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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남쪽에서는 평화로 정의와 공의를 수립하는 놀라운 역사가 쓰이고 있다. 평화의 힘이 부패하고 불의한 세력을 몰아내고 있다. 일부에서 이것을 왜 혼란이라 일컫는지 그 의도가 의심쩍다. 들불같이 번져가는 그 힘이 두려운 자들의 속내가 그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평화가 불편한 사람들, 그들은 혼란을 빙자해 무력을 끌어들이고 변혁의 기회를 압살하려는 흑심을 국가안위로 또는 애국충정으로 위장한다. 평화 속에서 혼란을 보려고 애쓰는 그들의 현실인식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박근혜를 정점으로 그 주변에 붙어 있는 그들은 한 무리의 관료들과 정치인들, 지식인들과 학자들 그리고 종교인들과 재벌들이다. 그들은 학연과 지연, 혈연과 돈 등으로 ‘울타리’를 쌓고, 그 속에서 온갖 불법적인 방식으로 자기들끼리 이익을 나누고 권력을 안배한다. 그 바깥에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깨어 있든 깨어 있지 않든, 이용당하기를 거부하든 거부하지 않든 저들에게 무시당하고 수탈당하고 억압당한다. 그런데도 저들을 마치 구세주처럼 지지하며 스스로 이용당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저들의 세력화는 친일과 독재로 왜곡된, 짧지 않은 비극적 현대사를 뒤에 숨기고 있다. 평화의 힘은 이 폭력의 역사를 들어내고 극복하기 위한 저항의 힘이다. 분노를, 바람에도 끈질기게 타오르는 촛불로 바꾼 지혜의 힘이다. 거짓과 허위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미래의 힘이다.
1
그때 저들을 대신할 사람들은 어떤 모습의 사람들일까? 시대와 체제의 차이를 넘어 혹시 다산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산의 『목민심서』 봉공에 나오는 말이다.1 (목민은 오늘날의 지자체 단체장들에 해당된다. 그러나 『목민심서』는 모든 공직자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익에 유혹당하지 않고 위협에 굴복당하지 않는 것이 지켜야 할 도리이다. 비록 상사가 (그러한 것들로) 강요(독촉)할지라도 받아들여선 안 되는 것이 있다.2
고위공직자들의 입에서 윗사람이 시켜서 했다는 말이 태연하게 흘러나오는 요즈음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직장윤리’라는 인상을 준다. 유혹과 위협은 그러한 ‘윤리’를 따르지 않는 경우에 채택된다. 당근과 채찍으로 비유되기도 하는 이익과 위협은, 조금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박근혜와 이재용의 독대 예가 보여주듯 불법과 연관된 거래수단이다. 다산은 목민관을 특별히 구별하고 그들을 위해 『목민심서』를 저술하지만, 거기에는 지방과 중앙의 모든 관리(공직자)에게 적용돼도 무리가 없고 또 적용되어야 하는 일반적 성격의 조항도 있다. 이것도 그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이 조항은 현실적으로는 지키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무조건적 복종이 미덕으로 간주되고 ‘직장윤리’의 이름으로 관철된다면, 더욱더 어려울 것이다.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때 그에 따른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하려면, 자기를 지키는 신념과 두려움을 이길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채찍과 당근을 모두 거부하면 찍어내는 것이 ‘권력’의 속성(?) 아닌가?
아랫사람에게 군림하는 한편 권력에 맹종하는 자들이 도태되고 목민적 공직자들에 의한 권력남용 견제가 이루어지는 체제가 평화의 힘이 지향하는 미래 권력의 모습일 것이다.
2
맹자가 생각한 정치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맹자의 책은 그와 양혜왕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는 정치가 추구해야 할 최우선적 가치는 이익이 아니라 인(仁)과 의(義)임을 역설한다.3 이익이 이들을 대신하면 정치가 피폐해지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갈 것을 그는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인의의 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맹자는 그의 책을 향원에 대한 말로 끝낸다. 향원은 누구인가? 맹자는 왜 향원에 대한 말로 그의 책을 끝맺는가? 이 말은 『논어』에 간단하게 한 번 언급된다.
