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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장님 우리 추장님
아! 위대하고 멋들어진 우리 추장님
뜨거운 음식을 잘 먹기 위해서는
박 껍데기로 만든 숟가락이 하나 있어야 하고
강물에 빠져죽지 않으려면 배 한척 있어야지
굶주림을 이기려면 젖소 한 마리 있어야 하고
겨울 한기를 견디려면 가죽 외투가 꼭 필요하다네
사막바람을 막으려면 큼지막한 모포가 있어야지
마을의 어려운 문제 골칫거리들 풀기 위해서는
아! 우리 추장님, 반드시 있어야 하네
(서아프리카 민요시, <추장님 우리 추장님>)
말은 야생마 혈통이어야 달리기시합 경주에서 이길 확률이 높다지. 하나님은 그의 친애하는 사람을 찾으실 때 야성, 야생성이 있는지 먼저 살피신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 메시아는, 야물딱지고 용맹스러우면서도 따스한 가슴을 지닌 추장님. 통제 불가능한 인간들 옆구리에 끼고 사랑의 행진을 이끄실 광야의 새 지도자.
구약성서는 온통 신의 이야기, 아니 신들의 이야기. 살아있는 신 람세스 파라오. 바알이라는 가진 자 지주의 수호신. 신들 가운데 떠돌뱅이 가난뱅이들 약자의 수호신 여호와. 람세스의 압제로부터 탈출한 노예들을 삼시 세끼 돌보시는 분. 정처 없는 히브리 집시들 가나안으로 건너와 보니 바위언덕 산적떼 반란자들의 수호신 엘로힘이 버티고 있었다. 사람 사는 이해관계에 따라 신들은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가 때론 하나가 되기도 하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던 히브리 떠돌뱅이들은 팔레스티나 언덕에 기거하던 암하레츠 낮고 천한 사람들의 엘로힘과 믿음 바탕이 다를 바가 별로 없었다네. 수만 년 서양의 늠름하신 하나님이나 수수만년 동양의 수수하신 하늘님이나 이름만 다를 뿐 한분 하나님 아니시던가. 가난한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라면, 살아있는 권력과 짱짱히 맞서며 정의와 평화 생명을 세워가는 신이라면 마땅히 한분 우리 하나님. 히브리 이주민 거류민과 가나안 원주민은 동맹을 맺고 하나님 나라, 희년을 한 발짝 성취해간다. 사람이 주인 되는 참 세상. 하나님은 기꺼이 자기의 형상을 한 사람들의 뒷전으로 물러나 대언하는 자들 곧 예언자의 입술을 빌려 통치행위를 이어가신다. 예언자들은 신을 자처하고 사기극을 벌여온 임금들을 엄히 꾸짖었지. 그들의 기만, 그들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저항하는 민중들을 이끌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긴긴 예언의 끝자락. 하늘의 점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새 이스라엘의 지도자 예수가 태어난 것이다. 우리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 추장님. 온실 속 화초 구중궁궐의 왕자가 아니라 산간벽지 베들레헴의 마구간. 이 낮고 천한 자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 우리들의 아기 추장님… 실로 야생마처럼 태어난 아기. 인간 세상 처음으로 신에 종속된 무엇이 아니라 인간 세상 자유의지를 만끽하는 독립된 최초의 자아였다. 신정에 대한 민란의 시작이었다. 사람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선언과 무차별한 사랑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신 분.
인간들은 범접도 못할 고고하고 고매한 신의 세계로부터가 아니라 낮고 천한 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죄인들을 구원해내신 분. 신의 노예와 종이 아니라 신의 형상을 입은 친구요 가족으로, 하늘의 아드님 따님으로서 우리를 살도록 깨우쳐 주신 첫 번째 인간, 첫 번째 메시아 예수.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 1:21)
팔레스타인의 여인,
성모 마리아
이 땅에는 그래도 그 때문에 살만한 것들이 있소: 4월의 망설임, 새벽의 빵 냄새, 남정네들을 위한 여인의 부적, 에스컬러스(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의 책들, 사랑의 처음, 돌 위의 풀, 피리 소리에 한숨짓는 어머니들, 그리고 기억에 대한 침략자들의 두려움.
이 땅에는 그래도 살만한 것들이 있소: 9월의 마지막 날들, 마흔을 넘겼어도 젖무덤 고운 여인, 감옥에 해 드는 시간, 짐승의 무리를 그대로 닮은 구름들, 웃으며 죽음을 향해 오르는 이들에게 바치는 사람들의 환호, 그리고 노래에 대한 폭군들의 두려움.
