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성서情談 > 성서의 눈으로 보는 세상살이 (2)
성서情談 (2016년 7월호)

 

  일을 해야 하는데…
  

본문

 

1 일! 그건 고생스럽다. 힘들다. 왜 이 일을 해야 되나? 그만두고 싶다. 언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일? 어쩔 수 없이 하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더 나은 일 하라고 공부 가르쳤지…. 이게 몇십 번째 지원서이다. 일해야 하는데…. 일할 수 없어서, 아니 일할 곳이 없어서 이것저것 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 연애도, 결혼도, 친구도, 꿈도, 미래도…. 박탈감, 분노, 자조, 좌절감, 무기력, 포기…. 불황? 잘라내면 되지. 정규직? 쓸데없는 비용 왜 들여? 계약직과 일용직으로 충분해! 주식값이 떨어져? 구조조정해! 임금인상을 요구해? 일차로 해고해! 복지? 기업이 복지 해주는 덴 줄 알어? 일하기 싫으니까 노조네 뭡네 하지. 저성과자들 추려 감봉해. 종놈들이 뭘 안다고. 게으르니까 가난하지. 죽어라 하고 일한들 달라질 게 뭐야?
일을 둘러싸고 흔히 들어볼 수 있는 말들이다. 도대체 일이 무엇이길래 이럴까?
위의 말들을 바탕으로 일을 나누면 일은 크게 ‘삶이 목표인 일’과 ‘이익이 목표인 일’로 구분된다. 전자가 노동자의 일이라면, 후자는 고용자의 일이 될 것이다.(물론 이것이 고용자의 일은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전제하고, 그 전제하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를 단순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곳이 일자리이다. 이곳에서 일을 제공하는 자와 일을 수행하는 자가 만난다. 목표는 동일하지 않지만, 공존은 가능하다. 그러나 공존이 의미 있으려면, 적어도 서로가 상대의 목표를 수긍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목표의 교환을 통해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원론적이기는 하지만, 일의 의미를 찾는 데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위의 말들은 이러한 일 이해와 실제 일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넉넉히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 거리는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발생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무한경쟁의 틀을 만들어낸 세계화 이념의 사회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이처럼 우울한 전망을 갖고 성서로 들어가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성서에서 일과 관련된 진술은 적지 않다. 그렇지만 그 모든 진술의 첫머리에 놓일 수 있는 것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이다. 창세기 1장 1절-2장 4a절과 2장 4b절-3장 24절에 있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 창조를 모두 일과 연관 짓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인간을 땅과 연관된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땅에는 초목도, 채소도 없었다. 땅은 생명체가 아직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었다. 땅을 갈 사람이 아직 없고 비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땅은 사람을 기다리고 비를 기다린다. 그 땅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인간 창조이다. 처음부터 인간은 땅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였던 셈이다. 흔히 이야기하듯 일은 그것을 통해 자기를 실현시키기 이전에 그의 근원인 땅의 요구에 응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땅을 갊으로써 자기의 존재 이유를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음 ‘명령’에 있다.

너는 어떤 동산 나무의 열매든 마음대로 먹어라!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나무 그 열매는 먹지 마라.(창 2:16-17a, 이하 사역)

