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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평신도 고전학자의 성서 읽기
성서情談 (2016년 3월호)

 

  아버지, 그 이름의 무게
  

본문

 

‘당신’과 3인칭의 입체성
몇 주 전 주일 예배였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을 따라 CCM을 부르는데 문득 뭔가 서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곡조의 잘 아는 노래였는데 이상하게도 본당 앞 커다란 스크린에 뜬 가사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찬양이 입에 달라붙지 않아 억지로 따라 부르는 느낌이 강했다. 왜 그런지 곰곰이 따져보니 가사를 조금 바꿔서 부르고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원 가사는 이렇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이날 우리 교회에서는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를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있는 곳에~~”라는 식으로 차례로 넉 줄을 개사해서 불렀다. 그렇게 개사한 이유는 쉽게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렸던 거다. 그래서 ‘아버지 당신’ 대신 ‘하나님 아버지’로 바꾸었던 것이다.
난 잠시 멍해졌다. 원체 삐딱하고 민감해서도 그렇지만, 아무튼 이날 난 찬양의 묘한 어긋남 때문에 도무지 가사와 곡조에 몰입할 수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당신’이라는 말이 상대방을 부르는 2인칭일 때는 하대하는 낮춤말이 맞다. 하지만 3인칭을 지칭할 때는 극존칭의 아주높임말이 된다. 예를 들어, 친구끼리 대화를 하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높여야 할 분을 지칭해야 할 경우가 생기는데, 그럴 땐 보통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는 어려서부터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
이때 ‘당신’이란 말을 듣는 2인칭인 친구를 향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로 3인칭이 된다. 그리고 이 ‘당신’이란 말은 낮춘 것이 아니라 상당히 공손하게 아주 높여 언급한 것이다.
“이 찬양에서 노래하는 화자(話者)가 하나님을 상대로 기원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2인칭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에게 ‘당신’이라고 하면 조금 무례한 거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2인칭인 것이 맞다. 하지만 ‘당신’이란 말도 요즘은 사랑하는 부부끼리 ‘여보, 당신’ 하듯, 2인칭에게도 친근감 있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꼭 하대한다고 할 수만은 없다. 게다가 난 한 번도 이 찬양의 화자(話者)인 내가(1인칭) 하나님을 상대(2인칭)로 두고 말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였다.
이 찬양에서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노래하는 나를(1인칭) 지그시 바라보시는 3인칭으로 계신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 당신의”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했고 그래서 더 간절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었다.
만약 내 느낌처럼 하나님이 3인칭으로 계신다면, 이 노래에서 2인칭은 누구일까? 1인칭 화자인 내가 말하는,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앞에 놓고 상대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가사를 잘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첫 줄을 다시 보자.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느낌이 오는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다. 잘 이해가 안 되면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 다음 석 줄도 함께 생각해 보라. 그러면 분명한 대상이(2인칭)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지금 화자인 나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첫 줄)’,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여 있는 곳(둘째 줄)’, 그 땅, 바로 그곳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영혼(셋째 줄)’,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하실 정도로 우실 수밖에 없는 어두운 땅(넷째 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화자인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쏟아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며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며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가 가야 하기에 바로 저 위에 계신 하나님, 즉 3인칭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며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 슬픔과 고통의 땅, 울고 있는 어두운 영혼에게로 갈 힘과 용기를 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이렇게 1인칭인 ‘내’가 2인칭인 대상의 영혼, 땅, 고통이 세상을 바라보며 저 위의 3인칭인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며 힘을 달라고 ‘당신’이라 불렀다고 생각했다. 매번 이 찬양을 부를 때 은혜로웠던 것은 이렇게 입체적으로 상황이 그려졌기 때문이지, 단순히 내가 하나님을 상대로 말하는 평면적이고 밋밋한 대화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사실 이날 예배 시간에 이 어긋나는 곡조가 내 맘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이런 2인칭의 평면성과 3인칭의 입체성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거였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린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하는 거였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 그 이름의 무게를 우리가 제대로 감당하고는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름의 본질과 야훼
이름이란 존재의 본질이자 정수를 담고 있는 핵심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존재 자체이다. <성경>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주변의 동식물을 ‘처음 부른 이름’이 곧 그 존재의 명칭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그러니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 존재의 본질에 맞게, 적확하게 그 존재를 나타내는 행위로, 이름이 곧 그 존재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광야 가시나무 떨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3)

