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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읽기 12
성서情談 (2017년 2월호)

 

  포스트던한 시대의 불량아들
  

본문

 

늙고 병든 아버지와 막 나가는 아들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전에는 웬만한 택시와 버스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구절과 함께 한 아리따운(?) 여성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아마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나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구절보다 그림 속 인물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나중에야 그가 성서 속 인물 ‘사무엘’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였던 거다.
아무튼 그렇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유명한(?) 인물인 사무엘에 대해서는 교회학교 때부터 숱하게 들어왔다. 어머니 한나가 기도해서 낳은 자식이란 것으로 시작해서 사울과 다윗을 기름 부어 세웠다는 것까지 1년에 한두 번은 설교 말씀으로 들은 것 같다. 그때마다 그와 상반되게 등장한 인물이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을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키우다시피 한 인물이지만, 사무엘이 유명한 만큼 그는 어리석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매사를 삐딱하게 보는 나였지만 한 번도 마음속에서 엘리 편을 든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엘리의 심정이 덜컥 이해되었다. 하나님이 뱃속에서부터 콕 찍어서 잘나게 태어나게 한 제자 사무엘과 자신의 두 아들이 너무나도 비교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면서였다. 무척이나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라는 공감에 그의 신세가 딱하고 안쓰럽게 여겨졌다. 하나님도 야속하시지, 어쩌자고 그 잘난 사무엘과 그 못난 아들 사이에 끼게 하셨단 말인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문제가 많았다. 제사장 직분은 본래 세습되는 것이니 그들도 제사장이 되었지만(삼상 1:3), 하는 짓은 보통 사람들도 하지 않을 짓을 서슴없이 해댔다.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사사로이 동침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법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이득을 챙겼다.(삼상 2:12-22) 제사장이란 권력을 빙자하여 전횡을 부리며 안하무인의 행동을 했던 거다. 엘리는 98세의 노령인 데다 눈까지 어두워 앞을 볼 수 없으니(삼상 4:18) 제사장 업무는 물론 일상생활도 쉽지 않았다. 이런 엘리가 애타는 마음으로 두 아들을 불러다가 간곡히 타일렀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삼상 2:23-25)

요즘은 젊은 애들은 물론 어린 초등학생들도 아버지의 말을 쉽게 무시한다. 제 생각이 옳다고 우기지는 않아도, “왜 그러면 안 되는데요?”, “제가 틀린 게 뭔데요?”라고 되받아치기 일쑤다. 그냥 이러이러하니 이러지 말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든지, 아니면 머리로 납득이 되든지, 둘 중 하나 정도는 돼야 비로소 “그럼, 해볼까.” 정도로 타협한다. 물론 홱 돌아서면 그마저도 던져 버리지만.
이렇게 된 원인이 여럿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포스트모던한 사회이므로 ‘확정적이고 분명한 가치’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졌기 때문일 거다. 해체주의적 사고방식과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에 ‘꼭’, ‘반드시’ 같은 가치나 외침은 아집과 독선으로 비쳐지기 쉽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여기에 ‘꼭,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의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은 것을 몇 번 경험적으로 체험한 이들까지 말을 보태며 반박해오면,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은 머쓱해진다. 공연히 말했단 자책감도 생긴다. 그리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으리라.’, ‘이 꼴이 뭐란 말인가.’, ‘세상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알게 뭐란 말인가.’, ‘이게 뭐 내 일인가.’ 하는 마음으로 몸을 웅크린다.
‘사실 인생에 무슨 답이 있고, 사는 방식에 어떤 한 가지 길이 있겠는가. 그런데 뭐가 잘 났다고 괜히 내가….’
그래 그런지 주변을 돌아보면 어디에도 ‘꼭, 반드시, 이러이러하세요.’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간혹 만나는 조금 이상한 종교에 물든 사람들 빼고 말이다.
아무튼 포스트모던한 시대가 오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하는 그 옛날 엘리 제사장 시절이니 두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의 간곡한 타이름을 무시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버지는 늙었고 앞도 못 보는 데다, 자신들이 아니면 이스라엘의 제례가 돌아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이스라엘 전체 제례와 의식을 수중에 넣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게다가 이들은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니었다.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나이를 감안하면 아무리 늦게 낳았다고 해도 둘 다 40은 넘었을 테니, 남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리 없다.
공자(孔子)는 “40세에 불혹(不惑)했다.”라고 말했는데, 그 의미는 “나이 40이 되자 어떤 유혹이나 사설에도 흔들리거나 혼미하지 않고 소신이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이 말을 따서 동양에서 40세를 ‘불혹’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대충 나이 마흔이 되면 웬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좋게 말해 소신을 지닌다는 것이겠지만 반대 측면에서 보면 ‘똥고집’이 세진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뚱딴지같은 소리가 아니다. 주변의 상사들을 살펴보시라. 그 양반들이 애초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주장이 완전히 어긋난 것도 아니다. 다만 고집이 조금, 어떤 때는 고래 심줄만큼 셀 뿐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말이야.”
“어허, 그게 아니라니까. 뭘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해.”
그동안 쌓은 삶의 경험과 궤적이 일정한 틀 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나이가 대충 마흔 전후인 거다.
이러니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 엘리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전횡을 부린다. 딱하게도 엘리는 늙어서 힘도 없고 앞도 못 보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말로 타이르는 것뿐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한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엘리에게 극단적인 말을 퍼붓는다. 하나님이 네 집과 영원히 계신다고 했는데 이젠 아니다, 끝났다는 말로 시작해서 멸시하고 경멸하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다 복을 받아도 너는 환란을 볼 거고, 네 후손들이 싹 다 젊어서 죽을 거라 말한 끝에 청천벽력 같은 선포를 한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삼상 2:34)