인간은 처음부터 일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이 명령은 그 일의 결과가 어디에 귀속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갈고 가꾸는 ‘땅’의 열매를 소비하는 자는 전적으로 일하는 사람 바로 자신이다. 일한 결과의 소비 방식만 놓고 보면, 그 일은 그 자신을 위한 일이다. 단 한 가지 예외 규정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규정도 자세히 보면, 다른 누구를 위한 규정이 아니다. 그 나무 열매를 소비할 다른 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매는 ‘동산 안에 있는’ 아담을 위한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를 동산 안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규정일 따름이다. 그가 동산 안에 계속 머물 수 있으려면, 그는 하나님이 처음 그를 지을 때의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 곧 법의 기능이다. 그 법이 지켜질 때에만, 그는 동산 안에서 그곳 나무들의 열매를 마음껏 먹고 사는 은총을 누릴 수 있다. 법은 이처럼 그것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은총과 그 위에 세워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게 하는 장치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일’이란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는 길이며, 땅에 생명을 돋우고 가꾸고 보존하는 창조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땅을 위해 일하지만 그 결과는 오로지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다. 이로써 인간과 땅 사이에는 상호보완적 관계가 성립된다. 인간은 땅에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땅의 생명활동을 ‘돕고’, 땅은 먹거리를 산출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를 유지시켜 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호관계를 가능케 하고 보장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취하지는 않으신다.
이러한 일의 의미는 창세기 1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1장에 따르면 인간은 2장에서와 달리 모든 것이 갖추어진 땅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이유는 그의 발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하늘 회의에서 그가 지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닮은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다. 인간의 위치는 땅과의 관계가 아니라 땅 위 생물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우리를 닮은 우리의 형상’이란 말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형상’은 히브리어의 ‘쩰렘’을 옮긴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닷이시’의 동상을 발견함으로 분명해졌다. 그 동상에는 아카드어와 아람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형상’으로 옮겨진 ‘쩰렘’은 왕의 동상을 가리키고, ‘닮은’으로 옮겨진 ‘데무트’는 ‘쩰렘’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1) 그렇기 때문에 ‘브-쩰렘-누’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보다는 우리의 형상‘으로’라고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2) 왕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그의 존재와 주권을 알리듯 사람은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 구체화하는 것이 ‘다스리다’라는 말이다. 이 사실이 인간에게 맡겨진 다스림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런데 ‘다스리다’로 옮겨진 히브리어 ‘라다’는 ‘(짓)밟다,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서 ‘폭력적으로 다스리다’를 함축하는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아마도 두 의미는 서로 다른 어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아카드어의 ‘라다’는 목자가 가축 떼를 ‘인도하다’라는 뉘앙스를 갖는다. 이 경우라면 ‘다스리다’라는 말은 평화적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정복하다’라는 말도 교정되어야 한다. ‘카바쉬’도 ‘밟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땅을 밟다’라는 것이 정복의 의미로 이해되어 땅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인지는 문맥에서 따져보아야 한다.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땅을 밟아라!(창 1:28)

하나님의 이 축복문에는 인구가 늘어남으로써 거주지가 계속 팽창되는 현상과 그에 따른 문명화 과정이 숨어 있다. 다시 말해 땅을 채우는 것은 인구증가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것은 땅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는 것을 전제한다. 바로 이 과정을 나타내는 말이 ‘땅을 밟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력으로 남의 땅을 정복하는 것과는 무관한 행위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딛고 그것을 살 만한 환경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스림과 땅을 밟는 것에 대한 이 같은 평화적 이해는 1장의 창조 이야기 전체의 흐름과도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손의 수와 관련된 축복을 생물에 따라 차등화하고(22a, 22b, 28절 비교. 25절에는 동물에 대한 축복이 없다.), 모든 생물의 먹거리를 식물로 한정 짓고, 또 동물들과 사람의 먹거리를 구별함으로써(29-30절) 상호 갈등과 투쟁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셨기 때문이다. 1장의 창조세계는 평화로운 공존의 질서 위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인간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주권을 대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운 평화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두 개의 창조 이야기는 이처럼 모두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의 일은 땅 위의 생명을 돌보고 보존하는 데 있다. 그 과정도, 그 결과도 당연히 평화의 질서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해된 ‘일’은 우리가 당면 문제로 삼고 있는 ‘일’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직장을 매개로 수행하는 일이 여기에서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세계는 오직 시장으로서의 ‘인간 세계’이고, 일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 관점에서 말하면, ‘일’은 한편으로는 사람과 자연 세계를 잇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구체화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일들이 자연 세계와 멀리 떨어진 듯 보여도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일’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일 이해에 따라 우리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있을 것이다.

