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의 시작과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현대 세계선교 운동 및 에큐메니컬 운동의 흐름 가운데 탄생했다. 교회, 선교, 일치의 관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한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따라서 교회 역사는 ‘교회 일치의 역사’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분열의 역사가 도배하다시피 해왔다.
이와 동시에 주목할 사실이 있다. 기독교는 교회가 하나라는 공감대 위에서 초대교회 때부터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통해 공통된 핵심 교리를 확정했다는 점이다. 초대교회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인데, 이 네 가지 주요 특성 중에서 일치 관련 항목이 절반을 차지한다.
이해를 돕고자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인간이 생활하는 세계, 곧 세상’을 뜻하는 명사 ‘오이쿠메네’(oikumene)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세계적’이란 의미를 지닌 일반 용어인데, 교회가 교회의 ‘세계적 보편성’을 가리키는 교회 용어로 채택했다. 제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 때부터 전 세계 교회가 모인 공의회를 ‘에큐메니컬’ 공의회라고 고정적으로 불렀다.1 기독교는 ‘에큐메니컬’이란 단어의 모체인 ‘오이쿠메네’(세상)도 주목해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cosmos)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세상 사랑’을 강조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갱신)를 양대 주제로 삼는다.
교회는 지난 2,000여 년 동안 일치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활성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구의 개신교 선교 운동이 절정기에 이른 19세기에 들어서야 선교 현장에서 일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원래 선교 연합을 도모하려는 실용적 이유에서 비롯됐는데, 곧 선교 본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선교 일치 운동은 교회 일치 운동으로 확산하였고, 이런 맥락에서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은 선교 운동의 자녀”라는 말이 나왔다.
선교 일치 운동은 지역별 모임에서 국가별 대회로, 다시 세계대회로 확대됐다. 1900년 ‘뉴욕 에큐메니컬 선교대회’에 재한(在韓) 선교사들이 참가하여 한국교회의 성장 및 삼자정책의 성공을 알렸다. 1910년 영국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 1,000여 명의 서구 교계 및 선교계 인사가 모였고, 20명 미만의 비서구 교회 지도자도 초청을 받았다. 비서구 교회 지도자들은 혁신적인 발언을 통해 비서구 교회의 존재를 과시했다. 가령 인도의 신부 아자리아(V. S. Azariah, 나중에 주교)는 선교사들에게 “우리는 사랑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고, 한국 남감리교회 소속이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윤치호는 “선교사들은 선교 자금 배분에 있어 현지 지도자들도 함께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라고 했다.2
에든버러 대회는 폐회하면서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를 설치했고,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로 발전했다. 국제선교협의회는 서구 선교 기관과 비서구 교회가 함께 참여하며, 국가 단위의 기구 조직에 힘썼는데, 이런 흐름에서 1924년 한국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가 결성됐다.
1920년대에는 두 개의 세계 에큐메니컬 기구가 추가로 결성됐다.(이 글에서는 신학적 성향과 상관없이 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한 기구는 모두 에큐메니컬 기구로 통칭한다.) 교회의 봉사를 담당하는 ‘생활과사업위원회’(1925, Life and Work, L&W)와 교리와 교회 정치를 다루는 ‘신앙과직제위원회’(1927, Faith and Order, F&O)이다. 이 두 기구는 서구 교회 중심적 기구로서 먼저 연합의 필요성을 느껴 1938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를 결성하려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1948년에 이르러서야 제1차 총회인 암스테르담 대회가 개최됐다. 이 창립 대회에 한국교회 중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대표를 파송해서 창립회원이 됐다. 1961년에는 국제선교협의회가 세계교회협의회와 합류해 산하 기구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CWME)가 탄생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 굳건하게 결속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기구의 역사
1) 산발적인 일치 운동 시대(1905년 이전)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은 초창기에 순탄한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3 선교사 간에, 선교사와 현지인 간에 협력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성서 번역 사역, 청년 사역 등 연합 사역을 위해 사역별 에큐메니컬 기구가 설립되거나 활성화되었다. 교파 내 선교협의회도 결성되었다. 4개 재한 장로교회(미북장로교, 미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단일 선교협의회를 구성하고, 단일 장로교회도 설립했다.4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선교 사역의 중복과 경쟁을 막고자 선교지 분할 정책인 선교 예양(comity)을 시도했다.