참, 하나님도 너무하신 게, 이런 악담이 자식들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똘똘하고 명민한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은 ‘영원히 심판하겠다’는 경고로 시작해서 다음과 같이 끝난다.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삼상 3:14)

이쯤 되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용서받을 어떤 방법도 없다는 단죄의 선언에 엘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결국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흘러간다.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싸움에 법궤를 가지고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삼상 4:11),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만다.(삼상 4:18)
“자식이 어디 맘대로 되나.”
“때려서 말 들을 것 같으면, 매일같이 때리지… 쉽지 않아….”
맞는 말씀이다. 정말 자식이 내 맘 같지 않다. 나무라고 혼내고 닦달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자식 잘못으로 아버지까지 징치를 당하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저주의 온상이 되다니…. 하나님이 너무 매몰차단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절로 나올 듯하다.
“지긋지긋하게 말 안 듣는 자식을 주시고서…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쉽지 않은 이 상황에서, 잠시 한발 빗겨 서서 우리 옛날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으로 숨을 돌리기로 하자. 혹시 우리가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이야기에는 엘리 제사장과 판박이 같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고뇌와 탄식의 아버지 코스프레
우리 옛 소설 중에 『삼설기』라는 단편소설집이 있는데, 거기에 <황주목사계자기>(黃州牧使戒子記)라는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제목을 풀면 ‘황주의 목사가 아들을 가르친 이야기’ 정도가 될 거다.
윤수현이란 사람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째는 재주가 뛰어나 공부는 잘했지만 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고, 둘째는 약삭빨라 요령이 넘쳤고, 셋째는 성격이 매사가 설렁설렁했다.
아버지 윤 공이 황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아들들을 데리고 갔다. 공부를 시킬 요량이었지만, 세상 모든 아버지의 바람과 어긋나는 것이 아들들의 행태인지, 이놈들은 하라는 공부는 않고 기생들과 놀러 다니며 황주 고을을 마치 제가 다스리는 것처럼 아전들까지 멋대로 부리며 법석을 피웠다. 고을이 쑥대밭이 될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타일러도 앞에서만 듣는 척할 뿐, 돌아서서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결국 윤 공은 포기하고 말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황주목사의 임기가 끝나 돌아갈 때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 아들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맘대로 전횡을 부리다가 하루아침에 끝내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세 놈 모두 제 처소로 돌아가 그동안 붙어 지내던 기생들과 작별을 했다. 첫째 아들은 이별이 서러워 우는 기생에게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질렀다.
“이년, 썩 그치지 못하겠느냐!”
그러고는 종을 불러 그동안 사귀던 기생을 쫓아버리고는, 벌렁 드러누워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을 자 버렸다.
둘째 아들은 달랐다. 그는 슬퍼하는 기생을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서울 가서 과거에 급제하면 이 고을 암행어사로 올게. 그때까지 정절을 지키고 있어. 알았지?”
셋째 아들은 기생과 서로 부둥켜안고 서러워했다. 차라리 같이 죽자는 말까지 하며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닭이 울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울지 마. 우리 도망치자. 너는 장터에서 빈대떡 장사, 술장사하고, 나는 아전들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며 지내면 밥은 먹고살지 않겠니? 우리 그렇게 살자.”
이렇게 세 아들이 기생과 이별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본 아버지 윤 공이 방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자식들의 미래를 예측해서 말했다.
“첫째 놈은 성품이 악하고 괴팍해서 제 자신은 물론 남들도 해치겠소. 오랫동안 정을 붙이던 기생에게 저리도 매몰차다니…. 평생이 고약하고 편안치 못할 거요.”
둘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놈은 속마음과 달리 거짓말을 하며 기생을 어르더군. 간사하고 못난 놈이오. 앞으로 사람을 후려 속이고 재물을 불려 그럭저럭 벼슬은 하겠지만, 크게 될 놈은 아니오.”
이러던 아버지 윤 공이 셋째에 대해서만은 칭찬을 했다.
“셋째는 천성이 어질어서 진실하게 말하더군. 기생을 진정으로 대하는 것이나, 양반이면서도 아전들 밑에서 심부름하면서라도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을 보니 잘 알겠소. 셋째는 훗날 분명히 큰 벼슬에 오를 것이오.”
아버지가 내다본 대로 세 아들의 미래가 그렇게 펼쳐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씁쓸한 뒷맛이 남는데 그건 아버지 윤 공 때문이다. 아버지 윤 공은 아들들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판단할 정도로 날카로운 지성과 심미안을 지닌 자였는데도, 아들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윤 공은 아들들을 불러 훈계를 하기는 했다.