3 창세기 1-3장에서 볼 수 있는 일의 성격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고대근동의 창조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트람하시스’라는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 창조의 동기는 신들 세계의 분화에서 비롯된 갈등에 있다. 처음에 신들은 큰 신들을 포함해 모두 일을 하였고, 그 일은 매우 고달프고 힘든 것이었다. 상당량의 본문이 훼손되어 있어서 분명치는 않지만, 그 일은 강(그리고 운하)을 파는 것이었다. 신들은 큰 신들과 ‘이기구’라는 신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큰 신들은 이기구들에게 일을 모두 떠넘기고 제비를 뽑은 다음 각자 자기 자리로 갔다. 그 후 이기구들은 계속 그 일을 했지만,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불평등한 일의 분배는 부당한 고통의 분배였다. 고통을 전담한 이기구들은 그 고통 때문에 부조리한 현실에 눈뜨게 되었고, 그 현실의 근원이 바로 권력 구조로 구현되어 있음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집단의 공동 인식은 변혁을 위한 집단의 통일된 행동을 낳는다.
그들은 파업을 결정하고 작업도구인 삽과 삼태기를 불태운다. 그런 다음 당시 권력자인 엔릴과 전쟁해서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전의를 다지며, 엔릴의 성읍을 향해 진격하고 성문을 포위한다. 이에 놀란 엔릴은 전쟁인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섞인 혼란을 겪는다. 그는 자신의 신하 누스쿠의 조언에 따라 신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하늘의 아누를 내려오게 하고, 지하(압수)의 에아(=엔키)를 올라오게 한다. 큰 신들은 먼저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누스쿠를 사자로 보내 이기구들의 항변을 듣는다. 그들의 처지를 듣고 엔릴은 눈물을 흘리며 아누에게 회의 진행을 넘기고 잠시 뒤로 물러난다. 아누의 주재로 큰 신들은 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때 그들이 찾은 묘책이 바로 인간 창조였다. 벨레트-일리에게 인간을 창조하게 해서 신들의 일을 그들에게 대신 떠맡기자는 것이었다.
신들은 인간의 조건을 무엇보다도 이성 곧 사유능력(테무)에서 찾았다.(이것은 창 2장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획득한 능력에 상응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것은 ‘아브-에-이-라’(→아윌루=사람)라는 신의 능력이므로 인간 창조를 위해 그는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신은 이성의 형식으로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통해 계속 존재를 유지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 인간의 몸은 에아가 자신의 거처 압수에서 가져온 특별한 흙덩이인 진흙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몸은 땅에 속한 것이지만 그 재료가 땅과 동일하지 않다. 이 두 가지 특성 때문에 신과 구별되는 인간은 신들의 일을 수행할 수 있고 신들이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인간의 생식 능력도 그 재료의 특수성에서 비롯되고, 인간의 생산 방식은 벨레트-일리가 신의 몸과 피를 진흙과 섞어 만든 재료를 10개월 품어 낳은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 창조는 신들의 환호와 벨레트-일리 찬양을 통해 추인되고, 그 일은 인간에게 존재 이유를 제공한다. 그렇다 해도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일의 고통을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비관적이지는 않다 해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일의 이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은 인간의 존재를 긍정하게 되는 원천이기도 하고 동시에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다. 창세기 2장도 이 점에서는 같다. 다만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행위에 대한 심판에서 찾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노동의 결과와 관련하여 아트람하시스와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중요한 차이점을 보인다. 아트람하시스에서 인간이 신에게서 넘겨받은 일은 강을 만드는 일의 연속인 운하를 파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된 인간의 일은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신들을 위해 성소를 짓고 신들을 섬기기도 한다.
(I. 337-339)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이 특별히 관심을 끈다. bu-bu-ti-iš ni-ši ti-i-ti-iš [i-li]. 이것은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신의 양식을 위해’로 옮겨질 수 있다. ‘부부티쉬’와 ‘티이티쉬’의 뉘앙스 차이는 현재로서는 분명치 않다.3)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동 목적에 자신 이외에, 비록 신들일지라도, 타자가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노동은 자족적이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노동 결과를 모두 인간에게 귀속시킨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동 결과에 의존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트람하시스는 일의 고통과 일의 결과의 귀속 문제와 관련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인간은 아트람하시스의 큰 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계급 분화를 통해 약자에게 일의 고통을 전가해왔다. 부분적으로 인간은 가축과 기계의 힘을 빌려 일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현대에 이를수록 이 경향은 강화되었고, 최근에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의 역사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렇지만 비극적인 국면이 전개될 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일하는 인간의 고통은 단지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의 결과를 그 생산자가 누리지 못하고 갖가지 이유와 방식으로 강자들에게 약탈과 착취를 당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부역 내지 노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중된다. 이러한 ‘현실’에 비춰볼 때 아트람하시스의 일 이해가 보다 현실에 가깝게 여겨질 것이다.

4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 일을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원론적인 데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일의 미래와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되는 미래에, 일은 그 이야기들 속에서 드러난 일의 모습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65장은 그 미래를 다음과 같이 그린다.

