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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 지시를 잘 따르면 개죽음만 남는다. 산산조각난 아이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웠다. 둘째 아이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첫째를 그렇게 키운 게 미칠 듯이, 미칠 듯이 후회가 된다.
이 말은 지난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가 목숨을 잃은 열아홉 살 청년 김 군의 어머니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지금도 우리 아이가 온몸이 부서져 피투성이로 안치실에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회사 쪽에서는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우리 아이가 지키지 않아 그 과실로 죽었다고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너무 억울하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왜 이렇게 가슴 아픈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걸까? 세월호 사건 때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잘 따른 아이들이 희생되었듯이, 또 한 명의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청년이 희생당했다. 세월호 사건를 제대로 해결했다면 김 군은 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무턱대고 든다. 비단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세월호 사건에서부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방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반생명적이며 폭력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려는 것인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김 군의 유품은 많은 사람을 울렸다. 그의 가방에서는 사발면과 숟가락이 다른 공구들과 함께 나왔다. 가지런히 진열된 공구들은 그의 일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끼니도 거른 채 언제 전동차가 들어올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어두운 철로와 스크린도어의 비좁은 틈에 홀로 곡예하듯 재빠르게 그 공구들을 움직였을 청년의 손놀림이 떠올랐다. 길을 가다 뒤통수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아들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는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죽는 날 나도 죽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책임감 있게 키운 것, 윗사람의 지시를 잘 따르라고 가르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죽음이 일상화되었다. 기업은 비용을 절감하고 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위험한 일을 외주화한다. 이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도 그 잘못을 영세한 하청기업과 노동자 개인에게 돌릴 뿐 원청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 결과 김 군과 같은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김 군’들의 목숨으로 굴러가는 사회이고, 그런 죽음이 반복돼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여성 노동자 김진숙 씨는 사고 후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여성이 도심 한복판에서 살해당하면 밤늦게 돌아다닌 여자 책임이고, 열아홉 살 노동자가 혼자 일하다 처참히 숨지면 보고 안 한 노동자 잘못이고, 숨 쉬기도 힘든 미세먼지는 고기와 고등어 잘못이라면 정부는 뭐하는데? 법은 왜 필요하고 세금은 왜 따박따박 걷는 건데?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슬픔이 배가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에 있다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들의 성실한 삶 때문이다. 왜 가난하고 작은 사람들은 이토록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걸까? 누굴 위해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이토록 기진맥진 허덕이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세계를 움직이는 자들은 누구인가? 걸핏하면 규정을 내세우며 책임 회피를 하는 관료들, 뒤늦게 나타나 화면 각도를 의식하며 카메라 앞에 서는 정치가들, 연구비 수주와 유명세, 얼마간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곡학아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문가들, 한 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짓도 서슴지 않는 기업가들…. 국가와 사회를 움직이는 그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작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심했을까? 투표를 해서 그들에게 국가와 사회를 맡기고 다시 자기 일에 매달렸을까? 자신은 보잘것없는 이득을 얻을 뿐인데도 서둘러 스크린도어에 매달려야만 했을까? 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착취를 당하고 기진맥진해야 하는가?
2 죽은 김 군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감당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 가운데 하나이다. 도처에 ‘김 군’이 있고, 그 숫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경제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고, 자본주의 자체가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최근의 지속적인 경제위기가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징표라고 경고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는 금융 위기와 석유 생산 정점, 기후변화와 같은 근본적인 위기로 인해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자본의 세계화 과정이 한계에 도달했고, 따라서 더 이상 경제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현재 전 지구적 자본은 상품시장의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확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그래서 실물경제와 유리된 투기자본의 형태로 순환되고 있으며, 이 거품은 언제든 터질 수 있다.
경제성장은 끝났다. 전 지구적 자본의 확장은 끝났다. 리처드 하인버그는 그의 책 『제로성장 시대가 온다』(The End of Growth: Adapting to Our New Economic Reality)에서 단호하게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경제성장을 예전으로 돌리려는 모든 근시안적이고 무익한 시도는 실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인버그는 성장시대가 끝나는 세 가지 핵심적인 이유로 석유 위기로 대표되는 자원 고갈,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 금융 통화의 구조적 실패를 들었다. 석유 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자원 고갈, 즉 석유 위기를 꼽고 있다.
