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이 장애인과 함께하는 목회를 하며 대학에서 장애인복지를 가르치다 보니 장애인들을 자주 만난다. 그러다가 교회와 관련한 얘기가 나오다보면 종종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 최근에 듣게 된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 A씨가 출석하는 교회는 중대형 규모의 교회이다. 건물 출입구에 경사로가 있고, 엘리베이터도 있어 주일예배가 있는 예배실까지의 접근은 가능하다. 그러나 장애인 화장실도 없고, 지하로는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아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아무런 장애인 사역을 하지 않아 발달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방문했다가 수어통역서비스나 장애인을 위한 지원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 B씨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다양한 장애인 사역을 하고 있다. 중증의 지체장애를 가진 B씨는 교회의 장애인 사역에 동참하고자 발달장애인 부서의 담당 목사에게 자신이 교사로 섬기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부서 내의 장로님, 집사님들과 상의하겠다고 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장애인 청년이 발달장애인 부서를 섬기겠다고 찾아왔고, 그 청년은 예배 때 환영을 받으며 그날로 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C씨가 다니는 교회는 지방의 작은 개척교회이다. 지어진 지 오래되어 모든 것이 계단이고 시설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C씨가 교회에 출석한 이후 목사님은 경사로를 설치하고 각종 불편한 사항들을 개선해주었다. 최근 이 지역의 발달장애 자매가 교회에 오기 시작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친절하게 자매를 맞아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자매가 교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장애인식개선 강사를 초청해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고, 지역의 장애인복지기관으로부터 자문을 받기도 했다.
장애는 항상 인류와 함께해 왔다. 성서에도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인이 등장한다. 이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여주듯 장애인은 교회 내의 물리적인 장벽이나 인식의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장벽은 교회의 규모나 장애인 부서 사역의 유무와도 딱히 관계가 없다. 장애인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의 제자 중 중증의 지체장애를 가진 학생이 있다. 믿음이 신실한 이 학생 또한 다른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는 길을 가다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교회에 다니면 몸을 고칠 수 있다’며 전도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장애인을 향해 적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지만, 막상 장애인이 교회에 방문하거나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물리적인 환경과 인식의 부족으로 불편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더욱이 A씨의 사례처럼 장애인이 교회에 방문했을 때 아무런 지원이 없거나 교인들이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겪으면 장애인들은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느낌을 갖게 마련이다.
교회에서 장애인은 어떤 존재인가
장애인은 언제나 교회에서 비장애인에게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돌봄과 섬김의 대상일 뿐일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면, 장애인 역시 그런 존재여야 한다. 장애 유형에 상관없이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하고, 교회의 지체로서 예배와 전도, 봉사와 교제 등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예배는 물론이고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과 행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성도로서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최근에 지어진 교회일수록 장애인의 접근성은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오래된 건물이든 새 건물이든 상관없이 대부분의 교회에는 강단과 회중석의 단차가 존재한다. 이로 인해 지체장애나 뇌병변장애인 목회자 혹은 장애 교인은 단상에 올라 설교나 대표기도, 간증과 찬양 등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주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장애인이 주일 낮 예배의 순서에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또한 교회 내에서의 예배와 신앙 활동은 불편 없이 할 수 있으나 수련회와 같은 외부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담당 목회자나 봉사자, 또는 비장애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려하지 않는 한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이 선뜻 프로그램 참여 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교회가 아닌 외부의 시설은 교회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 ‘다른 비장애 교인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게 마련이다.
