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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읽기 (7)
성서情談 (2016년 9월호)

 

  소금이 녹으면 보이지 않는다
  

본문

 

교회는 윤동주를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목사님들이 말씀 중에 종종 록펠러나 슈바이처 같은 인물을 예로 드는 경우가 있다. 그들 이야기를 여러 해 동안 또 여러 목사님에게서 들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명한 예화집이나 설교집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아무튼 들을 때마다 솔직히 나는 딴생각을 한다. 그들을 인용하는 것이 설교 목적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셔서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기독교적인 삶을 산 사람들도 아니고, 또 훌륭한 인물이라 하기에도 부족한 점이 있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사람을 예로 들든 나처럼 삐딱한 인간이 못마땅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록펠러든 슈바이처든 필요하다면 그 누구든 예로 들 수 있다.
사실 문제는 그 반대 경우이다. 세상에서 훌륭한 인물, 위인이라고 일컫는 인물들을 교회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말이다. 누가 봐도 멋지고 훌륭한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어.”라고 말하면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기 쉽고, 견강부회해서 예수와 연결시키려는 예수쟁이들의 극성으로 몰리기도 쉽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의 삶을 살았던 훌륭한 분들에 대해 말하면 왠지 어색하게 서걱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무조건 우기는 것 같은 불편한 기분도 든다. 사실인데도 말이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나부터 그러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다 보니 올해에만 윤동주(尹東柱)에 대해 심포지엄, 시상식 강연, 특강, 대중 강연까지 네 번이나 공식적으로 말할 기회가 있었다. 네 번 모두 목적이 달라 그때마다 윤동주의 다른 측면을 부각해서 말했고,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해서는 거의 다 살펴본 듯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윤동주의 여러 면을 속속들이 다 설명했지만 정작 중요한 점, 가장 근본이라고 생각되는 점은 어디서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앞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자, 한국인의 애송시 5위 안에 꼭 드는 명작 <서시>를 지은 멋쟁이 윤동주의 핵심이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아마도 대부분 눈살을 찌푸릴 거다. “그런 식으로 편협하게 보면 안 되지.”라는 점잖은 충고부터 “교회의 ‘교’ 자만 나와도 예수쟁이래. 니들 멋대로 해.”라는 비아냥거림까지 꽤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윤동주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단지 그가 만주 용정에서 교회에 다녔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미션스쿨인 연희전문학교를 나왔고, <십자가> 등과 같은 기독교적 시를 썼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본질이 아니다. 미션스쿨을 다니지 않았어도, 그의 시에서 예수와 관계된 것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도 상관없다. 그의 삶이, 그가 걸어간 발자취가 예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훌륭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윤동주의 삶이 분명 예수의 삶,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알게 될 것이다.

