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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무슬림들은 일생에 최소 한 차례 이슬람 음력 12월 초순,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지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이는 아랍어로 ‘알라’, 영어로 번역하면 ‘God’인 무슬림들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령한 신성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에게 이 순례는 5대 의무 가운데 하나로 기독교의 십계명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은 자금이 부족하거나 건강이 허락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이를 완수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평생 이를 준비한다.
하나님의 전당으로 들어갈 준비
성지로 향하는 순례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무슬림들이 속세에서 걸쳤던 문화적·계급적 차이를 벗고 모두 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한다. 메카에 들어서기에 앞서 모든 순례객들은 1,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고 똑같은 세정 의식을 거치면서 속세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공간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일부는 집을 나선 직후, 일부는 사우디로 떠나는 공항이나 항구에서, 나머지는 순례지에 도착하기 수십에서 수백km 전에 놓인 길목의 지정된 구간(미카트)에서부터 신체를 단정히 하고 ‘이흐람’이라는 복식을 취한다. 남자는 속옷과 양말을 포함한 세속의 옷을 모두 벗고 바느질하지 않은 두 장의 흰 천으로 허리의 위와 아래를 감싸고, 여자는 손과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천으로 가린다. 이 복식은 610년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시점보다 훨씬 이전, 최초의 인류 아담이 자연의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던 때를 상징한다. 이후 메카에 도착한 무슬림들은 여장을 풀고 세정을 마치고는 대(大)성원(모스크)으로 향한다.
차츰 알려져 가듯이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이슬람의 순례 의식 역시 앞선 두 종교의 믿음과 궤를 공유한다. 이 세 종교가 믿음의 아버지로 받드는 아브라함은 이슬람에서 최고위 반열의 예언자 중 하나이다. 대다수 비무슬림들의 오해와는 달리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가 아니라 최후의 예언자이며, 이들에게 최초의 무슬림이자 이슬람의 최초 예언자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다. 무슬림들에게 아브라함은 아담과 노아의 계보를 이은 선지자일 뿐 아니라 그의 장남 이스마엘과 함께 카으바 신전을 만들어 유일신교를 재건한 믿음의 아버지이다.
소순례 우므라
이슬람 성지순례는 크게 의무 사항인 대(大)순례 ‘핫즈’(Hajj), 의무는 아니지만 크게 권장되는 소(小)순례 ‘우므라’(Umrah), 그리고 존경받는 무슬림 선조들의 영묘나 그들의 자취가 깃든 장소를 자율적으로 답사하는 ‘지야라’(Ziara) 세 가지 형태가 있다. 비용과 건강, 일정 등의 이유로 핫즈만 수행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핫즈 전후로 우므라와 지야라를 병행한다. 소순례의 시작과 대순례의 마무리는 카으바 신전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7차례 도는 탑돌이, 즉 ‘타와프’ 의식이다. 이는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세우고 또 그곳에서 노년에 가진 어린 아들을 바치면서 신앙을 증명하려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신전의 한 모퉁이에 박힌 흑석에서 출발하여 타와프를 마치고는 곧장 아브라함의 두 발자국이 찍혀 있다고 여겨지는 ‘마캄 이브라힘’(아브라함의 아랍어 표기) 앞에서 카으바 신전을 향해 엎드려 예배한다.
아브라함이 차남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달리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장남 이스마엘을 바치려 했다고 믿으며 이스마엘과 어머니 하갈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이스마엘과 하갈이 체험한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으로 순례의 다음 단계를 시작한다. 하갈은 아직 젖먹이인 이스마엘과 함께 분가해 사막을 헤매며 아들을 위해 인근의 작은 두 언덕,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7차례나 오가면서 물을 찾으려 했다. 갈증으로 죽음에 임박한 어머니의 절규에 하나님은 사막에서 샘이 솟아나는 은총으로 답하셨으니, 이것이 이슬람 최고의 성수 잠잠 우물이다. 마캄 이브라힘 앞에서 기도를 드린 무슬림들은 우선 잠잠 샘물로 목을 축이고 하갈이 그랬듯 사파와 마르와 언덕 사이를 7차례 왕복한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깎으면 소순례 우므라는 끝난다. 곧이어 대순례 핫즈를 시작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기도와 휴식을 취하며 다가올 핫즈를 준비한다.