공자가 말하였다. 얼굴빛은 근엄한데 속이 나약하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자를 소인에 비유하지만, 그는 (실상 담)구멍을 뚫는 도적과 같다. 공자가 말하였다. 향원은 덕 도둑이다.4
향원은 덕을 훔치는 자로 규정된다. 누구에게서 덕을 훔친다는 것인가? 덕이 훔칠 수 있는 것인가? 이 구절을 앞 구절에 이어 읽으면, 향원은 얼굴빛이 근엄하고 위엄 있게 보이지만 심지는 나약하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 쉬운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을 사람들은 기껏해야 소인 정도로 생각하고 또 현재는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설명하지만, 공자는 그를 도둑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그는 덕이 있는 척하지만 실제로 그에게는 덕 있는 사람이 갖추어야 덕목들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덕 있는 자로 오해하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그 오해 때문에 더 이상 진짜 덕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자가 그를 덕 도둑이라고 부른 이유이다. 그는 그의 겉모습으로 사람들의 의식에 구멍을 내고 숨어 들어가 그들에게서 덕을 추구하고 몸을 닦을 마음을 훔쳐간다. 이러한 향원은 공자와 대척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자와 향원의 관계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는 덕이 문제이고, 후자에서는 앎이 문제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자의 향원 이해와 그 심각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맹자가 유일한 것 같다. 향원이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없어서이다.
맹자는 만장(萬章)과 대화하며 공자의 말을 인용해 향원에 대해 언급한다. 공자에게 향원은 ‘내 집 앞을 지나며 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유일한 자이다. 그는 덕 도둑이기 때문이다. 만장에게 이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이다. 어떻게 덕 도둑을 향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향원에 대한 전이해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향원은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덕 도둑이라 하다니 만장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그러한 사람일 것이라고 만장은 추론한다. 어디를 가나 인정받을 만한 사람? 그렇다면 대단히 뛰어난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를 덕 도둑이라고 하니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 때문인가? 맹자의 답이다.
(향원은) 아니라고 할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비판할 일이 있어도 비판하지 않는다. 세상 흐름과 같이하고, 더러운 세상에 맞춘다. 벼슬을 하지 않을 때는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자 비슷하고, 벼슬에 나아가면 청렴하고 깨끗한 자 비슷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기뻐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한다.5
비슷한 것이 왜 문제인가? 비슷하지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뜻은 높은데 행동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狂: 광]나 (큰 뜻을 말하지 않으나) 더러운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獧: 견]와 닮은 듯하다. 향원은 옛사람을 되뇌이기에 큰 뜻이 있는 듯 보이며 외롭고 쓸쓸한 듯 보인다. 그런데 그는 광(狂) 자나 견(獧) 자와 다르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서로 무관하고 이 세태를 즐기며 이 세상을 좋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을 향해 아니라고 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과 야합하는 향원이 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길을 돌이켜 바르게 하지 않는 데 있다.6 그의 그럴 듯한 겉모습은 세상에 아부하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껍데기이다.7 그는 사이비이다! 사이비는 아첨을 하고 편리한 대로 말을 잘하는 가라지이다. 그는 결국 공의를 어지럽히고 신의가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한 자가 공・맹이 경계하는 향원이다.8
3
맹자가 추구하는 인과 의의 정치와 세상이 저 향원들 때문에 실현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 사이비요 가라지인 자들이 대통령에, 비서실장에, 민정수석, 총리, 장관, 총장, 교수, 의사, 재벌총수 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위엄이 있고 원칙을 따르고 신의를 지키고 국민을 위하는 척한다. 국민은 속고 열광한다. 그들은 반성하고 길을 돌이킬 줄 모른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최순실의 지시에 따라 연기하는 박근혜이다.
