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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선조들의 삶을 묘사할 때 ‘나그네’, ‘떠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출애굽의 영웅 모세, 바빌론 포로기의 디아스포라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의 인상 깊은 주인공들은 모두 ‘나그네’ 혹은 ‘떠돌이’였다. 구약성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엄청난 땅과 가축을 소유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기약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실제 삶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이집트와 그랄 땅에서 두 번이나 성적인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창 12:10-20, 20:1-18), 그것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기근은 늘 그들을 따라다녔고, 강제 노동(출 1:9-14)이야말로 떠돌이, 나그네의 힘겨운 삶을 가장 잘 보여준다.
히브리인들은, 요즘 말로 하자면 외국인 노동자로서, 이집트에서 힘겨운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들은 이집트 왕을 위해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더위와 힘든 노동으로 쓰러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히브리인들, 그리고 포로기 이후의 디아스포라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는 바로 이 ‘집 떠난 나그네들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신앙을 고백할 때 스스로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 사람”(신 26:5)의 자손이라고 했다. 떠돌이 나그네로서 그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여 줄 사람이 필요했고, 어디서나 친구가, 동무가 필요했다. 우정과 환대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삶 속에서 경험하고 가꾸어간 우정과 환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협동적이며 위계질서가 없는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경험은 구약성서에서 ‘모세 계약’의 호혜적이고 협동적인 계명들로 구체화되었다. 안식일법이라든가 안식년, 희년 같은 제도들이 그러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을 나그네라고 여기는 것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약성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세계 경험이 일차적으로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불편했다. 그들의 세상살이는 마치 나그네가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소종파로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인 외부인들이 자신들을 보는 눈빛에서, 낯설고 적대적인 시선을 가장 일차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은 비기독교인들의 시선에서 ‘당신들은 우리와 다른 부류’라는 차별과 의심의 눈초리를 읽었다. 그들은 이러한 자각을 그리스어 ‘paroikoi, xenoi’ 같은 언어로 표현했다. 이 말들은 외국인, 거류 외국인, 나그네를 뜻하는 말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세계 안에서 자신들을 낯선 자로 인식했고, 지상을 헤매는 나그네라고 여겼다. 베드로전서를 비롯해서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나그네’라는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은유를 넘어서 실제적인 의미를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엡 2:19, 히 11:13, 13:2, 벧전 1:11, 17, 2:11)
초대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도 동일한 처지였음을 확인했고, 그들과 구원사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들도 그들처럼 선택받은 자로서 나그네들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서에는 한때 나그네로 살았던 것을 잊지 말라는 과거에 대한 회상(신 26:5)이 반복해서 나오며,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런 이스라엘의 과거를 자신들의 역사로 받아들였다. 구약성서가 나그네와 외국인을 잘 접대하라고 거듭 권면했듯이(레 19:34, 25:35, 민 35:15, 신 10:18-19), 초대교회 역시 외국인들이나 나그네들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접대해야 한다고 했다.(롬 12:13, 16:2, 빌 22장, 딤전 3:2, 5:10, 딛 1:8) 너희도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홀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 안에서 낯선 존재라는 생각이 나그네와 외국인에 대한 접대라는 기독교적 윤리로 연결된 것이다.
