래를 반기듯 / 나무를 버럭 끌어안으면 / 기우뚱란 어깨 위
잎사귀 몇 개 저물어도 / 발은 푸르게 푸르게 / 젖어가고만 그랬다

옆구리가 시릴 때 / 아무도 곁에 없을 때 / 나무에게 찾아갔다
팔짱을 끼고 곁에 섰으면 / 붉고 처연한 저녁에도 / 하나 외로웁지 않았다
든든한 가슴인 우듬지 / 갸웃갸웃 이방인을 / 훔쳐보는 새의 둥지엔
가지런히 서너 개의 / 알이 잠들어 있었고 / 한동안 별도 뜨지 않던 밤하늘
은하수 여울목 소리와 / 따뜻한 별빛을 비추어가며
하늘도 땅도 모두가 / 갸륵한 보살핌이었다

나무는 그림자를 펼쳐 / 내가 가야 할 길을 / 가리키고는 하였다
내 길은 결국 숲으로 난 길이었고 / 저 멀리 푸른 묘지가
손짓하고는 그랬다
- 임의진, <나무에게 가는 길>


길 표지판(way signs)은 영광의 왕 황제의 즉위식이 아닌 참혹한 실패자 메시아의 즉위식, 죽음의 언덕 골고타를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푸른 묘지가 보이누나. 죽음의 날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나이 예수는 그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체포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역시 성전정화라 불리는 갈릴리 순례자들의 폭동, 폭거. 장사꾼들을 내쫓고 성전에 그릇을 옮기는 것을 금지한 예수 일당들. 게다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전 파괴를 공공연하게 발설하는 것도 당국의 미움을 사게 만들었다. 예수는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소리쳤다.(요 11:17) 강도란 환전장이들, 성전에 가게를 둔 장사꾼들을 가리킨다. 주민들을 향하여 날강도라니 누가 예수를 달가워하겠는가. 예수는 고립과 죽음을 각오하고 성전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전 폭동의 대명사였던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잡아넣는 것은 행여 메시아를 바라던 민중의 보복 폭동이 있을까 염려한 당국의 술수이자 회유였다. 혁명가 바라바는 이미 따르던 게릴라 병력을 모두 잃은 상태였고, 어떤 견해에 의하면 전향한 듯도 보인다. 아니라면 폭동의 수괴에게 자유를 건네는 관용이란 로마 총독부로서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체포에는 제자단 가운데 가리옷 사람 유다의 공이 컸다. 그를 매수한 덕분에 수월하게 예수 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었다. 주거가 불특정한 데다가 대체로 비슷한 누더기를 걸치고 더부룩한 수염을 늘어뜨린 라삐 수행단에서 유랑 설교자, 예언자를 꼬집어 찾아내기란 정보력이 풍부한 비밀경찰로서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다는 왜 주님으로 모셨던 예수와 등을 졌을까? 심복 중 한 사람이던 그는 왜 이런 선택을 꼭 해야만 했을까? 물밑 거래의 액수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돈이 탐나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은화에 대한 언급이 꼭 배신의 동기를 밝힘은 아니었다. 물론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막 6:8-9)라는 예수의 말로 비추어보아 급진주의 나눔을 실천하는 궁색한 살림의 공동체였다는 것도 기억해두어야 할 일이겠지만.
문제는 바로 실망이었을 것이리라. 유다는 왜 예수에게 실망했을까? 서로들 스승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복음서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인정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예수는 떼어놓고 열외시켰다. 베드로를 비롯해 각별하게 몇몇을 챙겼다고만 읽지 말기 바란다. 모두를 위해 떼어놓는 시간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마음이 어지러운 공동체. 초자연적 기적행위 치유기도로도 소용없는 게 있나 보다. 마음의 병. 시기 질투쟁이에겐 뾰족 수가 없다. 오죽하면 예수가열두 제자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했겠는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
배은망덕, 배신, 뒤통수 치기를 실행에 옮기는 이들을 보면 불구덩이에 제 발로 들어가는 형국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연이 다한 것엔 분명히 브레이크가 오작동을 일으킨다. 누가 나서서 멈추게 해보려 해도 쉬이 가닥 잡힐 문제가 아니다. 관계가 한번 어긋나려고 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리고 일단 한 번 버성긴 관계는 되돌리기 쉽지 않다.
예수는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가는 이론가, 개인 능력이 탁월하고 출중한 지식층들보다는 굼뜨지만 성실한 행동가 활동가들, 이를테면 농부나 어부, 노동자 출신들과 어울리길 즐겼다. 출신 계급과 성분에 따라, 평소 냉소하고 경멸하고 하대하던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적지 않은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수년간의 순례여행에서 오해와 다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예수 일행과 유다는 이제 갈라서게 되었고, 유다는 분을 삭이지 못해 공동체를 파괴하기로 작정한다. 유다는 예수를 체포하기로 마음먹은 당국과 접촉을 시도했고, 마침내 모월 모일로 거사를 진척시켰다. 이 체포 그룹의 지도자로 유다가 지명되었고, 유다는 이제 예수의 제자가 아닌 당국의 앞잡이로, 그리고 비밀경찰의 수괴로 예수 앞에 나타나기에 이른다.
입맞춤의 사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덤벼드는 경찰들. 긴급 체포된 예수.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혼비백산 죽기 살기로 탈출하였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사람들, 에팡겔리아(epaggelia) 약속의 공동체. 죽음까지 함께하자던 그 약속은 이쯤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막 14:50) 나도 당신도 이 자리를 일단 피하고 보자였다. 예수는 철저히 홀로 버림받고, 아무런 희망조차 없는 빈 하늘을 쳐다보아야 했다. 별이 사라진 뒤 그믐달이 뜬 날, 예수는 멀리 언덕 위의 십자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앞서 죽어간 열사들. 죽음을 향한 수난과 고통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인간이 신과 만나는 유일한 현장은 ‘고통’뿐이라던가. 쓰디쓴 배신과 더불어 잔인무도한 고문, 심문의 고통이 예수를 엄습해왔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으랴. 그러나 예수는 도리질을 치며 이를 윽 물었다. 진실한 사랑의 마음,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자 두려움은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그래서 ‘약속’은 엄정한 것이고, 약속조차 이렇게 깨지기도 하는 법이고, 다만 무상한 노릇이 아닌가. 진실한 사랑, 진실한 마음, 아름다웠던 기억만이 소중하여라.