많은 에너지 전문가들에 따르면 석유 생산은 이미 정점을 지났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수레바퀴를 쉬지 않고 굴려온 것은 실은 석유였다. 석유는 그 어떤 에너지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율성이 높고 운송이 편리한 값싼 에너지원이다. 따라서 석유가 희소해질수록 현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엄청나게 증대된다. 지금 세계적으로 셰일가스 개발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것은 지하 깊은 곳의 혈암층, 즉 바위틈에 끼어 있는 석유로 채굴 과정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또 수압파쇄법(hydrofracturing)이라는 채굴 방법은 심각한 환경파괴를 일으킨다. 셰일가스는 갑자기 발견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채굴의 어려움과 고비용 때문에 방치했다가 이제 석유 생산이 그 정점을 지나면서 마지막 화석연료 자원으로 이것에마저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셰일가스마저도 생산 정점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예측하고 있다. 그러므로 셰일가스가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석유문명의 위기를 말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계경제는 빚더미 위에서 호황을 누렸다. 잔뜩 부풀려진 금융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숫자만으로 존재하는 돈으로 지출을 늘렸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이 현실화되면서 그 빚은 상환불능 상태가 되었다. 주요 은행들이 파산하고 국가경제가 부도나고 전 지구적인 재정 파산 상태가 목전에 있다. 게다가 정치구조는 마비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기업권력’에 볼모로 잡혀 있다. 정부는 위기에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결정한다. 국가를 기업화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인버그에 따르면 대격변은 예비되어 있다. 언제 충돌할 것인가는 시간 문제이고, 우리는 각자 이에 대응해야 한다. 경제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그러한 폭발은 언제고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하인버그는 아주 실감 나게 말한다.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동안 파산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빌려왔지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대출을 받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이를 것이다.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에 이르고 식품 가격은 치솟을 것이다. 현금 지급기에 돈이 없고, 실업률은 끔찍할 정도로 치솟을 것이다. 정부의 행정 서비스 역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생활수준은 곤두박질치며 긴축 프로그램들은 가혹할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확대되어 극소수의 지구 엘리트와 절대다수의 대중 사이의 간격이 엄청나게 벌어질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붕괴는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폭동과 소요의 불길을 당길 것이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진전되리라는 것을 파악하고 두려워하는 엘리트들은 타락한 지급불능의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금 국가의 자원을 약탈하고 있으며, 경찰력을 군사화하고, 이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범죄화하기 위해 법률을 고치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모순을 외화시킬 더 이상의 외부, 즉 식민지가 없고, 전 세계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이 점에서 현재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지속불가능하다. 이 ‘지속불가능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채무 탕감, 엄청나게 부풀려진 군사비 지출에 대한 대규모 삭감, 재정 부문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제한, 과두 엘리트들과 기업들에 대한 높은 과세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경제의 재구조화는 기후변화와 자원의 고갈을 늦추지는 못하겠지만, 새로운 정책을 운영해나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안정성을 창출해낼 것이다. 그러나 하인버그는 그런 합리적인 정책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파국이 가속화하면서 파워엘리트층에서 더 대담하고 절망적인 드라이브를 걸어 거대 은행과 군사체계를 지탱하기 위해 사회의 자원을 더욱 약탈적으로 먹어치우지 않을지 우려한다.