2
교회는 나그네들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가족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낯선 세상 안에 거하면서 인간의 친구가 되셨다는 생각은 세상의 나그네이며 낯선 자라는 기독교인들의 자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예수 자신이 세상에서 낯선 자였으니 너희도 낯선 자로 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특히 요한복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인간이 되어 낯선 세상에 거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이 낯선 하느님 예수가 제자들과 이별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겠다.’라고 말한다.(요 15:1-17) 예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 말하며, 그들을 우정의 공동체로 초대한 것이다. 우정과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형제 사랑의 의무에는 한계가 없고, 세상의 나그네로서 교회는 세상의 다른 나그네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적극적인 나그네 의식은 사실 예수 자신에게서 유래했다. 예수 시대에도 상대방을 적수로 삼고 너를 먹어야 내가 살겠다는 생각은 어디서나 넘쳐났을 테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침략과 헤롯 가문의 수탈 때문에 전통적인 갈릴리 농경사회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협동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당시 로마제국과 그 가신 왕들의 통치는 테러리즘과 폭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로 인해 민중들은 자긍심을 잃고 내면적으로 갈기갈기 찢겼다. 그 속에서 예수는 갈릴리 농민들과 함께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파괴의 위기에 직면한 갈릴리 농민들 사이의 서로 돕는 관계, 친구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동무들의 나라를 다시 불러들이고자 한 것이다. 예수는 그들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 가난에 대해 서로 비난하는 대신 서로 돕게끔 했고, 서로에 대한 의심과 원한 대신 연대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게끔 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수천 명의 사람이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을 회복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탄생하게 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도록 요청받았으며, 서로를 분열시키는 행동을 자제하고, 협동하고 우정이 넘치는 인간이 되도록 요청받았다.
예수의 뜻을 이어 초대교회 역시 세상의 나그네들을 향해 ‘동무하자’고 외쳤다. 로마제국 대도시에는 어디나 나그네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집도 절도 없이 물설고 낯선 타향을 떠돌았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의 나그네들을 동무하자고 불렀다. 로마제국이 벌이는 전쟁의 연기와 피 냄새는 여전하지만, 그들은 교회 안에서 동무를, 친구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다. 세상살이에서 소외되고 불편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삶 한가운데에는 기쁨이 넘쳤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들은 늘 기도하고 기쁨의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나그네, 낯선 사람이 아니라 친구였고, 함께 길을 가는 동무였으며, 하느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국가가 경영하는 복지제도나 돈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우정과 환대를 먹고 성장했다. 당시 초대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목자 잃은 양 같던 당시의 수많은 대중, 나그네들이 교회 안에서 친구를 발견하고 사귐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든 것은 그 안에 권력자가 있어서 그에게서 무언가를 나누어 받으려는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소박한 호의, 우정, 환대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 곧 사귐이다. 초대 기독교는 무언가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사귐이, 코이노니아가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살인 병기로 중무장한 제국의 몸 안에서 그 몸통을 야금야금 먹어들어 결국은 쓰러지게 할 새로운 공동체의 세포를 증식시켜 나갔다.
그 자신이 세상의 나그네로서 세상의 다른 나그네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다른 세상, 우정과 환대의 세상, 동무들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 예수. 초대 기독교는 그런 예수의 삶을 중심에 모시고 제국의 곳곳에 우정과 환대의 거점을 세워나갔다.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던 그들이 서로 흩어져 있을 때에는 제국의 논리에 짓눌려 삶의 희망을 품을 수 없었지만 서로 동무가 되어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옛 세상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힘과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가진 것 없는 나그네들이 하느님의 집 안에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을 때, 각자가 가진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는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는 기적을 낳을 수 있었다. 물질적 부와 번영에 대한 휘황한 청사진을 그려주지 않았어도,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박한 희망이 삶에 대한 근원적인 낙관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생명의 샘물을 처음 마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이 나누어준 물은 삼삼하고 담백하면서 생명을 소생케 하는 물이었다. 초대 기독교는 달콤한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가장 큰 것을 약속했다. 세상에 동무들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느님의 집, 교회 안에서 모두가 가족이요, 온 인류가 다 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식구라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 사이에 호의가 없고 사람과 사람이 동무로서 손을 잡지 못한다면, 진보도 발전도 의미가 없다. 우리 사회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근대화, 산업화를 진행해오면서 ‘하면 된다!’는 막가파식 개발 논리와 ‘너를 적수로 삼아 먹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경쟁 논리가 참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섭게 휘몰아쳤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군사독재가 쫓겨간 자리에 더 지독한 시장 전체주의가 똬리를 틀었다. 군대 귀신이 물러간 자리에 더 강력한 돈 귀신이 좌정했다. 이 돈 귀신은 총칼로 사람을 죽이거나 신체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번쩍이는 상품과 미끈한 육체를 통해 우리 마음을 유혹했다. 우리를 현혹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다. 노예가 되는지도 모르고 노예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어떤 귀신 들린 사람의 처지가 오늘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귀신 들렸다가, 간신히 귀신을 쫓아냈다. 그런데 나갔던 귀신이 살 집을 못 찾자, 이번에는 제 친구 귀신들까지 잔뜩 불러서 처음 살던 그 사람 안에 다시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마 12:43-45, 눅 11:24-26) 그래서 그 사람의 처지가 이전보다 귀신을 쫓아내기 더 어려워졌다. 돈 귀신에게 종살이하고 있는 우리 처지가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의 처지와 참으로 닮았다.
