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참석자 중 가장 어르신이 인사말을 하셨다. 본인 이야기를 잠시 꺼내시더니 이제 나이가 88세가 되었다고 하시며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현재의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이분들이 젊었을 때는 70세쯤 살 것이라고 예상하셨을 것 같다. 그런데 88세가 되었고, 아직도 얼마를 더 살게 될지 모른다.
과거 우리에게 장수(長壽)는 큰 복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장수가 곧 복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노후에도 가족이 화목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고독사에 관하여 일본에서 나온 책의 번역서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다. 80세, 90세가 되어도 노후가 걱정이라는 말이다. 예전 같으면 상상 못할 나이인데, 이제는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100세 어르신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90세 노인이 되어도 앞으로 10년을 살지, 20년을 살지 모르니 노후가 걱정이라는 말이 맞다.
대한민국의 어르신들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더 어렵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이렇게 갑자기 늘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때 70세까지로 설정했을 것이다. 60세가 되면 은퇴하고, 자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10년 정도 더 살고 인생을 마감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70세만 해도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70세가 되어도 앞으로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측하지 못했던, 그리고 준비하지 못했던 30년을 살아야 한다. 과연 이 30년이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노령화는 세계 여타 나라에 비해서 매우 빠르다. 유엔이 정한 바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비중이 7%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 14%가 넘으면 고령사회, 그리고 20%가 넘으면 초고령사회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경우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 넘어가는 데 114년이 걸렸고, 미국은 69년이 걸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불과 1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즉 프랑스에 비해 7배, 미국에 비해서 4배가 빨랐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이다. 정부에서도 대한민국의 평균수명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노령인구에 대해서 예측을 하지만, 항상 그 예측보다 더 빠르게 우리 사회는 노령화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노령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정부의 예측은 빗나갔고, 당연히 노령화에 대한 대책도 미흡하다.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2011년 49.18%에 이르렀고 2020년에는 38.97%로 많이 줄어들었음에도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하였을 때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즉 정부가 노인 인구에 대한 복지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노인들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이런 정책적인 면뿐만 아니라 노령사회의 문화도 정착되지 못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배워본 적이 없다. 지금 어르신들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사셨던 이들을 보지 못했다. 80세 혹은 90세가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워보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특히 성장 시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현재 벌이가 없는 상황에 많이 당황하고 있다. 목적 중심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특정한 일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사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40-50대의 중년층, 그보다 어린 손자뻘의 젊은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당황스러움은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도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어른아이’로 비춰지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은퇴를 앞둔 나이에 이르렀는데도,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를 위해서 손자를 돌보며, 부모님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은 당연하다. 서로가 익숙하지 않은 삶의 상황에다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까지 더해지니 분노가 나오고, 그것이 부딪쳐 갈등이 발생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지역갈등 이상으로 세대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고, 한정된 자원을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니, 문제가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10살 아이부터 100세 어른까지 각각 서로의 생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며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다극화된 투쟁만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현실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히려 증폭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목회는 어떠해야 하는지 논해보고자 한다.
교회의 고령화와 리더십
2020년 가을에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에서는 총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의 평균연령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총대 평균연령은 62.62세였다. 특히 장로 총대의 경우는 64.51세로 나타났다. 총대들의 평균연령은 매해 늘어나고 있다. 장로의 임기가 70세까지인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평균연령은 놀랍다. 이 통계를 보며, 한국교회의 리더십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총회에 참석하는 대의원들은 교회의 중추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평균연령이 퇴임을 5년 남긴 65세쯤이라면 좀 심각해 보인다.
요즈음 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는 연령은 대개 50대 후반에서 60세 전후이다. 예전에는 30대에 장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40대에 장로가 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대개 50세 전후로 장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연령대가 60세 전후로 올라왔다. 일반적으로 볼 때 장로 임직 평균 나이가 약 10세 정도 상승한 것이다.
문제는 교회의 리더십이 그만큼 고령화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에서는 이미 은퇴할 나이에 교회에서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40대에 회사의 CEO가 되기도 하고, 50대에 실제적 리더십이 절정에 이르는 반면 교회에서는 60대에 리더십에 첫발을 디딘다. 더 심각한 것은 적지 않은 교회에서 현직 장로가 아니라 은퇴 장로들이 실질적인 리더십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담임목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정하려면 당회를 마치고 은퇴장로실에 다녀와야 결론이 난다고 한다.