슬픈 일이지만 지난 10년 동안 이 나라는 가라지들, 곧 친일독재 정권이 뿌려놓은 가라지들의 천국이었다. 그들이 국민에게서 덕을 훔쳐가고 성공과 출세, 돈과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국민의 머리에 심어놓았다. 덕을 잃은 유권자들이 향원들의 거짓과 껍데기에 속아 정의와 평화를 내려놓고 이익을 선택한 탓에 지불해야 한 참혹한 대가가 바로 지난 10년이다. 1,000만 촛불은 그 10년을 청산하려 한다.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그 부역자들, 더 나아가 그 뿌리인 친일독재 유산을 모두 씻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청산되어야 할 것들의 한편에 지나지 않는다. 촛불은 동시에 우리의 속을 비춰야 한다. 친일독재의 역사가 오랫동안 우리 속에 심어놓은 가라지들을 모두 뽑아내 하나하나 태워버려야 한다. 그 자리에 본래 있어야 할 훼손된 가치를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향원들을 롤 모델로 삼고 존경하는 왜곡된 의식이 바르게 펴지고, 그들의 거짓과 몰가치를 읽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은 그 단초와 방향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익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이것이 지속가능할 수 있으려면, 제도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향원들이 도태되고 인의의 정치를 구현하는 목민적 공직자들을 길러내는 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켜야 할 도리를 어떤 경우에도 지키는 기개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아래 내용처럼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공감능력과 아울러 고통의 원인인 재난 발생을 예방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무릇 재난이 발생하면 목민관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자를 구조하되 자신이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처럼 구조하고 늦춰선 안 된다. 환난을 생각하고 예방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재난이 발생한 다음에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더 낫다.9
기개와 공감과 배려, 이것들은 공동체성을 구성하는 내용들로서 공직자들에게만 요구되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모두에게서 구현될 수 있는 보편적 자질이다. 예컨대 그것들은 촛불 든 뭇 사람들에게서 이미 볼 수 있다. 이 자질이 사회적 가치로 인식되고, 그것들이 결핍되어 있거나 그것들을 경시하는 향원과 그를 존경하는 자를 지혜가 부족한 자로 간주하는 사회적 합의가 제도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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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8장 13-26절은 목민적 공직자들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출애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한편으로는 자연적 환경 때문에 시련을 겪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봉착한다. 자연적 시련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이적으로 극복되고, 사회적 문제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 곧 말씀을 가르침으로 해결된다.(이적과 말씀은 예수의 두 가지 사역 방식이기도 하다.) 후자에 관한 출애굽기 18장 본문은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그 사회적 배경과 연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출애굽기 18장 13-26절은 문제와 해결을 축으로 다음과 같은 ABBA의 교차법 구조를 보인다.
A 13절 문제 상황: 모세는 판결 시 앉아 있고 백성은 종일 서 있다
B 14-18절 문제 인식
14절 이드로의 질문: 왜 너는 앉아 있고 백성은 종일 서 있는가
15-16절 모세의 답변: 백성-하나님께 물음
모세-판결하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을 가르침
17-18절 이드로의 판단: 잘못이다
너와 백성이 모두 지칠 것
힘들어 너 혼자 감당 못함
B 19-23절 문제 해결 제안
19-20절 상급심: 모세는 하나님 앞에 있고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율례와 법을 가르치라
21-22절 하급심: 지도자들-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능한/덕 있는 사람,10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진실한 사람
큰 일: 모세 판단, 작은 일: 지도자들 판결
23절 예상 결과: 너는 일을 감당할 수 있고 백성은 평안히 갈 것이다
A 24-26절 시행(=문제해결): 능력 있는 자들 선발
큰 일: 모세, 작은 일: 지도자들
사람의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갈등과 분쟁은 피할 수 없이 발생하고 그 조정과 해결이 없으면 개인적 평안은 물론 없으며 사회적 평화도 위협받을 수 있다. 이는 이동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도적 장치가 없는 ‘단순한’ 사회인 광야의 이스라엘에서는 모세가 유일한 정치적・종교적・사법적 제도였다. 따라서 모든 문제가 그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재판할’ 때면 재판은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그동안 모세는 앉아 있고, 사람들은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를 목격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 1인제도의 문제점을 모세와 백성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 문제는 ‘지치고(지쳐 쓰러질 정도) 만다’는 평범한 말로 표현되지만,11 그들의 힘든 상황에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공감이 문제해결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인간적 제도의 도입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배제하고 효율성만 고려한 제도가 비인간적인 까닭은 그것이 실제로는 효율성의 이익을 누리는 집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그들의 여정에 비춰보면 출애굽기 18장의 사건은 그 목표를 실현시키는 처음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발단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이드로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이는 그 공동체가 그만큼 개방적임을 뜻한다.
