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미 감리회 매클레이(R. S. Maclay) 선교사가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라는 기독교 간접 사업을 윤허받은 이후 첫 한국 선교를 개시한 교파는 장로교와 감리교이다. 장로교는 4개 선교부가 한국 선교를 개시한 반면, 감리교는 미국에 있는 두 개 감리교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를 개시하였다. 먼저 1884-85년 미국 감리회가, 10년 뒤인 1895-96년에 남 감리회가 한국 선교를 개시하였다. 한국 선교를 펼쳐나간 두 감리교회는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해방 이후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현재까지 단일 교단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140여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각종 문헌과 유물, 유적 등 다양한 사료들이 생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전국의 감리교회에서 생성된 사료들이 어떤 목적에서 어떻게 수집되었는지를 심도 있게 기술해보고자 한다.
역사 편찬을 위한 사료 수집
남 감리회보다 10년 먼저 한국 선교를 시작한 미 감리회는 1914년 강화읍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의 역사를 필두로 하여 1915년 정동교회 교인이었던 강매가 저술한 『정동교회 삼십년사』, 1923년 인천내리교회 신홍식 목사가 저술한 『인천내리교회사』 등 개교회사 역사 편찬을 먼저 시도하였지만, 교단 차원의 역사 편찬을 먼저 시도한 것은 남 감리회였다. 남 감리회는 1929년 양주삼 목사의 편저로 역사 편찬을 지향하는 자료집 성격의 『조선남감리교회 삼십년기념보』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 감리회의 역사 편찬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0년 미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되어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하나가 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감리교 한국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며 역사를 편찬하려는 첫 번째 계획을 세웠다. 1934년 2월 양주삼 총리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역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 감리교회 50년사를 영문과 한글로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야심찬 계획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후 1940년 예일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도익서(C. D. Stokes)는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를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정한 가운데 한국에서 사료를 수집하려는 부수적인 목적까지 더하여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수개월 만에 미·일 간의 전쟁이 고조되어 선교사 철수 계획이 세워짐에 따라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그의 사료 수집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신 도익서는 미국 내 도서관 자료들을 이용하여 1947년 위대한 선교학자이자 교회사가인 라투렛(K. S. Latourette)의 지도하에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in Korea, 1885-1930”이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한국 감리교회사를 집필하려는 계획 속에 상당한 자료를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었던 이는 양주삼이었다. 그렇지만 양주삼이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되어 이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그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조차 분실되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통해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직전 대한기독교서회에 방화가 발생하여 건물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초기 문헌들을 비롯한 귀중한 사료들이 불타 없어지는 등 심각한 사적 손실이 발생하였다. 1947년 재차 내한한 도익서 선교사도 한국전쟁 당시 책과 자료들을 분실했는데, 특히 박사학위 논문에 사용된 사료들을 모두 분실했다고 한다. 라사행 목사 역시 한국 감리교회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으로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1945년 이전 자료들을 모두 분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사행은 피난지인 부산 중앙장로교회에서 개최되었던 1951년 연회와 총회에서 한국 감리교회 역사를 편집하는 것을 제안하여 통과까지 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에 라사행은 1954년 선교 7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감리회보」 1953년 8·9월호와 10월호에 “한국감리교회의 선교약사”를 기억에 의존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역사 편찬에 가장 난관으로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사료 부족과 사료 부실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 감리교회사 편찬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라사행은 한국 감리교회가 선교 75주년, 선교 80주년 등 기념적인 해를 맞이할 때마다 한국 감리교회사 편찬 의지를 피력하며 「감리교생활」이나 그 후신인 「기독교세계」를 통해 간헐적으로 사료 수집 광고를 냈다. 하지만 역사 편찬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라사행은 한국 감리교회의 사료 수집과 역사 편찬을 위해 1968년 미국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에 보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다양한 사료의 기증이 이루어졌고, 미국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의 원조도 이루어져 한때 중단되었던 한국 감리교회사 역사 편찬 작업은 1970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감리교 역사 편찬에 앞선 자료집 발간을 위한 사료 수집은 김세한 선생에게 맡기고, 동시에 한국 감리교회사 집필은 이성삼 교수에게 맡겼다. 이에 더하여 교육국 총무였던 라사행은 감리교 교육사, 즉 교육국 40년 역사 편찬 작업도 계획하여 자료 수집과 집필을 김세한에게 맡기고, 역사 재료 모집 광고도 1970년 8월호 「기독교세계」에 냈다. 그렇지만 결국 교육국 40년 역사 편찬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료의 인멸과 재정난으로 중단되었다.
