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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현실주의
더글러스 러미스는 자신의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두 개의 배를 언급한다.1) 하나는 ‘타이타닉 호’이고, 또 하나는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허브 선장의 배 ‘피쿠드 호’이다. 타이타닉 호도, 피쿠드 호도 둘 다 침몰한다. 러미스는 이 두 개의 배를 은유로 사용해서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타이타닉 호 안에는 수많은 일상사가 있고, 각자의 일, 각자의 몫이 있다. 배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각자 맡은 일을 성실히 해야 하고, 기계는 철저히 관리되어야 한다. 각자 맡은 일을 책임 있게 하고 시스템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그것을 ‘현실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배 밖에 거대한 빙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 현실주의는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된다. 최고의 기술적 합리성과 효율적 시스템 관리에 힘입어 전속력으로 달릴수록 타이타닉 호는 침몰의 ‘때’에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실제로는 ‘묵시주의’(apocalypticism)가 된다. 반대로 타이타닉 호 안에서는 이대로 가면 빙산과 충돌한다고, 침몰한다고 외치는 ‘묵시주의’가 실제로는 ‘현실주의’이다. 현실주의가 묵시주의가 되고, 묵시주의가 현실주의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이타닉 호 안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사실은 허무주의고, 절망을 말하는 것이 사실은 낙관주의다. 이 역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외면한 채 타이타닉 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 어린 대사가 두려우면서도 실감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모두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다. 목적만이 광적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화폐가 전일적 보편성을 지니는 사회다. 만일 ‘화폐의 보편성’2)이 실제로 유일한 보편성이고, 세계경제 시스템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면,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실제로도 ‘현실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 바깥에 바다가 있고 빙산이 있듯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바깥에는 지구 생태계의 현실이 존재하며, 개인의 고유한 인간성 역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바깥에 존재한다. 화폐의 보편성은 지구 생태계의 현실도, 고유한 인간성도 포괄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포괄하지 못하면서 포괄하는 듯이 가장한 채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짓밟는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묵시주의는 이 위장된 현실인 ‘화폐 보편주의’, 즉 ‘돈귀신’이라는 우상과 대결해야 한다.
존재의 끝, 존재의 근원을 추구하는 존재론적 형태든, 아니면 종말을 기다리는 시간적 형태든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는 내적·외적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근원적·예언자적 비판을 통해 효율과 합리성이 아니라 ‘목적 자체’를 문제삼을 때 본래적인 의미에서 종교로 설 수 있다.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성자와 예언자의 노기 띤 음성은 성가시고 기분 나쁜 소음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하는 말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뛰놀 때 누구나 경험한 낙원의 명랑한 풍경이 들어 있다. 어린아이는 울 때도 기쁘게 울고, 남을 불쌍해할 때도 이기적으로 불쌍해한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현실주의이고, 아마도 어린아이의 존재 자체가 근원적인 희망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실주의일 것이다. 외견상 몽상적 유토피아주의로 보이고, 시끄럽게 보채는 울음소리로 들려도 종교는 끝까지, 마지막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비판의 보루로 남아야 한다. 끝까지 희생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인간의 일은 그 어느 것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관점을 견지할 때 믿음은 바로 그 유토피아적 ‘부정의 방식’을 통해 세상 안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실천적인 ‘생각의 힘’으로 남을 것이다.
플라비우스조의 황제들
“그만 해라!”(arci)
이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 재위) 때 로마 거리의 여러 개선문 중 하나에 새겨져 있던 낙서이다.(수에토니우스, “도미티아누스”, 『열두 명의 카이사르』, 13)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이 낙서를 전하면서 플라비우스조의 마지막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미덕과 악덕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자신의 미덕까지 악덕으로 변질시켰다.”(“도미티아누스”, 3)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아들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가 시를 읊을 때 졸았다는 이유로 동방으로 유배당하여 벌을 치고 있다가 유대전쟁(66-70)이 발발하자 전쟁 진압을 위해 유대로 파견되었다. 유대전쟁 중 쿠데타로 네로가 죽고 이후 엎치락뒤치락하는 혼란 속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닌 최초의 황제로, 원래 지방 세금징수관의 아들이었고, 군대에서 수많은 역경을 헤치고 공훈을 세워 승진을 거듭했다. 입지전적인 인물답게 그는 규율과 저축을 가장 훌륭한 덕목으로 생각했고, 귀족들의 호화로운 옷차림이나 세련된 행태를 역겨워했다.
