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협의회(WCC) 제11차 총회가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개최되었다. 과연 팬데믹 기간에 대면 총회가 가능할지 그동안 염려한 분들에게는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총회가 개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이요 은혜로 다가왔다. 2013년에 부산에서 개최된 제10차 총회는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1948) 이후 반세기 넘게 지속된 익숙한 패턴의 총회로서는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이번 제11차 총회는 부산총회 이후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가속화된 지구촌의 퇴행적 폭풍우 속에서도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체인 세계교회가 시대의 물살을 거스르며 기독교 신앙을 함께 증언하고자 하는 공동 의지의 발현이었다.1
이미 카를스루에 총회에 대한 유익한 참석기가 출간되었다.2 보고와 평가를 위한 후속 모임들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총회의 각종 회의, 에큐메니컬 간담회, 세미나, 행사, 주말 프로그램 등의 분량은 어지러울 정도로 방대하다. 한 개인이 다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개인마다 자신의 제한된 경험과 관점을 소개하게 된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떠한 진통을 겪으며 카를스루에 총회가 성사되었는지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세계교회의 공동 증언의 의지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망라하고 모든 분야의 대전환이 필요한 카이로스적 상황에서 지구촌의 파수꾼 역할을 감당하고자 기도하며 헌신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큰 기쁨이다.
카를스루에 총회와 WCC 총무의 한국 방문
카를스루에 총회를 마친 다음 달인 10월, 요안 사우카 WCC 총무(대행)가 피터 프루부 국제문제위원회(CCIA) 국장, ‘정의와 평화의 순례’ 담당 스태프 김진양 목사와 함께 한국의 회원교회들을 방문하였다. 10월 11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주최한 에큐메니컬 평화대화에서 주제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사우카 총무는 제11차 총회에 많은 참석자를 보내고 적극적으로 동참한 한국교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또한 한국교회와 NCCK가 부산총회에서 출범한 ‘정의와 평화의 순례’에 신실하게 참여해준 일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현하였다. 이번 카를스루에 총회에서는 ‘정의, 화해, 일치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총회 준비 과정에서 제11차 총회의 주제로 언급된 ‘화해와 일치’ 개념이 정의의 문제를 희석시키는 값싼 화해나 피상적인 일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곤 하였는데, 그 정신이 ‘정의, 화해, 일치의 순례’라는 언어로 명시된 셈이다.
사우카 총무는, 에큐메니즘은 정적인 기구로 축소될 수 없는 역동적인 신앙 운동이며, 따라서 함께 길을 가는 순례와 동행의 이미지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정체성을 잘 말해준다고 강조하였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길(헬라어 ‘호도스’)에 속한 사람들” 혹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개역개정)으로 불리기도 하였다.(행 9:2) 초기 기독교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함께 길을 걷는 동료 순례자들’이다. 이 개념을 나타내는 헬라어(‘쉰+오도이’, ‘쉰+오도스’)는 오늘날 노회나 대회 등 각종 단위의 교회 회의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시노드’(synod)의 어원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道)를 따라 걷는 길벗들의 순례공동체인 것이다.
사우카 총무는 세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첫째, 카를스루에 총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보전과 기후정의를 WCC 프로그램의 핵심으로 삼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WCC는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프로세스에 상설 대표부가 있는 세계 유일의 종교 분야 기구로서, 그동안 유엔 네트워크에서 자연 파괴의 위험을 경고하는 일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WCC의 기후 정의 실천은 여러 맥락에서 추진된다. 세대 간 정의, 특히 아동인권 옹호 차원에서 유니세프와 함께 일하던 맥락에서는 탄소배출 산업을 지원하는 금융에 대한 투자회수 운동과 녹색투자 운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생명경제’를 추구하는 맥락에서는 ‘새로운 국제 금융·경제구조 건설’ 운동과 삭개오 세금 등의 창조적 개혁안 추진에 동참하고 있다. 그 외에도 기후 정의는 물의 정의, 건강과 치유, 돌봄의 디아코니아 등 다양한 맥락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생태 정의 감각과 창조 영성을 함양하는 기도회 및 예전의 보급 또한 교회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이다.