신이 명령한 대순례, 핫즈
이흐람 차림의 순례객들은 12월 8일 아침 ‘미나’라는 야지로 이동하며 대순례를 시작한다. 미나의 텐트촌에 여장을 푼 무슬림들은 야영하며 수시로 기도를 올리고, 다음 날 약 15km나 떨어져 있는 아라파트산으로 이동할 준비를 한다. 무함마드가 고별 연설을 했다고 알려진 이 나지막한 동산은 아담과 하와가 천상에서 각각 지상으로 떨어져 헤어진 후 재회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힘겹게 이동한 무슬림들은 오후 내내 서서 자신의 죄악을 참회하고는 해 질 녘 ‘무즈달리파’로 이동한다. 여기서 합동으로 일몰 예배와 야간 예배를 올리고는 다음 날 ‘악마의 기둥’에 던질 자갈들을 줍는다. 이날 밤은 천장이 뚫린 텐트에서 야영하고는 새벽녘에 예배를 올린다. 핫즈 기간 내내 순례객들은 이동 중에도 늘상 기도문을 외고 멈춰 있을 때도 기도문을 읊거나 참회의 기도를 드리며 마음을 정화한다.
메카 일대를 거닐며 이곳에 얽힌 역사를 되뇌는 것만으로도 무슬림들은 순례 기간과 그 이후에 죄를 짓는 행위를 경계하게 된다. 무슬림들에게 메카는 세월이 흐르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차츰 잊어감에 따라 오랫동안 다신교들이 난립했다가, 무함마드에 의해 다시 하나님을 모시는 신앙의 중심지로 귀환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메카는 과거 하나님의 사자 여럿을 통해 내려온 경전들(유대교의 토라, 기독교의 시편과 신약의 4대 복음서 등)이 사람들에 의해 모두 불완전하게 전승되다가, 610년 무함마드에게 최후의 경전 꾸란이 계시되면서 이 모두를 완벽하게 대체한 장소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처음 계시했다는 곳도 메카의 ‘히라 동굴’이다. 모든 무슬림들은 신의 명령에 따라 어느 곳에서든 하루 다섯 차례 메카의 카으바 신전을 향해 기도드려야 하고 일생에 한 차례 이상 이곳을 순례해야 하는데, 이 모든 의식의 중심은 메카의 카으바 신전이다.
이튿날 일출과 함께 순례객들은 미나로 돌아가 돌을 던져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을 치른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희생하려 할 때 이를 거역하자고 유혹한 악마를 돌팔매질로 쫓아낸 행위를 모방하여 순례객들은 오른손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기둥 중 가장 큰 기둥을 향해 총 7개의 돌을 하나씩 던지며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친다. 이 돌이 종종 건너편 순례객에게 부상을 입히는 바람에, 사우디 정부는 2004년 긴 벽으로 악마의 기둥들을 대체했다.
다음으로 희생제가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아들 대신 양을 희생시켜 번제를 드렸던 것을 기념하여 동물(주로 양)을 도축하는 의식을 한다. 순례객이 얼마 없던 시절에는 순례객들이 직접 도축을 행하거나 그 장면을 참관했지만, 몇백만 명이 한꺼번에 운집하는 오늘날에는 위생상·행정상의 어려움이 있어 양 한 마리 값(우리 돈 10여 만 원)을 사우디 종교성에 기부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이 돈은 대부분 빈국에 전달하는 자선으로 쓰인다. 후술하듯 이 도축과 분배는 메카 바깥 모든 무슬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이슬람 최대의 명절, 희생절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후 남자들은 머리를 삭발하거나 반 삭발을 하고, 여자들은 머리끝을 다듬으며 죄를 정화하고는 메카로 가 ‘타와프’를 하고 밤에 미나 평원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 오후 무슬림들은 순서대로 세 번째로 큰 기둥에서부터 가장 큰 기둥까지 세 개의 악마의 기둥에 각각 일곱 개씩의 돌을 던진 후 기도하며 휴식을 취한다. 그다음 날에도 한 차례 더 세 개의 악마의 기둥에 돌을 던진 순례객들은 당일 메카로 돌아가거나 하루 더 남아 한 차례 더 돌을 던지고 메카로 이동한다. 메카 도착 다음 날 순례객들은 마지막으로 카으바 신전을 7바퀴 더 도는 고별 타와프를 끝으로 순례를 마무리한다. 도는 와중에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전의 벽이나 벽에 박힌 흑석을 만지거나 입을 맞추려 하고, 원하는 이들은 사파와 마르와 동산 사이를 한 차례 더 왕복하기도 한다.
