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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남은 목소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면
그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땐 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 프란체스카 도너 리
인생은 고독한 여행이다. 그러나 그 한 사람, 단 한 사람, 세상에 둘도 없는 한 사람을 믿음으로 우리는 과감하게 이 순례여행을 시작했다. 제자리에 멈추고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산다고 해서 어찌 외롭지 않다고 하겠는가. 오스트레일리아 ‘선한 사마리아인 수녀회’의 지도자인 헬렌 람바드 원장수녀가 그랬다. “제자리에 정주하고 머뭇거리는 이에게는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고 위험이 도래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려면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한다. 정주하게 되면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모험을 각오하고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로 길을 떠나 이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제 얼굴 돋보이려 하지 않고 모래바람에 숨어든 사막의 영성. 오직 예수만을 벗삼아 떠나온 사막 순례여행. 우리가 사막 전통을 멀리하면 한 만큼 방정맞은 명예욕과 이기심에 치여서 손톱만한 첫 믿음도 간직하기 어렵게 될 위기에 빠질지도 모른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정주하려는 이들, 깃발을 꽂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축적과 축재의 욕망에 빠져 더는 모험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 뒤로는 권태와 나른함으로 헤픈 하품과 졸음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해방신학자 버질리오 엘리존도가 그랬다. “춤추는 축제가 없는 저항행위는 성령이 없는 예배처럼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집에 들어앉아 졸지 말고 광장에 나아가 노래하고 춤추라! 저항의 광장이 바로 수도원이요, 예배당이다.” 예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화가 잔뜩 난 꼰대가 아니다. 그이는 웃고 떠들며 춤추고 노는 우리의 개구쟁이 광대요 친구이고, 누구보다 모험을 즐기는 순례자요 춤꾼이렷다. 춤은 그 어떤 종류라도 일상의 모험이 된다. 인생도 춤출 수 있다면 모험에 발 담그는 것이리라. 신은 춤의 왕!(Lord of the Dance) 정주하고 그대로 멈춘 이들은 신의 춤사위를 배울 생각이 없는 얼음공주가 아닌가.
우리는 성서를 읽는데, 다석의 말씀처럼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곧 그이를 그리워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와 ‘그리움’이 합쳐 ‘글’이 되었다고 한다. 성서라는 문자에서 그리움을 배웠다면 우리 인생은 당장 모험, 춤, 순례에 젖어들어야 한다. 그대의 고독한 여행에 마지막 한 사람 동반이 필요하다면, 여행자 예수가 당신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리라. 그러니 안심하고 길을 나서라. 모험을 시작하라.
그대는 주의 이름으로 뜨겁게 모험하고 수난당하다가 ‘살아서 남은 목소리’(Living and abiding voice)가 되기를…. 나도 당신 없이 혼자가 된다면 살아서 남은 목소리로 당신을 영영 기억하리라.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눅 12:32–34, 공동번역)
재물의 욕심은 정말 끝도 한도 없나보다. 권력도 뭣도 다 핑계거리이고 결국은 재물 욕심. 예수님이 제대로, 정확히 본 것이다. 돈지갑에 정신머리가 팔린 인간 군상들. 그 수렁 속을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돌보다 훨씬 무거운 철, 쇳덩어리 금덩어리 재물이다. 재물이 많고 짐이 많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예수를 따라 함께 순례를 할 수 없다. 수많은 골칫거리들에 검고 무거운 실루엣을 늘어뜨리고서 무덤이 된 성에 스스로 갇혀 사는 사람들. 뱀이 우글거리며 재물을 지키는 그 자리는 주검의 흙구덩이. 너희의 재물을 그 흙구덩이에 파묻어 두고 그 침전된 오물을 재물 창고라 부르는 것이 아니더냐.
쇠붙이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아침에 누군가 밭이랑에 씨를 뿌린다. 불가에서 타종을 하는 것은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쇠붙이를 대표하는 종. 무기와 재물을 사랑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종소리. 그런데 고독한 여행자, 고독한 농부, 고독한 양치기에겐 멀리서 들려오는 예배당 종소리가 큰 위안이요, 반가움이다. 누군가에게는 가르침, 깨우침이 되는 종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치유와 희망이 되기도 한다. 종추가 춤을 추며 들려주는 발랄한 노랫소리.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한 종. 있는 것을 모두 팔아 마련한 종이 시방 어둠을 찢으며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 저도 살아서 남은 목소리인가. 양심과 진실을 깨우는 종소리여!