이전에 중형교회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20개 교회를 대상으로 하여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분석을 해보니 중형교회의 위태로움이 잘 느껴졌다. 그 가운데 핵심은 리더십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교회는 목회자의 은퇴와 청빙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은퇴 목사와 신임 목사 간의 갈등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장로들과 신임 목사 간의, 그리고 장로와 장로 간의 갈등이 심했다.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갈려 다투는 현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청빙위원회는 장로들로 구성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0대 장로들이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신임 목사를 결정한다. 신임 목사는 앞으로 20년은 그 교회에서 목회해야 하는데, 신임 목사와 미래를 함께할 교인들 대신 은퇴를 4-5년 앞둔 고령의 장로들이 신임 목사를 ‘선발’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웬만한 경연 프로그램 이상으로 복잡하고 어려우며, 그 과정 과정에서 고령의 어르신들이 개입한다. 그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회자가 오도록 하고 나면, 신임 목사는 청빙 과정에서 ‘힘’을 써준 장로들을 무시할 수 없다. 거기에서 갈등의 씨앗이 생긴다. 젊은 목사가 와서 소신껏 목회를 펼쳐보고 싶은데, 신임 목사가 자기 말을 잘 듣는지 살펴보는 장로들도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대놓고 ‘나는 다른 목사를 지지했습니다’라며 신임 목사를 반대하기도 한다. 이런 갈등으로 교회가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교회는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어르신들의 리더십이 인정받는 곳이다. 대부분의 가정을 보면 가정의 재정 지출의 핵심에는 아이가 있다. 대부분 아이의 교육비를 중심에 두고 가정재정을 설계한다. 아이의 공부 환경도 중시하고, 시간과 공간도 아이를 중심으로 한다. 여기서 아버지에게는 별다른 역할이 요구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재정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할 뿐, 그 지출을 관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 구조가 거꾸로이다. 교회의 주요 사항에 대한 결정권과 집행권은 당회에 있다. 아이들은 건물 지하로 내려가고, 어른들은 본당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집안에서는 이미 힘을 잃은 할아버지들이 교회의 모든 결정권과 집행권을 차지하고 있는 구조가 이 시대에 적합할까?
중형교회를 조사할 때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40대 이하의 신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에서는 세대 간 갈등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교회에서는 그런 현상이 크게 문제가 안 된다. 세대 갈등을 원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조용히 교회를 떠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목회는 점점 더 어르신들 위주로 진행된다.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의 목회를 ‘야유회 목회’라고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철마다 어르신들 모시고 야유회 다니는 것이 자신의 목회라는 자조 섞인 소리였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미래가 없다.
교회 내에서 차지하는 어르신들의 영향력은 줄어들어야 한다. 집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교회에서도 내려놓아야 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면 교회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청년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오는 40대들이 마음에 시험 들지 않고 교회 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묵상하는 시대
최근 죽음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여러 미디어에서도 죽음에 관련된 강연이나 영화 등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수명 연장에서 찾는다. 예전에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나이가 60세 정도였다. 요즘은 60세를 넘기고도 40년을 더 산다. 이 기간 동안 어르신들은 죽음을 묵상한다.
그보다 젊은 사람들도 부모 세대의 죽음 과정을 같이 겪는다. 50대 중반인 필자의 경우 90세 넘으신 노모가 작년에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셨지만, 현재 문제없이 사신다. 2달가량 병원에서 수술도 하고 치료 과정을 겪었고, 이후 연결하여 요양병원으로 가셨지만, 완강히 거부하셔서 현재 요양원에 계신다. 의료서비스 문제 때문에 걱정했지만, 고비를 잘 넘기시고 이제 평범하게 동료들과 사신다. 이 과정을 1년여 겪어보니 죽음에 관한 생각이 많아진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이다.
요즘 또래 동료들이 모이면 부모님의 노후에 대한 걱정이 항상 화제이다. 요양병원, 요양원, 실버타운 등등에 대한 정보가 요긴하다. 이 과정을 통해 60을 바라보는 자식들도 죽음과 노후를 함께 겪게 된다.
자녀들은 아직 간접 경험이나 어르신들은 직접 겪는 경험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고, 주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본다. 그래서 어르신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죽음이다. 드러내놓고 내색하지는 않지만, 죽음과 사후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실제로 죽음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 보면 어르신들의 집중도가 아주 높다.