장애인 중 목회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사역지를 찾지 못하고 그저 평신도로서 교회에 머물러 있거나 자신과 같은 장애인 사역을 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여 특수목회를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장애인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으면 당연히 일반적인 목회 현장에서도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직분도 차별 없이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장애인 또한 신앙이 성숙함에 따라 권사와 장로의 직분 또한 마땅히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국교회는 여전히 장애인을 그저 섬김의 대상, 즉 선행의 도구로만 인식하고 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분리 현상이 일어나고 암묵적 배제가 가속화된다. 다수의 비장애 교인들 세계의 하위 공간으로서의 장애 교인 게토(ghetto)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온전한 통합을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교회에서 분리와 배제를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돌봄과 지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교회 내에 만연하기 때문이다. 자선적이며 시혜적인 장애 인식이 한국교회 내에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 자원으로서의 교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뤄가기 위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셨고, 모여서 함께 예배하며 연대함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고 살아내며 살아지는 힘’을 주셨다.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당연히 장애인도 당당한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특히 교회는 생명을 소유하고 생명을 나누어주는 신앙공동체이다. 교회야말로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 가장 기본적인 생명 자원인 구원과 성화,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 생명 자원의 힘으로 장애인들이 이 땅을 힘 있게 살아가도록 그들과 함께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전진기지로서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섬김의 에너지가 저장된 곳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한 마리 양’, ‘작은 자 하나’ 등 성서에는 교회가 함께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제일 큰 계명(마 22:37-40),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랑(요 11:33-36),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사랑의 생활(마 20:28) 등 교회는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생명 자원을 창조할 생명의 에너지원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향해 “네 형제요 자매인 장애인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그들에게 필요한 복음을 전하고 나누고 있는가?”라고 묻고 계신다. 이처럼 주님은 장애인 선교와 목회를 위한 교회의 사명을 강하게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장애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을 향한 장애인의 간절한 영적·육적 욕구의 중간에 서서 장애인의 생명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는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는 장애인의 삶을 직시하고 장애인 선교와 목회를 계획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 선교와 목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교회는 장애인에게 어떻게 선교할까’라는 질문 대신에 ‘장애인이 교회에 바라는 선교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질문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 교회의 선교 과제를 묻는 것이다. 장애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누릴 존재임을 교회는 확인해야 한다. 둘째, 사회나 교회 내에 만연한 편견, 차별, 냉대 등을 없애는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애인 선교와 목회는 이와 같은 편견과 차별을 사라지게 하는 신앙적 토대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셋째, 장애인들이 교회공동체에 속하여 장차 누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체험하고 이것이 그들의 신앙과 소망으로 연결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한 자립을 실현하고 주체적으로 살도록 교회가 장애인을 위한 생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질문하는 것이다.
교회의 올바른 성서적 장애 이해
성서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장애를 통해 펼쳐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 성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나타나게끔 한다. 장애를 통해 창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면, 성서에 나오는 다양한 장애 이미지들은 장애인들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로부터 나왔음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낳은 이삭의 장애는 구속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관점을 대변하는 장애 이미지가 된다. 에서와 야곱 중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야곱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삭은 인간의 전통을 따라 에서에게 마음이 갔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쇠하여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이삭을 통하여 야곱에게 축복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삭의 장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셨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시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친히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백성은 약속을 깨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부서진 장애 나라가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은 장애 백성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었고, 하나님의 자녀였다. 출애굽기 4장 11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시각장애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한편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는 처참하게 깨진 장애 모습으로 장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함과 상함’, 바로 ‘장애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피조물임을 고백하게 한다. 또한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삶의 권리와 영적 권리를 가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천국잔치 비유는 이방인을 은유하는 소외계층으로 가난한 자, 눈먼 자(시각장애인), 저는 자(지체장애인) 등이 등장한다. 이는 이사야 61장 1-2절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는 것인데 이들이야말로 변두리 인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성서에서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스스로 자신의 욕구와 권리를 충족시켜 나가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비유된다. 예레미야 31장 7-9절에는 바벨론 유배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사람 중에 맹인(시각장애인)과 다리 저는 자(지체장애인)가 포함되어 있다.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는 막중한 사명을 안고 돌아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장애인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도 그 공동체의 핵심적인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미가서 4장 6절과 7절에는 장애인을 남은 자에 포함하고 있다. 저는 자(지체장애인)를 모으고 저는 자가 남은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다시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출발선상에서 장애인과 함께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장애인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다른 실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장애를 어떤 것이 결여된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결여된 것이 있어서 보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장애란 다른 형태의 또 하나의 삶이다. 그래서 장애는 보편적인 하나의 삶의 형태로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산다는 것은 장애가 다양한 사회적 현상 중의 하나로 이해되고, 여러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일을 의미한다. 더욱이 장애로 이해되고 규정되는 현상, 바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하나님 형상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장애라는 외형적인 이유로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신다.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의 장애를 불행한 사건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실제적인 삶의 현실임을 보여주신다.
특히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에서는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등과 같은 장애인들에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면서도 동시에 장애는 극복되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사는 일상의 삶으로 제시된다. 실제로 예수는 모든 질병과 장애를 없애는 방식으로 장애인들을 치유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질고를 친히 대신 지심으로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될 수 있음을 보이셨다. 그래서 장애를 안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장애가 치유되어도, 그렇지 않고 장애와 함께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또한 예수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장애인 당사자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체계와의 관계 회복도 자연스럽게 허락해 주셨다. 이는 예수가 지향한 장애인의 진정한 자립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벽이나 환경,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장애 당사자 스스로 자신의 관심사, 친구 관계, 사회적 네트워크를 선택함으로써 풍부한 상호의존성을 향유하는 ‘영성적이며 정신적인 자립’에 기초한 ‘당당한 사회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통제권을 갖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스스로 만족하며 행복감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진정한 자기 주체적인 자립인 것이다.
