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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예상보다 빠르게 상황이 바뀌었다. 사드 철폐 요구와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도 꿈쩍 않던 30%대 철옹성 지지벽이 맥없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문제의 당사자는 바뀌지 않는다. 부질없는 미봉책을 계속 들고 나온다. 반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책략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에는 역사의 추가 너무 멀리 옮겨진 것 같다. 지금은 10년의 퇴행 역사를 마무리하고 역사의 순행을 준비해야 할 때이리라. 이를 위해 맹자와 신명기적 역사서와 신명기를 이어서 읽고자 한다.
1
맹자는 잘 알려져 있듯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으로 인의예지를 설명하고, 각각을 이 네 가지 ‘덕목’의 단서라고 말한다.1) 여기서는 예(禮)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관점을 빌려 짤막하게 지난 4년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끌어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아이의 불행을 견딜 수 없는, 곧 참을 수 없는 마음(不忍之心)을 측은지심이라 하고, 이를 인(仁)의 단서라고 한다. 이 단서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곧 성장과정이다. 이 과정이 없으면 그 단서는 그 사람 안에서 메말라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확충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맹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참을/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 참을/견딜 수 없는 것(의 경계)을 이런저런 이유로 참아온 것에까지 이르게 한다면2) 이를 인(仁)이라고 한다.3)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의 폭을 넓혀가라는 말이다. 이전까지는 참고 지나쳐온 것을 더 이상 참을/견딜 수 없는 것이 되게 하는 이 과정은 지속적이어야 한다.
침몰하는 배에 갇혀 죽은 아이들은 운이 나빠 그렇게 되었지, 하고 참으며 지금까지 마음을 닫았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는 마음이 그 사건에까지 이르러 그 일이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면, 이를 인이라고 한다. 참을 수 없는 마음의 확장은 종교적 용어를 빌려 말하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회개를 거꾸로 그 과정에 비춰 이해하면, 회개는 사랑의 확대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에도 한 승마 선수를 위해 체육개혁을 챙긴 박근혜 대통령의 그 자상함(?)은 지금까지도 수장당한 아이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수신(修身)은 몸매를 가꾸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마음의 경계를 확대하여 외면하던 타자의 고통을 품는 것이다.
맹자는 의(義)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하지 않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 경계를 해온 것에 이르게 한다면, 이를 의라고 한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잘못과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때문이다. 바로 이 마음이 의의 단서로 간주된다. 의는 행위의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 마음을 확충하는 길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을 적당한 핑계를 대며 해온 것에까지 확충하는 것이다. 이를 의라고 한다. 예컨대 도둑질이 있다. 사람마다 이를 부끄러워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도둑질을 폭넓게 말하면 거기에는 공적인 제도를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포함된다. 도둑질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여기까지 이르게 하여 그렇게 축재하던 것도 부끄러워하게 된다면, 이것이 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측근과 친지를 이용하는 경우이다. 부정축재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자신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 그리 하는 것에까지 이른다면, 그 의는 보다 온전해질 것이다. 전자에서 멈춘다면, 자신은 사심이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그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심이 없다고 소리 높여온 박근혜 대통령은 도둑질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자신을 넘어 최순실과의 관계로까지 확장시켜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그가 말하는 사심 없음은 공허하고 사기에 가깝다. 의의 단서를 확장시키지 못한 탓이다.
맹자가 시비지심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4)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사사로이 여길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를 사사로이 여기는 것에까지 이르게 한다면 이것이 지(智)이다. 사(私)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음을 확충한다면, 지는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거나 뒤집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사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비록 아버지의 일일지라도 옳고 그름의 판단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 옳은 것이 될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판가름할 수 없었기에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효(孝)일 리 없다. 그것은 온 국민의 시비지심을 ‘장기적으로’ 마비시키는 일이다. 사기꾼 혐의를 받는 이명박과 칠푼이 소리를 듣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집단 지성의 ‘일시적’ 마비 결과라고 할 수 있고, 그 값을 우리는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맹자의 말을 빌리면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데, 전 국민적 차원에서 시비지심을 마비시킨다면,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 두렵기만 하다.
인의지는 예와 함께 세상을 보는 ‘윤리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최선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유일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것들과 배타적이지 않다. 보다 평화롭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공유할 수 있어서 그렇다. 그로부터 한참 멀어진 지난 10년을 마감할 날이 다가온다. 그와 같은 덕목이 존중되고 실현되는 미래가 만들어지도록 모두의 힘이 모아지고 분출되어야 하는 때이다. 성서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더 나아가 명령한다.
