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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없고 관심도 없고
요즘 정말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있다.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우리 집 애들은 교회에 다닌다는 거다.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 다니고 있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뭔 소리냐며 뜨악해 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최근 우리 교회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분이다. 교회학교 출석률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는 심각성을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담임목사님이나 장로님들도 이런 상황에 대해 무심하신 것 같다. ‘목회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얘들은 그저 부모 따라오는 거지. 오면 좋고 안 오면 그만 아니겠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교회학교의 부진에 대해 핑계 댈 것도 수두룩하니 말이다.
“애들은 공부하기 바빠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우선 대학에 가야지.”
“젊을 땐 원래 그러는 거 아니겠어. 방황하다가도 결국 돌아와.”
이중 아무거나 갖다 붙여도 얼추 맞는 말이 된다. 아무튼 이대로라면 조만간 어른들 장례예배에서 찬송 불러줄 사람도 구하기 힘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허풍을 조금 보태면 말이다.
원체 삐딱해서 그런지, 교회에서 천하보다 한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 ‘한 생명’은 어른들만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얼라들(?)은 쏙 빼고 말이다. 하긴 예수도 이런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한껏 강조해서 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귀에 익은 말씀이어서 정황이 잘 안 들어올지 모르지만, 예수 당시에 아이들이란 인간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것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예수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복음을 어른들만 들었던 거다. 약장수처럼 “훠이! 애들은 가라.”며 아이들을 쫓아버린 거다. 그래서 예수가 그러면 안 된다며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힘써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아이들에 대한 무시와 태만이 일반적이던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저쪽이나 이쪽이나 여전한 것 같다. 친구 하나가 “애들은 헌금을 안 내잖아, 그래서 그래.”라고 한 냉소가 진실처럼 들릴 지경이다.
너무 경우 없는 심한 소리라고 눈살을 찌푸리실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번 이런 것을 생각해보시라.
아무리 초신자라도 어른들은 주일날 담임목사와 한 번은 만난다. 예배 시간을 통해 직접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안 그렇다. 교회학교가 전부이다. 거기서 신앙을 배우고 거기서 생활을 익힌다. 양식과 인격을 지닌 어른과 이제 그런 것들을 갖춰가야 할 아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취약할까? 어디에 더 힘을 쏟아야 할까? 굳이 답이 필요한가? “그래서 교회학교에 전문 교역자가 있잖아”, “부장, 부감, 교사들이 맨투맨으로 달라붙어 열심히 가르치잖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분들의 노고를 모르는게 아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말 그분들이 ‘전문적인’, ‘아이들 눈높이에 최적화된’ 분들인가? 정말 그런 전문가들이라면 교회는 왜 그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것인가? 왜 부목사, 전도사들이 제대로 능력을 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파트타임 교역자를 청빙하고, 준전임 교역자에게 교회학교를 맡긴다. 파트타임은 말 그대로 시간을 조각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분들이 아무리 전문적 능력과 최적화된 식견을 갖고 있다 해도 파트로 시간을 내서 과연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정말 미래세대가 중요하다면 그런 전문 교역자들을 ‘제대로’ 청빙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분명 구조적 문제이다.
전임 교역자를 교회학교에 모시지 못하는 이유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나 재정은 항상 부족하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조직이든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일을 하는 최선의 방법을 꾀한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해서 재정을 투여하는 것이다.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지도자의 가치판단, 즉 철학이다. 교회라면 목회 철학이다.
교회 전체 예산의 몇 퍼센트가 교회학교에 투여되는지, 어른들과 관련된 성가대, 전도대, 장례를 비롯한 경조사, 식당 봉사 등에 사용되는 예산과 비교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면, 정말 교회가 교회학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교회의 철학이 나타난다. 어른들을 위한 교회인지 아이들을 위한 교회인지 말이다.
앞서 말했듯 교회학교는 단순한 부서가 아니다. 그곳은 어른들과 똑같은 생명 하나하나가 그곳이 전부인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이다. 조금 더 신앙생활을 잘하고 봉사하기 위해 모인 성가대와 같게 여긴다면 그건 너무 어처구니없고 아이들 입장에선 억울하다.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교회학교를 전문 교역자에게 맡긴 것인지, 그냥 방임한 것인지 말이다. 혹시 아이들은 어른보다 그리 수준이 높지 않으니 파트 교역자로도 충분하다고, 그냥 견습하는 마음으로 맡으면 된다고 한 건 아닐까? 삐딱한 성정에 돼먹지 못한 나는 자꾸 그쪽으로 쏠린다. 진실은 물론 하나님만 아실 거다.