돈 귀신이 지배하는 시장 전체주의는 비판적인 지성을 불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우정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요즘은 지식인조차, 심지어 예술가나 성직자까지도 경쟁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집단적인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로 넘치게 살면서도 현재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개발하고, 발전하고, 경쟁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이 어떻게 명예가 될 수 있는가? 타인을 낮추어 보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는가? 싸움에 이겨서 먹이로 삼을 존재를 가졌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이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야수들의 세계이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친구를 가지는 것이 명예이다. 경쟁은 짐승들에게 맡기고, 우리 인간은 동무들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3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준다. 11세기 유럽의 수사였던 빅토르 드 휴는 친구 로놀프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우정의 편지를 썼다. 일부를 인용한다.
친애하는 형제 로놀프에게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금방 그게 진실임을 알았네.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대를 낯선 땅에서 만났지. 그러나 내가 거기서 친구들을 발견한 이상 그 땅을 정말 낯선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혹은 내가 친구가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나는 거기서 사랑을 발견하였고 나는 그것을 사랑했으며 나는 그 사랑에 싫증난 적이 없었다네.…(중략)…나는 이 소중한 선물의 무게에 짓눌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짐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네. 왜냐하면 내 온 가슴이 나를 지탱해준 까닭에. 그리고 이제 긴 여행 끝에 나는 내 가슴이 여전히 따뜻해짐을 느끼고, 그 선물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았음을 느낀다네. 사랑에는 끝이 없는 탓이라네.
- 죄인 휴로부터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기쁨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우정은 참된 기쁨을 가져다준다. 사람은 동무가 있어야 기쁘다. 고독은 모든 쾌락을 죽인다. 즐거움은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만 즐거운 법이다. 오늘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경쟁상대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적이 많은 사람, 경쟁자가 많은 사람은 고독하다. 물론 그런 사람도 물건을 사고팔면서, 화려한 만찬 석상에서 눈인사를 하면서 친구를 사귈 수는 있다. 그러나 벗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벗이란 글자 ‘友’는 본래 손을 둘 그린 것이라고 한다. 손과 손을 맞잡은 것은 사귐이고, 악수이며, 화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의가 없어지고 호의가 성립되는 일이다. 벗이란 호의를 가지고 나를 대해주는 사람이다. 경쟁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고, 그래서 고독하고, 그래서 기쁨이 없다.
삶의 본질은 기쁨이다.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들에 대해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생명을 선사받은 인간의 본분이다. 들에 핀 백합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명랑하게 피어나고 노래할 의무가 우리 인간에게 있다. 온종일 먹을 것을 구해 날아다니는 참새도 내 집 마당에 날아와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데, 어째서 인간인 우리가 초조한 낯빛을 한 채 끝없이 경쟁만 하겠는가? 하루 종일 먹고만 있을 수도, 입고만 있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사실 욕망에는 한계가 있다. 욕망에 한계가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마케팅이 우리 마음에 걸어놓은 주술일 뿐이다. 우리 삶은 욕망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샘물이 넘쳐흐르듯이 우리 뱃속에 기쁨의 샘이 넘쳐나야 한다.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의 노래가 영혼의 밑바닥부터 밀려나와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동무들의 나라, 기쁨의 나라를 이루지 못한다면 교회는 껍데기일 뿐이다.