2) 선교사 에큐메니컬 기구 시대(1905-18년)
선교 연합 분위기가 무르익자, 1905년 선교사들은 초교파 선교협의체인 ‘재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1911,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협의회)를 결성했다. 이 기구는 연합사업, 초교파 연합교회 설립 등을 논의했는데, 전자는 진척이 있었지만 후자는 실패했다. 1907년에 설립된 장로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에는 초교파 연합교회라는 이상과 이를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이 동시에 담겨 있다. 즉 교단명이 의미한 바는 한국(대한)에 기독교(예수교)가 하나이고 부득이 교단이 생겼지만, 교단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독교 내의 한 집단(장로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하고자 장로‘교’가 아닌 장로‘회’라는 단어를 택했다. 이후에 여러 교단이 이런 식의 이름을 취했지만, 과연 원래의 의미를 의식했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선교사들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설립될 때, 아시아 교회의 일치를 위해 각각 인도장로교회의 신조와 싱가포르교회의 신조를 소개했다. 이것들이 장로교회의 ‘12신조’와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의 토대가 됐다. 또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재일 한인교회를 위해 협력했고, 장로교회와 중국교회는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인 중국 산동 선교를 위해 협력했다.
3) 교회 에큐메니컬 기구 시대(1918-70년)
1918년 한국교회 초기의 대표적 교파였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를 결성했고, 장로교 선교부들과 감리교 선교부들도 참가했다. 따라서 이 기구는 교회 에큐메니컬 기구이지만, 사실상 교회와 선교 기관의 공동 기구였다. 이 기구는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 1948년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발전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8년 비서구 교회가 대거 참가한 국제선교협의회 예루살렘 대회에서 한국교회의 현안이었던 농촌 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 기구는 1937년에 해산되는 바람에 당시 26개 회원(국가 단위 기구) 중 유일하게 1938년에 인도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탐바람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국제선교협의회는 탐바람 대회 회의록에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생략했고, 그 이후 “한국 내 어떤 기독교 집단도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도록” 아예 회원 명단에서 생략했 다.5 대신 재한 선교사 중 3명이 탐바람대회에 참석했다.6
일제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에큐메니컬 운동을 여러모로 약화시켰다. 첫째, 일제는 1937년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해산시켰다. 둘째, 심지어 ‘대립 에큐메니컬 기구’를 세우려고 “일제는 1938년 5월 8일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해 이를 ‘친일어용단체’로 활용하고자 했다.”7 해방 후에도 이런 행태가 반복됐지만, 대부분 단명했고 실태 파악도 어렵다. 셋째, 일제는 1945년 아예 교단들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했다.(해방 후에는 교파 환원이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크게 활성화되지 못했다. 1940-60년대에는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했고, 적지 않은 교단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교단 분열의 정당화를 위한 빌미로 삼았다. 1970-80년대 이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힘썼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는데, 198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의 보수 진영이 이 분야에 후발주자로 참여하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진보 진영이 이룩한 과실은 공유하려고 하면서도 그들의 노력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1937년에 일제에 의해 해산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해방 후인 1946년에 재건되었고, 이후 1970년에 이르러서야 선교사가 아닌 교회가 선교의 주체라는 새로운 선교관에 입각해 교회를 정회원으로 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로 헌법 개정을 거쳐 재조직됐다. 여기에서 에큐메니컬 기구명에 들어가는 단어를 통해 기구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통상 기구명에 ‘선교’(mission)가 들어가면 선교 기관이 회원이고, ‘기독교’(Christian)가 들어가면 교회와 선교 기관이 모두 회원이며, ‘교회’가 들어가면 교회가 회원이다. 가령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영어명은 ‘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이라서 교회와 선교 기관이 모두 회원이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영어명은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라서 교회만이 회원이다. 한국 기독교 기구명에 이런 단어들이 사용되지만, 정확한 의미가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계열이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나섰고,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곧 미국의 ‘전국복음주의자연맹’(1942,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과 세계 조직인 ‘세계복음주의협의회’(1951,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WEF; 2001, World Evangelical Alliance, WEA), 매킨타이어 중심의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1941, American Christian Council of Churches, ACCC)와 세계 조직인 ‘국제기독교교회협의회’(1948, Inter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Churches, ICCC), ‘로잔세계복음화운동’(1974,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 혹은 Lausanne Movement)이다.