메디나로의 답사, 지야라
의무 사항은 아니나 다수의 순례자들은 가급적 대순례가 끝난 후 메카에서 북쪽으로 400km 남짓 떨어진 이슬람 제2의 성지이자 선지자 무함마드의 도시 ‘메디나’를 답사한다. 제1의 성지 메카가 하나님이 계시하고 무슬림들에게 기도하며 순례하도록 한 하나님의 영역이라면, 제2의 성지 메디나는 무함마드가 무슬림들을 자립시켜 공동체를 형성하고 최후까지 수도로 삼은 곳으로, 사후에 묻힌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의 역사적 중심지이다. 메디나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예언자의 무덤에는 무함마드뿐 아니라 그의 직위를 이어받은 초대 칼리파(이슬람의 지도자)와 2대 칼리파의 무덤이 있고 또 심판의 날에 강림할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까지 총 네 개의 무덤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메디나와 그 인근에는 무함마드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초기 무슬림 영웅들의 전쟁터나 초기 모스크와 같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숱하게 널려 있고, 소수 종파인 시아파의 성인 여럿을 모신 영묘들도 있다. 또한 이 도시는 꾸란 박물관과 같은 종교 테마의 답사 시설뿐 아니라 관광호텔이나 수영장과 같은 종교 이외의 즐길 거리도 가득해 여독을 풀면서 순례의 의미와 즐거움을 마무리하도록 돕고 있다.
성지순례를 둘러싼 인간 사회
성지순례라는 행위는 인간이 신을 마주하는 과정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무척이나 다양한 인간들의 복잡한 지원이 요구된다.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에서 대순례 핫즈와 소순례 우므라를 관리하는 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최우선 순위에 해당한다. 사우드 왕가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 가장 큰 명분이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관리자’ 역할이기에 사우디는 독립 초창기인 1945년에 ‘대순례와 소순례 부’(Ministry of Hajj and Umrah)를 별도로 편성하여 성지를 관리해오고 있다. 또한 성지순례객들을 위해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 에어라인’(Saudi Arabia Airline, 현 사우디아의 전신)이라는 항공사를 설립하고 그 본사를 수도 리야드가 아닌 성지순례의 주관문 젯다에 설치했다. 이러한 설립 정신을 반영하듯 오늘날까지도 사우디아는 항공기 뒤편에 별도의 기도 공간을 마련해 승무원과 승객들의 예배를 돕고 있다.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명분은 사우디에게 정치적·외교적 이득을 주기도 하지만 부담이 되기도 한다. 현재 19억에 육박하는 무슬림이 모두 생애 내에 핫즈를 완수하려면 재정과 건강 여건상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매년 1,000만 명 이상의 순례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동일한 동선과 의례를 한꺼번에 치르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사우디 정부는 여지껏 엄청난 재정을 퍼부어 전 세계 순례객들이 최대한 많이 순례할 수 있도록 시설과 서비스를 확충하고 있다. 1934년 독립 당시 10만 명 대에 머무르던 순례객의 수를 80년 만에 20배 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려 하고 있다. 또한 더운 기후 아래에서 오랫동안 먼 거리를 이동하고 야영하는 순례객들을 위해 일부 구간을 실내로 만들어 에어컨 아래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을 주려고 하고, 순례의 각 요소에 안내원과 의료진들을 배치해 두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메카는 순례를 희망하는 모두를 받아들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듯하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매년 국가별로 핫즈에 참여할 수 있는 인구를 제한한다. 이러한 쿼터는 기본적으로 각국의 무슬림 인구에 비례해 배정하지만, 때로는 양국의 외교 관계 등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배정된 인원수에 맞춰 각국은 자국 순례객을 선발하고 사우디 정부는 이에 맞춰 핫즈와 우므라만 할 수 있는 전용 비자를 발급한다.