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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홍수 이야기가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이런 배열은 이미 고대 근동의 이야기인 ‘아트람하시스’에서 발견된다.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이렇게 지근거리에 둔 것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내적 필요에 대한 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 답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는 그저 ‘말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해두자.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려면 그 배후의 사람들이 어떤 필요 때문에 무슨 질문을 던졌길래 그러한 답이 주어졌는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하나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야기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독자에게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또한 이야기의 각 구성 요소에 좌표를 정해주는 준거점(조금 더 넓게 이야기하면 준거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을 찾는 ‘객관적’ 방법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다. 이 때문에 소통은 더 나은 이해로 가는 길이 된다. 그렇지만 소통은 독재자나 요구하는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다. 거기에는 비판적 사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름의 인정’이라는 말로 단지 공존하는 것을 겨냥하지도 않는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그런 구절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보고 탄성을 지르며 했던 ‘참 좋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산출해낸 세계의 한 면을 들여다보는 데에도 기여한다. 하나님마저 감탄하게 만든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질서, 조화, 평화, 상생, 풍요 등의 단어들을 합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세상이라면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데 창조주의 그 말로 현재를 비춰보면, 현 세계를 보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결코 아니다. 그러면 세계는 자기 본래의 모습을 거기서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찾아야 할 것이다. 예언서에서는 그 모습이 종말론적 평화의 세계상으로 그려진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세계이다. 존재자 각각의 그 존재 이유가 의심당하거나 부정당하지 않는 세상이다. 권력과 부, 종교와 인종, 교육과 성, 신분과 지역, 인간과 동물 등이 차별과 편견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자는 ‘생명’의 구체적 실현자로서 존재 이유를 그 안에 갖고 있다. 창조 이야기는 이 사실에 대한 근원적 긍정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를 조건적인 것으로 만들고 부정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홍수 이야기가 다루려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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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이야기를 읽는 데 준거가 되는 구절을 찾는다면 아마도 창세기 8장 21-22절일 것이다.
야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 그 마음에 다짐하셨다.
‘내가 또다시 사람 때문에 땅을 무시(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계획이 어릴 때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처럼 모든 생물을 또다시 없애지 않을 것이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창 8:21-22, 이하 사역)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홍수 후에야 그 사건의 의미를 새삼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이 악하기 때문에(창 6:5) 땅에서 사람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이 홍수의 시작이었는데, 여기서는 사람 때문에 홍수가 땅을 무시 내지 저주한 사건으로 해석된다. 사람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은 땅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은 땅의 일부이지 그 역은 아니다. 땅 중심의 이 결정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사람은 홍수에 의한 심판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기로 결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은’ 땅이 인간의 활동과 자연의 리듬이 계속되는 것을 보장하는 일종의 ‘증거’로 채택된다. 인간은 죄 가운데 있고 죄의 결과로 세상을 훼손시킴에도 그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았다. 땅을 염두에 둔 결정인 만큼 제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땅과 관계된 존재로서의 사람이기에 그 존재를 부정당할 수 없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창세기 2장에 숨어 있던 사람의 존재 이유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할 만한 일들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러한 일들을 계속해도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고 부정하는 크고 작은 자연적·사회적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폭력을 내용으로 한다. 홍수 이야기에서는 바로 그 폭력적인 사건들과 그 배후의 힘들이 일체 부정된다. 그러한 사건들과 힘들의 최대치가 곧 홍수와 부정당한 하나님 자신이기에 그렇다. 홍수 이야기는 홍수로 인간 전체의 멸망을 계획하고 집행한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이 부정하는 이야기이다. 이로써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든 세력과 시도들이 하나님에게 부정당한 하나님 안에서 다 부정된다. 사람의 존재를 부정했던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긍정한다. 사람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관계된 존재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볼 때 그 존재가 긍정된 인간은 세계에 빚진 자이다.
이처럼 창조와 홍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존재를 긍정하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는 아주 길고 긴 이야기의 첫머리이기에, 그렇게 긍정된 사람에게 직접적인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이미 그 방향을 내포하고 있다. 평화와 폭력 거부가 그것이며, 양자는 실질적으로 하나를 지향한다. 곧 땅 위에서의 생명과 삶이다. 생명이 존중되고 어우러지는 삶의 실현이 곧 평화이다. 이것이 성서적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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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유형의 폭력이 난무하고 생명이 계속해서 위협당하는 현실에서 두 이야기는 꿈같은 소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존재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부정하는 폭력은 부정당한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 이에 대한 저항이 다름 아닌 정치이다. ‘종교’는 그 가치의 보존과 확산을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투신한다. 이것을 ‘종교’의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현실 정치의 유형과 관련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두 가지 유형의 정치 행태에 대한 맹자의 이야기이다.
맹자가 말하였다.
패자의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왕자의 백성들은 너그럽고 느긋해서
덜어도 원망하지 않고
이롭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백성들은 나날이 선해져 가는데
그렇게 되어가는 줄 모른다.
군자가 지나가는 곳(사람들)은 교화되고
그가 머무는 곳(사람들)은 신묘해진다.