한국교회는 로잔 대회에 참석한 이후 1978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결성했는데, 이후 두 방향으로 전개됐다. 즉 1981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Korea Evangelical Fellowship)가 결성됐고,8 1989년 ‘[로잔세계복음화]한국로잔[위원회]’(Korea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가 정식 출범했다.9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기구는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쳤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견줄 만큼 크게 발전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로잔세계복음화운동은 교회보다 선교 중심이었고, 매킨타이어 중심의 기구는 한국에서 군소 교단의 형성 이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국교회는 거의 모든 일이 교회 중심으로 이뤄지기에 어떤 기구이든 교단 차원의 참여가 없으면 영향력이 크지 않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기구 복수 시대의 도래와 전개
1) 에큐메니컬 기구 단수 시대(1970-8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는 20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에큐메니컬 기구로서 국내외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교회협의 회원은 교단과 연합기관 및 지역협의회로 돼 있는데, 회원 교단 수는 많지 않지만 대표적인 교단들이 망라되었다는 강점을 지닌다. 즉 회원 교단이 장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감리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구세군(구세군대한본영), 자생적인 교회(기독교대한복음교회), 오순절[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통합)], 기독교한국루터회, 한국정교회 등 9개이다. 따라서 교회협은 국내외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교회협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첫째, 교회협 비회원 교단이나 회원 교단 내 보수 진영이 교회협과 별도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독자 기구를 결성하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탄생된 자생적 에큐메니컬 기구가 1989년 결성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The Christian Council of Korea, CCK, 이하 한기총)이다. 둘째, 한국 사회가 발전하고 교회가 급성장함에 따라 세계교회협의회 등 에큐메니컬 기구와 교단들은 교회협이 원조를 받는 ‘수증 기구’에서 ‘자립 기구’로, 나아가 원조를 하는 ‘공여 기구’로 전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교회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은 대중화가 부진해 교회로부터의 지원이 미약했고 독자적인 자립 정책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이런 변화는 재정 압박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부득불 기구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2) 에큐메니컬 기구 복수 시대(1989년-현재)
한기총의 대두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형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한기총의 출범은 에큐메니컬 기구 단수 시대를 마감했다. 둘째, 한기총의 파행적 운영은 자생적 에큐메니컬 기구들의 양산으로 이어지면서 일종의 춘추전국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 에큐메니컬 기구 복수 시대는 양자 구도 시대와 다변화 시대로 양분됐다. 새롭게 등장한 에큐메니컬 기구에 대해서는 각 기구의 홈페이지에 나타난 공식 입장을 참고하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에큐메니컬 기구 양자 구도 시대(1989-2012년)
“1989년 초에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했던 한경직·강원룡·조향록·지원상 등 교계 인사들은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하였다.”10 즉 “새로운 천년과 통일을 대비해서 한국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 범교단의 교회 지도자들이 1989년 2월 9일 대전 유성에” 모였고, 4월 28일 창립 준비위원회 총회를 거쳐 12월 28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36개 교단과 6개 단체에서 대표 121명이 참여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탄생하게 되었다.”11 다시 말해 한기총은 그동안 교회협이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 특히 통일 운동을 독점했던 판도를 바꾸고자 했다.
더구나 1989년 말을 시작으로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후기 사회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당시 통일 운동은 진보 진영의 남북한평화통일 운동과 보수 진영의 북한선교로 대별되는데, 보수 진영은 북한선교 방식의 통일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가령 한기총은 북한을 비롯한 구공산권 국가를 겨냥한 ‘사랑의 쌀’ 운동을 벌였다. 한기총은 점차 교회협과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양대 기구로서 위상이 높아졌고, 정부 등 사회 기관도 그런 현실을 인정했다.