그들이 집을 짓고 (거기)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 그들이 짓고 타인이 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심고 타인이 먹지 않을 것이다. 오! 내 백성의 날이 나무의 날과 같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누릴 것이며 그들이 헛되이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21-23a절. 또한 미 4:4, 왕상 4:25 참조)

이 본문은 단순히 자급자족적 노동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생산활동의 결과가 강제적으로 생산자와 분리되는 사회경제적 과정이다. 권력에 의한 강탈이나 ‘자본’과 법에 의한 수용 등은 그 과정의 핵심 내용이다. 성서에서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채권자들의 횡포(출 22:25-27, 암 8:6, 욥 24:3-4, 9-10. 또한 신 24:10-14, 17 등), 부당한 세금징수(암 5:11), 집과 토지 강탈(욥 20:19, 24:2, 사 5:8, 미 2:2), 법에 의한 강탈(사 10:1-2. 또한 신 24:17도 참조) 등이 있다. ‘삯 착취’와 관련된 경고를 위의 본문 23a절과 연관하여 읽는 것이 허락된다면,4) 위 본문은 인간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는 노동을 다 포괄할 수 있다.
형식과 정도의 차이를 감안하면, 위 본문은 사회체제와 관계없이 작동하는 약탈적 기제와 그에 기초한 사회경제체제 일체에 대한 거부로 읽힌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컬어지는 미래는 노동하는 행위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실현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여기서는 일의 고통 문제가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을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일은 즐거움이 될 수 있고, 그 고통은 삶을 위한 값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가? 하지만 일이 없어서, 일할 곳이 없어서 일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극히 사치스러운 꿈처럼 들릴 것이다.

5 일의 고통과 짝을 이루는 것이 쉼 곧 안식이다. (구약)성서에서 쉼은 안식일로 제도화되어 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안식일 제정의 동기를 서로 다른 곳에서 찾는다. 전자는 안식일을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관련짓고, 후자는 출애굽 사건을 그 동기로 삼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안식일에 쉬어야 하는 자들이 아들이나 딸, 남종이나 여종, 가축이나 ‘고용된’ 이주민들이라는 것이다.5) 이들에게 쉼을 허락해야 하는 자는 종들의 주인이다. 안식은 주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바로 그 아래서 일하는 모든 자의 권리이다.6)
십계명은 안식일을 예배 등과 연관 짓지 않는다. 단지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을 멈추는 것이 안식이며, 안식해야 할 자는 그 활동에 참여한 사람과 가축 모두라고 말할 뿐이다. 안식일을 설명하는 또 다른 구절인 출애굽기 23장 12절에 따르면, 쉼(샵바트)이란 힘들고 지쳤을 때 숨을 돌리는 것이다.(나페쉬 ni. 삼하 16:14도 참조) 이 쉼이 몸을 살리고 영을 살린다. 바로 여기서 안식이 창조 이야기의 일부가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31장 17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숨을 돌리셨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손쉬운 일이 아니라 쉼이 필요할 만큼 힘든 일이었다.(위의 ‘아트람하시스’와 비교!) 하나님은 단순히 일을 마쳤기에 또는 어떤 ‘종교적인’ 이유로 쉬었다기보다 쉼이 필요해서 쉬었다. 이 본문들이 일하는 자의 쉼/안식 그 자체만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일의 고됨을 체험하시고 아시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일의 고통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고통은 일의 기쁨을 낳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보고 ‘좋다, 참 좋다.’라고 하신 한 가지 이유일 수 있다. 고통의 미화가 아니라 고통 없이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의 십계명이 쉼을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과 연관 지어 말한다면, 그 일의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일 수 없다. 어떠한 경우이든 일의 고통은 숨을 돌리는 쉼이 필요하게 만든다. 쉼은 사람과 가축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쉼은 땅을 살리기도 한다.(레 25:1-7, 대하 36:21. 또한 출 23:10-11, 롬 8:18-22 참조) 땅과 인간은 위에서 본 대로 상보적인데, 사람은 땅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는다. 땅이 인간에게 무한정 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땅은 인간의 그와 같은 약탈적 사용 때문에 신음한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다린다. 하나님도, 땅도, 사람도, 가축도 쉼으로써 창조 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오직 경쟁과 효율에 의해서만 판단된다. 그리고 그 경쟁과 효율은 무엇보다도 자본가와 권력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구호와 장치이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저성과자가 되어 해고 위기에 처하고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일하는 자는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는 주체이기보다는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산만 맞는다면, 사람은 언제든 기계나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될 수 있다. 기계와 로봇에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가와 권력자의 눈에는 한낱 잉여인간에 불과한 자들일까? 기계와 로봇에 의한 생산력 증대는 오히려 직장을, 긴 시간 일하는 소수가 아니라 짧은 시간 일하는 다수의 구조로 전환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미래 직장이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명시적이든 아니든 직장은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직장이 공동의 목표를 내세우고 그 목표에 복무하는 것을 직장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모든 종사자에게 요구할 때, 바로 그 공동 목표가 직장인들을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 목표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공동 목표가 될 것이다. 이 경우, 창세기 2장의 하나님, 땅, 사람의 관계를 사주, 회사, 직장인의 관계로 바꾸어 말한다면, 이 관계가 비록 저 관계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지향한다면, 직장은 일하려는 사람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쫓아내기보다는 일하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일자리를 나누고 자신들의 삶을 실현시키는 곳이 되지 않겠는가? 일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희망의 자리가 되지 않을까? 늘어나는 쉼과 여가는 역으로 직장의 생산력 증가와 ‘이익’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일을 찾는 사람들,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서 일할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삶을 비트는 무자비한 효율과 경쟁‘주의’적 경제원칙을 버려야만 그러한 때가 만들어질 것이다.

