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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스킨십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한소리의 메아리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숨결이며 바람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상처 입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불길 같은 사람입니다.
딩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눈물 흘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님을 맞이할 신부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하나님이 만지신 죄인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당신에게 답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바보라고.
- 카타리나 드 후에크 도허티, <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스승(mentor), 메시지(message), 기적사화(miracles)를 몰고 다니던 마스터 예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특별한 예식을 집도했다. 무좀을 낫게 해주려는 기적을 베풀기 위함이 아니라 이건 종이나 되어야 하는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 스승이며 메신저이자 기적의 마법사이기도 한 예수의 이러한 행동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놀라지 않았다면 성서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터.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주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사양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서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돌아와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 13:4-15, 이하 공동번역)
가난한 이들이 품위 있게 살도록 돕는 것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길밖엔 없다.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예수의 스킨십, 하나님이 만지신 죄인은 우리. 예수의 만지심, 씻어주심으로 새로운 탄생을 하게 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행 20:35)한 일이기에 예수는 대접받는 일보다 대접하는 일로 본을 보여주셨다. 분홍물 든 가슴, 서답이 붉어지는 밤에 둘러앉아 희게 베어 문 달빛 아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분.
볼우물 언저리에 눈물도 그렁그렁 맺히고 그랬을 풍경이렷다. 오호츠크에 사는 귀신고래를 만나기도 했다. 장생포 앞바다에도 나타나고는 하지. 귀신고래는 얼지 않는 독주처럼,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그 추운 바다에서 거침없는 유영을 즐기고 있었다. 눈물조차 얼어붙을 것만 같은 맵고 추운 겨울에 우리는 귀신고래를 만나듯 예수를 만나고 있다.
“일종의 협약, 어떤 비밀 계약, 어떤 신비로운 약속, 어떤 성스러운 맹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가난한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비천한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궁핍한 사람 사이에, 하나님과 콧물 흘리는 고아 사이에, 하나님과 헌데 투성이 머리 사이에, 하나님과 환각제 냄새를 맡는 아이 사이에, 하나님과 굶주린 사람 사이에 어떤 약속, 어떤 성스러운 약속이 있는 것 같습니다.”(예수 그 낯선 분/ 조셉 돈더즈)
주님은 우리와 맺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 함께해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분. 코끝을 찌르는 시린 꽃내음으로 찾아와 봄누리를 열어주시는 분. 풀벌레들의 잠 속으로 창문을 열어주시고 진달래 꽃바다 만나게 해주실 분.
녹이 벌겋게 슨 세월 속에서 허물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나미비아의 힘바족이라는 원시 부족이 있는데 영혼이 사라질까 봐 붉은 흙을 온몸에 칠하고 산다는 이야길 어떤 시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미비아는 사막 땅이라서 정말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붉은 나무만 있다고 한다. 빠져나간 영혼은 붉은 나무에 매달리고, 고목을 쓰러뜨리고, 끝으로 바람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버리지.
텅 빈 겨울이 있다면 텅 빈 여름이 또 있어서 사막은 영혼마저 구하기 힘든 절망의 땅. 그러니 얼마나 귀하고 귀한 생명인가. 너! 사람아! 사람을 대하는 예수의 곡진한 태도를 보라. 이 붉은 금성 같은 땅에서 만난 친구들. 매만지고 또 매만지며 각질 붙은 발들을 씻겨주었을 것이다.
해마다 1만 개의 씨알 종자들이 멸종되어 가는 위급한 시대를 살고 있다. 6,500만 년 지속되어 온 신생대의 종국을 맞이하는 마당, 우리는 이 기계문명 공장 시스템에서 벗어나 사람의 발을 매만지며 씻어주듯 생태계를 돌아보고 아껴야 한다는 큰 배움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는 신생대가 아닌 생태대(Ecozoic)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우리 시야 안의 이 우주에 스킨십을 안겨주어야 한다고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야기했다.
씻고 닦고 싸매는 일이 아니라 깎고 자르고 찌르고 허물고 불을 지르는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을 보라. 골고다의 아픈 포옹과 애정을 외면하는 저들의 포악성, 저들의 만행. 자본의 편리를 맹신하며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산업경제를 밀어올릴 참인가. 오물덩이에 뒹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 누가 있어 그들을 씻고 닦아줄까.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바보들이 많아져야 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알몸으로, 자연인으로 몸을 나누듯 덕지덕지 껴입었던 산업경제의 옷들을 조금씩 벗어던지고, 기계를 조종하던 손으로 사람과 대지를 매만지면 어떨까.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 손전화기 스마트폰을 매만진다. 그대는 하루에 얼마나 친구 손을 매만지는가. 아이야! 너는 엄마 손을 오늘 만져보기나 하였느냐.