2
성서에는 신명기적 역사서로 일컬어지는 역사서가 있다. 신명기 신학의 관점에서 기술된 역사서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이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를 중심으로 그 역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로부터 신명기적 역사가들의 주요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신명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성서의 구분과 달리 사사시대는 사무엘서에서도 계속된다. 제사장 엘리는 사사로 불리고(삼상 4:18), 예언자 사무엘은 실질적으로 사사 역할을 하고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다.(삼상 7:13-8:2) 사사시대를 마감하는 중요한 사건이 둘 있다. 하나는 궤가 실로를 떠나는 사건으로 엘리 시대를 끝맺고, 다른 하나는 왕정 도입 사건으로 사무엘 시대를 종결짓는다.
실로를 떠난 궤는 팔레스타인 여러 도시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힘을 보여주고 이스라엘로 돌아오지만, 그곳은 실로가 아니고 벧세메스였다. 그러나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를 소홀히 다룬 탓에 궤는 그곳에서 다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지고 아비나답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삼상 4-6장) 궤가 다시 이동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여부스족의 시온성을 정복한 후 궤를 그곳으로 옮겨올 때였다.(삼하 6장)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궤: 실로를 떠남(삼상 4-6장)→왕정 도입(삼상 8-12장): 사울과 다윗→궤: 예루살렘 도착(삼하 6장)
다윗은 이 궤를 위해 성전을 짓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만 받고 성전 건축은 그 아들의 몫이라고 한다.(삼하 7장) 성전이 솔로몬에 의해 세워지고 궤가 그곳에 안치된다.(왕상 5-8장)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궤를 위한 성전 건축 계획: 다윗(삼하 7장)→성전 건축과 궤 안치: 솔로몬(왕상 5-9장)
이렇게 보면 사무엘상 1장부터 열왕기하 8장까지는 궤를 중심으로 하고, 왕정의 도입은 그 계기와 상관없이 궤의 이 같은 이동을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역으로 그와 같은 궤 이동은 예루살렘 왕권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그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궤와 성전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열왕기하 25장은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성전의 파괴를 보도하기 때문이다. 이를 포함해서 위의 도표를 확대하면 다음과 같다.
궤를 위한 성전 건축 계획: 다윗(삼하 7장)→성전 건축과 궤 안치: 솔로몬(왕상 5-8장)→성전 파괴(왕하 25장)
궤와 성전이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간다는 사실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신명기적 역사가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관심의 방향이다. 궤가 떠난 북이스라엘의 실로와 성전이 파괴된 유다 예루살렘의 공통점은 두 지역 모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데 있다. 궤와 성전은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 동행과 보호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 궤가 떠나고 그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강조해서 이야기하던 대로 하나님의 지지 철회 선언과 심판을 뜻한다.(렘 7:12-15, 26:1-9 참조) 바로 여기서 신명기적 역사가들의 성찰이 시작된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을까? 그에 대한 답은 왕정 초기의 왕인 사울과 다윗 이야기에 숨어 있다.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으로의 이행은 아무 갈등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정 도입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한 것으로 규정된 만큼 그로 인한 갈등은 왕정 초기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울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러워야 하겠지만, 성서는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사울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역대기를 빌려와 말하면, 다윗은 사울에 대해 그의 시대에는 궤 앞에서 묻지 않았다고 한다.(대상 13:3, 10:14 참조)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그의 말을 듣는 자로 기록된다.
물음과 들음! 신명기적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이것이 하나님과 맺어진 관계의 핵심이다. 제도의 중심은 성전과 제사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물음과 들음을 요구하는 그 관계의 외적 표현일 따름이다. 들음의 의미는 그것을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바꿔 읽으면 곧 분명해진다. 신약의 말로 하면 다음과 같다.
내 계명을 ‘갖고’ 그것들을 지키는 바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a, 이하 사역)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 14:24a)5)
‘물음’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은 없지만, 위에서 본 대로 물음과 들음, 이 두 가지는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로 간주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 물음과 들음, 성전과 제사 등 세 가지는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찾아낸 역사 이해의 바탕이지만, 그것들은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다. 앞의 둘은 성전과 제사의 전제로서 이것들의 존재와 의미를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과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이 세 가지는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찾아낸 역사 이해의 한 축이다. 이를 수직적인 축이라고 한다면, 수평적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축이 있다. 그것은 수직적 축의 수평적 투영 내지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수평적인 축에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윗의 정치를 한 절로 이렇게 평가하면서 그 구성요소를 분명한 말로 밝힌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되 다윗은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시행하였다.(삼하 8:15, 대상 18:14 참조)
물론 다윗은 개인적으로 크고 작은 과실을 범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위의 관점에 비춰 말한다면, 회개함으로써(삼하 11-12장) 그와 같은 ‘씨앗들’을 계속 확장시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시행한 정의와 공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도가 없기 때문에 그것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성서의 언어로 소박하게 말하자면, 고난당하는 자, 억눌린 자, 갇힌 자, 수탈당하는 자, 가난한 자, 고아, 과부, 이주민 등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은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어야 할 대상이다.(시 140:12, 146:7, 렘 23:3 등 참조)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것이 정의와 공의의 출발점이다. 야훼 자신이 정의를 사랑하고(사 61:8),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시행하는 분(렘 9:24, 출 22:21-27)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애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그와 동행하는 것뿐이다.(미 6:8) 이것이 선이다.
