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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집행과 관련된 대표적 상징은 라틴어로는 유스티치아로 불리는 디케 여신상이다. 정의의 신인 그녀는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양날의 칼을 잡고 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거나 수건으로 눈이 가려져 있다. 양면적 힘과 공정성과 공평성을 나타내는 이것들을 법과 관련하여 풀어 쓰면 각각 형벌권과 그 남용 금지(칼), ‘양형 기준’에 부합하는 적정 형량(저울)과 눈치와 차별 없는 공평한 법적 판단(가린 눈)이 되고, 이것들은 법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한 요소들이다. 정의의 여신과 법을 연관 짓는 전통(?)은 법과 정의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법에 종사하는 자들이 남다른 자부심을 갖는 까닭도 그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법을 출세나 부를 축적하는 길로만 여기는 자들이 아무리 다수라 해도 그 기대는 계속될 것이다. 비록 그들에 의해 법이 왜곡되고 불의한 현실이 법적 정당성을 갖게 됨으로써 기대가 무너져도 그럴 것이다.
법과 정의! 그러나 우리의 법적 현실은 참혹하다. 법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법이 공정하게 적용되지도 않고 공평하게 집행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법이 권력과 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있는 죄도 없어지고, 없는 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냉소적 반응이 주를 이룬다. 법? 법은 무슨?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악법은 철저하고 엄격하게 지켜지고, 정작 지켜져야 할 법은 법전 어느 구석엔가 처박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법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법이 무엇인가? 학문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든 그것은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표현이고 사회적 삶의 규칙이다. 법은 특히 인권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한 사회가 이루어낸 성취로서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다. 법으로 규정되지 않으면, 그 성과는 일시적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법에 무관심할 수 있는가?
정의의 여신은 정의를 규정하지 않는다. 마치 정의로운 법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법의 여신으로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로 법은 이미 주어져 있다. 그 신상은 다만 법 집행과 관련될 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위와 같이 이해된 법이 불변의 법일 수 없어서일 것이다. 법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담아내야 한다. 그러나 법이 정의와 연관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법 집행 차원에만 그칠 수 없다. 법의 내용과 지향점도 정의여야 한다.
물론 악법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그리고 악법도 법이라며 죽어간 소크라테스가 있고, “법이 비록 선하지 않아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법가의 신도도 있다.1) 그러나 악법을 지키는 것은 악을 행하거나 악에 동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악법을 지킬 수 없었지만, 실정법을 어겼기에 그에 따른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악법의 집행에 대해서도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정의의 여신이 악법을 어긴 자를 향해 칼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수건을 벗어던지고 저울 너머에 숨어 있는 악법 제정자를 향해 칼을 겨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2
지극히 단편적이긴 하지만 고대의 법 이해에 조금만 더 머물기로 하자.
위에 언급한 법가의 신도 이전에 법과 관련된 대표적 표상은 『예기』 곡례 상(禮記 曲禮 上)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예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벌은 대부로 올라가지 않는다.
刑人不在君側
형을 받은 사람은 임금 옆에 있지 못한다.
이 말은 대부나 관리(사)가 지켜야 하는 예를 서민까지 지킬 이유는 없다고 말할 뿐이지 서민들에게 지킬 예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초점은 귀족의 행동규범이 서민의 그것과 다르다는 데 있다. 대부들을 형벌로 다스리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임을 말하는 그다음 대목을 고려할 때 그 의미는 온전히 드러난다. 형벌이 아래로 일컬어지는 서민들을 겨냥한 타율적인 행동규제 방식이라면, 예는 귀족들에게 한정된 자율적 행위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예와 형벌은 주 왕조 이후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용되어 온 질서체계이다. 이에 대해 신도는 귀족들도 법 아래 둠으로써 그 체계를 거부하고자 한다.
君人者 舍法而以身治 則誅賞予奪 從君心出矣…大君任法而弗躬 則事斷於法矣(愼子 君人)
임금이 법을 버리고 직접 다스리면 벌과 상, (관직) 수여와 삭탈이 모두 임금의 마음에 따라 이루어진다.…대군이 법을 사용하고 직접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은 법에 따라 판단된다.
여기에는 왕도 법에 따라서 다스리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왕의 통치행위도 임의가 아니라 법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한비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확대된다.
故以法治國 刑措而已矣
그러므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그것은 바른 것을) 높이고 (잘못된 것을) ‘벌하는’ 것일 따름이다.
法不阿貴 繩不撓曲
법은 경대부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휜 것을 따라 휘지 않는다.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敢爭
법이 가하는 것은 지혜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용자도 감히 다툴 수 없다.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韓非子 有度)
잘못한 것에 대한 형벌은 대신도 피할 수 없고, 잘한 것에 대한 상은 필부도 빠뜨리지 않는다.
비록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왕 역시 법에 의거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그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대단히 진전된 사상이다. 왕의 자의적 행위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왕이 법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선언에 불과할 수 있다. 왕에게 법 준수를 강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삼권분립에 기초한 현대 사회를 준거로 법가를 비판하는 것은 부당한 면이 없지 않다. 지금도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는 제왕적 권력자의 행태를 심심치 않게 목격하는데, 군주 시대라면 오죽하겠는가.