모세의 판결은 단순히 갈등과 분쟁의 조정이나 해결에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을 가르쳤다. 이 교육적 행위는 갈등과 분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리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은 현재 성서에서 20장 이후에 비로소 주어진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긴장관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여기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규례와 법들이 20장 이후에 나오는 법들의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교육도 제도의 한 부분으로 정착된다.
너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사건들을 하나님께 내어놓으라. 그들을 규례와 법으로 경고하고 그들이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라!(19b-20절)
출애굽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 여정의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에 필요한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道理]을 담은 규례와 법은 징벌적 성격보다는 윤리적 성격이 더 강할 것으로 보인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화된 ‘도리’는 평화 공동체 성립과 유지의 법적 토대가 될 것이다. 분쟁에 대한 법적 판단과 집행이 평화를 목표하기 때문이다.(23절)
이러한 제도의 성패는 최종적으로 제도를 운영하는 자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일정한 자격요건이 요구된다. 이들은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로 나눠진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일’의 사람들이다.(주 10 참조) ‘하일’이 유능하다는 뜻을 갖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외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내적인 덕(Tugend)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 경외의 성서적 특징은 악을 멀리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 경외와 악의 공존은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하나님이 견딜 수 없고 하나님을 지치게 만든다.(사 1:11-15 참조) 판결하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양자를 뒤바꿔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행위이다.(잠 17:15, 18:5, 24:24)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일’의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사람들일 수 있지만, 다 그렇지는 못하다. 그다음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들은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진실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판결하는 자로 꼽히는 이유는 판결을 왜곡시키고 정의를 비트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불의한 이익 곧 뇌물이기 때문이다.(출 23:8도 참조) 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외에도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또 다른 요인이 평행 본문인 신명기 1장 9-18절에 언급된다. 그것은 신분이나 지위의 높낮이, 또는 부의 많고 적음 등에 따른 차별과(잠 24:23, 출 23:6 참조), 유력인에 대한 두려움이다. 유혹이든 위협이든, 자발적이든 강압적이든 판결을 굽게 하고 불의한 사회를 만드는 현실적 요소는 그 밖에도 많다. 재판관들이 이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어야 재판제도는 본래의 취지를 살릴 수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재판관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자격이 아마도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진실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비단 저 옛날의 재판관들에게 한정된 것일 수 없다. 맹자나 『목민심서』에서 보듯 그 요구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계속되었고, 지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직자들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기본 자격이 되어야 한다.
이들의 존재와 교육은 정의에 기초한 개인적-사회적 평화를 지향하는 제도의 존재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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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사유화한 자들과 그들에게 헌신한 저 향원들에 대한 재판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공정한 재판 여부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불의한 권력의 존속은 국민에 대한 감시와 보복과 억압으로 이어지고 노예국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 교육적 효과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거짓과 조작이 진실을 이긴다는 신념을 낳고 고착화할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담당 판검사들이 목민적이어야 한다는 기대와 희망이 더욱더 간절해진다. 촛불 민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재판은 그에게 속해 있다. 저들의 조사와 판결이 오직 국민의 마음 곧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 되도록 촛불의 외침은 계속되어야 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 얼굴을 보지 말라 큰 자와 작은 자의 말을 모두 듣고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재판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신 1:17a)13
1 『목민심서』는 12편×6조=72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조는 중국과 조선 양국의 사례들로 해설되어 있다.
2 不爲利誘 不爲威屈 守之道也 雖上司督之 有所不受(茶山 牧民心書 奉公六條 二 守法)
* ‘爲+명사+동사’는 수동태 구문이다
3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을 때 왕이 말하였다. “연로하신데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도 있겠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왕께서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맹자』 양혜왕 상 1, 1-3)
4 子曰 色勵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 子曰 鄕原德之賊也(論語 17篇 陽貨 12-13)
* 荏(임)은 荏弱(임약) 곧 ‘나약’을 뜻한다. 穿窬(천유)는 ‘(담)구멍을 뚫거나 (담을) 넘는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穿窬(천유)를 穿踰(천요)의 뜻으로 읽기 때문일 것이다.