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의 정부는 매년 순례를 원하는 모두에게 성지순례 비자를 발급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많은 핫즈 비자를 확보하도록 국민으로부터 압력을 받기에, 사우디로부터 가급적 많은 쿼터를 배정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최근의 코로나19 대유행은 기존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팬데믹 직전 250만 명에 달하던 순례객들이 방역 문제로 2020년에 약 1,000명, 2021년에는 약 6만 명, 2022년에는 약 1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로써 기존에 적체된 대기 인원에 새로 650만 명이 추가되면서 인도네시아는 40여 년치의 대기 순번이 뒤로 밀렸고 말레이시아는 무려 114년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그나마 100만 명을 수용했던 2022년에도 사우디는 전염병에 취약한 65세 이상의 고령자에게는 순례를 제한하여, 오늘날 노령자들은 임종 전에 순례를 완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이 무척 커졌다. 따라서 각국은 순례가 정상화되는 2023년에 가능한 한 많은 쿼터를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2022년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성지순례 기간이 끝나자마자 종교부장관 담화를 통해 자국에 배정된 순례 비자의 쿼터 증가를 요구했고, 또 9월에는 대통령이 직접 자국을 방문한 사우디 성지순례부 장관에게 이에 대한 확답을 요구했다.
성지의 수호자인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 세계의 남다른 기대를 짊어지고 있다. 이라크 전쟁 당시 사우디는 무슬림 형제들을 치러가는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성지가 있는 자국 영토에 이교도인 미군의 주둔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79년에는 반정부 무장단체가 메카의 대성원을 기습 점령하여 인질극을 벌이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신성한 공간에 대한 관리 부실 논란이 불거졌다. 이뿐만 아니라 압사나 화재 등의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사우디 정부는 사고 피해자뿐 아니라 그들의 출신 국가와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성지순례의 파생 경제
성지순례는 거대한 경제 효과를 창출한다. 관광시장 개방 이전인 2019년까지 사우디는 순례만으로도 이미 관광 대국 이집트와 모로코를 아득히 뛰어넘는 중동 최대의 관광 국가였다. 심지어 코로나19로 순례객이 뚝 떨어진 상황에서도 한류로 한창 인기몰이 중인 한국 이상의 외국인 손님을 맞이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슬람의 성지순례에는 12월 초·중순에 이뤄지는 핫즈 외에도 연중 수시로 받는 우므라와 무함마드를 비롯한 성자들을 모신 영묘를 찾는 지야라가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 심지어 한 달 이상 메카와 메디나 인근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며 쉴 새 없이 소비한다. 이들에겐 소모품인 선글라스, 양산, 신발주머니와 같은 일용품부터 고국의 지인들에게 선물할 성지의 물건들과 기념품까지 쇼핑 리스트가 넘쳐난다. 마지막으로 메카를 들어가는 관문이자 사우디의 유서 깊은 상업 도시 젯다에서 순례객들은 떠나기 전에 또 한 차례 세련된 상품들을 구매한다.
사실 사우디와 순례길에 익숙지 않은 순례객 대부분은 큰 비용을 치르고 여행사를 통해 성지를 답사한다. 특히 핫즈 기간은 대호황기라 택시 요금이 2-3배, 심지어 10배까지 오르기도 한다. 또한 핫즈를 다녀왔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많은 무슬림들은 연중 내내 순례가 가능한 우므라를 가능한 한 여러 차례 가고 싶어한다. 우므라에는 쿼터가 없어서 건강과 돈, 시간을 확보한 수백만의 무슬림은 연중 몇 번씩 생애 내내 수십 번의 우므라를 다녀오기도 한다. 이 인파로 메카는 사우디 제3의 도시가 되었고 메디나 역시 제4의 도시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이들 도시는 성지 시설과 인프라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순례의 생태계는 사우디 내에 그치지 않는다. 순례 기간 동안 몇백만 명의 순례객들이 매끼 먹는 음식의 식자재 대부분은 자체조달 대신 수입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소고기는 주로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수입해왔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수출길이 막힌 에티오피아는 다른 수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순례와 관련된 운수업, 숙박업, 여행업, 도소매업 등의 산업 전반이 모두 심각한 피해를 보았고, 이는 이슬람 성지순례와 연관된 산업 생태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보여준다.