시를 썼기에 시인이다, 당연히?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듣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주억거린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함정이 있다. 매번 언제나 성공‘만’ 하는 사람은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는다는 점이다. 성공한 사람도 당연히 이런저런 주춤거림과 실패나 곤경을 겪지만, 성공 스토리에는 그런 점이 부각되지 않거나, 언급되더라도 결국 성공했기에 그 괴로움이 축소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잘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공만 했다고 생각하며, 실패나 좌절, 낙심은 전혀 없이 줄기차게 성공, 성공, 성공으로만 향해 달렸고, 그렇게 성취했다고 믿는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성공한 사람과 비교해서 자꾸 스스로를 비하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될 수 없어.”라며 쓸쓸히 고개를 젓는다.
종종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과도하게 생각하는 교만이 문제인 줄로만 알지, 거꾸로 자신을 너무 하찮게 보는 것이 더 문제인 줄은 모른다.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냉철한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당당히 “나를 본받으라”(빌 3:17)며 교만으로 비칠 만한 말을 하기도 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의 진심을 파악할 수 있다. 바울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다.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당신은 못나지도, 그렇다고 잘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이건 말이 쉽지, 생각보다 어렵다. 남들이 환호해도 흥분하지 않고, 남들이 비난해도 주눅 들지 않는 삶이다. 성공해도 제 분수를 알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이란 여간 힘들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인물 한 명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윤동주를 꼽는다.
윤동주는 성공한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니었다. 뜬금없는 말장난 같지만, 그의 인생을 엄밀히 따지면, 그는 고흐 같은 인물이었지, 피카소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죽은 후 유명해졌지, 살아생전에는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시를 썼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시인으로 당대에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고 그의 시집이 출간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를 읽은 지인들이 훌륭하다고 찬탄했을지는 모르지만, 단지 그 정도였다. 냉정히 말해,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시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스스로 자기 시를 뽑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내려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시의 내용이 불온해서 일제의 검열에 걸릴 것이라는 충고 때문이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동주>를 보면 그가 자신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서 출간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그것은 그냥 영화적 허구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누군가에게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럭저럭 했을 뿐이다. 그런데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점은 그래도 그는 ‘계속’ 시를 썼다는 점이다.
윤동주는 고민과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조국을 떠나 만주에 정착한 디아스포라 이주민이었다는 것이나, 말과 글을 빼앗긴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살았다는 것처럼 거대한 상황도 그랬지만, 그보다 더 그를 힘겹게 한 것은 어쩌면 고종사촌 형 송몽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이가 아주 좋았고 평생을 같이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프랑스 문화이론가인 르네 지라르 식으로 말하면, ‘짝패 갈등’을 일으키기에 가장 전형적인 상황이었다.
송몽규의 나이가 훨씬 많다면 덜했을 텐데 그는 불과 몇 개월 먼저 태어났고, 윤동주와는 친구처럼 지냈다. 송몽규는 김구 계열의 민족운동 집단에 들어가 활동하다 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고, 「동아일보」에 <술가락>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게다가 송몽규는 그 지역 최고의 수재였다. 이들과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낸 문익환 목사가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이는 송몽규였고, 다음이 윤동주, 그리고 나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가 자신을 마지막에 놓은 것은 그의 겸손일 수 있지만, 어떻든 모두가 인정하는 탁월한 이는 바로 송몽규였다. 따지고 보면, 송몽규는 하는 것마다 최고였다. 일도 술술 풀렸다. 송몽규는 대학 입시에서도 당당히 교토 제국대학에 붙었지만, 윤동주는 떨어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쿄의 릿교 대학으로 갔던 것이다. 창씨개명까지 하는 치욕과 심적 괴로움을 안고 도전한 대학이었는데 말이다.
공부도 잘하고 민족운동도 했고 게다가 하는 일도 잘 풀리는 송몽규를 보고 윤동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송몽규를 미워했을까, 질시했을까?
“대기만성(大器晩成)이야, 대기만성….”을 되뇌었다는 지인들의 회고를 들으면, 그도 인간이니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은 죽어라 노력하는데도 등단도 못하고 대학도 떨어졌는데, 송몽규는 민족운동도 하고 등단도 하고 대학도 척척 붙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송몽규를 미워하지도, 질시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제 길을 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를, 등단도 하지 못한 시를, 언제 출판할지 기약도 없는 시를, 그저 계속 썼다, 묵묵히.
그러지 않았다면 오늘날 윤동주는 윤동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시인이 되고 훌륭한 민족 시인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시를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살펴보면 ‘너무 당연하다’는 말을 하기가 저어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들의 시선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남들의 환호에 우쭐댈 필요도 없다. 그냥 묵묵히 제 길을 가면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삶이다.