산업화 이후 교회는 긍정적 사고가 지배해 왔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새가 없었다. 그 이전에는 ‘예수 천당’이라는 구호가 교회의 중심이었고, 사후에 가게 될 세상에 대한 기대로 현재를 살았다. 그런데 산업화 시대가 되자 성공 신화가 중심에 자리하고, 긍정적 사고가 함께하면서 교회에서는 죽음에 관한 생각이나 교육이 사라졌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교인의 다수가 노인인 지금, 이 주제를 회피할 이유가 없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와 죽음 이후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야 한다. 특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의 의미, 그리고 부활과 영생의 개념을 명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전적 헌신이 가능한 시기
우리는 보통 노인을 하나의 계층으로 보는데, 사실 60세부터 100세에 이르는 모든 계층을 한 세대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반면 일찍 노령화를 경험한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인을 80세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노인이라고 다 같은 노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60세부터 80세까지는 여전히 활동이 가능한 시기로서, 신체나 정신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 때이다. 그러므로 요즘 같은 시대에 60대나 70대를 노인으로 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자녀에 대한 부담마저 내려놓은 이 세대는 교회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가능한 세대이다. 80세까지는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헌신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과 노동과 재정까지 헌신할 수 있는 전적 헌신의 세대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수정해야 한다. 놀이를 주축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헌신이 가능한 노인들을 어떤 분야로 배치할 것인지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집에서 돌아가시게 해드리겠다
협동조합을 견학하기 위해 일본에 간 적이 있다. 가나가와현 후쿠시 복지클럽 생활협동조합을 방문했다. 이 마을은 일찍이 생활협동조합을 시작했다. 주부들이 주축이 되어 생필품 판매를 시작했는데, 운영이 잘 되어 수익이 생겼다. 이 수익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였고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며, 노인복지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그래서 생활협동조합을 넘어 노인복지를 감당하는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협동조합을 통해 재가복지서비스, 식사 제공, 이동 서비스 제공, 문화 활동, 공동식당 운영 등 노인복지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곳 마을 사람들은 협동조합에 가입하여 나이가 들면 이러한 서비스를 값싸게 이용한다.
이 복지클럽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소개를 받으면서 인상에 남았던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최적의 복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부에서 하는 복지는 최소한의 기본 요구만을 충족시키는 복지이다. 하지만 이 협동조합의 복지의 경우 같은 마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이고, 자신들도 나중에 그 혜택을 볼 것이기에, 최적의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는 어르신들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죽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얼핏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은 나이 든 노인들이 그동안 살던 집을 떠나 낯선 곳 즉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죽지 않도록 직접 돌보겠다는 말이다. 이 말이 필자에게는 매우 강하게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이 어르신들을 잘 돌보아서 말년에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한국교회도 이런 계획을 구상하면 좋겠다. 평생 한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했던 장로님, 권사님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가다가 돌아가실 수 있게 돌봐드리자.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나 자식의 집이나 낯선 요양원으로 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교회에서는 장로요, 권사로 대접받고 존경받는 분들이었는데 그 나이에 다른 곳으로 가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어르신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장례이다. 내 장례는 누가 치러 주는가에 대한 걱정이다. 교회에서는 당연히 온 교인의 축복 가운데, 나를 돌봐주던 목사가 장례를 치러 줄 것인데, 주거를 옮겨서 새로운 곳으로 가면 내 장례가 어떻게 될지 염려가 된다. 필자는 이 걱정이 정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교회가 근처에 주거시설을 마련해서 어르신들을 모시면 좋겠다. 교회 예산으로만 하기엔 버거운 측면이 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일정 정도 입주 비용을 내고 들어오고, 식사는 교회에서 함께하고, 교회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평생 헌신했던 교회의 주역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가장 복된 복지가 될 것이다.
나가며
한국 사회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속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던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시스템이나 개인의 삶, 그리고 사회 문화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교회 또한 다르지 않다. 더구나 교회는 어르신들만 남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령화가 심하다. 상대적으로 젊은 50세 이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결단이 필요하다. 어르신들을 위주로 한 복지 목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어르신들이 양보하여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교회를 만들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지혜를 발휘한다면, 이 둘의 공존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르신들의 뜨거운 신앙과 중생의 경험,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사회화된 신앙과 생활화된 신앙을 잘 아우를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 어우러져 참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면, 다른 두 개의 세대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헌신하신 어르신들을 존중해 드리는 목회와 돌봄이 가능한 공동체가 되기를, 한국교회가 이러한 공동체적 목회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조성돈|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목회사회학』,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그들은 왜 가톨릭교회로 갔을까』, 『한국교회를 그리다』 등이 있다. 현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