돌아올 테니 내버려두라 하고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런 거였다.
“애들이 얼마나 힘든데요. 학교 다니랴, 학원 다니랴 정신이 없어요. 교회 와서라도 편하게 있어야지요.”
“핸드폰 가지고 게임을 하지만 그래도 걱정 마세요. 안 듣는 것 같지만 다 듣는다니까요.”
“저러면서 크는 거지요. 언젠간 다 돌아와요.”
이러며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고 무진 애를 쓰신다. 그분들의 노고가 눈물겨울 지경이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시큰둥하기 일쑤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대체 쟤네들은 교회에 왜 오는 거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교회에 오는 이유가 카톡 확인을 하기 위해서도 아닐 테고, 스마트폰 게임을 하기 위해서도 아닐 게다. 혹시 교회의 찬양과 프로그램이 훌륭해서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별로 참여도 않고 그리 적극적이지도 않으니 말이다. 정말 교회에 왜 올까?
아마도 그 답은 부모가 우겨서일 거다. 교회 가라는 잔소리에 밀려오든지, 아니면 그냥 다니던 관성으로 시간 보내러 오는 거다. 안 오면 찜찜한데 막상 가면 재미가 없으니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우리 교회학교가 처한 극명한 현실이라고 하면 너무 막말일까?
어떻든 아이들은 점점 클수록 더 많이 교회학교에 오지 않는다. 중고생 자녀를 둔 집사님들이 “애들 머리가 굵어져서 이젠 우리 입김이 통하질 않아.”라며 걱정을 하신다. 게다가 지금은 교회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아이들을 학원으로 돌리는 부모들도 제법 많다. 교회학교보다 학원 가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집사님들 탓할 것 하나 없다. 그분들 보기에 교회학교가 별로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튼 이러던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면 더 많이 교회를 떠난다. 중·고등학교 때도 바빠 교회를 빠졌는데, 대학과 직장은 더 바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젠 나이를 먹어 예배 시간에 배짱 좋게 스마트폰 게임을 하기에도 얼굴이 화끈거리니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모르겠다. 동료 교사들이 나보다 더 경험이 많고 더 신실한 분들이니 그분들 말씀처럼 “때가 되면 돌아올 테니, 기다려라.”가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짜증이 난다. 그렇게 예수를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것이 좋다는 건지, 아니면 젊어서 방황을 해야 다시 돌아와서 더 열심히 예수를 믿을 거라는 1970-80년대 부흥강사식의 ‘뚝딱론’을 신봉하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이다. 무엇보다 예수를 떠난 아이들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겪을 고통과 괴로움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교회의 교사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내버려둬도 때가 되면 다들 제자리를 찾아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다면, 지금 교육한다고 애쓰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좁아터진 내 머리론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교회는 재미난 곳이었는데… 옛날에는
내 어릴 적 교회는 재미난 곳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는 국민학교 2학년 때 처음 교회에 나갔는데, 무허가 건물들이 죽 늘어선 곳에 위치한 개척 교회였다. 대부분의 개척 교회가 그렇듯이 그곳도 어른들 위주였다. 아이들은 지금의 교회에서처럼 그저 귀염이나 재롱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이들도 많지 않았고,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교인들이 조금 많아졌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처음 교회를 다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고등부가 되기까지 교회학교 담당은 그냥 담임목사님이었다. 하다못해 전도사님조차 없었다. 그럴 형편이 안 되었던 거다. 심지어 유치부에서 초등부까지 전부를 합한 교회학교에서 설교는 어떤 집사님이 하셨고, 교사들은 시커먼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형, 누나들이었다. 프로그램? 그런 것이 있을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교회에 비하면 학교 프로그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적이었고 세련되었으며, 교사도 당연히 정규 대학을 졸업한 분들이었다. 교육심리, 교육 방법 등을 배운 분들과 고등학교 학생인 교회 선생님들과는 처음부터 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교회는 재미있었다. 심지어 그 흔한 여름성경학교도 난 띄엄띄엄 경험했다. 그것도 주변 몇 교회와 연합해서 억지로 운영한 것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재미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교회에서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어설프고 미숙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대부분의 교회가 다 그랬다. 학교에 비해 그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프로그램에 비해 더욱 그랬다. 그래도 학교보다 텔레비전보다 교회가 훨씬 더 재미났다.
왜 그랬을까? 아니 그보다, 그랬던 교회가 지금은 왜 재미가 없을까? 아이들의 심성이 변해서 그런 걸까? 그때는 사교육이 없고 입시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 이유는 잘 모른다고 해도 틀림없는 것은 지금 교회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런 자각도 없다.