한편, 순례의 경제는 일면 빈부격차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두들 같은 복장으로 이동하지만, 그전에 순례자들은 메카의 머무는 숙소에서부터 빈부 차를 느낀다. 여행사들은 가격과 등급에 따라 식사와 간식, 이동 간의 편의와 야영 장비의 차이를 둘 수밖에 없다. 순례 후 지야라 과정은 여행상품에 따라 아예 없을 수도 있고 최고급 시설에서 아주 화려한 놀이를 포함한 것까지 다양하다. 1등석 항공기에서 편안한 여정을 즐기는 이들도 있고, 비좁은 선실에서 부대끼며 매우 불편하게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2006년 알 살람 보카치오 98호(MS al-Salam Boccaccio 98) 침몰 사고처럼 선박 불법 개조로 수용인원을 억지로 늘려 승객 제한을 아득히 초과한 배가 침몰한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성지순례의 사회적 효과
성지순례의 사회적 효과는 앞서 언급한 모든 파급효과에 앞선다. 성지순례와 같은 관광 산업은 높은 고용 창출로 사우디에서 점증하는 실업 문제, 특히 청년 실업과 비숙련 노동 인력들의 실업률 개선에 크게 기여한다. 순례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에 종사하는 근로자와 자원봉사자들의 시설물 생산과 정비, 순례 교육과 안내 등 간접 고용 효과는 사우디 국내 사회 안정에 핵심적 요소이다. 더욱이 성지순례를 돕는 업무는 이들에게 단순히 생계 수단 이상의 자부심과 보람을 부여하고, 사우디 국민의 의식 고양에도 기여한다.
지역과 출신,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무슬림 순례자들은 각기 외양과 속세에서의 생활은 다를지라도 적어도 성지에서는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한 하나의 무슬림, 같은 신앙을 믿는 형제라는 사실을 체감하며 무한한 감동과 일체감을 느낀다. 수백만이 함께 카으바 신전을 돌다가 한꺼번에 엎드려 기도하고 몇 날 며칠을 함께 걷고, 먹고, 자고, 기도하고, 돌을 던지며 이들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심지어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전 세계에 무슬림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타 인종과 계급에 대한 편견과 이질감의 벽을 깨 나간다. 일례로 극단적 흑백분리주의 단체 NOI(Nation of Islam)를 주도했던 말콤 엑스(Malcomn X)나 이 단체에 소속되었던 무함마드 알리는 핫즈를 통해 다양한 피부색의 무슬림들과 어울리면서 흑백분리주의와 결별하고 코스모폴리탄 무슬림이 되었다.
성지로 모였다가 돌아가는 수백만 순례자들의 귀환은 개인의 기쁨이 아니라 공동체의 축제이다. 사실 모든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핫즈는 역사적으로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특히 과거로 갈수록 극히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었다. 지금은 몇 시간만에 비행기로 날아가서 며칠 만에 순례를 다녀오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낙타와 같은 탈것이나 배에 몸을 싣고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려서 성지를 다녀왔다. 이는 한 나라의 왕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핫즈를 다녀오면 온 마을이 축제를 벌이고 이들의 이름 앞에 ‘핫지’(Hajji)라는 타이틀을 붙여 존경을 표했다. 핫즈를 끝내고 돌아온 이들은 많은 경우 소속된 공동체에서는 물론이요 고향이나 경유지, 심지어 전혀 낯선 곳에서 교수나 판사 또는 외교관, 심지어 공동체의 수장을 맡기도 하였다.