그렇다면 약자를 편드는 정의와 공의의 시행 결과는 무엇인가? 이것도 직접 알려주는 보도는 없다. 그렇지만 솔로몬의 예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초기) 정치에 대해 하나님이 그에게 정의와 공의를 시행하게 했다고 한다.(왕상 10:9) 이러한 정치의 결과는 안팎으로의 평화이다. 그 평화는 이렇게 그려진다.
솔로몬 시대에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각자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왕상 4:25)
이 평화의 모습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는 그것이 종말론적 평화를 그릴 때에도 그대로 차용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이 집을 짓고 (거기) 살고 포도원을 가꾸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짓고 타인이 살지 않고 그들이 심고 타인이 먹지 않을 것이다.(사 65:21-22a, 미 4:4도 참조)
종말론적 평화는 곧 정의와 공의의 궁극적 실현이다. 평화를 낳는 정의와 공의가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찾아낸 수평적 축이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으로 꼽는 므낫세의 죄에는 무고한 피를 흘린 폭력이 포함된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와 평화가 그 내용인 수평적 축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수직적 축과 수평적 축이 교차하는 지점이 평화이다. 역대기의 도움을 빌려 말하자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던 이유는 비록 전쟁에서이지만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대상 22:8, 28:3) 이는 성전이 평화의 상징임을 시사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지향하는 곳이 평화의 세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처음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명기적 역사서에서 수직적 축과 수평적 축은 합하여 전체를 이룬다. 전자는 후자의 바탕을 이루고, 후자는 전자를 참이 되게 한다. 양자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양자의 분리는 양자를 모두 공허한 것이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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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신명기적 역사서의 사상적 배경은 신명기에 있다. 이를 신명기 6장1-19절과 10장 12-22절에 국한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신명기 6장 1-19절
이 단락은 1-3절, 4-9절, 그리고 10-19절의 작은 단락으로 다시 나눠진다. 그것들은 각각 다음과 같은 얼개들이 보여주는 대로 야훼 경외와 법 실천이 중심을 이룬다.
1-3 법 가르침, 법 실천, 땅 / 경외, 법 실천, 복 / 법 들음, 법 실천, 복, 땅
4-9 야훼(의 말) 들음6) / 온 맘으로 야훼 사랑 / 말씀을 마음에 새김
10-19 땅 / 경외, 다른 신 / 시험, 법 실천 / 복, 땅
이미 위에서 본 대로 성전과 제사와 함께 수직축을 구성하는 이 두 가지 요소는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5-11장에서 계속 반복된다.