따지고 보면 모세의 질문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세가 비록 옛날에는 왕궁에서 살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일개 양치기 노인일 뿐이다. 그런 그가 무턱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내 말을 들어라. 너희들의 신이 나를 보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가시나무 떨기에 나타난 신이 요구하는 것은 글쎄 그 막강한 권력자 파라오와 맞장을 뜨라고 하니, 이런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모세가 한껏 용기를 내서 간다 해도, 모세처럼 그런 식의 신비적 체험을 한 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런 자들이 너도 나도 사람들을 모아놓고 ‘신이 나를 보냈다’고 떠들어 댈 테니 백성들은 대체 그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 모세는 ‘자신을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었다.
이때 모세가 물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물은 것은 바로 이름이 그 존재의 본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세의 질문에 신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출 3:14)라고 답한다. 그것이 바로 그 신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의 이름을 알게 된 모세는 그 신을 신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름을 알았다’는 것은 곧 그 ‘신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그것은 곧 신과 자신이 하나로 합일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앎으로써 신을 완전히 알게 된, 더 정확하게는 신을 자기 속에 체화시킨 모세는 더 이상 평범한 양치기 노인이 아닌 것이다. 그가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세는 자기 안에 신을, 신의 본질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일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Yehowah)였다. 하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이 명칭은 하나님의 원래 이름에 ‘나의 주님’이란 의미의 히브리어인 ‘아도나이’(adonai)의 모음을 섞어서 만든 거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래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יהוה, Yahweh)이다. 또는 ‘h’ 발음이 묵음이기에 ‘야웨’로 읽어야 한다고도 한다. 어떻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처럼 엉뚱하게 되는 등 복잡해진 연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해서였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신의 이름인 ‘야훼’는 4개의 자음[Y, H, W, H]으로 되어 있다. 그 쓰는 순서가 우리말이나 영어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데, 아무튼 옛날 성경을 낭송하던 사람들은 이 4개의 자음인 신의 이름이 나타나면 읽지 않고 ‘음음음’하는 식으로 넘기든지 아니면 ‘아도나이’처럼 다른 말로 대체해서 읽어 넘겼다. 아무도 ‘야훼’를 “야훼”라고 읽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그렇게 한 번에 죽 내려 읽으면, 즉 그렇게 신의 이름을 부르면, 신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읽을 때만 그런 게 아니라 글자를 필사할 때도 그랬다. 단 번에 죽 내려 쓰면, 그건 그 신을 범하는 행위였다. 그렇게 신을 범하지 않으면서도 글자를 쓰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각각의 획을 따로 따로 쓰는 방법이었다. 이래저래 네 개의 자음은 꼭 하나님의 이름에만 쓰는 것이 아니니 각각 떼어서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Y, H, W, H”의 순으로 한꺼번에 묶인 그 ‘위대한 네 개의 글자’[tetragrámaton]만 신의 이름이니 그것만 피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이 4개의 자음이 나오면 한 획을 긋고 목욕재계를 하고 새 붓을 가지고 한 자를 썼다. 그리고 다음 글자를 쓸 때는 또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씩을 끊고 구별해서 분리시켰다. 그러니까 4개의 글자를 쓸 때, 네 번 목욕했단 말이다.
정말 모세 십계명의 제3계명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거였나 보다.

아버지의 이름, 휘(諱)와 자(字), 호(號)
이름에 대해서는 서양보다 동양이 더 민감하게 생각했다. 어려서 동네 꼬마들끼리 놀다가 수가 틀어지거나 힘으로 당하지 못하게 되면, 한 꼬마가 도망을 치며 종종 이렇게 외쳤다.
“나는 네 아버지 이름 안다~!”
도망치는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달아나고 자기 아버지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분하다고 여긴 다른 아이는 씩씩거리며 달아나는 아이를 죽어라 쫓아갔다. 아버지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니고, 하물며 욕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안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흥분하고 성을 내는 것이다. 지금처럼 함부로 부모의 이름을 말하는 시대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장면이지만 이러한 일은 그리 멀지 않은 몇 십 년 전 얘기다.
이름은 존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 존재를 지배, 능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휘’(諱) 문제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관념이 이어져 내려와서다. ‘휘’(諱)란 ‘꺼린다’는 의미인데, 단순히 싫어서 꺼려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히 함부로 할 수 없기에 멀리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삼국지』 같은 책만 봐도 휘(諱) 문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유비(劉備)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렇다.