겨울 공화국에서 촛불 융단을 까는 이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에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눅 1:79, 새번역)
오늘 우리의 역사는 전대미문의 혹독한 시련을 맞고 있다. 사욕에 눈먼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신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살아내지 못한 우리의 크고 무거운 죄를 참회하며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길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박근혜 대통령은 즉각 퇴진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이상 국가의 통치를 감당할 능력이나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남은 길은 국민의 분출하는 퇴진 요구에 겸손히 응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2. 지금의 위기를 한국 현대사의 대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위기는 미봉책으로 덮힐 수 없다. 이 깊은 위기의 진정한 극복은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해방 이후 쌓여온 온갖 역사적・사회적 적폐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민주권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3. 한국교회는 불의한 권력에 기생하며 복음을 왜곡해온 지난 역사를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폭정에 관여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한다. 저들의 영적 무지와 타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 세상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이 선언이 이루어지도록 신앙의 양심으로 한 자루의 작은 촛불이 되어 어둠의 세력에 빛을 비출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2016년 12월 2일
박근혜 퇴진과 민족 대전환을 위한 일만 기독인 시국선언
국가와 교회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일만 기독교인 일동
독일교회의 타락과 일탈을 회개하고, 나치 청산에 깃발을 올린 헬무트 틸리케 목사의 발언이 떠오른다. “교회는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자들, 길 잃고 방황하는 모든 자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지난 10년간 그들의 어머니를 저버리고 잘못된 이념에 맹종했다. 희생자들에게 너그러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은 위대하고 힘 있는 자들이나 미국이나 영국을 쳐다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죄수들을 방문하고 교회를 도울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
수많은 시국선언이 쏟아지고 있다. 격정 어린 시와 노래들이 길바닥에 쏟아지고 있다. 목련꽃처럼 터져버린 울음을 삼키며 움켜쥔 뿌리는 너도나도 한마음으로 나라 걱정 나라 사랑이었다.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 13:18) 겨울이라는 헬라어는 ‘케이몬’(Ceimwn)이다. 케이몬은 예기치 않게 내린 벼락눈을 뜻한다. 폭설이 내릴 때는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로 암만 도망을 쳐봐도 눈앞엔 켜켜이 내리는 것은 벼락눈이렷다. 아뿔싸! 하필이면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구나. 촛불 시민들은 언 손을 호호 불어 녹여가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길거리에 모여들고 있다. 우리는 거짓되고 부정한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길가에 버려진 주권자들이다. 국민이 주인인데, 주인은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 뜻있는 가수들이 <길가에 버려지다> 노래를 부르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 앞에 우리 짱짱히 맞서며 공화국 찬가를 노래하고 있어라. 이건 혁명의 노래가 아니라 주권회복의 노래이다. 진실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기도하는 노래렷다.
내 몸에 날개가 돋아서 어디든 날아갈 수 있기를
내 꿈에 날개가 돋아서 진실의 끝에 꽃이 필 수 있길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려 하고 고장난 시계는 눈치로 돌아가려 하네
just no way no way and no way
난 길을 잃고 no way no way and no way
다시 길을 찾고 no way no way and no way
없는 길을 뚫다 no way no way and no way
길가에 버려지다
내 몸에 날개가 돋아서 무너지는 이 땅을 지탱할 수 있길
내 의지에 날개가 돋아서 정의의 비상구라도 찾을 수 있길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려 하고 고장난 시계는 눈치로 돌아가려 하네
just no way no way and no way
난 길을 잃고 no way no way and no way
다시 길을 찾고 no way no way and no way
없는 길을 뚫다 no way no way and no way
길가에 버려지다
— 이승환, 이효리, 전인권의 <길가에 버려지다>
길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길을 찾아 뛰어든 하늘길 순례자. 이 겨울도 하나 두렵지가 않아라. 겨울이야기 하면 수도원의 아버지라 할 만한 베네딕트 성인이 떠오른다. 성인이 사는 동굴은 폭설 한기를 피하게끔 깊숙한 동굴이었다. 하루는 이 동굴로 길에서 헤매는 미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면서 동굴에 들어와 성인이 건넨 겉옷을 걸치고 하룻밤을 묵었다. 그런데 다음날 그녀는 정신이 돌아와 온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평생을 공동체에 헌신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겨울은 환란이지만 따뜻한 난롯불 같은 구원을 만나면 폭설도 행복한 순간으로 바뀐다. 우리는 희망을 노래하며 평화와 해방을 앙망한다. 발밤발밤 눈길을 걸어오는 어린 예수의 손을 맞잡고 이사야 40장을 읽는다. 야훼를 앙망하는 자의 노래! 히브리어에 앙망하다는 말 ‘코예’는 사전적으로 ‘바라다, 찾다’ 정도가 아니다. 독수리가 날갯짓으로 올라가듯 힘차게 다가서며 바라는 것을 말한다.