더 나아가 여기에는 법의 공평성과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다. 법 집행은 그 자체의 규정에 따를 뿐, 신분이나 정황에 따라 임의로 변경되지 않는다. 적어도 법 앞에서는 대부나 평민이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차별 없는 법 집행, 21세기에도 여전히 꿈이다.
한비자에게 법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장치일 뿐 아니라 인간의 욕구를 제어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법치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를 인간 자신 곧 욕심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는 욕심이 자라면 사심(邪心)을 낳고, 사심에서 재난이 비롯된다고 본다. “욕심부리는 자들이란, 내세우면 양민들에게 간사한 짓을 하도록 가르치고, 물러나게 하면 선한 사람들에게 화가 미치게 한다. …그러니 욕심부리는 자들은 위로는 군주를 범하여 약화시키고, 아래로는 백성을 상하게 한다. 이는 큰 죄이다. 화(의 근원으로) 욕심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개인적으로 욕심은 병과 재난의 원인이며 그로 인한 ‘고통이 위와 장 사이에 모여 사람을 상하게 한다.…그래서 허물 가운데 욕심보다 더 비통한 것은 없다고 한다.’2)
이렇게 이해된 욕심이 법치의 출발점이 된다면, 법치의 목표는 왕권 안정이나 강화를 넘어설 것이다. 욕심이 불러올 화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것이 그 안에 숨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확충해야 할 네 가지 단초를 갖고 있다고 한 맹자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3) 법치가 그 단초들의 확충에 기여하는 한 가지 길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 욕심의 제어 없이 수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소 법치는 법 만능주의로 빠지지 않고 사람의 얼굴을 한 법치가 될 것이다.
이것들이 원론적이라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법전인 수메르의 우르-남무법은 법과 사회적 실천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4) 이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우르 남무는 사회개혁을 시행하여 법과 정의를 세운다. 그는 큰 선박의 무역 독점이나 소나 양 또는 나귀를 소유한 목축업자들의 목자 독점 등을 금지하고, 노예를 해방시키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고아, 과부, 가난한 자들이 부자와 권력자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고, 자기 측근이나 친인척에 의한 임의적 강제노역을 금지함으로 수메르 땅에서 증오와 폭력을 멈추게 하고 정의를 수립하였다. 이것은 그 법전의 역사적 서언 내용이다. 이는 권력자의 업적을 내세우는 것으로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개혁이 정의와 법을 향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의 법제화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없다. 법전에 수록된 것은 뜻밖에도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규정들이다. 그 법들은 현대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민사와 형사 모두에 관련된다. 살인, 도둑, 납치(?), 성폭행,5) 혼인, 간음, 상해, 무고, 위증, 법정 판결 불이행, 종, 토지 강제점유와 경작, 토지 임대 등에 대한 형벌이나 배상 규정은 신분제 사회의 한계 내에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사회적 관계와 행위에 관한 법과 정의가 개인적 관계와 행위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법은 법제사(法制史) 처음부터 정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를 떠난 법이 지금도 만들어지고 집행되고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형식적으로는 현재가 더 나은 법 제도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독소조항과 악법들이, 또 불의한 법 집행이 법을 불법화한다. 사회정의의 후퇴를 반영하는 이 같은 우리의 법적 현실은 재벌 중심의 경제 권력을 위한 사회체제 성립과 함께 더욱 어두워져만 간다. 성서의 법에 대한 고찰이 이러한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아니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계기라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3
앞에서 본 것들과 법의 의미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에 이어 구약성서의 법을 다루고자 한다. 현재의 구약성서에서도 법은 역사적 사건의 법제화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개입이 이루어낸 이스라엘 해방이 모든 법의 토대이다.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새로운 공간에서 전개될 삶의 모든 차원에서 계속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해방을 지향하는 그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권력과 부에 의지하는 지배체제가 끼어들 틈이 없다. 비록 후에 왕정 도입이 결정되지만, 그때에도 왕정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의 본래 의도된 관계 성립과 유지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경외와 은총의 상호 인정을 드러내는 ‘제도화되지 않은 제도’만 있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억압과 착취 대신 평등과 연대가 있다. 구약성서의 법은 이 같은 이중적 관계의 표현이다. 이 관계를 나타내는 대목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신명기 10장 12-22절6)에만 주목하고자 한다.
A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야훼를 경외하여
a 그의 모든 길을 따라 가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야훼 네 하나님을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해 네게 명하는 야훼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외
에 (더 있느냐)
B
14 보라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야훼 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b 15 야훼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 뒤에 그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으니 오늘과 같다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B
17 야훼 너희 하나님 그는 신 가운데 신이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힘 있고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a 외모를 보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고 (재판)
18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며 (약자)
이주민을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
19 그러니 너희는 이주민을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주민이었다
A
20 야훼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붙어 있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이 본 이 크고 두려운 일들을 너를 위하여 행하신 분이다
b 22 겨우 칠십 인의 네 조상들이 이집트에 내려갔으나 지금은 네 하나님 야훼
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다
15절과 21b-22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선택과 해방과 복(약속의 성취)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은총을 기반으로 한다. 그 위에서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길 것을 요구하는 한편 그의 길을 가며 그의 법을 지키라고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법은 은총의 관계를 법제화한 것이다. 은총은 법의 근거이며, 법은 은총의 역사화라고 할 수 있다. 법의 내용을 결정하는 사건은 해방이다. 해방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경험이다.