신에게서 사람으로 눈을 돌리시게
1. 농민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하겠어요
이 땅에 농민이 없다면 무얼 먹고 살겠소
식량이 없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 테니까요
2. 농조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대동 강물 팔아먹는 선달이라오
어느 해 가뭄에 물을 한 방울도 안 썼어도
예년과 변함없이 물세는 받아가지요
3. 농촌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아름다운 전원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러면 당신이 들어와 농사를 해보라지
김매고 약치다 모두가 헉헉대며 울 테니까요
- 농민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개사
참새가 내려앉은 나락들판 안에는 해바라기처럼 둥그렇게 잠든 물뱀도 있고, 길 잃은 노루가 내려와 숨기도 한다. 겉으로 보아서는 중세 성당 어드메쯤 황금빛깔 황홀한데 속으로는 농조 은행 빚더미에 쓰러진 농민들이 참혹하다. 물가는 오르는데 나락 값은 수십 년째 그대로이고, 전원주택 붐에 밀려난 이들이 어둠과 침묵의 빈집에 갇히기도 하고. 헬라어로 농민은 ‘게오르고’(gewrghz)이다. 대지를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누가 있어 저 너른 들판의 농토와 울긋불긋 빼곡한 촌마을을 지키고 살겠는가. 빈집에 갇혀 생사조차 알 길 없는 수많은 농민들의 안부를 물어보는 시간이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대통령이 누가 되든 말든 사실 농민 현실은 항상 불안과 고통, 냉대 속에 머물렀다. ‘이명박근혜’라 불리는 지난 10여 년 자본독재 시기에만 농민들이 죽어나가고 농투산이 백남기 농민 혼자만 저들의 폭력에 상여를 탄 것이 아니다. 민주정부라고 불리던 정권조차도 농민 노동자, 우리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이 계층 계급을 기망하고, 달달 볶고, 손끝 발끝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 자본가들의 배를 채우게 만들어주었다.
소심한 노인이 목초지에서 나귀에게 풀을 뜯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적군의 고함소리가 나서 그는 놀랐습니다. 그가 외쳤습니다. “빨리 도망쳐라. 그들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그러나 나귀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정복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내게 짐을 두 곱으로 지울까요?” 하고 나귀가 물었습니다. “그러진 않겠지.” 하고 노인은 대답했지요.
“여느 때의 짐을 지기만 하는 것이라면 주인이 누가 되건 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나귀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이솝 전집)
그저 권력의 이름만 바뀔 뿐, 정작 바뀌어야 할 무엇은 바뀌지 않고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조작한 자들. 나귀는 권력이 바뀌면 짐을 좀 줄여주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말았다. 그래온 세월이었다. 나귀가 전쟁이 났다고 도망칠 이유가 없는 것은 이리 되나 저리 되나 고생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렷다. 나귀에게 자유를 선포하기로 작정하고 해방투쟁을 한다면 몰라도. 그렇다면 나귀는 기꺼이 당신을 대장으로 모시고 등에 태우고서 전쟁터에 목숨 걸고 나갈 것이다.
쌀값 보장하라는 농민들의 투쟁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 대통령 선거 공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쌀값을 올리기로 약속해놓고서 입을 씻어버리는 이런 행위는 공약(약속)을 쉽게 여기는 태도를 넘어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 자체의 약점이 아닌가 싶다. 국민을 기망하는 행위이고 민주주의 자체를 파탄 내는 태도이다. 민주주의는 권력 형성과 실현이라는 과정이 잘 적용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구조이다. 시민광장의 목소리가 하나의 권력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데모스의 통치라고 누군 부르더군. 그런데 시민을 교활하게 속이고 집권한 행정 권력이 수시로 말을 바꾸면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약속 공동체인 국가는…. 정말 농민, 노동자, 시민의 목소리에 올인하고, 그 시민자치 권력을 존중하는 이들로 구성된 정당이 집권할 때만이 울음은 웃음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리.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눅 14:25-33)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올인해야 한다. 이것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성서엔 파랑겔로, 준엄한 명령을 쓸 때 이 단어가 새겨져 있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란 시간(인생)과 장소를 가리킨다. 우리 곁의 작은 예수들과 함께하는 일은 곧 인생을 바치는 일. 또한 예수가 가자는 대로 걸어가야 한다. 덩굴딸기의 아픈 가시가 있는 산길이라도 그분이 가자면 무조건하고 가는 것이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는 입술로만 들썩거리면 되는 노랫가락이 아니렷다. 민주공화국에서 정치란 국민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여 따르는 것이겠다. 국민이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정치이다. 한편 이 세상 틀짜임의 주체인 농민 노동자를 배척하고 자본가의 편을 드는 체제는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인지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참주인 민중이 최소한이나마 사람대접 받는 평등한 세상,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향한 전진을 위해 우리 부름받은 몸임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예수는 신적 존재, 초월 권력, 황제 숭배, 하나님에 집중하던 그간의 구약 시대를 깨뜨리고, 우리를 사람(들), 인류 공동체에 집중하도록 이끈 최초의 예언자요 메시아이다.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신에게 공양 제물로 바쳐지고, 신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는 파시스트들의 노예살이를 하고 살고, 인류 공영을 향한 공동체 진보를 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에게서 사람으로 흘러들어, 오! 사람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스며들어서.