반면 오랜 숙원이었던 한국 감리교회사 편찬 작업은 드디어 첫 성과를 냈다. 이성삼이 집필한 한국 감리교회사 제1권인 『한국감리교회사-조선감리회(개척기)』를 선교 90주년 어간인 1975년에 간행한 것이다. 이때 감리교 계통의 학교사를 비롯한 역사서를 집필하여 경험이 풍부한 김세한이 사료 수집부터 집필 구상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주었다. 특기할 것은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사료를 보내온 것이다. 이러한 첫 성과물은 사료 수집부터 책 간행까지 미국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의 물질적 도움이 컸다.
이후 한국 감리교회 분열을 빌미로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보조비를 완전히 중단하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사행은 한국 감리교회사 제2권(1930-1945)과 제3권(1945-1974)의 집필을 향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였고, 1976년 1월호 「기독교세계」에 수집 광고를 냈다. 그 결과 이성삼에게 집필을 의뢰한 제2권 『한국감리교회사-조선감리회(1930-1945)』는 집필 기간이 예상보다 늦어져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1980년이 되어서야 간행되었다. 그 와중에 장병욱 목사는 한국 감리교회사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한국감리교여성사』를 사료의 부족 속에서 미국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의 보관 문서까지 찾아가는 여정 끝에 1979년 간행하였다. 당초 라사행이 집필하려고 했던 해방 이후의 한국 감리교회사(제3권)도 이성삼이 집필을 맡은 상황에서 라사행이 교육국 총무에서 퇴임(1982년)한 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성삼은 집필을 계속 이어갔고, 2000년 『한국감리교회사-대한감리회(1945-1998)』를 교단을 통해 간행하려고 교섭했지만 결국 개인적으로 간행했다.
이와 별도로 라사행은 1981년부터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 100주년사를 기획하면서 또다시 사료 수집 광고를 1981년 11월호 「기독교세계」를 통하여 냈는데, 이것의 특징은 해방 이후에 발생한 사료들을 수집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다양한 영역의 100년사를 거창하게 기획하였지만 1982년 교육국 총무에서 퇴임하면서, 결국 1981년에 조직된 기독교대한감리회 백주년기념사업위원회에서 이 일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 안에 역사편찬위원회가 조직된 것은 1983년이었는데, 한국기독교 100주년 사업협의회에서도 역사 사료의 보존과 보급을 위해 「신학세계」 영인본을 간행했지만 이 사업위원회 역시 『조선감리회연회록』과 『조선감리회보』 영인본을 간행했다. 또한 이 사업위원회는 한 집필가에 의한 통사 형태를 기획하였지만 결국 여럿이 집필하기로 하여 100주년을 넘긴 1987년에 『한국감리교회 성장백년사』를 출간하였다.
그 어간인 1986년에 윤춘병 감독을 회장으로 한 한국감리교사학회가 창립되었다. 이 학회는 「감리교와 역사」라는 학회지를 창간했는데, 창간호에서 한국 감리교회 사료 수집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이 학회에서도 「죠션 크리스도인 회보」와 「신학월보」 영인본을 간행했다. 나아가 한국 감리교회 대계도 기획하여 1993년 『한국감리교회 사상사』와 1997년 『한국감리교 교회성장사』를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한국 감리교회 인물들을 조망한 탁사신서도 간행하였다.
1990년에는 교단 본부에서 자치 6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면서 그 산하에 홍석창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역사정리분과위원회를 두었는데, 이 위원회를 통해서 역대 총회록 및 교리와 장정 영인본을 간행하려고 했지만, 인력 부족으로 인해 결국 1992년 본부에 역사자료실을 신설함에 따라 이로 이관하여 『총회록』 및 『교리와 장정』 영인본을 간행했다.