2) 신명기 10장 12-22절
이 단락은 야훼가 이스라엘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12-13절은 법 실천을 함축하고 있지만 하나님 경외가 그 내용을 대표하고, 14-19절은 법 실천의 자세와 특히 이주민 사랑을 법 실천의 내용으로 강조한다. 20-22절에서는 다시 경외가 다루어진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0, 12a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A a 12bα1 야훼 경외
b 12bα2 그의 길 가는 것
a 12bα3 야훼 사랑
b 12bβγ 온 마음 온 뜻으로 그를 섬기는 것
B 13 법 실천
14-15 하나님-만물의 주
하나님-너희 선택
16 겸손: 마음에 할례, 목을 곧게 말라
17 야훼: 최고 신, 최고 주, 능력의 하나님, 두려우신 하나님
공정, 이주민 사랑, 약자를 위한 정의 시행
18-19 이주민 사랑
A 20 야훼 경외, 의지
21-22 하나님: 너의 찬송, 두려우신 하나님
능력: 약속 실현(자손 약속)
통상적인 AB(C)BA 형식의 교차법 구조는 AA에 초점을 맞춘다. ABA 형식의 이 단락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경외와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 경외는 법 실천을 매개로 표현될 수 있고 또 표현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목을 곧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함축하고, 이주민을 사랑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와 이주민에 대한 그의 사랑을 닮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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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 경외와 사랑을 한 축으로 하고, 사람 사랑과 정의 실천을 다른 축으로 한다. 이러한 요구의 배후에는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해방 경험이 있다. 이를 앞에서 언급된 단서들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경험으로 마련된 혹은 일깨워진 단서들의 확장이 하나님의 요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약자 편에 서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은 그의 사랑의 영역을 넓혀 타자, 특히 약자와 고통당하는 자에게 공감하고 그 안에 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다. 믿음은 씨앗과 같고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은 확충을 기다리는 단서들과 같다. 확충 없는 단서들과 마찬가지로 수평적 확장 없는 믿음은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 죽음의 힘은 자신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변혁의 때에 믿음의 수평적 확장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1) 孟子 公孫丑 上 6(『맹자』 공손추 상 6)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母
…왜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참지/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가? 지금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다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 것이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는 것도 아니고, 고을 사람들과 친구들에게서 영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명성을 싫어하지 않아도 그렇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실마리이다. …무릇 나에게 네 실마리가 있다는 것은-누구나 이를 알고 그것을 확충할 따름이다-불이 처음 붙고,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다. 만일 이를 확충할 수 있으면 온 천하를 보전하는 데 충분하고, 그것을 확충하지 못하면 부모를 섬기는 데도 부족할 것이다.
2) 人皆有所不忍 達之於其所忍 仁也
이 본문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이유는 지(之)를 지나쳐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명사로서 앞 구절의 소불인(所不忍)을 받고 달(達)의 목적어가 된다. 그러면 달(達)은 ‘이르게 하다’를 뜻하고 실마리를 확충하는 방법이 된다.(번역은 아래 각주 3 참조) 맹자는 『양혜왕』 상 7장에서 “그러므로 은혜를 확장시키면 온 천하를 보전하는 데 충분하고 은혜를 확장시키지 않으면 그것으로는 처자도 보전하지 못합니다. 옛날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난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것을 잘 확충했을 뿐입니다.”(故推恩足以保四海 不推恩無以保妻子 故之人所以大過人者 無他焉 善推其所爲而已矣)에서처럼 확충 방법을 나타내는 또 다른 말로 추(推)를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환진, “맹자의 추(推), 그리고 잠언의 마음 닦음”, 이덕주 외, 『해천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 그 기억과 꿈』(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2016), 339-358 참조.
3) 孟子 盡心章 下 31(『맹자』 진심장 하 31)
…人皆有所不忍 達之於其所忍 仁也 人皆有所不爲 達之於其所爲 義也 人能充無欲害人之心 而仁不可勝用也 人能充無穿踰之心 而義不可勝用也 人能充無受爾汝之實 無所往而不爲義也 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餂之也 是皆穿踰之類也
…사람은 누구에게나 참지/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를 (넓혀) 그가 (이제까지) 참아온/지나쳐온 것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이) 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를 (넓혀) 그가 해오던 것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이) 의이다. 사람이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확충할 수 있으면, 인(仁)은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다. 사람이 구멍을 뚫고 담을 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확충할 수 있다면, 의(義)는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너, 너’ 하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그 ‘앙금’이 없음을 확충할 수 있다면, 어디를 가든 의를 행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선비가 말할 수 없는데 말하면 이는 말로 낚아내는 것이고,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으면 이는 말하지 않음으로 낚아내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구멍을 뚫고 담을 넘는 것과 같다.
4) 人能充無思私之心 而智不可勝用也
사람이 사(적 이익)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음을 확충할 수 있으면, 지(智)는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5) 이것은 요한복음이 신명기적 전통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6) 쉐마(들으라!) 본문인 6장 4절은 야훼가 유일신임을 말하는 것으로 자주 해석되지만, 구조적 이해는 다른 결론에 이르게 한다. 평행법에서 동일한 어구는 생략될 수 있다. 그러면 4절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보이고, ‘야훼 우리 하나님’과 ‘야훼 한 분’은 모두 ‘들으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된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야훼 우리 하나님
X X X 야훼 한 분
에스겔 2장 2절도 이와 닮은 문장 구성을 보인다. 히브리어 어순을 따라 그대로 옮기면 ‘나는 들었다 내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를 우리말로 바꾸면 ‘나는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을 들었다.’가 된다. 이를 따라 4절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야훼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X X X 야훼 한 분(만의 말씀)을
이렇게 읽을 때 4절은 앞뒤 문맥에 잘 맞는다. 이 구절이 유일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셋째 단락의 14-15절이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니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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