둘째, 이번 총회는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개최되었다.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기가 무색한 현실이었다. WCC는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부터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라고 선언하며 세계의 평화와 군축을 위해 선구적으로 헌신해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성명서에서는 죽음과 파괴를 멈추기 위한 즉각적 휴전과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한 대화와 협상을 촉구하였다. 총회 첫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연방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서 푸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공적 저항에 참여한 수백 명의 러시아정교회 사제들의 용기를 치하한 바 있다. 이번 총회는 러시아정교회와 우크라이나정교회 대표들 사이의 불편을 감수한 대화와 만남의 장이 되었는데, 이들이 입장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성명서 작성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큰 의의를 지닌다. 사우카 총무는 한국 방문을 마치자마자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시아정교회 대표에게 종전 노력을 촉구하였다.
셋째, 카를스루에 총회는 “한반도의 전쟁 종식 및 평화 건설에 관한 의사록”을 채택하였다. 사우카 총무는 부산총회에서 채택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성명서”의 권고사항을 이행하고자 노력한 WCC의 활동을 회고하였다. 2018년 WCC의 에큐메니컬 대표단이 평양과 서울을 각각 방문하였고, 2019년에는 청년 순례단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발발한 2020년에는 세계교회 여성 순례팀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컬 여성계가 WCC 최초의 비대면 순례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도 하였다.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교회 기도 캠페인을 진행하고 『평화의 빛: 한반도와 함께 연대하는 세계교회』라는 제목의 책자를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이 중요한 자료에는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을 촉구하는 “한반도 전쟁 70주년 세계교회 공동 평화선언문”이 실려 있다. 한반도 전쟁 참전국들의 교회들이 동참한 선언문이다.(한국, 미국, 호주, 영국, 태국, 캐나다, 필리핀,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프랑스, 남아공, 네덜란드 등) 그 외의 교회들과 에큐메니컬 기관들(독일, 일본, 노르웨이, 러시아), 그리고 세계 에큐메니컬 기구들(세계개혁교회커뮤니언, 세계감리교협의회, 세계YMCA, 아시아태평양YMCA)도 함께 마음을 모아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사우카 총무는 WCC와 한국교회가 함께 펼치고 있는 팔레스타인 농부들의 올리브나무 심기를 지원하는 연대 운동을 환영했으며, 미얀마의 투쟁에 한국교회가 강력한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는 모습에 큰 힘을 얻었다고 논평하였다. 한국교회가 미얀마를 위해 적극 연대하는 일은 아시아 지역에서 에큐메니컬 정신의 빛을 비추고 본을 보이는 소중한 공헌이다.
21세기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제
1) 시대의 표징에 부합하는 국민 계몽의 과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는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향해서 돌진하던 군사독재 시대에 신선한 도전과 영감을 준 서적이다. 그는 인간의 생존 양식을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으로 구별한다. ‘소유 양식’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산업사회의 노예가 된 인간의 삶의 양식이다. ‘소유 양식’에 매몰된 인간은 존재와 존재가 상호 소통하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을 사물과 숫자로 환원하는 죽은 관계를 창출하며 살아간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간 군상은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라는 악순환의 노예들이 거주하는 사회를 만든다. 이들은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써만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은 사회주의이건,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현대의 모든 체제가 관료주의의 노예가 될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였다. 관료주의는 자발적으로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을 양산한다. 성찰과 저항의 의지가 없이 타성적으로 살아가는 수동적인 인간은 ‘악의 평범성’의 터전이 되고 만다.