“너희 놈들이 서울에서 무어라 했느냐? 아비 말대로 이곳에 내려와서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대체 이 무슨 짓들이냐?”
하지만 아들들은 이렇게 뻔뻔스럽게 대꾸한다.
“이왕 잘못된 걸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말씀 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잘 할게요.”
그러고는 모두 코웃음을 치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황주목사계자기>


사실 이쯤이면 손을 떠난 거다. 어떤 방법도 없는 거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걸까? 애초부터 이들은 천하의 잡놈(?)이었을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인간 말종(?)이었을까?
이야기를 꼼꼼히 잘 살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망나니 아들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아버지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버지 윤 공이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분명하고 엄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꾸짖지 못했던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희들은 한사코 하고자 하는데 내가 굳이 말리다가 귀한 자식들 병나면 어떡하지. 차라리 약간 타이르고 내버려 두는 것이 낫겠다.’-<황주목사계자기>

이것이 윤 공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망나니짓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린 거다. 그러며 ‘아이고 우리 귀한 아들을 어쩌나.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며 곱게곱게 키웠는데, 저렇게 하겠다니 믿어야지.’ 하며 탄식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엄하게 꾸짖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꼭”,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거다.
혹시 윤 공이 워낙 출중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분이시다 보니, 먼 미래에 다가올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예견하고 미리 포스트모던하게 키우신 것은 아닐까? 미안하다. 농담이다.
소설 제목이 말이 좋아, ‘황주목사가 아들을 훈계하고 가르친 이야기’이지, 실제로 아버지가 훈계한 거라곤 하나도 없다. 그저 방관하고 탄식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그게 전부이다. 아들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면, 그들을 더 엄하게 진정으로 타일렀어야 했다.
물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맞다. 그렇다. 아무리 타일러도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윤 공의 방임은 제 자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의 무책임은 자신이 황주목사로서 마땅히 다스려야 할 고을이 결딴나고 있는데도 그대로 방치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직무유기였다.
그래 좋다. 당신 자식은 당신 맘대로 하시라. 하지만 왜 당신 자식들 때문에 황주 고을이 쑥대밭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자식들을 붙잡아다 볼기를 치고 감옥에 넣었어야 했다. 피눈물이 나겠지만 그것이 자식을 위하는 일이고 또 그것이 자신이 맡은바 임무인 ‘목사’로서의 직무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식들의 미래가 마치 그들의 품성과 소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듯이 설레발을 치고 있다. 자신의 심각한 잘못은 모른 채, 자기는 충분히 할 바를 했다는 듯이,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는 자세로 발뺌을 하고 있다. 모든 잘못이 ‘그렇게 행동한 자식 놈들에게 있다.’며 고뇌에 찬 표정의 아버지 코스프레나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찜찜하고 개운치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불량 아들? 불량아들?
이제 다시 엘리를 살펴보자. 황주목사 윤 공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다는 것에 깜짝 놀랄 지경이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실제 제사장이었고 윤 공의 자식들은 아버지 위세를 등에 업고 패악을 부리는 호가호위(狐假虎威)를 했다는 것이 다를 뿐, 모든 것이 베낀 것처럼 꼭 같다.
엘리는 성전의 여인들과 간통하고 하나님의 제사에 사용되는 재물을 마음대로 빼먹는 아들들을 불러 간곡히 타이른 것 같다. 성서가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주지 않으니, 윤 공의 막돼먹은 세 아들처럼 뻔뻔스럽게 “이왕 잘못된 걸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말씀 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잘 할 테니.”라며 코웃음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성서는 그런 설명 대신 더 명확한 지적을 하고 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삼상 2:29)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삼상 3:13-14)