성지순례는 순례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순례에 참석할 수 없는 성지 바깥의 전 세계 모든 무슬림들이 함께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특히 순례의 셋째 날인 희생제(이드-알-아드하)를 전후한 기간은 세계 전역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국가 최장의 공휴일이자 최대 명절이다. 심지어 비이슬람 국가의 무슬림들도 이날은 명절을 지키고, 여러 비이슬람 국가들은 이날을 무슬림을 위한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이날은 세계 어디를 가든 무슬림들이 직접 양을 잡거나 도축장에 비용을 지불하며 고기의 3분의 1은 가족에게, 3분의 1은 친척과 지인에게,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전 세계 무슬림들이 함께 어울려 전 세계의 가난한 무슬림들을 위하여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이슬람 세계를 단결시키는 가장 큰 힘이다.
이슬람 성지순례의 진화와 미래
이슬람 성지순례와 연관된 경제 활동은 지금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순례지는 순례를 위한 목적에 특화되어 있었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2016년에 발표한 개혁안 ‘비전 2030’으로 성지순례가 아닌 일반 관광도 가능해졌다. 이로써 사우디의 성지들에 순례객과 일반 관광객을 함께 초청하면서 성지를 둘러싼 지역의 성격이 획기적으로 탈바꿈되고 있다. 오늘날 성지순례 코스는 대규모 박물관과 역사·문화 탐방 코스에 레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시설 및 대형 숙박 시설과 쇼핑센터를 덧붙여 종합 관광단지로 개발되고 있다. 비무슬림들의 입장이 원천 불허된 메카와 달리 비무슬림의 접근이 가능한 메디나에는 이미 한국인들의 관광도 시작되었고, 일부 패키지 여행상품을 통해 단체 관광객들도 드나들고 있다. 또한 사우디 당국은 메카를 전국 5대 스마트 의료 도시 중 하나로 지정하여, 순례객들이 순례 외에도 성지에서 장기간 치료와 요양을 병행하고 그 가족들이 관광과 쇼핑을 즐기면서 체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사우디 정부는 2030년까지 스마트 ID 등의 디지털 기술까지 동원해 지금껏 연 800만 명에 불과했던 핫즈와 우므라 순례객의 수용 범위를 연 3,000만 명까지 확대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핫즈와 우므라를 관리하는 수장 타우피크 알-라비아 장관은 무려 2,000억 사우디 리얄(우리 돈으로 약 71조 842억 원)을 쏟아부어 메카 대성원을 확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의 종교 시설 확충은 도시의 관광 수용력을 늘리고, 성지 내 일반 관광객의 유입은 순례 기간을 장기화하고, 소비 규모를 확대시킨다. 이처럼 양대 분야가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는 궁극적으로 순례 용량 확장을 위한 재투자로 이어진다. 이는 순례를 갈구하는 대기자들이 보다 빨리 순례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두 성지를 관리하는 사우디가 이슬람 세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에도 분명 득이 된다.
성지순례는 IT 분야의 성장을 견인하는 주요 콘텐츠이기도 하다. 성지순례와 관련한 수백 개의 앱을 비롯하여 순례 코스 안내와 유의점, 각종 팁을 교육하는 가상현실(VR) 콘텐츠는 파키스탄을 필두로 다양한 국가에서 개발되고 발전하는 중이다. IT 기술이 발달하고 성지순례의 수요자가 늘수록 가상 성지순례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여러 상황으로 순례를 수행할 수 없는 이들에게 가상 순례 체험은 위안이 되고 어느 정도의 만족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에도 성지순례를 떠나는 무슬림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크고 작은 분야에서 이슬람을 둘러싼 이견이 불거지는 오늘날, 이슬람의 성지순례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보며 무슬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더 나아가 서로에 대한 이해의 접촉면을 늘려가면서 양측이 무지에 의한 오해를 줄이고 보다 준비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눠가며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길 소망한다.
정진한|요르단대학교에서 한-이슬람 교류사로 석사 학위를,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서 문명교류사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와 서울대에서 이슬람 사상과 동서교류사를 강의하고 있고,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수신문」의 ‘글로컬 오디세이’ 코너에 기고 중이며, 저서로 『아시아 공동체론』, 『신라와 실크로드』(이상 공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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