이 땅에는 그래도 살만한 것들이 있소: 이 땅에는 대지의 여인, 모든 시작과 끝의 어머니가 있소. 그녀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렸다오.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오. 나의 여인이여, 나는 살 만하오. 그대가 나의 여인이기에, 나는 살 만하오.
(마흐무드 다르위쉬, 송경숙 옮김 <이 땅에는>)
인권 로터스상, 레닌 평화상에 빛나는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쉬는 1941년 갈릴리호수 근처 마을 알-비르와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자 지구 문제를 거론한 시를 발표하여 수차례 수감과 출옥을 반복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고 대변인, 문교상을 역임했다. 이후 극심한 탄압을 피해 파리로 갔던 그는,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가려 하자 이스라엘 당국이 가로막는 바람에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 요르단 강 서쪽 라말라에 정착했다. 2008년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유랑민의 이야기를 시에 담았다.
시인의 인생과 같은 유랑을 요셉과 마리아도 겪었다.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마 2:16)
학살을 피해 젖먹이 아기를 안고 떠돌아다닌 이야기. 한숨 돌린 뒤 다시 돌아온 나사렛 동네. 슬픈 통곡의 땅 팔레스타인 그 언덕.
어머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성모 마리아의 모습. 지극한 모성의 여인. 알뜰한 살림과 숭고한 자녀에 대한 가르침. 당시 2백명 정도가 고작인 자그마한 시골동네 나사렛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압제자 헤롯 아켈라우스는 반란의 씨앗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모자라 무자비한 철권통치로 일관했다. 하지만 누르면 누르는 만큼 반란은 계속되었다. 식민지 총독부는 나사렛을 포함 반란의 진원지를 특별 관리하였고, 대상자들은 단호하게 격리했다. 계엄령을 내려 통행을 규제했으며 진지가 될 만한 건물은 모조리 부숴버렸다. 그러한 와중에 일반 가정집들도 초토화되어버렸다. 반란이 일어난 세포리스를 재건할 때 목수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아마도 요셉은 이러한 도성 재건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돌만큼 단단한 백향목을 도끼로 찍고 톱으로 썰며 나사렛사람 목수 요셉은 부당한 차별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을 게다.
한편 전쟁터에서의 여자의 삶이란 얼마나 곤핍한가. 게다가 마리아는 ‘아비를 알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따가운 눈총에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 이 가련한 아이를 지우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우라는 신의 계시와 요셉의 격려에 이를 앙 다물고 살았다. 학교도 병원도 그 어떤 국가의 시혜라고는 볼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 버림받은 땅 팔레스타인.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 1:46) 그러나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길러냈다.
“이 땅에는 그래도 살만한 것들이 있소 : 이 땅에는 대지의 여인, 모든 시작과 끝의 어머니가 있소.” 그렇다. 나사렛에는 모든 시작과 끝인 대지의 여인, 바로 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구름의 백성과
소년 예수
비누아투 부족(적도 이남의 작은 섬)은 구름을 야호웨로 부른다 야 하고 그리운 것을 부른 다음 호 하고 그리워할 때 웨 하고 벌어지는 입술처럼 갇혀 있지 못하고 새어나가는 것들은 언제나 슬픈 몸을 하고 있다.