인간다운 ‘존재 양식’의 삶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성격 구조 및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구조의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다. 산업사회와 관료주의가 조장하는 인간 유형인 ‘자동인형’에게 사랑과 자유는 잃어버린 예술이다. 모든 욕망은 충족되어야 한다는 쾌락주의, 이기주의, 탐욕을 당연시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병든 인간과 병든 사회를 만든다. 병든 인간과 병든 사회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비윤리적 사태에 무감각해진다. 이렇게 무감각한 체제가 인간 생명의 터전인 자연까지 파괴하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프롬은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하는 산업사회의 방향성이 분명한데도, 이 파국을 피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믿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정치와 사회 지도자들이 끝없이 회담을 하고, 결의안을 채택하며 부산을 떠는 활동들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문제 상황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대책이 수립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아무것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도자와 피지도자들은 모두 갈 길을 알고 있는 척,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척함으로써 그들의 양심과 생존에 대한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도층과 일반 대중이 각각 피상적이고도 관성적인 활동과 ‘치명적 수동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프롬의 분석은 21세기 지구촌의 복합적 위기 상황에 놀랄 정도로 부합한다.3
‘어둠에 대한 사랑’(스코토시스)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거부하는 마음의 습관을 가리킨다. 역사의 유일한 교훈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어둠에 대한 사랑’의 집단적 발현은 비극적 파괴성을 지닌다. 지난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과 숱한 전쟁의 참혹한 트라우마를 겪고서도 21세기에 여전히 전쟁으로 돌진하는 국가들이 나타난다. 핵의 잔혹한 총체적 파괴력을 알면서도 핵무기에 대한 비윤리적 매혹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사랑’(네크로필리아)이다. 이에 반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살상무기 철폐 운동을 꾸준히 벌여온 세계 평화 운동과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은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사 2:4, 미 4:3) 전환시키는 성서적 평화 비전을 현실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빛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기후위기 문제는 자연에 맞선 제3차 세계대전이다.(프란츠 알트) 현재 인류가 공동으로 직면한 가장 큰 안보 문제인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환경 학살’인 전쟁과 군사연습을 지속하면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요청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생명경제를 수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계각층의 집단 지혜를 수렴하기 위해서는 만인의 참여를 보장하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견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후 정의와 생태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 총체적인 사회 시스템 전반을 함께 혁신해야 하는 중차대한 도전 앞에 함께 서 있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은 시대의 표징을 읽고 국민 의식을 계몽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바벨탑이 조장하는 우상숭배를 참회하고 공생공락의 생명문명을 건설하는 예언자적 상상력과 의지를 보급해야 한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국민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용기가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과 후손의 생명권을 위해 정의로운 사랑의 힘에 기초한 생명과 평화의 새로운 문명의 새벽을 함께 열어가자고 초청해야 한다. 생명과 평화는 성령에 속한 생각이다.(롬 8:6) 기독교적 정신에 충실한 교회의 사명은 막중하다.
2) ‘K-교회’의 두 얼굴
이번 카를스루에 총회 참석자 중에 환대가 넘쳤던 부산총회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대한 세계교회의 은근한 기대를 많이 느꼈다. 한국은 JPIC 대회와 WCC 제10차 총회의 개최지이다. 한국교회가 가진 기도의 열정, 선교의 열정, 사회변혁의 열정을 높이 평가하는 관점도 접하게 된다. 세속주의가 휩쓰는 현대 문화 속에서도 생동감 있는 신앙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지역 교회들과 국경을 넘어서 직접 교류하고 싶어 하는 해외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활동을 세계교회에 부탁하는 한국교회가, 정작 자체적으로는 교회의 일치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실이 의아하다는 반응도 있다. 교회의 일치는 인류의 일치, 만물의 일치를 예시하는 토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안의 무게가 압도하는 비정상적 현실을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지닌 한반도에서 평화협정도 없이 휴전 상태의 군사적 긴장 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도하는 평화 운동이 불 일듯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쉽다는 의견을 접한 적도 있다. 한편 한국교회 총회에 참관한 이후에, 남녀 성비율이 현저히 불균형한 모습에 실망했다는 후문을 듣기도 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성당(가톨릭)은 직영점, 절(불교)은 프랜차이즈, 교회(개신교)는 자영업”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가 눈길을 끌었다.4 이 기사는 개신교가 하루아침에 분열상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개신교의 분열된 현실은 이단과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도 대처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국에서 개최된 콘퍼런스에 초청받았던 해외 여성 동료가 초청인이 누군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세계, 평화, 여성, 종교”라는 21세기 중요한 화두들을 한데 모은 이 콘퍼런스를 개최한 여성이 알고 보니 신천지 소속이었다.