장애인을 향한 한국교회의 사명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기존의 장애 이해를 뛰어넘는 대안적 개념으로서의 성서적 장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을 무능력하거나 불능인 존재로 ‘낙인화’하는 사회적 통념들 대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적응하기 위한 능력이나 어떤 필요들을 채우기 위한 대안적 방법들을 개발하고, 삶의 모든 수준에서 자립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회적 자원들을 사용하기 위한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하는 새로운 장애 개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을 개발하고 적응하기 위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다. 아울러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도록 큰 능력을 허락하셨다. 물론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개개인이 도움의 종류와 도움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할 수 있는 자기 주도적인 주체성을 개성으로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통념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장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언적으로 말하면 장애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수많은 현상 중에서 하나이다. 그래서 ‘장애라는 현상’은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다 장애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어머니가 산고를 이겨내고 아기를 출산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수고했어요.” 하는 아기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당연히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보면 ‘언어장애’라는 현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기는 엄마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바로 ‘청각장애’라는 현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잘 뛰지도, 걷지도 못한다. ‘지체장애’라는 현상을 갖고 있다. 더욱이 지적인 능력도 부족하며 사회적 상호작용도 잘하지 못한다.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반적으로 장애라고 말하는 현상들을 갖고 있다. 놀랍게도 이런 현상들이 사라지고 세월이 흐른 후, 고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노화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노화의 현상 또한 결국은 다양한 장애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장애라는 현상을 갖고 태어나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금 장애라는 현상을 갖게 된다. 여기서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 짓는 것은 장애라는 현상을 얼마나 오랫동안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것이다. 장애라는 현상을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 동안 경험하고 있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명명하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를 비장애인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장애는 각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이며, 그 현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장애는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장애를 개성이나 정체성으로 보기보다는 차별과 배제로 대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소외시키고 폄하하는 일이다. 이 부분을 한국교회가 선도적으로 시급히 해소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장애 당사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장애를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장애에 대한 개념을 성서적 관점으로 재개념화하여 이를 한국 사회에 모범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성서가 강조하듯이 존엄한 존재로서의 장애인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자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장애’를 이해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렇게 장애인을 바라보게 되면 청각장애인의 경우 ‘못 듣는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측면을 고려하여 오히려 ‘잘 보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각장애인은 못 보는 사람이기보다는 ‘보는 감각 이외의 다른 감각이 탁월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다. 지적장애인은 지능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지적 이해의 통로가 다른 사람’인 것이다. 자폐성장애인은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의사소통과 사회적 상호작용의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체장애인은 이동과 활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이동과 활력의 성격이 비장애인과 다른 사람’이 되게 된다. 성서는 장애인을 부족과 결핍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를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한 사람, 한 사람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할 존엄한 존재로 본다.
더불어 함께 이루는 하나님 나라
남서울은혜교회의 경우 원로목사인 홍정길 목사의 재임 시절부터 목회 철학을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로 두고 통합 지향적인 장애인 사역을 해오고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통역,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사 배치, 지체장애와 뇌병변장애,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자 배치와 차량 지원 등 장애 유형에 따른 지원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전체 교인의 10%가 장애 교인이며, 비장애 교인들도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을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함께 예배드리고 어울리며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정길 목사의 설교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여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앞서 제시된 C씨의 사례처럼 장애인에 대한 시설과 지원이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이지만 장애인과 함께하기 위해 편의시설을 갖추어 나가고, 의무사항도 아닌 장애인식개선교육을 자발적으로 받는 교회들이 있다.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면, 교회 주변 지역사회 내 장애인복지기관과 연계를 하는 경우도 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장애 유형별로 특성이 어떤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에티켓을 익히며 장애인과 함께하기 위해 교회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결국 핵심은 재정도, 규모도, 시스템도 아니다. 장애인과 함께하겠다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가 더 많은 한국교회에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차별받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소망한다.
이준우|숭실대학교(사회복지학)와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목회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충현교회 청각장애인부 지도교역자, 남서울은혜교회 장애인위원회 지도목사로 섬겼으며, 현재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이자, 지구촌교회 농인부 지도목사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애인과 함께 가는 교회』, 『복지선교와 복지목회: 교회사회복지실천의 새 지평』, 『농인의 삶과 수화언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