성(姓)은 유(劉)요, 휘(諱)는 비(備)이다. 호(號)는 현덕(賢德)이다.

유비를 설명하면서 “이름이 비(備)다”라고 하지 않고, “휘(諱)는 비(備)다”라고 했다. 즉, 휘(諱)란 이름을 경외해서 꺼릴 때 쓰는 말이다.
성인(聖人)이나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었다. 위대한 분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 이름자인 그 글자 대신 다른 글자로 바꿔 쓰든지, 같은 자라면 마지막 획을 긋지 않는 식으로 글자를 완성시키지 않았다. 즉, 피해서 범하지 않든지 완성시키지 않아서 그 이름을 범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유명한 공자(孔子)의 본명은 언덕을 뜻하는 ‘丘(구)’였다. 즉, 공자는 공구(孔丘)였다. 그런 성인의 이름인 ‘丘(구)’를 함부로 쓸 수 없어서, ‘丘(구)’ 대신 ‘邱(구)’로 바꾸어서 썼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구시도 한자로는 ‘大邱(대구)’가 된 것이다.
왕의 이름과 같아서 자신이 죽은 후 이름이 바뀌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고려 때 ‘안향’(安珦)이 그렇다. 그는 고려 말 성리학을 들여온 인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인데, 그의 처음 이름은 ‘안유’(安裕)였다. 그러다가 이름을 바꿔 안향(安珦)으로 불리다가 죽었다. 당연히 안향은 안향이라고 불리는 것이 옳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와 문종 때 ‘안향’이란 이름을 ‘안유’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조선 문종의 이름이 ‘향’(珦)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향을 ‘안향’이라고 부르면 의도하지 않게도 무엄하게 왕의 이름을 능멸하게 되는 거였다. 그것을 방지하지 하기 위해 ‘안향’을 ‘안유’로 바꿔버린 것이다. 땅에 묻혀 죽은 전 왕조의 인물 안향은 후대 조선 왕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시대 내내 본명을 잃고 ‘안유’라고 불렸다는 것을 과연 알기나 할까?
아무튼 이런 휘(諱)의 문제는 단순히 옛날 왕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웃어른의 성함을 TV 등에서 아무렇지 않게 불러대는 세대인 지금은 정말 번잡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제 부모의 성함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할 때가 당연히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부모님 성함을 물으면 그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답했다.
“‘김’씨 가문의 몇 대 손으로, ‘개’자 ‘동’자 쓰십니다.”
이렇게 무척 복잡한 방식을 통해서 이름을 전달했다. 한꺼번에 “김개동입니다.”라고 말하면 그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범하게 되는 것이니, 자식이 부모를 범하는 하극상이 되고 만다. 아버지의 머리를 밟는 행위인 것이다. 성경을 필사하던 필사자들이 글자 하나마다 목욕을 다시 하고 옷을 갈아입고 붓을 바꾸는 수선까지 피워대지는 못하더라도, 또박또박 끊어서 다른 맥락에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신(神)이나 왕(王)의 이름을 부를 일이야 별로 없지만, 사람들에게 호칭이 없으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개발해 낸 것은 ‘자’(字)와 ‘호’(號)였다.
자(字)는 성인이 되면서 만드는 이름이었다. 성인식을 하면서 만든 이 이름은 공식적인 곳에 두루 썼다. 부모들도 자식이 성년이 되면 본명 대신 자로 불렀다. 호(號)는 격식 없는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다. 호를 한두 개 이상씩 쓰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는데, 아무튼 이렇게 본명이 있는데도 굳이 자(字)니, 호(號)니 하는 다른 이름을 만들어서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모두 진짜 이름을 숨기려는 의도이다. 서로 알지만 부르거나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름에 그 존재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경의 마음과 아버지 이름의 무게
옛날 아버지들은 엄(嚴)한 분들이셨다. ‘엄하다’는 것은 ‘무섭다’와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막무가내로 화를 내거나 다가가면 불똥이 튈까 두려워 멀리 하는 것을 ‘엄’(嚴)이라고 하지 않는다. 철저하고 바르기를 자식들에게 가르치지만 그와 동시에, 아니 그보다 먼저, 스스로가 철저하고 바른 것이 바로 ‘엄’(嚴)이다. 정말 옛 아버지들은 엄하셨다. 그것은 결코 힘들거나 괴로운 것만이 아니었다. 믿고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있는 거였다. 언제든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갈 든든한 버팀목이 저기 어딘가에 있는 거였다.
언제 누가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온통 친근한 아버지, 푸근한 아버지, 허물없는 아버지 타령으로 온 세상이 난리다. 말 잘하지 못하는 아버지나 무뚝뚝한 아버지는 낙제감이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아이들 졸업식과 입학식은 물론 애들 생일날은 철석같이 케이크 앞에 앉아 박수를 쳐주며 즐거워해줘야 한다. 이젠 애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벌이는 것이 전혀 새롭지도 않다. 물론 당연히 이런 모습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한다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흘러만 가는 것이 옳을까? 정작 본질은 엉뚱한 곳에 흘려버린 것은 아닐까?
친근하고 푸근한 아버지들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버지가 친구로 편안한 동료가 되어 버리는 순간 원래 있어야 했던 저 위의 아버지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아버지의 권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장제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은 아버지를 존경하는가? 아니면 무서워하는가?
아버지를 신뢰하고 따르는가? 아니면 억지로 끌려 다니는가?
친근한 아버지의 사랑을 진정으로 느끼는가? 아니면 만만하게 여겨 늘 나만 위하는 아버지여야 한다고 여기는가?