위아래가 다 천지와 함께 흐르는데
어찌 작게 돕는다고 하겠는가?1)
맹자는 여기서 패자 정치와 왕자 정치를 구분한다. 왕도는 의(義)를 기반으로 덕(德)의 실현을 추구하는 정치이고, 패도는 리(利)를 중시하여 현실적 이익/결과를 목표로 삼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정치에 대한 백성의 반응을 짤막하나마 언급하기 때문이다. 패자 정치는 백성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을 낳는다. 이것은 이익의 관점에서 얻어지는 것이기에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을 낳겠지만, 맹자는 거기서 멈춘다.(이것이 그의 필치가 갖는 멋일 수 있다.) 반대되는 경우에 대한 물음과 답은 왕자 정치에 관한 내용에서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한자 ‘殺’은 ‘살’이 아니라 ‘쇄’로 읽어야 한다. 이는 ‘덜다, 감하다’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다음 구절의 이(利)와 대립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손해를 끼치다’로 풀이된다. 정치가 언제나 성공적일 수는 없다. 그 결과가 백성에게 손해를 유발했을 때, 왕자 정치하의 백성은 그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다. 만약 이익을 추구하는 패자 정치에서 동일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이와 다른 반응이 생겨나리라 추측할 수 있다. 반면에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 있어도 백성은 그것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덤덤하게 여긴다. 이익 추구는 사람의 관계를 경쟁과 효율에 종속시키고 사람을 손익에 따라 반응하게 만든다. 패자 정치에서 이익은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왕자 정치에서 그것은 하위 가치로서 의에 종속된다. 그것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가치로 바뀔 뿐이다. 그리고 그 나눔이 요즘 이야기하는 ‘성장’을 가져온다.2) 의를 추구해서 생겨나는 이러한 변화는 위와 아래 모두 하늘과 땅의 흐름과 함께하는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된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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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위에서 말한 평화의 모습 아닌가? 창조와 홍수 이야기에 숨은 가치를 실현하는 정치는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익이 최고의 가치로 등극하고 맘몬의 힘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러한 정치는 가능한가? 솔직히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1% 운운하는 사회에서 아니라 하며 주저앉기에는 이익추구 정치의 폐해가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이익추구 사회의 종착점이 바로 그 1% 사회이다. 국민을 향해 개돼지 운운하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회사 임직원들을 종놈들이라고 했던 어떤 자의 의식을 뒤이은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위대 100만 명쯤은 죽여도 상관없다고 했던 자들의 변형일 뿐이다. 그런데 그 시작은 그러한 이익추구의 패자 정치를 즐거워하고 기뻐했던 백성에게 있다. 개돼지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 ‘즐거움과 기쁨’을 잊지 못해 지금도 대를 이어 충성한다. 그래서 저 권력은 300여 명의 사람들이 진도 앞바다에서 수장돼도 7시간이나 자리를 비울 수 있고, 주변국의 미사일 위협 아래에 나라를 처박는 사드를 아무렇지 않게 국민에게 들이댈 수 있었으리라. 개돼지의 즐거움과 기쁨이 그 1%와 그 권력을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그 즐거움과 기쁨을 떨쳐낼 수 있는가? 그래야 패자 정치를 무력화하고 의를 기반으로 새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때에야 개돼지 껍질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 당신이 살아날 수 있다. 당신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평화의 나라를 볼 수 있다.
1% 맞은편에 0.001%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죽은 젊은이, 실외기 수리 중 추락사한 삼성전자 하청업체 수리기사, 살수차 직사로 사경을 헤매는 농민, 삼성 백혈병이라고도 불리는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 등이다. 이들 외에도 권력과 재벌의 횡포에 맞서 싸운, 또 싸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사람이 있다. 전태일이다. 밟히고 뜯기고 버림당함으로써 그는 이 사회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 했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교회를 행동하게 했다. 권력의 횡포와 재벌의 탐욕에 눌려 있던 민중들을 일어나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또다시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발 묶은 예전 사회로 복귀하려는 듯 ‘가만히 있다.’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이 그들에게서 어른거린다. 저 많은 이들에게서 그 종은 고통당하고 죽고 살아나기를 되풀이하며 그들과 함께 이러기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고 울부짖는다. 울림 없는 그 노래의 한 대목은 이렇다.
분명히 그는 우리의 병을 지고 우리의 고통을 담당했는데
우리는 그가 재앙당했다고, 하나님께 맞아서 고통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렸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채찍질 당함으로 우리는 고침을 받았다.(사 53:4-5)3)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미안함과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 그는 어떤 자였나? ‘우리’는 처음부터 그를 오해했다. 별 볼 일 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하지도 않았고 풍채도 없어서다. 그가 야훼 앞에 햇순처럼 올라왔기에4) 기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른 땅을 비집고 나온 뿌리 같은 몰골이었다. 아무리 지켜봐도 볼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탐낼 만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멸시당하고 무시당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도 그를 으레 그렇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가 강압적으로 제재당하며 끌려가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고 저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억압당하고 고통당할 때에도 말없이 그것을 감내했듯이 재판받는 과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고 거짓을 입에 올린 적도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건 모순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그가 그렇게 죽을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맞은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듯 단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도망이었다. 무엇이 두려워서였을까? 이런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죽임당하였고 죄인들이 묻히는 곳에 묻혔다. 잊혀졌다. 그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모든 것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평화였다. 그 속에 두려움도, 비굴함(?)도 묻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우리를 뒤흔드는 소식이었다. 우리의 평화가 파괴되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식이다. 그의 말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인 하늘의 응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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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팔이 그에게 나타났다!