짧은 생애, 2월에 대한 명상
2월은 자주 슬픔을 어겼다.
비가 내렸고 그 비는 풍경을 지키고 있었다.
너는 지나가고 있었다. 그 비처럼.
그것을 보면서 겨울을 변명하기는 쉬웠다.
내게 이마는 눕기 좋다고 했다.
2월은 비를 받고 있었고 그 사이 너는
더 멀리 통과되고 있었다.
나무는 물을 흘리고 있었다.
규제가 헐렸고 그 틈으로 새가 날았다.
젖고 있다. 너는 계속 걷고 있었다. 2월의 빗속으로.
그러나 비는 효력이 없었다.
그 비가 2월을 어겼다.
네가 그 비를 어기듯이 걸어갔다.
너는 민담처럼 흩어져 갔다.
- 안태운, <2월의 비>
한 해를 살다보면 2월만 날이 짧다. 생쥐가 달력을 갉아먹었나 어쨌나. 이런 시도 있다. “시간의 생쥐, 아름다운 날들아, 너희들이 내 삶을 야금야금 갉는다. 맙소사! 이제 나도 스물여덟, 헛살아온, 내 멋에 겨워.”(기욤 아폴리네르, <생쥐>) 시인이 이팔청춘일 때 쓴 시인가 보다.
2월에, 겨울의 끝자락에, 봄이 똑똑 노크하는 그때 비가 내리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견고하던, 규제가 너무도 많던 겨울이 그만 금기를 어기고 눈물을 흘린다. 난 바다에 가면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연가>)
바다에 가면 왠지 멀리 바다로 떠난 그가 돌아올 것 같다. 2월이 되면 금방 봄이 오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나는 2월에 서서 기다린다. 겨울비 혹은 봄비일 이 빗물을 바라보면서, 누군가 금기를 깨주기를 바라면서.
그들은 게쎄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도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막 14:32-39)
예수는 일 년 열두 달 중에 2월 그 짧은 생을 살다갔다. 그에게 짧은 생을 권하는, 죽음과의 혼례를 권하는 청첩장이 날아왔다. 예수는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달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였는데도, 충성스러운 제자로 여겨지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조차도 단잠에 빠져들었다. 예수의 외로움은 배나 더 잔혹했을 것이다. 2월의 비가 예수에게서 내리고, “영원히 기다리리~” <연가>를 부르던 제자들도 모두 잠들어버리고, 안타까운 비만이 주루룩 내리는 중이었다. 사랑이 슬픔이 되고 강물이 되어 흘러가 버리게 될 것을 그 누가 알았으랴. 마당의 쥐똥나무가 눈더미에 얼어붙고, 변방에 내리던 따숩던 햇살도 먹구름에 감춰진 대지. 울타리를 가볍게 넘나들던 바람도 2월엔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린다. 틀니조차 잘 들어가지 않던 쭈글쭈글 어머니의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찬송가 소리 말고는 이 산골짝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그런 슬픈 사랑이여. 예언의 종을 치는 시인들은 다 어디에서 잠이 들었는가. 흥뚱흥뚱 슬픈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취객들은 알까. 2월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데, ‘간절하게 또 가득 차게’ 살고 싶었던 한 사내의 설운 마음을….
예수는 이 겨울을 향해 따뜻한 사람의 눈물을 흘렸다. 그 따뜻한, 추위와는 다른 취향, 다른 방식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봄은 오지 않을 것이고, 찬란한 부활의 새날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관련하여 행한 일, 즉 범세계적 다중문화(multicultural)정책을 오늘날의 제국과 관련하여 수행해야 한다. 현 세계의 조건하에서 범세계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의 세계 질서를 전방위적으로 저지하면서 진실의 입장을 대변하고 억압된 진실의 관점에서 현 세계 상황에 대입하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를 주입하려 한 레닌의 몸짓의 반복을….(슬라보예 지젝, 『믿음에 대하여』)
겨울의 차가운 속성에 정면 승부를 건 예수의 눈물어린 기도는, 이 완전한 자의 범세계 범우주적인 파격과 투신은 장차 거대한 수용과 거대한 연민으로 진일보하게 된다. 금기를 깨뜨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의 기도는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라는 이 기도는, 인류의 승리이다. 오! 예수의 승리이고 우리 모두의 승리이다. 우리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사람일 때, 가장 인간적일 때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들리라. 날짜가 턱없이 부족한 2월의 어느 비 내리는 날, 이 비가 설마 겨울을 깨트릴까 싶어지는데, 깊숙이 깊숙한 곳으로 충만한 봄기운의 3월이 범람하여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냐. 이런 것이냐. 따뜻한 사람의 눈물이란. 촛불 예수 당신이여! 따뜻한 사람의 온기여!
임의진 | 시인이며 수필가, 목사이다. 「경향신문」 칼럼니스트로 “시골 편지”를 장기 연재 중이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5·18기념교회에서 성서연구를 인도하고 있다. 저서로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예수 동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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