부활 예수, 찢기고 구멍 난 손

안간힘으로 어머니를 주었다 논 흔적이다

생일을 맞을 때마다 손금을 본다 놋그릇 냄새가 난다 가뭄 든 저수지 바닥 같다

어머니의 손이 유독 갈라졌던 때가 있었다 검은 금이 가고 더 많은 상처가 생겼다
잔금이 많아졌다 모를 찔 때였다

밤새워 아버지의 옷을 다렸던 어머니는 보리쌀 삶아두고 무논에 갔다
고춧잎 무쳐 아침을 차렸다 무릎박자를 맞추며 아버지는 사장으로 가고
젖먹이 동생 업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갔다


벼랑에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움켜준다면 이런 자국이 생길 것이다
- 이대흠, <손금>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눅 24:36-40, 공동번역)

나사렛 마을 목수 노동자의 손. 오랜 유랑, 순례자의 거칠고 때 묻은 손. 쇠못 자국이 아니더라도 찢기고 구멍 난 손이었다. 부활 이야기는, 뜬금없지도 난데없지도 않은, 마치 죽은 일조차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고 말쑥하다. 누구는 육신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으며 믿고, 학자들 중에는 몸의 부활이 아닌 뜻의 부활, 민중의 자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야기는 이야기, 진실은 진실, 어느 것 하나 내 가슴에 와 닿을 때 소중하지 않음이란 없다.
“모든 것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다.”(Alles Kommt Immer Wieder…) 세계대전 당시 군의관 출신인 고트프리트 벤의 시를 읽는 것처럼, “수술대 위에 올려진 죽은 처녀의 벌거숭이 시체여. 나는 벌거숭이 그 처녀의 자궁 속에 빨간 꽃 한 송이를 심어주었다.”
콩을 기를 때 적당히 순을 따지 않으면 잎사귀만 무성해진다. 하나님은 때로 젊은 순을 따고 자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열매가 많이 열리게 되는 법이니까. 아쉬운 잎사귀 목숨. 그러나 마중물이 큰물을 데불고 오는 것처럼, 이 빨간 꽃 한 송이를 심으면 온 세상이 꽃밭으로 물들게 되고 말리라.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내 손과 발을 보라고 말한 텍스트는 비단 부활 이야기에서만이 아니다. 아마도 예수가 자주 꺼내든 이야기였을 것이다. 저 사람 손과 발을 봐라! 이 사람 손과 발을 봐라!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발을 보라시는 말씀.

시인은 어머니의 손금을 보고 “벼랑에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움켜준다면 이런 자국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들 예수의 손을 보고, 갈라진 손금을 보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으랴. 도처에 예수가 부활하여 계시다. 봄꽃이 환장, 환장하게 피어나듯이. 깨어 있는 인간이여 만세, 깨어 있는 노동자여 만세! 다시 살아 돌아오는 이들의 봄보로봄봄. 밥솥 안에 쌀을 익히는 불기처럼 뜨거운 봄보로봄봄. 인간 존재의 고통, 흉터, 어쩌면 생의 매듭인 손금. 적대를 환대로 되돌리는 물줄기는 그가 내민 상처투성이 손금이었다. 거칠고 상처 깊은 손. 착란을 깨고 일어나는 힘찬 용기의 두 손. 예수의 손과 발을 만져본 이들은 대번 예수의 부활을 외치고 다녔다. 결코 죽일 수 없는 이 세계의 참 주인, 쓰러지지 않는 진실과 정의의 발걸음.
“부엌 구석에 앉아 생선 대가리 뜯으시고 찬 밥 덩어리만 드시던 누렁소 / 평생 새벽기도 다니시는 쉴 줄 모르며 절룩거리는 골다공 관절염 / 화장실 물컵에 들어있는 늙은 분홍빛 경전 빛 바랜 어머니.”(김응교, <틀니>)
이처럼 우리 곁에는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놓은 수많은 예수가 무덤을 뚫고 일어나 엄연히 살아 계시다. 빛은 무덤 속에서 나온다. 그 빛에 둘러싸여야 이 대지가 환하고 생명력 넘치는 공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눈 말똥말똥 굴리며 살아 있는(내는) 것의 큰 밑천이야말로 예수의 부활이 아니겠는가.

* “시의 입술로 말하는 성서”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연재해주신 임의진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임의진 | 시인이며 수필가, 목사이다. 「경향신문」 칼럼니스트로 “시골 편지”를 장기 연재 중이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5·18기념교회에서 성서연구를 인도하고 있다. 저서로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예수 동화』가 있다

 
 
 

2023년 4월호(통권 7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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