결국 생존 가능성은 지역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복원 능력이다. 성장이 멈추면 인구가 많은 나라가 더 어려워지고, 자급적 농민이 많은 나라는 ‘저개발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공동체들은 집단을 형성해서 자신들이 먹을 것을 생산하고 안전을 지키며 교육과 재정 시스템, 자기 통제 등을 실행해야 한다. 하인버그는 이러한 탈중심화 과정이 21세기 경제와 사회적 흐름의 한 징표가 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한다. 우리 삶의 질은 우리 공동체의 질에 달려 있다. 공동체적 구조가 강력하다면 아마 견딜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꺾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대파국의 위기가 정말로 시작되기 전에 이러한 구조가 정착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하인버그에 따르면 그것은 ‘이웃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에 터 잡고 지역의 삶에 뿌리를 내리는 것, 그것만이 생존을 위한 우리의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서 개인들이 각자 실제적인 기술을 연마하고, 보다 자급적이 되고, 이웃과 신뢰의 연대를 형성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 아이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탈중심화, 지역화라는 하인버그의 대안은 타당하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장시대의 종언이라는 상황진단의 엄중함에 비해 하인버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지역화 대안은 안이하게 느껴진다. 지역 화폐, 텃밭 가꾸기, 푸드뱅크 등은 모두 필요하고 또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지만, 상황의 긴박성에 비해 한가로운 대안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그 논의가 활발하며, 국내에서는 녹색당이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안정적으로 착지시킬 적극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기계화와 자동화, 특히 인공지능의 실용화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취업은 어렵고 인구도 줄어들어 연금제도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베이비붐 세대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수많은 ‘김 군’들의 삶의 안전망을 어떻게 보장해줄 것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기본소득은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현재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일정 액수를 매달 지급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소득이 반드시 고용이나 이윤 획득을 통해 얻어진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제도와도 다르다. 기본소득의 이념은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인간 존엄성의 원칙과 모든 지식과 기술, 넓은 의미의 자본이란 근본적으로 수천 수만 년에 걸친 인류 공동의 지혜의 보고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공동체적 경제철학에 기반해 있다. 사실 고용을 통해서만 소득을 얻는다는 관념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다. 이러한 관념의 근저에는 임금노동만이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의 뿌리 깊은 통념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전의 노동은 거의가 임금노동이 아니었다. 가령 자급적인 소농의 노동은 임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인간은 소득으로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든 일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하도록 창조되었고, 진정한 의미의 노동은 임금노동이 아니라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기술이나 특허, 지식은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수많은 선조들이 이룬 지혜의 보고에 깃털 하나의 무게도 안 되는 것을 살짝 얹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기에 과도한 이익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오랜 인류 공동의 삶과 지혜의 덕택으로 지금 이 사회와 문명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정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기본소득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가 유지된다면 젊은이들은 돈벌이를 위해 굴욕을 당하거나 생존을 위해 삶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고,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재미를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마치 다윗의 물맷돌처럼 최후의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괴물 자본주의를 너무 소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원 확보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생각이 바뀌면 길은 있다.
3 무한성장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파산했다는 것은 하인버그만이 아니라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에서부터 장 지글러, 제레드 다이몬드 같은 사람들이 이미 계속해서 경고해온 바이다. 슈마허는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라고 간명하게 말했다. 그리고 경제지표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경제’를 이야기했고, 유한한 지구에서 계속 살려면 순환적 경제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보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랜 세월 인류가 발전시켜온 지혜로운 전통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성장이 멈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는 끝없이 소비를 부추긴다. 끊임없이 소비하고 소비가 확대되어야만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경제 시스템은 석유와 같이 유한한 자원을 마구 낭비할 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을 좀먹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세계에 대한 폭력은 반드시 인간성 자체의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그런 것들을 얻어야 하는가? 우리는 본래 무엇을 생산하며, 우리의 노동에는 어떠한 사회정치적 의미가 부여되는가? 믿음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하느님의 세계 경륜과 관련하여 제기해야 한다.