19절은 이를 ‘이주민(게르)으로 살기’라고 한다. 그것은 남의 땅에서 갖가지 형태의 권리 제약을 받으며 사는 삶이다. 여기에는 차별과 억압과 수탈이 있다. 그들을 위한 안전망과 보호망은 기대하기 힘들다.(우리나라의 이주민 상황을 돌아보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해방의 경험은 그들을 향한다.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과거를 보며 그들과 연민으로 연대하라고 한다. 어쩌면 그 명령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해방자가 되었음을 기억하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명령 배후에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인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18b절) 이 명령은 이스라엘에게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동시에 가르쳐준다. 흔히 말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이고, 신약성서에 기대어 말하면 ‘황금률’이다.(마 7:12, 눅 6:31) 마태복음 7장 12절은 이것을 (율)법과 예언자 (전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그 명령이 왜 거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7bb-18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공정하고 공평한 재판관이며 약자를 위해 정의를 행하는 신으로 소개한다. 이는 법 집행에서 하나님이 염두에 둔 정의는 정의의 여신이 상징하는 공정, 공평, 엄격한 법 집행 자체가 아니라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을 지키시고 살게 하는 것임을 예상케 한다. 다시 말해 법 집행에서의 정의는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억압적 사회로의 퇴행을 저지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정의에 종속된다. 하나님의 명령 곧 그의 법은 그것을 받고 지키는 자들의 행복(토브)을 목표하기 때문이다.(13절)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 곧 그의 길을 따라가는 자(12ba2절)는 그 길에서 행복을 얻는다. 하나님의 길은 17bb-18절에 있는 그의 자기소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4
구약성서에는 수많은 법이 나와 있다. 그리고 그 법들이 이것들로 다 총괄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있고 그 길을 따라간다면, 그 밖의 것들은 당연히 지켜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모아지고 있는 그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곧 정의요 이웃 사랑이기에 그렇다.(눅 10:25-37 참조) 따라서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라면, 그 길 위에서 곧 약자에게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정의로 서로 만나게 된다. 양자는 둘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은 사람 사랑을 통해 표현되고, 사람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내용이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요구이다.(12a절) 그렇기에 미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구하는 선한 것을 ‘오직 정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뿐이라고 갈파한다.(미 6:8)
신명기의 본문이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마음에 할례를 하라는 16절 때문이다. 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할례는 이제까지 마음을 덮고 있어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게 했던 ‘가죽’을 베어버림으로 부드러운 마음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요구에 겸손히 응하게 하는 것이다.(렘 4:4)7) 이처럼 신명기 본문은 법 집행보다는 법 실천에 더 중심을 두고 있어서 앞에 언급된 것들과 차이를 보인다.
법 실천은 법 정신의 구현이지 특정 조항이나 문구의 실행이 아니다. 그런 조항이나 문구는 그 정신에 따라 해석되고 적용될 때 비로소 제대로 실천되고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 실천이 겸손과 정의와 자비에 있다면. 그 실천은 차별과 고통과 죽음을 만들어내는 악법들과 불의한 법 집행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를 정당한 법으로 만들어내기까지 그 실천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1) 法雖不善 猶愈於無法 所以一人心也(愼子 威德. 4 B.C.E)
2) 可欲之類 進則教良民為姦 退則令善人有禍…然則可欲之類 上侵弱君而下傷人民 夫上侵弱君而下傷人民者 大罪也. 故曰 禍莫大於可欲…苦痛雜於腸胃之間則傷人也憯…故曰 咎莫憯於欲利(韓非子 解老 22)
3)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凡有四端於我者…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孟子 公孫丑 上)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단초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초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초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단초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단초가 있는 것은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무릇 자기에게 있는 네 단초를 모두…만일…확충시킬 수 있으면 사해를 보존하는 데 충분하고, 만일 확충시키지 못하면 부모 섬기는 데도 부족할 것이다.
4) 고대근동의 법으로는 우르-이님기나법(역사적 서언만 남아 있음), 리피트-이쉬타르법, 에쉬닌나법, 함무라비법 등이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고대근동의 법은 대체로 역사적 서언, 법, 복과 저주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5) 특히 결혼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사형에 처하였다.
6) 신명기 10장 12-22절은 거시적으로는 ABBA 형식의 교차법 구조를 보이고, 미시적으로는 abab 형식의 평행법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7) 예레미야 9장 26절, 에스겔 44장 7, 9절은 몸과 마음 모두 할례받는 것에 대해 말하고, 에스겔 11장 19-20절, 18장 31절, 36장 26-28절은 ‘새 영’을 이야기한다.(또한 렘 31:31-34도 참조)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기념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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