이러한 영인본 간행은 한국 감리교회의 통사 서술까지도 가능하게 하였다. 1992년 10월 취임한 표용은 감독회장은 1993년 봄 유동식 교수에게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집필을 의뢰했는데, 주로 영인본들을 사용하여 1년 수개월만인 1994년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Ⅰ』,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Ⅱ』를 완성해 간행했다. 이때 성백걸이 사료 수집으로 돕기도 했다. 이외에도 1991년 조선혜의 1년여의 사료 수집과 이덕주의 2년여의 집필의 결과로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를 발행하였으며, 「기독교세계」를 통해서도 사료 수집을 한 바 있는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역사』는 이진경의 사료 수집과 이덕주의 집필로 1993년 간행되었다. 또한 같은 해 여러 필진이 공동 작업하여 『남선교회 연합 활동사』도 발행하였다.
이 같은 한국 감리교회 역사에 대한 통사들이 간행되면서 한동안 교단 차원의 역사 편찬 작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가 장광영 감독회장의 취임 이듬해인 2001년 역사위원회를 조직하여 2002년 한국감리교회사 영문판 간행과 더불어 여러 필진들의 수집 활동과 집필로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일시적인 조직이었던 역사위원회의 집필 활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 중부연회에서 제안·기획하고 선교국이 주관하여 한국 감리교단 산하 세 신학대학의 한국교회사 교수들인 이덕주·서영석·김흥수 등의 공동집필 작업으로 시대적 요청에 따라 2017년 『한국 감리교회 역사』를 발행하였다.
이렇게 역사 편찬을 위해 감리교 사료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 활동을 꾸준히 해왔던 한국 감리교회 사학자들이 소장했던 사료들은 감리교 후진 사학자나 한국교회사 연구 기관에 기증되었다. 송길섭 학장의 자료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기증되었고, 이성삼의 자료는 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기증되었다. 라사행의 자료는 1992년 선교국에서 기관 인준을 받아 감리교 역사 사진자료 수집과 감리교 역사 연구를 해 온 감리교영상선교연구소(유은식 소장)가 다수 소장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로 은퇴한 이덕주의 자료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감리교신학대학교 도서관,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최태육 소장) 등 크게 세 군데로 이관되었다. 이 중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에 보관된 자료는 재차 분산되었는데, 이 연구소가 고난함께 예하 부설기관으로 변경된 가운데 분단, 학살, 통일 자료들은 그대로 연구소에, 교회사 관련 자료들은 감리교회의 자치 90주년을 맞이한 2020년 12월 설립된 역사와종교아카데미 나무와 숲(대표 하희정, 책임연구원 장미경)에, 일본 관련 자료들은 홍민기 박사에게 분산되어 있는 상황이다. 목원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로 은퇴한 김흥수의 자료는 일부 목원대학교 감리교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고, 나머지는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한국 감리교회 개교회사와 관련된 집필 활동을 꾸준히 해 온 한샘교회 조이제 목사는 라사행이 해방 직후부터 발행한 조알·크리스챤·기독자로 이어진 잡지와 라사행이 소장하고 있던 감리교 본부 서류, 그리고 NCCK 관련 자료 등 수집한 자료 일체를 역사와종교 아카데미 나무와 숲에 기증하였다.
사료 보존을 위한 사료 수집
사료 보관을 위한 사료 수집의 첫 포문을 열었던 감리교 기관은 1970년대 초반 총리원이었다. 총리원에서는 윤창덕 감독의 명의로 감리교회의 유일한 교회 역사와 기록재료인 연회록을 보존하기 위한 광고를 1973년 5월호 「기독교세계」에 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 감리교 100주년을 맞이하던 1984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박봉배는 도서관 내에 한국 감리교회사 자료실을 설치한 가운데 한국감리교회사와 관련된 귀중 자료들을 기증해 줄 것을 요청하는 광고를 1984년 5월호 「기독교세계」에 냈다. 총회록이나 연회록이 어느 정도 수집된 상황에서 주요 수집 대상은 지방회의록과 개교회 자료들이었다.