체제와 문명 대전환의 기회로 삼는 일, 그것이 종말의 이야기이다. 예수가 이야기한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의 마지막 끝날,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종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뒤집어보면 그 이야기는 ‘새로운 구원 이야기’이다. 길가에 버려져 새로운 길을 찾듯이 우리는 세상의 끝에 서서 새로운 희망의 새 길을 바라본다. 구원은 간절히 바라는, 앙망하는 자의 차지. 주님! 저희에게 내일로 나아갈 믿음과 용기를 주소서. 촛불 융단을 까는 이들에게 봄공화국 꽃바다를 만나게 해 주소서.
영혼의 승리자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시가 있다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
빛이 없다면 세계는 어둠의 것
소금이 없다면 사회는 부패의 것
헌신의 아름다움과 희생의 고귀함으로
존재 그 자체로 빛이 되는 사람
정의로운 저항과 생활의 간소함으로
사람 그 자체로 흰 소금인 사람
그리하여 인류의 새로운 시가 있다면
나 자신이 빛과 소금이 되리라
— 박노해, <가장 오래된 시>
두 눈이 그렁그렁하고 가슴 가득 뻐근한 노래와 같은 시가 있다. 바람 같은 힘이 거기에 담겨 있누나. 부드러운 물살이 들어와 정강이 가득 서늘해지는 듯해. 별자리 움켜쥔 나무들이 대지로 수직하여 서 있듯 이승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를 읽고 싶다. 묵묵히 걸어가는 달력은 새해로 접어들었고, 뒤꿈치를 잠시 들고서 우린 무겁고 흰 눈을 머리에 이었다. 푹푹 쌓이는 눈만큼 겨울이 깊어가고 있구나. 꼬장꼬장 할머니가 겨우내 바느질을 하듯이 북풍이 부는 한낮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
구름은 달을 껴안고 흐르고 있어라. 하늘도 사람을 끌어안고 역사가 되어 흘러서 간다. 이 변경의 삶(Marginal Life)에서 우리는 탁족을 하듯 숨결마저 훌훌 씻고, 섞박지처럼 아삭아삭한 성경말씀을 상고하면서 새로운 인류, 새로운 시어를 꿈꿔본다.
철거반의 폭력이 평범한 기쁨을 앗아가는 것처럼 감기란 놈이 몸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만 일상의 평화를 잃고 만다. 흐린 날에 더욱 고향이 그립듯 몸이 아프고 사회가 아플 때 우리는 예수에게 더 다가서는 기회를 삼으면 좋겠다. 작가 모리스 블랑쇼는 “낮 세계와의 관계가 깨지면서 바깥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고 말했다. 진실의 결핍은 글쓰기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현실사회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결핍을 메우려고 글을 쓰게 되고 또 글을 읽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 흥성흥성한 자리들엔 도무지 진실이 없을 거 같고 가난뱅이 우리는 두 렙톤을 들고 예수에게 찾아가는 것이다. 바깥의 세계인 복음이 우리의 안쪽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깜짝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막 12:41–44, 공동번역)
로마 총독부 시절 가장 가치가 작은 동전이 바로 렙톤이었다. 회당 헌금자들은 제사장에게 연보한 이유를 또 적어야 했다. 과부는 한 끼 밥을 사먹을 수 있는 두 렙톤을 헌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달란트는 가장 값이 나가는 액수. 1달란트는 일반 노동자가 6,000일 동안 일한 삯이다. 달란트에 비교하면 렙톤은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흙수저들의 돈.
예수는 이 작은 연보 돈을 귀히 여기시며 가난한 여인을 감싸고 돈다. 사람 자체로 흰 소금과 같은 여인이라는 듯. 언젠가 스페인 여행길에서 아랑훼즈의 집시 여인이 플라멩코 춤을 추고 나서 받는 돈을 보았는데 고작 동전이었다. 여인은 동전 몇 닢을 들고도 기쁜 미소로 앵콜 춤을 추었다. 적은 돈을 귀히 여기고, 하늘에 감사하며 춤추는 집시 여인. 그녀의 춤은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은 여자의 춤과 같았다.
육신의 욕망을 도모하며 세속의 승리자들을 드높이는 지상 무리들과 우리는 달리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영혼의 승리자(Soul Winner)가 되기 위해 기꺼이 하루 밥도 굶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 추위도, 배고픔도 무릅쓸 수 있다. ‘헌신의 아름다움과 희생의 고귀함, 정의로운 저항과 생활의 간소함’을 입은 영혼의 승리자들이 점차 늘어나길. 그리하여 가난한 여인들이 축복을 입고, 변경의 삶이 두각을 나타내는 세상이 되길….
임의진 | 시인이며 수필가, 목사이다. 「경향신문」 칼럼니스트로 “시골 편지”를 장기 연재 중이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5·18기념교회에서 성서연구를 인도하고 있다. 저서로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예수 동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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