1) 이 동상은 1979년 시리아 북동쪽 터키 국경에 인접한 텔 할라프 근처의 텔 파카리야에서 발견되었다. 실물 크기의 이 동상 앞면 아래쪽에 아시리아어 텍스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아람어 텍스트가 새겨져 있다. 이에 따르면 하닷-이시(Hadd-yisci)는 샤마쉬-누리의 아들이다.
2) 이 경우 전치사 ‘브’는 ‘~으로’를 뜻한다.
3) bub⁻utu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정도의 음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 말이 기본적으로 ‘굶주림, 기아’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예레미야 22:13, 말라기 3:5, 레위기 19:13, 신명기 24:15, 야고보서 5:4. 또한 욥기 7:2, 눅 10:7도 참조하라.
5) ‘객’이나 ‘나그네’보다는 이주자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한 ‘게르’는 전쟁이나 재난 등의 이유로 연고가 전혀 없는 타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아무 법적 권리도 없다. 그런 자들이 일을 한다면, 그들은 넓은 의미의 피고용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6)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에는 ‘남종과 여종들을 너(=주인!) 같이 쉬게 해야 한다.’는 조항이 첨가되어 있다.


김상기 |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나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과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Dr. Theol.) 감신대와 한신대에서 강의하며, 백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위기Ⅰ-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기념성서주석』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기도』 외 다수가 있다.

 
 
 

2023년 8월호(통권 776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의왕카카오톡 친구찾기   비아탑-시알리스 구입   woao50   노란출장마사지   myilsag   racingbest   24시간대출   대출DB   gmdqnswp   viame2   ViagraSilo   Gmdqnswp   miko114   채팅 사이트 순위   yano77   미프진약국 박스   캔디약국   LevitraKR   gyeongma   천사약국   MifeSilo   reu112   출장 파란출장마사지   koreaviagra   Mifegymiso   skrxodir   24parmacy   ViagraSite   무료만남어플   euromifegyn   시알리스구매   의왕 발 기 부진약   moneyprime   insuradb   우즐성   비아탑   마나토끼   돔클럽 DOMCLUB.top   onnews   24Parmacy   비아센터   미프진 후기   kajino   미프뉴스   drugpharm   vnnd33   비아탑-프릴리지 구입   euromifegyn   파워맨   미프진 약국   시 알 리스 후기   24시간대출 대출후   alvmwls   비아몰   만남 사이트 순위   alvmwls.xyz   비아센터   유머판   밍키넷 MinKy.top   미프블로그   tlrhfdirrnr   financedb   qldkahf   주소야   rudak   링크114   코리아e뉴스   최신 토렌트 사이트 순위   미페프리스톤   HD포럼   vianews   돔클럽 DOMCLUB   viagrastore   24 약국   bakala   poao71   합몸 출장   낙태약   viagrasite   코리아건강   비아마켓   skrxo   신규 노제휴 사이트   allmy   비아랭킹   althdirrnr   miko114   웹토끼   gkskdirrnr   healthdb   비아365   yudo82   링크와   실시간무료채팅   mifegymiso   미소약국미프진   미소약국   qmn320   totora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