우리가 그 소식을 다른 이에게 전하면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야훼의 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내고 이집트 군대를 바다에 던진 그 팔이다.(출 6:6, 15:16 등 참조) 그 야훼의 팔이 그에게, 그토록 보잘것없던 그에게 어떻게 나타난다는 말인가? 말이 되나? 그렇게 연약한 그 위에 야훼의 그 강한 팔이? 누가 봐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가 들은 것을 말하고 있다.5) 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화가 그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팔이 이룩한 평화라고 한다. 그가 당한 고통과 고난 그리고 징벌은 우리가 당해야 하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었다. 그런 우리가 받을 징벌을 하나님은 그에게 대신 덮어씌우셨다고 한다. 왜? 우리의 평화를 위한 그의 고난이다. 곪을 대로 곪은 우리를 위해, 썩을 대로 썩은 우리를 위해,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해 말 없는 그가 어린양으로 선택되었다.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
야훼의 팔이 그를 죽임으로써 산산조각낸 것은 바로 우리의 상상력이다. 이집트 저 갈대바다에 묶여 있던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었다. 스크린도어 사고에서, 실외기 수리 사고에서, 진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에서… 어떻게 야훼의 팔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온전해지고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 그의 수난과 죽음 때문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께 맞은 것은 맞지만, 그가 맞을 짓을 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변화가 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다 덜어주지는 못해도 이제는 그에 대한 고마움이 덧붙여져 그의 말 없음을 대신 말하게 되었다. 야훼의 팔은 우리가 무시하는 곳에 있었고 우리가 멸시하는 사람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 앞에 세울 것이다. 그를 조롱하던 입들을 봉해버릴 것이다. 비웃음의 빛으로 가득했던 눈들을 덮어버릴 것이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평화는 머나먼 평화의 길을 열었다.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지시하는 저 끝의 평화를 바라보고 꿈꾸게 하였다.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야훼의 종들을 또 만나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건강해지고 그들 때문에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된 이들이 그 평화의 길을 계속 닦고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 종들의 존재는 우리가 병과 고통을 짊어지고 죄와 죽음의 길로 옮겨가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패자의 정치가 주는 그 가벼운 달콤함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 이미 우리는 영혼을 팔아넘기고 그 길로 들어서서 그 종들을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자. 패자의 정치를 거부하는 평화의 길이 야훼의 팔이 나타난 그 종들과 함께 열려 있지 않은가!
1) 孟子曰 覇者之民驩虞如也 王者之民皞皞如也 殺之而不怨 利之而不庸 民日遷善而不知爲之者
맹자왈 패자지민환우여야 왕자지민호호여야 쇄지이불원 리지이불용 민일천선이부지위지자
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豈曰小補之哉 - 孟子 盡心章 上
부군자소과자화 소존자신 상하여천지동류 기일소보지재 - 맹자 진심장 상
2) 『맹자집주』는 순의 경우를 그 예로 든다.
舜耕歷山 歷山之人皆讓畔 漁雷澤 雷澤上人皆讓居 陶河濱 河濱器皆不苦窳
순경역산 역산지인개양반 어뇌택 뇌택상인개양거 도하빈 하빈기개불고유
一年而所居成聚 二年成邑 三年成都 - 司馬遷 史記 五帝本紀 帝舜
일년이소거성취 이년성읍 삼년성도 -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제순
순이 역산에서 농사를 짓자 역산 사람들이 다 같이 밭두둑을 양보하였고,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자 뇌택 주위 사람들은 다 같이 거처를 양보하였고, 그가 하빈에서 그릇을 굽자 하빈 그릇에는 거칠고 이지러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1년이 지나자 그가 사는 곳은 취락을 이루었고, 2년이 지나자 읍이 되었고, 3년이 지나자 도시를 이루었다.
3) 4-5절은 abba의 교차법적 구조로 되어 있다. bb는 그가 고난당한 이유와 관련되고, aa는 그가 고난당한다는 사실과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5b절은 한편으로는 운율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와 ‘우리에게’(번역에서는 ‘우리가’)의 대립 때문에 반절을 이루고 있지만, 내용 면에서는 5bα절은 고난의 목적/이유를, 5bβ절은 결과를 나타낸다. 일종의 행 걸치기(enjambment)라고 할 수 있다.
4) 히브리어 본문은 ‘그 앞에’로 되어 있다. 대명사 ‘그’가 가리킬 수 있는 낱말은 앞 절의 야훼뿐이지만,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5) ‘쉐무아’는 ‘샤마’(듣다)의 수동분사형의 여성형이다. 그것은 현재 문맥에서 들려온 것(들은 것)을 말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기념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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