어릴 적 내가 다니던 교회는 가난한 개척 교회였기에 목사님이 혼자서 어른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는, 교육적으로는 불모지 같은 교회였는데도, 아이들은 교회가 재미났고 교회 가는 것이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온갖 교육 방법을 동원한 세련된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데도 재미가 없단다. 애들이 한없이 마냥 시큰둥해 한다. 그리고 교사들은 “기다리면 돌아와요.”만 줄기차게 중얼댄다. 교회가 무슨 부산항인가, 기다리면 돌아오게.
요즘 교회에서는 다음 세대를 위한 목회를 한다고 목청껏 외치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더 재미없다. 한마디로 말해 옛날에 비하면 한참 후지단(?) 말이다.
옛날 우리가 교회에 가는 것이 그토록 재미났던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형, 누나, 동생들과 놀려고 교회에 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놀이라면 동네 골목에서도 얼마든지 그리고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교회에 갔던 이유는, 교회 가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났던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예수가 있다.
그렇다. 믿기지 않겠지만, 난 예수를 만나러 교회에 갔다. 그리고 목사님이 가르쳐준 대로 열심히 기도하는 흉내를 내며 예수를 찾았고, 찬송을 부르며 예수의 마음과 하나 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뭔 소린지 하나도 알 수 없는 성경을 보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자나 깨나 예수만 이야기했고, 예수를 믿고 예수처럼 살라고 했다. 그 말이 무척 낯설고 투박하고 어설프며 심지어 웃겼지만, 그 속에 담긴 예수에 대한 진정은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열정과 진지함이 그곳에 있었다. 학교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보지 못한 진정이 바로 교회에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고민이 된다. 내 아이들이 재미없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이다. 세련된 학교 흉내 내기에 급급하고, 텔레비전과 콘서트 베끼기에만 여념 없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된다. 이러다 애들이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할까 봐 두렵단 말이다. 애들은 귀신이다. 어른보다 더 잽싸고 빠삭하다. 흉내인지 진정인지, 베낀 것인지 본질인지를 귀신처럼 알아챈단 말이다.
예수 없는 교회가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 빠진 예배가 세련된 세상의 프로그램과 맞장 떠서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예수 없는 우리는 공갈빵보다 더 한심한 허깨비일 텐데, 정작 예수를 뺀 나머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정말 이러고 있다면 교회가 재미있을 턱이 없다. 그동안 억지로라도 교회에 다녀준 것만 해도 눈물 날 정도로 고마운 지경이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그리고 또 속고
턱에 혹이 달려 평생이 고달팠던 영감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밤에 도깨비들을 만났다. 혹부리 영감은 노래를 잘 불렀는데, 도깨비들은 그가 혹 때문에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알고 혹을 떼어가고 대신 금은보화를 주었다.
마을로 돌아온 영감은 자신이 겪은 일을 자랑했다. 동네의 또 다른 혹부리 영감이 그 말을 듣고 밤중에 도깨비를 만나러 갔다. “자, 이 혹이 노래를 잘 부르게 합니다. 이 혹을 드릴 테니 금은보화를 주시오.” 이미 겪은 일이 있던 터라 도깨비들은 화가 나 있었다. “그래, 혹이 노래를 잘하게 한다고? 그러면 이 혹도 가져가라.” 그렇게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제 혹에 또 다른 혹까지 붙인 채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코흘리개들도 아는,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는 ‘혹부리 영감’ 이야기이다. 도깨비들은 멍청했다. 혹을 노래 주머니라고 제멋대로 생각해서 떼어 갔으니 말이다. 노래는 영감이 잘 부른 것이지 혹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이 진실이고 본질이었다.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도깨비들은 엉뚱한 것에 주목한 것이다. 도깨비는 원체 그런 족속이니 그러라고 하자. 어수룩하고 아둔한 바보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도깨비도 한 번 속았지 두 번 속지는 않았다. 금방 본질을 알아차렸다. 가끔은 우리가 도깨비만도 못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번이 잊고 번번이 속아 엉뚱한 곳에서 본질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덜렁거리는 혹을 들고서 밤새도록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답답할까, 예수만 빼고 다 가르치면서 교회가 재미있기를 바라는 것이 더 답답할까?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계속 이러면 좀 곤란할 것 같다. 계속해서 멍청한 짓을 반복하면 미련퉁이 개나 다름없다며 성경이 혀를 쯧쯧 차니 말이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엉뚱한 혹만 만지며 노래 나오기를 기다리던 어수룩한 떠꺼머리 도깨비들도 단 한 번만 속았는데, 우리만 ‘멍멍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유광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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