이런 질문은 끝도 없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에서 빗겨나가는 순간 그 빈자리에는 무엇이 스며들었을까? 혹시 돈은 아닌가? 혹시 경쟁을 위한 승부욕은 아닌가? 아버지가 3인칭의 자리에서 지그시 웃음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응원하던 그 자리에 대체 지금 무엇이 있는가? 내(1인칭)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세상(2인칭)만 있는 평면적이고 삭막한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주무시는 아버지 머리맡으로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고, 아버지보다 먼저 숟가락을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집안에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머리맡이 발치로 걷는 것보다 빠른 길이니 휙 갔을 테고 아버지보다 먼저 먹고 학원에 가야 하니 밥상에 앉아 퍼먹은 거란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네 개의 글자를 쓰기 위해 노력했던 필경사(筆耕士)들의 간절함과, 알면서도 함부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해 휘(諱)하며 노력했던 선조들의 진지함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들의 고난일지, 아니면 자라나는 아이들의 고난일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친구 같은 아버지를 넘어 슈퍼맨이 되기를 강요하는 시대에, 아버지가 3인칭의 자리에서 2인칭으로 내려오다 못해, 이젠 살갑게 부르는 2인칭 ‘당신’에서 아예 ‘너’라는 말로 바뀌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은 꼭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지금 자식을 낳아준 아버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자리에 여호와든 야훼든 하나님을 넣어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과연 어떤 답이 나오는가?
‘아버지’ 그 이름의 무게는 천금 같은 것이다.
함부로 부를 수도 없는 거였다. 무섭고 멀고 귀찮아서가 아니라, 감히 막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간절하기에 그랬던 것이다. 든든한 버팀목이자 끝없는 후원자인 그분이기에 그랬던 거다. 그런 그분이 나를 응원하고 지켜보시기에 비록 나는 약하지만 강했고 부족했지만 넉넉했던 것이다. 눈물이 웃음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름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아니 이름에 무게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시대에, 정말이지 ‘아버지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다.

유광수 | 교수는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연세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부교수이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007년 『진시황 프로젝트』로 제1회 뉴웨이브문학상’을 수상했다. 쓴 책으로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1, 2』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등이 있다.

 
 
 

2023년 8월호(통권 7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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