그는 계산이 빠르고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군대와 재정을 정비하는 데 탁월하게 발휘되었다. 그는 군대의 고위직을 지방 출신의 경력 있는 장교들에게 경매를 통해 위임했고, 공직은 비싼 가격에 팔았다. 재정 상태를 개선하는 데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탐욕스럽고 악질적인 세금징수관들을 제국 전역에 파견하여 가난한 주민들을 악랄하게 쥐어짰고, 그들이 도둑질한 돈을 국고로 환수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제국의 기초를 든든히 한 매우 현명한 군주 중 하나로 꼽힌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도미티아누스의 형 티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벌인 유대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갈릴리와 유대를 피로 물들이며 유대전쟁을 대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쟁으로 60여 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티투스의 치세를 수에토니우스는 “어떠한 악덕도 볼 수 없고, 최고의 미덕을 보였다.”라고 찬미했다.
(“티투스”, 『열두 명의 카이사르』, 7) 티투스는 갑자기 죽었다.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의 차례가 왔다. 그는 81년 등극하기까지 와신상담 오래 기다렸고, 즉위하자 곧바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우리의 주, 우리의 신이 명령하신다.”라는 문구로 모든 공식 문건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의지한 세력은 자신이 월급을 인상해준 군대와 시민이었는데, 그들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지출을 했다. 그의 시대에는 토지나 사업을 통해 부를 쌓은 기사계급 출신 엘리트들이 고위직에 진출했고, 행정 분야에서도 주요 직책을 담당함으로써 제국은 점차 관료정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도미티아누스”, 『열두 명의 카이사르』)
88년 말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사투르니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황제는 반란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게 되어 공포정치를 강화하게 된다. 86년 이후 그는 자신을 ‘주이신 신’(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것은 종래의 원수제3)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원로원과의 대립이 심해졌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유력 귀족이나 정치가들을 차례차례 처형하고 그 재산을 몰수했다. 원로원은 겉으로는 아첨했지만 내심 그를 증오하면서 암살을 모의했다. 이 원로원 의원 중에는 미래에 황제를 가장 심하게 비판하게 될 역사가 타키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시대착오적인 황제숭배를 강요했고, 방문자들에게는 자신의 발에 키스하도록 했다. 자신의 절대권력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93년에는 스토아 철학자들을 이탈리아에서 모조리 추방했다. 93년부터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당한 96년까지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행해졌다. 누구 하나 전전긍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95년 도미티아누스는 사촌 클레멘스를 살해하고 그 부인을 추방했는데, 이 두 사람은 유대교도(또는 기독교도)였던 것 같다. 드디어 도미티아누스에게 두려움을 느낀 부인 도미티아가 근위병들과 공모하여 그를 침실에서 암살해버렸다.
도미티아누스 치세에는 속주 통치와 국경 방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역설적으로 이탈리아의 경제는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속주로부터 수입한 농산물로 인해 로마의 올리브 생산 농가들과 포도 재배자들은 파산하게 되었다. 토지 가격은 하락했고, 노예 공급도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소지주들과 대농장의 사정이 나빠졌다. 산업 역시 타격을 입어 도자기 공업과 유리 공업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탈리아는 점점 인구가 줄어들었고,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국가는 국고를 은행 체제로 전환하여 개인들에게 확실한 담보와 높은 이자를 대가로 자금을 대부해주었다. 속주를 통치하는 장군들에게도 통화 주조권을 부여했고, 금융업자들은 지점들을 설립하여 제국 내의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기능을 보장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이것은 금융위기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로 인한 피해는 수많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갔다.
이 같은 사태는 33년 티베리우스 황제 때 이미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기업 ‘세우테스’가 홍해 폭풍으로 세 척의 상선을 잃었고, 뒤이어 타조 깃털과 상아 가격의 폭락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같은 시기에 안디옥과 에베소에 지점을 둔 ‘말쿠스사’가 페니키아 노동자들의 파업과 관리자들의 횡령으로 인해 갑자기 도산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은행들이 파산했고, 제국의 거대한 영토를 배경으로 속주들과 로마를 상호 연결하고 있던 경제 고리는 로마의 신용위기를 제국의 외곽지역에까지 빠른 속도로 확산시켰다. 피해는 심각했다. 곳곳에서 부도가 났고, 관련자들의 자살이 이어졌다. 농민들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빚에 몰려 헐값으로 자신의 재산을 매각해야 했다. 고리대금업자들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제국의 경계 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 혼돈 속으로 침몰해갔다. 도미티아누스의 독재와 공포정치는 사실상 이러한 위기, 끝 모를 경제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되었다. 예의 그 낙서, “그만 해라!”는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의 거리를 헤매던 누군가에 의해 씌어졌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몫을 감당한 풀뿌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 해라!”라는 그 낙서는 제국의 그늘 아래 힘겹게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소리를 들려준다. 분노와 역겨움을 담아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새겼을 그 손가락이 떠오른다.