그리움의 음절로 구름을 발음할 때 내 안을 구르는 어떤 기억의 분절도 그들과 합세하지 못하였다 버려버리고 싶은 기억의 편편들만 떠다녔을 뿐 지상의 모든 그리움들을 합하여 야호웨를 부를 때 나는 그들이 바람의 표정을 세공하는 것을 보았다
비누아트의 닭과 돼지가 피자두 같은 울음을 울 때 쩍쩍 갈라진 흙덩이가 구근들을 토해낼 때 게으름만큼 거룩한 노무는 없다 이것들이 다 그리움의 족속들 잘 익은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화한 마음으로 나는 그들을 구름의 백성이라 부르겠다
구름의 백성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야호웨를 부를 때 수수만년을 떠돌던 여호와들이 다녀가기도 한다 너무 커다래서 닿을 수 없는 것 이들에게 구름과 여호와는 한 몸이다 야호웨가 또 다른 야호웨를 다른 야호웨가 모든 야호웨를 비유할 때 맹목을 이길 수 있는 낱말은 어디에도 없다
한 낮의 해를 맨몸으로 받아내면 가슴팍 위로 구름과 여호와가 붉게 교차한다 십자가속으로 전족을 한 어린 계집처럼 절뚝거리며 붉게 우는 태양이 실족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온몸을 해의 집으로 내어주고 싶어라
태양이 머리를 누인 자리에서 몸 뒤채지 않고
조용하고 황홀한 욕창을 앓고 싶다
야호웨 야호웨
그리움의 독경을 외면서
오래도록 구름의 백성들과 여민동락하리라
(김은주, <태양의 실족>)
불멸의 태양이 빛을 쏟아내는 아침이다. 이 땅은 태양의 건너편. 태양의 새로운 주거지. 당신이 숨 쉬는 대지에 태양이 아긋하게 뜬다. 행여 태양이 스러져도 기댈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 이 땅일 것이다. 태양은 지구를 만나 나무와 꽃을 키우고 나는 너로 인해 사랑으로 하나 된 우리가 된다. 신은 인간이 있을 때 둘이 아닌 하나님, 나뉨이 아닌 하나님이 되는 것이리. 하나가 되는 일은 신과 인간이 얼싸안는 일. 우주가 합일하는 신성한 러브 액션. 멀리 계신 신이 아니라 내 안에, 내 목전에 계신 신으로 믿고 아버지라 불렀던 한 아이가 있었다. 신이 머문다고 믿었던 신당, 신을 찾아 나선 구름의 백성들 순례자들로 옥시글거리던 성전에서 열두 살짜리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눅 2:49) 아이를 잃어버린 지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았는데, 아이의 이런 뜬금없는 말에 아찔해졌을 마리아와 요셉.
내 온몸을 해의 집으로 내어주고 싶었던 아이가 거기 우뚝 서있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다정한 품에 뛰어든 그 아이. 시드럭시드럭 시들어가는 꽃들, 시들어진 저기 저 믿음들 속에서 소년 예수의 당찬 사랑고백은 눈자라기처럼 어리고 모자란 믿음들과 너무도 달랐지.
지붕 위 잠깐 젖었던 빗물이 구름에 실려 떠다니는 것처럼 예수는 이미 구름의 백성 맨 앞자리에 선 순례자였다. 쓸쓸한 생의 한때를 녹이는 다정한 한마디 말, 아버지. 우리는 소년 예수가 입술을 벙긋거리면서 내민 그 아버지라는 말에 가슴을 떨어야 한다. 그대 떨리지 않는가, 아버지라는 말. 그리운 아버지. 그립고 그리운 하늘 아버지.
강아지 꼬랑지가 한들거리는 논둑길, 앞서 걸어가시는 아버지. 사과 씨앗만큼 작은 나를 들어 올려 먼 하늘을 보여주고, 바다 저 건너 세상을 쏠쏠 이야기해주셨던 분. 까만 분꽃씨앗을 또 손에 쥐어주시고 꽃을 기다리는 마음을 일깨워주신 분. 하나님은 아득한 밤하늘 별똥별이 지는 순간에 눈을 감지 말고 눈을 뜨라 깨우쳐 주셨다. 눈을 뜨고 보아야 한다. 아이야. 삶과 죽음을 보아라. 살림과 죽임을 또 보아라. 가난한 이웃을 패대기치는 저 잔악무도한 군병들을 보아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빛이 없는 곳에 빛을… 아이야 네 인생을 그렇게 사용하도록 하여라. 나는 너의 아버지 하나님이란다. 팽팽한 긴장을 가지고 똑바로 쳐다보렴. 태양이 스며들지 못하는 어두운 골목. 후미진 세월의 모퉁이. 먹장구름에 가린 저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보렴, 사랑하는 내 아이야!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음성이 귀에 잘 들려옵니다. … 소년은 하나님과 이처럼 대화하면서 막힘없이, 창문이 열려 바람이 잘 드나드는 것처럼 시원스러운 해답을 착착 쥐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담대한 믿음으로 소년 예수는 성전의 어둔 그늘을 하나둘 햇빛으로 지워가는 중이었다.
“성전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고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의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눅 2:46-47)
빛의 아이 예수. 빛의 사람인 또한 우리들. “우주에 꽉 찬 태양은 빛 때문에 눈이 부신 박쥐를 위해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빛에 휩싸여 살았던 수피 메블라나는 또 이렇게 노래한다.