한편, 이러한 문헌들이나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안으로 박물관 설립도 추진되었다. 1970년대 후반 처음으로 감리교 박물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제안한 이는 윤춘병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정동예배당을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말이 나올 때였다고 한다. 윤춘병은 당시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하지만 1979년 정동제일교회가 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성전을 봉헌한 가운데 범교단적으로 1984년 100주년 행사 준비로 한창 분주할 무렵인 1981년, 4월 28일 자 「동아일보」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정동교회 구 예배당을 감리교 박물관으로 사용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즈음 동부연회 감독이자 「기독교세계」 편집위원이었던 윤춘병은 다시 한번 1982년 2월호 「기독교세계」를 통하여 감리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박물관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때 윤춘병은 박물관을 건립할 특정한 장소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감리교 박물관 문제를 꺼내든 이는 연세대 김찬국 교수였다. 그는 한국 감리교 100주년 기념 시기를 넘긴 시점인 1987년 2월호 「기독교세계」를 통해 다시 한번 감리교회 본부를 향해 감리교 박물관 건립을 피력하였다.
이처럼 감리교 역사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한 가운데 1990년대 초반 곽전태 감독회장의 용단을 통해 감리교 역사자료실이 설립되었다. 이 역사자료실은 감리교회의 역사를 발굴하고 수집할 뿐 아니라 이후의 자료들을 소중히 정리 보존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신앙 유산들을 전승하려는 목적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때마침 광화문사거리에 감리교 100주년 기념회관인 감리회관이 준공되어 교단 본부 전체가 1991년 12월에 이전을 완료하여 세모부터 근무하였다. 이런 분주한 상황에서도 곽전태 감독회장은 1991년 12월 4일 감독회의를 통해 역사자료실 설치를 결의하고 12월 20일 총회 실행부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그 운영을 확정했다. 역사자료실 설립을 확정한 이후 1992년 2월 역사자료실 첫 간사로 김진형 목사가 부임하면서 역사자료실도 역사적인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으로 1992년 5월 웨슬리 회심 주간을 이용하여 역사자료 및 유물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를 계기로 「기독교세계」를 통해서 수차례 사료 수집 광고를 게재하였다. 사료 수집 광고를 통해 사료를 보내준 기증자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개관한 역사자료실은 역사 전시, 역사 수집, 역사 정리, 사료 제공이라는 네 가지 기능을 강조했다.
이렇게 역사자료실을 설치했던 곽전태 감독회장은 1992년 6월 총회 실행부위원회 회의를 통해 사직동 대지 위에 감리교 역사박물관을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감리교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가 2002년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제24회 총회에서 다시 감리교 역사박물관 건립을 결의하였으나 이때도 감리교 역사박물관 건립은 유야무야되었다. 그런 중 일생 기독교 고문헌과 유물을 수집하여 보관해 오며 숱한 감리교회 역사서들을 집필한 윤춘병이 유일본과 희귀본을 포함한 소장 자료 1만여 점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를 계기로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는 백주년기념관 3층에 역사자료관을 설치하여 2002년 12월 개관하였고 윤춘병을 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교단이 다시 감리교 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것은 2004년 4년 전임 감독회장으로 취임한 신경하 시절이었다. 그는 취임한 이듬해인 2005년 9월 2001년 역사 편찬으로 조직된 역사위원회와는 달리 자료 보관과 보존이 목적인 역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역사위원회는 역사박물관 건립추진 분과, 역사자료 분과, 기념사업 분과로 사업 영역까지 세분화하였으나 한동안 진전이 없었다. 이 같은 답답한 흐름 속에서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는 2002년 역사자료관을 설치한 이후 지속적으로 역사박물관 설립을 추진해왔는데, 그 결실로 대학 설립 120주년을 맞이하던 시기인 2007년 4월 구 학보사 건물로 이전, 윤춘병을 관장으로 하여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또한 군산에서는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의 개인적인 열정속에서 군산지방 실행부위원회 회의를 통해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기념교회 추진을 승인받은 가운데 2007년 6월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와 아펜젤러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개관 시 제천에 지적박물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이진호 장로가 기증한 기독교 자료들이 기반이 된 가운데 임춘희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아펜젤러 선교사 후손과 아펜젤러 선교사와 사돈지간인 노블 선교사 후손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자료까지 기증받았다. 