요한묵시록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조직적인 박해의 대상이었다. 유대전쟁 후 로마의 속주 유대에서는 토지수용이 행해졌고, 과중한 세금이 거두어졌다. 게다가 로마의 팔레스타인 주둔 부대와 행정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새롭게 작물세도 신설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의 세금을 늘린 데다가 가혹하게 거두었고, 로마에서 유대교로의 개종을 엄금했다. 또한 유대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여전히 유대 민족주의자들을 두려워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적 희망이 약화되지 않았고, 그런 희망은 비밀리에 유포되고 있던 묵시문학 속에서 과거의 위대한 왕과 예언자들의 이름과 결부되어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2에스드라서 3-14장은 도미티아누스 박해 때 작성된 유대 묵시문학 작품 중 하나로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메시아를 상징하는 한 사자에 의해 심판받는 환상을 보여준다.(11:38-46)
유대 묵시문학의 열렬한 독자였던 기독교인들도 묵시문학 작품을 썼는데, 그중 하나가 도미티아누스 박해 때 쓰인 요한묵시록이다. 이 편지의 저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에 충실하게 머무르라고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여러 도시의 기독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로마제국이라는 악마의 멸망과 새 세계의 도래를 희망하는 강렬한 종말의식이 편지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또한 4장 11절에서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신에 대해 요구하던 ‘주이신 하느님’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문서를 쓴 환상가는 ‘주이자 신’인 도미티아누스와 신흥 권력 엘리트들이 펼쳐 보이는 제국의 번영에 대한 화려한 수사를 상징적으로 전복시켜 권력의 실상을 보여주고, 참된 삶의 희망을 다시 일구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희망은 요한묵시록에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잉태한 아이를 통해 나타난다.(12:1-5) 아이와 여인을 공격하는 무시무시한 짐승들은 제국의 지배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짐승은 큰 표징들로 땅의 주민들을 속였고, 자기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했다.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 말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했다.(13:17)
장사꾼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한 플라비우스조는 이제 도미티아누스에 이르러 그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외견상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숭배를 강요했지만, 그것의 실질적 의미는 돈에 대한 숭배, 돈과 폭력의 원리를 삶의 전 영역에 더 철저하게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제국의 번영에 대한 선전이 난무했지만, 제국의 신민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고, 플라비우스 집안과 거기 달라붙은 한 줌의 지배집단에게 신민들이란 납세자,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돈주머니를 불려줄 숫자에 불과했다. 요컨대 도미티아누스가 스스로를 일컬어 말한 ‘주이자 신’은 돈과 권력과 숫자들의 주권을 신격화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묵시록의 환상은, 실은 환상이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의 신민들에게 그 현란한 선전선동의 실상, 즉 ‘주이자 신’인 황제신은 돈의 화신이요 괴물, 야수임을 알려주는 계시였다. 계시는 계속된다.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14:1-3, 이하 사역)
새 노래를 부르는 새 집단이 나타났다. 제국 곳곳의 황제숭배 제단에서는 돈과 권력을 기리는 찬미가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이제 어린양에게 속한 사람들이 부르는 새 노래가 큰 물소리처럼 하늘에서 들려온다. 그들은 돈귀신이 지배하는 세계를 뒤집을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새로운 원리, 새로운 노래로 소통한다. 이러한 환상에 뒤이어 무서운 재앙에 대한 예고가 이어진다. 재앙의 절정은 바빌론의 패망, 곧 로마의 패망이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저 큰 도성! 강한 도성 바빌론아 삽시간에 너에게 심판이 닥쳤구나!”(18:10)
로마 패망의 선언이 반복되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사치품과 교환가치의 확산을 통해 이윤을 얻는 상인들에게 낭패이다. “땅의 상인들도 그 여자(바빌론/로마) 때문에 슬피 울 것이다. 더 이상 자기들의 상품을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상품은 금, 은, 보석, 진주, 고운 아마포, 자주색 옷감, 비단, 진홍색 옷감, 온갖 향나무, 온갖 상아 공예품… 노예, 포로 따위이다.”(18:11-13) 이러한 물품을 팔아 그 여자 덕분에 부자가 된 상인들은 그 여자가 받는 고통이 두려워 멀찍이 서서 슬피 울 것이다.(18:15) 큰 도성 바빌론은 맷돌처럼 큰 돌이 바다에 던져지듯이 던져질 것이다. 그것은 “너의 상인들이 땅의 세력가였기 때문이며 모든 민족이 너의 마술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18:23)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은 로마체제는 하느님의 심판 아래 있고 기필코 무너진다. 재앙의 예언들은 돈과 폭력으로 지탱되는 제국의 불모성과 공허함에 대한 계시이다. 또다시 하늘이 열리고 흰말을 타고 오는 분이 벌이는 심판에 대한 환상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심판의 환상 위로 드디어 새로운 환상이 떠오른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21:1-5)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이며,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현 세계의 전복에 대한 환상이다. 나를 죽은 숫자로 만들어 등급을 매기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으로 밀어 넣으려고 끊임없이 강요하는 좀비들이 사라진 세계, 살아 있는 삶이 중심이 되는 세계에 대한 환상이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22:1-5)
이처럼 요한묵시록은 로마제국의 지배원리를 상징적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외견상 드러나는 요한묵시록의 폭력적 언어와 복수의 정서 근저에 깔린 것은 실은 어린양처럼 여리고도 간절한 소망이다. 그것은 실제로 인류의 생명을 이어온 사람들,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준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감춰진 소망이다. 그것은 어린양과 그에게서 나오는 생명수가 삶의 중심이 되는 세계에 대한 소망이고, 더 이상 화폐 전체주의에 의해 인간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세계,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다.