남에게 너그럽고 도움주기를 물처럼 하기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기
남의 허물을 덮는 일은 밤처럼 하기
분노와 원망하는 일은 주검처럼 하기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기
관용을 베푸는 일은 바다처럼 하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보이는 것처럼 되기
빛의 사람들은 태양처럼 밝은 얼굴로 춤추고 노래하며 지상천국을 만들어 낸다. 헤어진 아이와 만난 부모는 그 순간이 지상천국. 영특한 소년 랍비를 만난 성전 안 사람들 가슴마다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장면이다. 소리꾼의 깊은 소리맛 같은 아버지를 향한 기도. 아버지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서럽고 탁한 마음들 맑게 씻기던 날.
새까매진 눈과
새 봄
아예 내려오면서부터
더러워지는 것이다 눈은
그리하여 지상에 닿자마자
두 눈 질끈 감는다
쌓인 눈은 순백색을 버린 데부터 녹는다
겨울 햇빛을 빨아들이며 녹는다
새카매진 눈은 녹으면서 죽는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
깃봉처럼 고개를 내밀던
목련가지 끝들이 하얗다
땅속 실뿌리들이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가며 뒤볼아 본다
깃봉에 더운 물 오른다
문득 지난 해 떨어진 목련꽃잎들 생각난다
눈 녹은 물은 얼마나 검은가
저기 젖은 발로 새 봄 오신다
(이문재, <잔설>)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목련 환하게 피는 봄날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꽃 피면 걱정이다. 목련의 낙화를 지켜보기가 버거운 것이다… 봄의 한낮이 가끔 캄캄해지는 것도 지는 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곁에 아니 내 안에 있는 내 죽음과 가끔 알은 체할 일이다.”
살기만 바라고, 살 줄만 알고서 욕심 부리고 희번드르르한 거짓으로 나아간다면 너무도 안쓰러운 인생이겠다. 우리는 다가올 낙화의 때를 알고, 도깨비놀음 같은 인생을 차분하게 내려놓고서 뒤돌아 살펴봐야 한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바리사이파들과 사두가이파들을 향해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 3:7-8) 위선자들을 향해 서슴없는 분노를 퍼부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의 길로 나아간다면 봄날의 주인으로 다시 설 수 있다고 호소했다.
눈 녹은 물이 하얗기만 하던가. 그 검은 땟국물, 그 검은 물이 흙에 스미어 말캉하게 녹아들 때 새싹들은 기지개를 켤 수 있다. 복슬강아지 마당에 뛰놀고 되똥거리며 걷던 두꺼비 확독 옆에서 뜬잠을 잔다. 이드거니 차오른 욕망과 죄업들, 그 검은 물이 어연간하고 알맞게 새 희망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기도 할 것이리. 진실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이여! 마음을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이, 죽을 줄 알고 생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새봄의 주인공이다.
끄무레한 하늘과 늦추위에도 하얀 목련 피었다. 녹진한 몸 추스르고 일어나보자. 변화의 기미를 느끼는가. 찬 공기가 춘설과 시샘추위로 아무리 철딱서니 없이 굴어댄다 하더라도 어김없이 따순 봄은 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가을과 겨울의 빈들 또한 기억해야 한다. 젖먹이가 곤지곤지하듯이 손바닥을 부지런히 움직여가며 새까매진 노동의 손을 만들어보자. 땅두릅나물과 물고기반찬은 남녘의 후한 자랑. 농부들과 어부들은 일찍 봄을 맞이한다. 궁핍 속에서 주저앉지 않으며 몸을 부려서 일을 한다면 작은 기쁨들을 맛보게 되리라. 노동으로 생산성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반드시 타락하고 만다. 노동 후의 달콤한 휴식. 봄바람 쐬면서 친구들과 즐기는 꽃놀이가 배나 즐겁고 반가울 것이다. 눈 녹은 물에 머리를 감고 손을 씻고 심장까지도 씻어서 새롭게 되자.
혼인잔치,
돈이 아닌 사랑의 기적
아가씨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해
어머니는 돈 많은 부자를 좋아해
아버지는 높은 학벌을 좋아해
일가친척들은 가문을 따진다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오직 하나
배부르게 먹을 잔칫상을 바라지
(인도 잠언시집 수바시따, <사윗감에 대하여>)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고 세상이 다 고요한대도 혼인잔치 그 잔칫상만큼은 달뜬 얼굴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으리. 갸르릉 거리며 하품하던 고양이도 잔칫상을 보면 멀리서 달려온다. 마테를링크(maeterlinck)는 인간은 자기가 절실하게 바라는 것만을 발견하고 획득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랑은 가장 절실하게 반쪽을 찾는 마음이다. ‘심히 원하다’는 에피포테오(Epipotheo)다. 간절히 원한다는 뜻.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반쪽을 찾으면 가정을 이루게 되고, 친지들과 벗들을 모시고 축하잔치를 열게 된다. 천상의 상징으로서 혼인식장인 교회도 마찬가지. 간절한 마음들이 모일 때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는 잔치자리가 된다.