앞의 것은 엘리에게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한 말이고, 뒤의 것은 제자 사무엘을 통해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네가 네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네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기를 자청하고 있다.’, ‘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죄악 때문에 망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들었다. 하지만 엘리는 바뀌지 않았다.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윤 공과 같은 마음이다. 자식 사랑이란 거짓 애정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코스프레,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엘리는 마치 하나님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듯이 행동한다. 선지자를 통한 첫 번째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음을 알고는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셨는지 말하라고 다그친다. 참혹한 말이기에 감히 스승에게 말할 수 없어 주저하는 사무엘에게 엘리는 이렇게 독촉한다.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3:17)

엘리는 과연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자식은 바뀔 수 없으니, 아니 자식은 바꿀 수 없으니, 하나님 보고 ‘마음 푸시고 좀 바꾸시죠.’ 하고 싶었던 걸까? 사랑으로 용서할 테니 걱정 말라는 달콤한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두 망나니 자식의 행패는 누가 봐도 분명히 패악이고 방종이었지만, 엘리는 그걸 그렇게 보지 않았다. 육신의 눈만 먼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까맣게 먼 거였다.
여전히 엘리를 편들고 싶은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늙고 병든 아버지, 98살의 노인이 힘세고 기세등등한 자식들을 어떻게 당한단 말인가?”, “어릴 때 못 잡은 것을 다 큰 애들 어떻게 바로 잡는단 말인가?”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패는 황주목사 윤 공의 세 아들놈의 패악 짓보다 더 심각했고, 엘리는 윤 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개 고을의 원님보다 제사장이 훨씬 더 무거운 직이고,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도 더 넓고, 그 결정과 판단의 결과도 훨씬 본질적이며 근본적이다.
게다가 엘리는 단순히 제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놀랍게도 사사(士師)였다. 성서는 엘리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설명 이후에 다음과 같이 무섭고도 떨리는 언급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삼상 4:18)

그는 자그마치 40년 동안 사사였다. 여기서 사사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사사다. 기드온, 삼손, 입다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하나님께 받았던 그 직분 말이다. 재판관이자 정치 지도자이고 군사 영웅이던 그 사사의 직분을 엘리는 과연 어떻게 감당했을까? 성서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단지 그와 관련된 것은 제자 사무엘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망나니 아들들을 통해서 그려지는 앞의 이야기가 전부이다.
엘리는 직무유기를 했다.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사사로서 하나님의 직무를 팽개쳤다. 홉니와 비느하스를 아버지의 시선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는 제사장이었고 사사였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재판관 사사로서 그들을 잡아다가 징치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직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며, “옹냐, 옹냐”만 일삼았다. 그런 행동이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혹시 용서받을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제사장으로서, 사사로서는 아니다. 하나님이 두 번씩이나 경고를 하고 기다린 것만 해도 오래 참으신 거라 할 것이다.
엘리의 이 짜증스런 제 자식 끼고 돌기가 빚은 비극은 치명적이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했고,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전쟁에 나간 무수한 청년이 도륙을 당하는 슬픔을 당했고, 허다한 부모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모두 제 새끼만 예뻐하고 감싸고 돈 죄 때문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엘리와 그의 집안이 저주를 받은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한 시대 탓을 하며, 그저 내버려 두면 잘 될 거라고 믿는 알량한 마음이 결국 어떤 미래를 빚어낼지는, 신이 아니니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성서가 “꼭”, “반드시” 이리이리 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시대가 포스트모던하든, 구닥다리 옛날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량한 아들’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자식의 죄로 부모를 벌하지 않고, 부모의 죄로 자식을 벌하지 않는 하나님이 생뚱맞게 자식 때문에 부모를 징계하지는 않는다. 엘리가 바로 ‘불량한 인물’이었기에 징벌을 받은 거다. 엘리 이야기는 불량한 부모가 불량한 자식을 키워낸 이야기인 거다.
어쩌면 이 모든 사달이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윤 공의 세 아들이 ‘불량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엘리와 윤 공이 ‘불량아’였기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르겠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는 ‘불량 아들’보다 ‘불량아’들이 더 치명적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누군가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시라. 누가 더 불량한지 말이다.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2023년 11월호(통권 7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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