* 諸(제)는 之於(지어)의 약자이다. 여기서 之(지)는 앞에 묘사된 자를 가리킨다. 소인과 도적은 같을 수 없다. 양자의 차이는 譬(비)… 其(기)…를 역접으로 읽게 한다. 色勵而內荏(색려이내임)은 조건이나 가정을 나타낸다.
* 賊(적)은 ‘해치는 자’로 옮겨지기도 하지만, 도적으로 새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앞의 盜(도)와 짝을 이루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5 曰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 合乎汚世 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孟子 盡心章 下 37) 非之… 刺之…의 之는 목적을 나타내는 소유격이다. 非와 刺는 각각 無擧와 無刺의 목적어이고, 이들의 주어는 향원이다,
6 이혜경, “향원을 향한 유가윤리의 비판은 정당한가?” 「철학사상」 39(2011): 3-29는 행위의 윤리 관점에서 향원을 윤리적 미숙 상태로 보고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향원을 갈등 속에서 분투하는 보통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향원 이해는 공자와 맹자의 향원 이해와 다르다. 갈등 속에서의 분투는 반성을 의미하지만 향원에게는 그러한 노력이 결핍되어 있다. 더 나아가 윤리적 미숙 상태인 그들이 고위직에 있다면 그만큼 더 반성적 노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7 曰 何如斯可謂之鄕原矣 曰 何以是嘐嘐也 言不顧行 行不顧言 則曰古之人古之人 行何爲踽踽凉凉 生斯世也 爲斯世也 善斯可矣 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孟子 盡心章 下 37)
어떻게 이 자(=덕 도둑)를 향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뜻이 참으로 크겠느냐? 그는 말하면 행동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면 말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옛사람 옛사람 하는데 말이다. 그의 ‘길’이 무엇 때문에 외롭고 쓸쓸하겠느냐? 그는 이 세상을 살고 이 세상을 위한다. 이것(~세상)을 좋다고 할 것이다. 속은 숨기고 세상에 아부하는 자 그가 바로 향원이다.
* 何以…와 何爲… 의문문은 각각 사람들의 말을 반박하기 위한 인용 형식이고, 그 이하는 맹자의 반박 내용이다.
8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鄕原 恐其亂德也(孟子 盡心章 下 37)
(나는) 비슷하지만 아닌 사이비가 싫다. 가라지가 싫다. 염려컨대 싹을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아첨이 싫다. 염려컨대 공의를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편리한 대로 잘 둘러대는 것이 싫다. 염려컨대 신의를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향원이 싫다. 염려컨대 덕을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9 凡有災厄 其救焚拯溺 宜如自焚自溺 不可緩也. 思患而豫防 又愈於旣災而施恩(愛民 6 救災)
* 다산의 이러한 목민 이해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勿施於人)는 논어의 서(恕)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자신을 미루어 사물에까지 이른다.’는 추기급물(推己及物)이나 곱자로 재는 도 곧 ‘자신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를 이해하다.’는 혈구지도(絜矩之道) 등으로 표현되고 인(仁)에 이르는 원리이다.(비교, 『맹자』 진심장 상 4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강서이행 구인막근언) 그것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서의 황금률(마 7:12)과 일맥상통한다.
10 ‘하일’은 힘, 능력, 재산, 소유 등을 의미하지만 ‘덕’(德)으로 옮길 수도 있다.
11 ‘나볼 팁볼’은 ‘나발’(지치다, 시들다, 약해지다)의 강조형이다. ‘나발’은 문맥에 따라 ‘어리석다’를 뜻하기도 한다.
12 19b-20절은 aa′bb′ 형식의 구조를 갖고, a′와 b′는 각각 a와 b를 설명한다.
13 abb′a′의 교차법 구조를 보이지만, 각 행의 관계는 조금 더 복잡하다 b와 a′는 각각 a와 b′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차법 구조에서 강조점은 뒤에 곧 재판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데 있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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