예수가 한 일은 무엇인가? 예수는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눈 것도 아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기적 쇼를 한 것도 아니다. 그의 위대함은 만인에게, 아니 죄인에게, 세리와 창녀와 탕자에게 친구로서 자기 가슴을 열었다는 데 있다. 그들의 무거운 짐을 몸소 자기 어깨에 졌다는 데 있다. 그의 위대함은 이 냉랭하고 살벌한 세상에 형제애를 일으키고, 서슬 시퍼런 로마제국의 식민지에 우정과 환대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가져온 데 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등등해도 사람들은 예수의 가슴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마음, 받아들여 주는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따뜻한 벗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동무들의 나라였고, 우정과 환대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동무들의 종교, 서로 친구 하자는 종교이다.
세상 권력자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지체가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에 온갖 금을 그어놓고, 거기 더해서 종교 권력은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온갖 넘지 못할 선들이 사람들 사이에 그어졌다. 그 날카로운 선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싸울 수밖에 없다. 권력은 분리와 싸움을 낳는다. 그 분리선을 지우고 보면 누구나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웃인데, 너나없이 권력이 그어놓은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를 원수 삼아 창을 겨누고 있다. 그 선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경계선이, 분리하는 철조망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분리벽이 없는 것처럼 넘나들며 모두와 동무가 되었다. 누구하고나 밥을 먹었고, 밥을 먹으면서 마음까지 나누고, 병을 고치면서 영혼의 교류를 나누었다. 철조망 너머로 동무가 되자고 악수의 손길을 내밀었고, 먼저 다가와 벗이 되어주었다. 분리의 나라, 두려움의 나라는 사실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도깨비 나라일 뿐, 친구의 따뜻한 눈길을 서로 주고받고 도와주는 손길을 내미는 순간 맥 잃고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수가 전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 점을 아주 잘 말해준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곤경에 빠졌는데, 지나가던 권세 있는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척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간 것이다. 당연히 청중은 마지막에 권세와 상관없는 한 보통 사람, 즉 보통 유대인 남자가 와서 그를 구해주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준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그에게 연민을 품고 불쌍히 여겼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그를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 돌아올 때 추가로 들어간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마도 예수의 이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사마리아인의 행동에 매우 놀랐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민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splagcnizein)는 내장과 관련이 있다. 고대인들은 깊은 사랑이나 슬픔 같은 감정은 신체에서부터, 내장에서부터 일어난다고 여겼다. 우리말에서 ‘애(창자)를 끊는 것 같은 슬픔’,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여졌다.”
이 비유는 기존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통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비유 속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한 당사자로서, 그 증오와 분리의 벽을 깨뜨리고 넘어와 어려움에 처한 구체적인 한 인간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이다. 모든 분노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따지고 보면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서로에 대한 증오에는 뿌리 깊은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유대인들의 예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바빌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복구하는 것을 방해했다.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들이 시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도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를 도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은 기원전 128년 그리심 산 위에 세운 사마리아 성전을 불태운 원수였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인간이 아니었고, 사마리아인에게도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증오와 폭력의 역사 속에서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미워할 만한 정당한 이유에 매달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함을 자기 앞에서 온몸으로 보여주는 한 구체적인 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한 인간과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만난 것이다. 이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는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뻗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움 앞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다.
결국 이 비유는 우정과 친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해서 원수가 친구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의 이 비유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더 이상 민족적·국가적·계급적 분리의 벽이 존재하지 않고, 원수인 ‘그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돕기까지 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善)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국가나 제도, 이념은 우리를 친구가 되게 하지 못한다. 언제나 그것은 분리하는 경계선을 하나 더 만들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경계선을 넘는 것은 곤경에 처한 한 유대인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최초의 한 사마리아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모두를 위해 새로운 세계, 동무들의 세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몇 년 전 우리 곁을 떠난 시인, 누구보다도 동무들의 세계를 그리워하던 시인 권정생의 시를 통해 얼핏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박경미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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