이후 구 예배당 역시 한국기독교역사전시관으로 개관했다가 한글성경 전시관으로 변경하기도 했지만 아펜젤러 선교사의 죽음에 대하여 순교냐, 순직이냐 논란이 된 상황에서 아펜젤러 순교교회는 아펜젤러기념 선교교회로, 아펜젤러 순교기념관은 아펜젤러 선교기념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별칭으로 아펜젤러·노블 선교기념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2007년 10월 신경하 감독회장의 사회로 개최된 정기 입법총회에서는 감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자료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교리와 장정에 역사보존위원회를 신설하였다. 역사보존위원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위원회는 역사 편찬보다는 역사 자료의 보존과 관리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역사보존위원회가 신설된 이후 원로목사회장단협의회(회장 이성순 감독)에서는 감리교역사박물관 건축과 관련된 청원서를 제출한 가운데 신경하 감독회장의 사회로 2008년 7월 제27회 총회 실행부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여 이 청원서를 통과시켰지만 유야무야되었다. 또한 2008년 감신대 총장으로 선출된 김홍기 역시 감리교신학대학교 안에 감리교역사박물관 건립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유야무야되었다.
이처럼 교단은 역사박물관 건립을 수차례 결의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그친 반면, 감리교와 연관된 단체에서는 가시적인 열매를 맺었다. 즉 2008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동관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그리고 강화에서는 1993년 강화기독교 선교 100주년기념사업회를 조직한 가운데 역사 편찬 및 역사기념관을 세울 것을 결의한 것이 시발이 되어 이춘수 목사가 위원장이던 2007년부터 강화 지역에 지역적인 명칭이 아닌 교단적인 명칭을 사용한 감리교 선교 역사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2008년 중부연회 실행위원회와 제27회 총회 실행부위원회에서 승인을 받은 가운데 국회, 인천시, 강화군 등과 협의하여 성사되는 듯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그런 중에도 다시 원점에서 재추진하여 이번엔 당초 계획한 대로 지역적인 명칭을 사용한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을 강화군의 ‘통큰’ 지원 속에 건립하여 2022년 3월 개관하였다. 또한 서천에서도 2004년 한상명 목사, 정근중 목사를 중심으로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추진한 것을 시발로 대천남지방, 충청연회, 총회 실행부위원회를 통과한 가운데 2009년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건립을 시작하여 2012년 1월 준공예배를 드리고 개관하였다. 특히 이 순직기념관에는 미국에서 모은 자료를 기증해 준 박대성 목사와 북한 선교 자료를 모아 기증해 준 유관지 목사의 특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2010년 광화문 본부에 자리하고 있던 감리교 역사자료실은 조병철 역사전산부 부장 시절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제1연수원 별관에 전시실과 서고를 갖춘 역사정보자료실로 확장 이전하였다. 즉 감리교 역사자료실은 감리회관 13층과 16층으로 서고가 분리되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두 서고 도합 25평밖에 되지 않아 아주 협소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이사장 신경하)에서 대지를 제공하고 행정기획실과 kmc출판사에서 건축 비용을 부담한 가운데 1층 120평, 2층 30평 건물을 신축하여 1층 60평을 역사정보자료실에서 문서보존실과 전시자료실로 사용하여 오다가, 현재 2층에 자리한 30평까지 문서보존실로 사용하여 총 90평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확장 이전한 감리교 역사정보자료실은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 교통편이 용이하지 않아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이처럼 오프라인 상황은 열악하지만 역사 자료의 디지털화 작업을 통하여 역사 자료 DB를 구축한 가운데 이메일, 팩스, 휴대폰 전송 서비스 등을 이용하여 전송하는 온라인 상황은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역사정보자료실은 2016년 10월 제32회 총회에서 감리교역사문화박물관 건립을 결의한 것을 근거로 감리교역사문화박물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요원하다.