잔치에는 먹고 마시는 것이 빠질 수 있겠는가. 장판 깔고 벽지 바르고 원앙금침 깔아 놓은 신방 앞에서 외롭고 찬 긴 겨울밤 잊어버릴 수밖에. 어떤 시인은 말하더라. 나무보다도 정처 없는 바람이 더 외로웠을 거라고. 먼 길을 헤매다가 만난 바람 같은 사람. 바람을 매어둔 잔치이기에 문을 닫고 혼례는 시작된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술을 내온다. 포도주는 자꾸 넘어지게 만든다. 쓰러지게 만든다.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말이다.
동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마시다가 밤이 깊어지면 신랑 신부에 대해선 잊어버린다. 창호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짓궂은 구경을 할 것이 아니라면 잊어버려야 해. 떠나보내자, 저들 둘은…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막 2:16) 먹보요 술꾼인 예수(마 11:19)와 함께 이 잔칫상을 즐겨보자. 궁극의 밥상 공동체. 궁극의 혼인식. 신랑이신 예수와 신부인 우리의 만남. 물속에서 젖은 물을 퍼오듯 술독에서 젖은 술을 퍼 올린다. 당신의 사랑에 젖으며 술에 젖으며 우리는 옷소매마다 눈물까지 젖는다. 우리들의 만남은 사랑이었다. 긴긴날 기다려온 사람. 궁극의 인연, 위대한 만남이 오늘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예수께서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하셨다. 하인들이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요 2: 7-9)
일편단심이나 충성으로 대할 무엇도 아닌 때. 그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저 처음 만난 자리, 우리의 믿음도 없었고 존경심도 갖지 못했을 때. 그는 돈으로, 돈의 위력으로 뒤범벅이 되곤 하던 결혼식장을 뒤엎는 혁명적 거사를 보여준다. 무일푼 예수가 보여준 나눔의 기적에 어찌 놀라고 반하지 않을 손가. 사랑보다 돈이 더 숭배되는 현장이 바로 결혼식장이다.
세상은 돈에 미쳐 돌아가고, 그놈의 돈은 우상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올라 숭배되고 있다.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응답조차 돈벼락이라고 말하는 미치광이들이 있다. 좋은 포도주, 비싼 포도주. 자본가들은 저들끼리 뭉쳐서 맛나게 먹고 마시고, 행여 없는 자들, 가난한 사람들 기웃거릴까 봐 전전긍긍. 입맛을 들이면 빼앗아 먹을까 두려운 것일까. 그런데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버린다. 돈이 아니라 이것은 나눔의 힘, 평등의 선언. 모두에게 평등한 나눔의 기적. 너희 가난한 사람들도 좋은 포도주를 마실 권리가 있다! 자격이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자, 이 잔칫상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잔칫상이 되어야 한다. 어디서 털어오든지 어디서 구해오든지 모두 이 테이블에 한 병씩 올려놓으면 포도주가 넘쳐날 것이다. 부족함이 없는 포도주 잔칫상을 만들어 보자꾸나!
마실 포도주가 떨어져 뿔뿔이 흩어지려고 했던 찰나, 그들을 불러 세우고 여섯 개 물항아리를 열자 거기 감춰두었던 향긋한 포도주향이 잔치마당에 들큰하게 퍼져나갔다. 빈손으로 그야말로 물로 이런 잔칫상을 마련할 수 있는 언변, 뜨거운 눈, 유쾌한 젊은이를 우리는 그날 만난 것이다.
부자들은 나눔으로 친구가 되고 가난한 자는 그의 성결함으로 벗이 되어서 잔칫상은 고루고루 평등하고 즐거웠단다.
임의진 | 목사는 시인이며 수필가이다. 현재 <경향신문> 칼럼니스트로 ‘시골편지’를 장기 연재중이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5·18기념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성서연구를 인도하고 있다. 수필집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시집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동화책 세계위인전 『예수』, 『예수 동화 1, 2』 등을 펴냈으며 월드뮤직전문가로 <여행자의 노래>, <가스펠 여행>, <노르웨이의 길> 등 많은 선곡음반을 발매했다. 세계의 숨은 노래와 시를 찾아나서는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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