하인버그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이 문명의 전환기에 생존의 가능성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는데, 경제적 행위의 목표가 삶 자체, 그것도 공동체적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고, 부유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했다.(눅 6:20-26)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빚을 탕감해주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한 선언이다.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서로 이웃이 되어주는 관계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의 빛나는 비유들은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로 가득 차 있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한 가르침으로 넘쳐난다. 검소한 삶, 물질이 아니라 관계, 가족, 친구,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나타난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많은 무리를 먹인 이야기들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민중과 함께 수없이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 가슴 벅찬 경험을 담은 이야기이다. 마가복음 6장 30-44절에는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5,000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예수의 잔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헤롯의 잔치와 나란히 배열했다. 당시 헬레니즘 시대 상류계층이 즐기던 잔치는 누구나 한 밥상에서 같은 음식을 같이 나누는 평등한 잔치가 아니었다. 당시의 잔치 풍습에 따르면 손님의 지위고하에 따라 잔치의 상석과 말석이 정해졌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 앉는가에 따라 나오는 음식의 양과 질이 달랐다. 헤롯의 잔치는 바로 그런 잔치로서 예수의 잔치와 대조된다. 게다가 잔치의 여흥거리로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려 쟁반에 담겨 나온다. 이것은 질탕하고 흥청망청한 상류계층의 잔치가 사실은 민중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행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헤롯의 잔치는 인간의 탐욕을 끝없이 자극함으로써 유지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 헤롯의 잔치가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듯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음산한 잔치는 ‘김 군’과 같은 희생자를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의 잔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함께 먹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현실, 전혀 다른 잔치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배고픈 민중이 집단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겪은 깊은 해방의 경험을 담고 있으며, 공생공빈(共生共貧)하는 삶의 공동체적 연대성과 풍성한 삶의 감격을 담고 있다. 지극히 적은 음식을 가지고 5,000명이 족히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는 것은 가난한 민중이 예수와 함께 맛본 공동체적 삶의 기쁨과 넉넉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고르게 가난한 삶, 인간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적 조건에 순응하면서 또 거기 저항하면서 이루어간 ‘생태적 가난’의 문화가 주는 기쁨, 공생공빈이 주는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감격을 표현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정신과 삶의 태도에 기반해 있으며,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경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근대 이전 농경사회에서 경제행위란 기본적으로 상호의존과 공동체성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경제행위가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자체 논리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 전반, 즉 인간의 사회적·도덕적 삶과 관련해서 작동했다. 경제는 인간의 물질적 욕구 충족을 위해 자연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의존하면서 그들과 함께 이루는 상호작용, 즉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인 활동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그러한 실체적·실물적 의미의 경제는 점차 은폐되고, 희소성과 경제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경제개념이 지배하게 되었다. 경제에서 공동체적 요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칼 폴라니에 의하면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전 인간의 삶에서 경제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에 “묻혀 있었다.”(embedded) 경제가 사회에 ‘묻혀 있는’ 한, 개인의 경제행위는 사회적·공동체적 규범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경제행위가 제약을 받지 않게 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자체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인간 삶의 전 영역에서 자기를 관철시키는 시장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칼 폴라니 지음, 박현수 옮김, 『거대한 변환: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 , 서울: 민음사, 1991)
이러한 시장 전체주의는 인간에 대한 야수적인 정의 위에 서 있다. 물질적 이익추구는 인간의 본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경제적·합리적’ 존재라는 것이다. 개인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며, 사회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약육강식의 장이다. 이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이 전제하는 인간학은 불경(不敬)스러우며, 믿음과 함께 가기 어렵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볼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존재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멸망을 목전에 둔 신자유주의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죽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죽은 물건들을 사랑하면서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착각한다. 각자 고립된 채 경쟁하며 모두 혼자 힘으로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물건이 다 필요하고, 물건들에 둘러싸인 삶은 더욱 고독하다. 그리고 고독과 고립이야말로 이 무너져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연명시키는 마지막 먹잇감이다. 그러므로 하인버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결론, 즉 경제성장이 끝났고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져간다는 소식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방향전환을 위한 희망의 소식일 수 있다. 동료 인간과 지구 생태계에 대한 끝없는 약탈에 기반한 경제 시스템이 끝난다는 것은 실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거듭 전하고 있는 예수의 잔치는 서로 돕는 공동체적 경제의 일단을 보여준다. 풍성한 기쁨을 누리는 데는 산해진미가 필요 없다. 욕심을 내서 자기 창고에다 쌓아 놓으려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허기지다. 창고는 가득 채워질지 모르지만 욕심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한 그 집단은 궁핍할 수밖에 없다. 풍요 속에 굶주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이다. 인간이 사는 생태적 조건에 적합한 삶의 방식은 끝없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고르게 가난한 삶’이다. 아마도 이것이 경제성장이 끝나가는 이 시대에 요구되는 삶의 방식, ‘하느님의 경제’일 것이다. 그것은 효율성과 생산성, GNP, GDP와 같은 추상적인 사회경제적 지표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 공동체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얼마나 경제적인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이다. 또 개인 차원의 이윤 획득보다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경제행위의 실질적인 목표로 삼는 경제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삶의 풍성함과 만족감이 기본 척도가 되는 경제이다.
박경미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외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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