‘시스템’의 진보와 ‘인간’의 퇴보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은 ‘화폐적 보편성’에 입각한 통계수치를 통해 개인을 지배하고, 결국은 전체주의 사회를 도래시킨다. 모든 것은 등가원칙에 의해 지배되며, 동일하지 않은 것을 추상적인 크기로 환산함으로써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무한히 확대되는 사물의 내면성, ‘신비’ 등은 간단히 허상으로 취급해버린다. 결국 전체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신들’과 사물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 ‘질’이며, 이처럼 사물의 내적·질적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 세계는 기계들의 세계이고, 그때 세계는 인간기계들에게 종속된다. 그때는 도덕과 종교를 밀어낸 자리에 시스템 자체가 하나의 형이상학이 되고,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된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도 시스템이 결정한다. 시스템에 복종하면 선이고, 시스템을 거스르면 악이다. 시스템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가 존재와 비존재를 결정한다. 시스템을 통한 전면적인 지배다.
이러한 시스템의 지배는 반드시 “기술주의적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특이한 종류의 전체주의”로 가게 된다.4)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적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되면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술 및 통치 시스템과 이를 운용하는 집단이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개인은 시스템과 그것을 운용하는 경제적·기술적 세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대신 시스템에 의해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받게 되었다. 지배집단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대중에게 돌아가는 재화의 절대적 양이 증대되는 만큼 대중에 대한 지배집단의 조종 가능성은 커진다. 자유를 내어주고 지배당하는 대가로 얻은 생활수준의 향상은-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이마저도 위기상태에 몰렸지만-그 자체가 ‘정신의 물화(物化)’에 해당한다. 이것은 전 사회적으로 ‘정신’이 천박하고 위선적이 된 데서 잘 드러난다. 시스템의 진보가 인간의 진보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화’를 통한 지배는 시스템의 진보가 인간의 퇴보로 바뀌는 현상의 핵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스템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물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결과적으로 시스템의 진보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실질적인 불행을 보지 못하게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장막의 기능을 한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세계에서 ‘정신’은 숨을 쉴 수 없다. 정신의 진정한 속성은 물화에 대한 부정이며,5) 물질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이 상품이 되고 언어가 선전도구가 되는 세계에서 인간의 자율적 생각과 관련된 것들, 가령 사상과 종교, 예술은 공허해진다. 따라서 국가 시스템이든 경제 시스템이든 시스템 안에서만 생각하고 시스템 안에서 내 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정신과 생각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참 존재에 대한 부정이며 불경(不敬)이다.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시스템의 지배에 맞서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시스템에 의한 ‘물화’를 거부하고 물질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추구하는 것은 믿음의 실천에서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시스템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세계에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신앙도, 민주주의도, 시도 없다. 인간은 자율적이 되는 만큼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 대한 시스템의 심각한 침해를 허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근원적인 죄악일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산될 수 있는 것, 계산의 계산인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은 극단적으로 관철되지만, 다른 모든 개별성은 화폐의 추상적 숫자로 환원된다. 화폐의 추상성도 분명 하나의 개별성에 불과하건만, 이 개별성은 자기 외의 다른 어떤 개별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닌 내적 무한성에 대해 색맹인 개별성이다. 따라서 ‘화폐적 보편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 동질화의 경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며, 내가 발 딛고 사는 장소와 그 장소에 서식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그들을 돌보는 대신 전체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잔혹한 짓을 하는 것을 서슴지 않게 만든다. 즉 ‘화폐적 보편성’에 의한 전체주의 시대의 도래이다.