매력적인 사람은 멋지다, 당연히!
말했듯이 윤동주가 시인이 된 것은 계속 시를 썼기 때문인데, 오늘날 우리가 그의 시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두 명의 헌신적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명은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이고, 다른 한 명은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동기 강처중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비록 윤동주가 시를 썼어도 그는 시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쓴 시가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자선 시집을 출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은사인 이양하 교수가 출간을 보류하라고 했다. 그래서 윤동주는 원고지에 자필로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세 부를 만들어, 하나는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갖고, 세 번째 것은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그리고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이 세 부의 시집의 행방은 소설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윤동주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은 일본에서 검거될 때 같이 압수되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양하 교수에게 준 것도 사라졌다. 한국전쟁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곧잘 쓰기는 했지만 학생이 쓴 육필원고를 신줏단지처럼 보관할 이유도, 또 그럴 여유와 경황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신줏단지처럼 보관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병욱이다.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우리 젊은이들을 학도병으로 마구 끌고갔다. 대부분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죽어 돌아오지 못했기에, 학도병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 그가 자신의 모친께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일제가 망하든지, 일본에서 동주 형이 돌아오든지, 아무튼 이 시집을 잘 보관했다가 출간해주세요.”
이것이 실화이기에 그렇지, 소설이나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개연성이 없다면서 수많은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릴 것이다. 아니 세상에 자신이 죽음의 길을 가는데, 자기 것도 아니고, 또 유명한 시인의 시도 아닌 것을 모친에게 잘 보관해달라고 유언처럼 말하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그 어머니도 대단한 분이었다. 아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데 그깟 시집 하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떤 젊은이의 시집을 신줏단지처럼 보관했다. 따지고 보면, 그 젊은이는 지금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지 않은가. 자신의 아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편안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 대단한 어머니는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보관했다. 마루 밑을 파서 솥단지를 묻은 후 그 안에 태극기와 함께 넣고는 다시 마루를 덮어 잘 보관했다. 이후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아들에게 그것을 꺼내준다. 이렇게 해서 윤동주의 위대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강처중은 윤동주가 일본에 건너가서 쓴 시들을 꼼꼼히 모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윤동주가 일본에 건너가서 죽기까지 창작한 그의 마지막 시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강처중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물건들과 사용하던 기물들까지 빠짐없이 보관했다가 후일 그의 유족에게 건네주었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너무 당연한 질문이 생긴다. 대체 이들은 왜 자신의 일도 아닌 일에 이토록 열성적으로 나섰을까? 자신이 죽으러 가는 마당에도 그의 시를 보관하고, 일본의 서슬 퍼런 감시에도 가지고 있으면 곤란할 것들을 하나도 허투루 취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윤동주의 시가 너무나도 탁월하고 뛰어나서? 잘 보관하면 훗날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미래를 내다봐서? 말도 안 된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이 윤동주의 시를 보관한 이유는 간단하다. 윤동주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보다 윤동주가 더 좋았던 것이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양하 교수가 시집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보관한 것에 비교하면 이를 알 수 있다. 이양하 교수에게는 그저 한 명의 학생이었지만, 이들에게 윤동주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멋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소금은 녹아야 짜다, 너무나도 당연히
자신이 차별당해 승진하지 못했다고 앙앙불락하는 졸업생에게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리더십을 비교해서 말한 적이 있다. 회사에서 복사하는 예를 들었다.
“한국 사람은 복사를 하다가 종이가 부족하면 옆에 있는 복사용지를 채워 넣은 후 복사를 마저 한다.”
무슨 소린가 할 정도로 너무 당연하고 뻔한 소리라며 그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모든 미국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들도 복사하다 종이가 떨어지면 복사용지를 채워 넣지. 그런데 때때로 자신의 복사가 끝난 후에 종이가 떨어지지 않아도 복사용지를 채워 넣어.”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을 덧붙였다.
“그냥 그래. 남을 위한 행동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에 대한 배려도, 선행도 아닌 그냥 그렇게 삶과 행동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체질화되어 확장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둘 중 누구를 뽑을까? 누구를 승진시킬까? 굳이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 주변에 같이 있으면 뭔지 모르지만 편안하고 행복하며 쾌활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지. 왜 그런 편안함이 드는가? 그가 유머러스하고 말을 잘 해서? 돈에 구애됨이 없이 써서? 아니면 미남, 미녀여서? 반대로, 싫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긴장되는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보라.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없고, 그의 행동이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것이 없어도, 왠지 그와 함께 있을 때 불편하고 거북하다면 왜 그럴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둘 중 누가 더 매력적인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가?
예수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당신 하나 힘들고 어려워도 주변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을 선택하도록 하라.’ 이 명제가 아마도 사회윤리의 핵심일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좁은 길을 따라가라는 것이 예수의 철저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넘치고 넘쳐도 도무지 주변이 쾌적하지도, 행복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사사건건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목소리만 가득하다. 예수 믿는 자는 바보처럼 시비를 가리지도 말고 무조건 손해를 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성전의 장사하는 사람들을 쓸어버렸고, 분노했고(마 21:12-13), 사회 불의를 보고 사사건건 비판했다.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배려가 배려인 줄 모를 정도로 평안과 행복의 영역이 커져 있는 진정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 되라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윤동주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후배가, 그의 친구가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했고 그를 따르고 그의 것을 지키고 아꼈다. 이것이 윤동주를 윤동주가 되게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윤동주가 예수를 믿었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어떻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든 그렇지 않든 그가 예수의 제자처럼 살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굳이 교회에서 윤동주를 외칠 필요도 없다. 윤동주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마 5:13-16)처럼 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예수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쓸데없다고 했다. 소금은 녹아야 짜다. 있지만 있지 않은 것처럼 되어야 진정한 맛이 난다. 소금이 눈에 보인다면 맛이 날 수 없다. 낙심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배려가 배려인 줄 모르고 선행이 선행인 줄 모르는, 그저 넉넉하게 웃고 받아주고 이해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예수의 길, 제자의 길, 소금의 길이다. 소금은 보이지 않는다. 녹으면 말이다. 그리고 녹아야 짜다. 당연히 말이다.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2023년 8월호(통권 7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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