얼마 전 영국 신문 가디언에 ‘K-한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지구촌의 한류 열풍은 뜨겁다. ‘K-교회’는 어떤 얼굴을 선택할 것인가? 계속 ‘자영업’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교회, 곧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하는 국내외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에큐메니즘은 혼돈과 위기에 빠진 지구촌에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관을 제시하는 세계적인 공교회적 노력이다. 이 합창 속에서 ‘K-교회’는 하나의 지체로서 뚜렷하고 독특한 한국적 선율 한 가락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 이러한 ‘K-교회’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하는 새 시대 청년 리더십을 양육할 수 있는 터전이다.
에큐메니즘은 단순히 ‘교회연합’으로 번역할 수 없는 만만찮은 외래어이다. 헬라어 어원부터 경제(이코노미)·생태(이콜로지)와 연결될 뿐 아니라, 2,000년 교회사, 그리고 세계사의 궤적을 품고 있는 다차원적이고 다문화적 단어인 에큐메니즘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에큐메니즘은 예수 운동, 혹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정신을 현대에 계승하고자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 운동이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도록(마 23:24), 기도와 성찰과 행동의 해석학적 순환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 운동이다. 에큐메니즘은 종파주의, 근본주의와 대척점에 서서 개교회주의, 교단주의를 극복하라고 우리를 부른다. 주도권 혹은 패권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라 책임적 참여, 건설적 비판, 능동적 연대, 자발적 희생과 공헌이 에큐메니즘의 기본 문법이다. 세계적인 에큐메니컬 네트워크에서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창조적인 신앙의 길에 대한 풍성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 로드맵’은 선구적인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 함께 호흡하는 야심 찬 로드맵이다. 이 로드맵에 의하면 1차 목표 기간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이다. WCC는 1차 목표 기간의 상반기가 끝나는 2025년에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기리는 17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자 한다. 전국의 뜻 있는 교회들, 녹색교회들, 마을목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교회들이 이 로드맵을 길라잡이로 하는 ‘지역 에큐메니즘’을 함께 실천하며 목표 기간의 성과를 세계교회 네트워크와 공유한다면, 이는 ‘글로컬 에큐메니즘’을 형성하며 지구촌 위기를 극복해나가야 하는 우리 시대에 ‘K-교회’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이며, 세계교회에 희망을 주는 소중한 공헌이 될 것이다.
3) “사람만이 희망이다”5
신약학자 케제만(E. Käsemann)은 “예수는 자유를 뜻한다.”라고 했다. 오래전에 쓰인 김남주의 시 〈자유〉가 연상된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 /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 피와 땀을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사람들은 맨날 /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제 자신을 속이고서.”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만인’이라는 표현에 ‘만물’, 곧 우주적 자연을 포함시켜 읽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현재 지구촌의 총체적 위기 상황은 자신이 타고 앉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열심히 자르는 형국이다. 탐욕과 이기심과 어리석음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걸맞는 이미지이다. 이 시대의 풍조에 저항하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자유인,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집중적으로 참여하고자 번잡한 인생을 질서 있게 정리한 자유인, 소유 양식의 삶을 지양하고 사랑과 존재의 예술을 터득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하는 자유인, 공룡 같은 정사와 권세의 카르텔에 맞서 함께 마음과 지갑을 열고 연대하며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맞불을 놓는 일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자유인. 예수 닮은 그들이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그루터기이자 희망이다. 거대한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반딧불 같은 그들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는 일부터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상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註)
1 배현주,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에서 카를스루에로,” 「기독교사상」 764호(2022. 8): 9-21.
2 「기독교사상」 767호(2022. 11)에는 세 편의 의미 있는 참석기가 실려 있다. 장윤재, “발로 뛰는 에큐메니즘-세계교회협의회(WCC) 제11차 총회 카를스루에 총회, 보고와 성찰”; 정희경, “제11차 WCC 카를스루에 총회, 그리고 여성”; 전남병,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1차 총회, 청년들과의 브룬넨 참여”.
3 에리히 프롬, 정진홍 옮김, 『소유냐 삶이냐』(홍성사, 1978).
4 “성당은 직영점, 절은 프랜차이즈, 교회는 자영업,” 「연합뉴스」, 2020년 4월 7일.
5 박노해의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옥중 에세이』(느린걸음, 2011)에서 빌려온 용어이다.
배현주|부산장신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최근까지 WCC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으로 일했다.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