이러한 전체주의 사회에서 믿음은 바로 그 전체주의를 거부함으로써만 진정한 믿음으로 설 수 있다. 그래야만 야만적 관성에 아첨하지 않고 시대와 맞설 수 있게 된다. 전체주의는 삶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침해하고,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인간적 경험을 소멸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악의 문제와 덕행이라는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관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시스템의 울타리를 세워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도덕적 감수성과 선악에 대한 판단을 시스템의 권위적인 명령에 양도하고 그저 시스템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만 골몰한다. 최대한 시스템과 나를 일체화시키는 것만이 선인데, 사실 그러한 일체화란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결과 개인들은 시스템 밖에서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에워싸고 있는 빈곤과 나약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스템은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스러운 창조세계”가 아니라 “조작된 세계, 인공적인 세계”일 뿐이다.6) 이 인공적인 세계에서 개인은 타자의 존재를 느낄 필요도 없으며, 아무도 딴 사람에게 다가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관계가 소멸된 사회는 예술과 종교가 소멸된 사회이며, 이런 사회에서 종교와 예술의 유일한 가능성은 그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로서만 존재한다.
종교가 지니는 종말론적 지평, 내지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에 의한 지배’와 근원적으로 불화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비판이론가였던 호르크하이머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전혀 반성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신학을 포함하지 않은 정치는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결국은 그냥 장사에 불과하다.”7) 이 말은 정치에 대한 말이면서 종교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종교적 감수성을 추동시키는 절대적 정의에 대한 갈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종교의 중심적 충동을 “보다 나은 상태를 향한 저항과 갈망, 즉 마음 없는 세계에서 마음을 갈망하는 것,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종교의 근저에 깔려 있는 정의를 향한 충동은 종교가 지니는 생동성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호르크하이머가 모든 정치는 신학적 동기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하고 있는 말은 정의로운 세계를 향한 모든 노력, 즉 정치는 인간다운 삶을 향한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갈망에 의해 추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든, 종교든 유토피아적 차원을 보존하지 않는다면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된 장사로 전락하고 만다.
요한묵시록에서 보듯 기독교의 경우 유토피아적 동경을 보존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 근저에 깔려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유토피아적이고 종말론적인 지평은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작동원리인 ‘화폐 보편주의’와 ‘시스템’의 관리에 저항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아도르노의 책 『미니마 모랄리아』(최소한의 도덕)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유명한 결론 구절에서 그는 ‘사유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세계를 옮겨놓고 낯설게 해서 세계란 대체 무엇인지, 언젠가 메시아적인 빛에서 드러나게 될 그 남루하고 뒤틀린 모습, 그 균열과 간극이 보일 수 있는”8)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설익고 값싼 화해나 거짓된 조화를 이루고자 하지 않는 ‘부정의 유토피아주의’이다. 뱀처럼 영리하고 강철같이 강고한 이 시대의 지배자들, 시스템의 관리자들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찬미하지만, 믿음의 인간들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전체주의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만드는 저 악마의 과정을 계시의 빛 아래 조명해야 할 것이다. 오래전 요한 묵시가가 그랬듯이 말이다.
1)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김종철·이반 역, 녹색평론사, 2000, 13-20.
2) ‘화폐적 보편성’이라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수치에 의한 획일화를 설명하기 위해 알랭 바디유가 그의 저서 『사도 바울』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Alain Badiou,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현성환 역, 새물결, 2008.
3) ‘원수’(princeps)는 원래 아우구스투스가 선호하던 칭호로서 ‘제1시민’을 뜻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과 군대를 장악한 명실상부한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면서도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제적 이상을 존중하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러한 맥락에서 ‘황제’(imperator)라는 칭호보다 ‘원수’라는 칭호를 선호했다.
4) Lee Hoinacki,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김종철 역, 녹색평론사, 2007, 125.
5) T.W. Adorno·M. Horkheimer,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역, 문학과지성사, 2001, 17.
6) Lee Hoinacki, 184, 191.
7) Max Horkheimer, Die Sehnsucht nach dem ganz Anderen: Ein Interview mit Kommentar von Helmut Gumnior(Hamburg: Furche Verlag, 1970), 60.
8) Theodor Adorno,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 김유동 역, 도서출판 길, 2005, 325.
박경미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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