또 다른 한편, 감리교 내에 존립하고 있는 세 신학대학도 역사박물관 내지 역사자료실을 설립하기는 하였으나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은 임영희 조교가 윤춘병 관장이 기증한 자료들 가운데 해방 이전 자료들을 목록화하는 실제적 작업 속에 2009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고도서목록집』을 발행하기도 하였고, 또한 조선혜가 정동제일교회의 후원하에 책임연구원으로 상주하는 등 활성화되기도 하였지만 2010년 8월 16일 윤춘병 관장이 소천한 이후 하향길로 접어들어 존속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목원대학교는 구 신학관을 복원하고 이를 감리교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기로 한 가운데 2015년 2월 초대 감리교역사박물관장으로 김흥수 교수, 역사자료실장으로 이평구 목사를 임명하고 주로 해방 이후의 사료들을 수집하자는 데에 뜻을 모았다. 이를 시발로 하여 박물관 내에 2017년 선교 초기부터 일제 말기까지 희귀 사진을 중심으로 한 한국감리교역사관을 개관하고, 2022년 9월 사애리시 선교사 기념관까지 설치하였지만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제2대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임 후 명예관장으로 있는 안승병이 개인적으로 목원대학교 신학과 초기 졸업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수집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협성대학교에서도 2012년 진흥문화사 빌딩 4층에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을 설립했던 박경진 장로가 한국기독교역사자료 일체를 모교인 협성대학교에 기증한 가운데 웨슬리관에 2017년 11월 2일 개교 40주년을 기념한 기독교역사자료실(박경진장로기념실)을 설립하여 존속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소속된 개교회들 가운데는 공주제일교회의 경우처럼 2011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예배당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여 2018년 충남 제39호 박물관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특이한 사례도 있고, 역사가 오래된 교회의 경우 역사기념관 내지 역사자료실을 구비한 교회도 다수 존립하고 있지만 대다수 교회들은 역사와 역사 자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맺는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감리교회가 사료 부족과 부실에 직면하게 된 역사적 원인은 한국전쟁의 여파였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 이후 역사 편찬과 역사 보존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교단적인 수집 활동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한국 감리교회 역사 편찬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비록 감리교 역사문화박물관 건립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으나 감리교 역사정보자료실이 설치되어 존속하고 있으며 총회 차원에서의 역사보존위원회도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교단적인 차원에서 겉으로 보기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역사에 대한 관심은 실상 미미한 편이다. 교단 본부의 재정적 운영은 방만하지만 역사 관련 투자에 있어서는 인색하다. 더욱이 역사정보자료실에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뿐 아니라 역사보존위원회의 조직이나 운영 역시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리교 내 세 신학대학도 역사박물관 내지 역사자료실이 설립되어 있으나 상근 직원조차 없는 실정이다. 개교회들 역시 역사나 사료에 관심이 있는 교회들도 더러 있지만 대다수는 관심조차 없다.
이와 같이 부족한 역사의식이 자리한 한국 감리교회 현실에서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 수는 있으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연구와 보존을 위해서는 총회뿐만 아니라 연회, 지방회, 구역회(당회) 안에도 역사와 관련된 위원회를 반드시 설치해서 기록하고 정리하고 수집하고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유야무야를 반복하고 있는 감리교역사문화박물관도 조속히 건립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고 살리는 일이다. 진실로 한국 감리교회가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때이다.(이 글을 위해 귀한 증언을 해주신 서영석 교수, 안승병 교수, 이은용 장로, 이춘수 목사, 임영희 목사, 임춘희 목사, 조병철 목사, 주승동 목사, 하희정 박사, 홍민기 박사께 감사드린다.)
고성은|목원대학교 신학과와 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호서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 광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한국교회인물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목원대 강사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동부연회 순교자 열전』, 『해방 후 월남 기독교인의 활동과 통일』(이상 공저),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목회 활동 연구』, 『철마 정경옥, 생애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