한편 에큐메니컬 기구가 양분된 상황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교회협과 한기총의 통합 움직임이 가시화되기도 했다.”12 2000년 한국기독교연합준비위원회가, 2001년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가 구성되었고, 2006년 부활절연합예배를 공동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자의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기총은 내부 갈등으로 분열한 뒤 군소 에큐메니컬 기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한기총의 이런 변화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한기총은 에큐메니컬 활동은 열심이었지만, 그 토대가 되는 에큐메니컬 신학 개발에 소홀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한 각국의 교회협은 신앙과직제위원회, 생활과사업위원회,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 등 3개 기구가 균형을 이루는데, 특히 신학이 기구의 방향을 정하고 활동을 평가하는 자정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한기총은 에큐메니컬 운동 경험이 일천할뿐더러 건전한 한국형 자생적 에큐메니컬 신학을 개발하지 못해 기구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복원력을 충분히 지니지 못했다.
둘째, 한기총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연관성이 없어서 상호 유대와 견제 및 교정 기능의 혜택을 맛볼 수 없었다. 한기총은 2017년 이후 대표회장이 부재한 가운데 현재 변호사가 임시대표회장이 되는 위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기총은 2020년 1월 30일 제31회 총회 ‘총회선언문’에서 “한기총의 분열과 갈등을 종식하고 본연의 연합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회원들의 역량을 모으는 일에 적극 앞장서겠습니다.”라고 결의했다.13 한기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2) 에큐메니컬 기구 다변화 시대(2012년-현재)
한기총이 분열된 이후 유사한 자생적 에큐메니컬 기구가 속속 등장했다. 그 결과 에큐메니컬 기구의 지형도를 그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큰 맥만 짚어보자면, 한기총(1989)에 이어서 한국교회연합(2012, 이하 한교연; The Communion of Churches in Korea, CCIK)이 설립됐고, 한국교회총연합(2017, 이하 한교총; The United Christian Churches of Korea, UCCK)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한교총이 이전의 한기총의 위상을 대신하는 상황이다.
한기총은 2011년 분쟁 이후 소수 잔류파(잔류 한기총)와 다수 이탈파인 한교연으로 양분됐다. 한교연은 2011년 12월 30일 ‘한기총 정상화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참여 교단과 단체는 각각 21개와 10개였다. 이듬해인 2012년 3월 29일 ‘(가칭) 한국교회연합’ 설립총회를 개최하고 김요셉 목사(예장 대신측)를 초대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14
오늘날 에큐메니컬 기구 중 최대 기구로 부상한 한교총의 설립은 2001년으로 소급된다. 2001년 12월 17일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교를 운영하는 24개 교단이 참여해 ‘교단장협의회’를 창립하고, 2015년 6월 30일 ‘교단장회의’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5년 11월 24일에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틀인 교단 중심의 연합기관 설립”을 결의하고, 2년 뒤인 2017년 1월 9일 ‘한국교회총연합회’가 출범했다. 2017년 8월 16일 이 기구가 한교연과 통합에 합의해 ‘한국기독교연합’ 출범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같은 해 12월 5일 ‘한국교회총연합’ 제1회 총회를 개최해 오늘에 이르렀다.15 요약하자면, 교단장 모임이 중심이 되고 한기총에서 이탈한 한교연이 합해 한교총이 됐다. 그 과정에서 교단장 모임의 명칭은 교단장협의회, 교단장회의 순으로 변경됐고, 관련 에큐메니컬 기구의 명칭은 한국교회총연합회, 한국기독교연합, 한국교회총연합 순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교회협과 한기총의 통합을 시도하던 교단장협의회가 한교총으로 발전했기에, 한교총이 사실상 교단장협의회가 결성된 때부터 존재했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2001년부터 ‘에큐메니컬 기구 3자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6
결국 자생적 에큐메니컬 기구의 설립과 발전도 한국교회의 교회 정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교단이 관여함으로써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한교총이 한국교회 연합 운동의 새 틀을 만들겠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한기총이나 한교총도 교회협과 마찬가지로 교회 중심적 에큐메니컬 기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교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에큐메니컬 기구 다변화 시대에서 교회협과 한교총 중심의 에큐메니컬 기구 양자 구도 시대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균형이 당분간 유지되리라 전망되지만, 정치적 요인을 포함한 외부 요인에 의해 에큐메니컬 기구가 생기기도 하니 에큐메니컬 기구의 미래는 개방적 자세로 지켜보기로 하자.
결론: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겨울인가, 봄인가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를 돌아볼 때, 적어도 에큐메니컬 기구의 조직이라는 면에서는 이미 충분한 경험을 했고 문제도 많이 발생했다. 한국교회의 경우, 일치와 연합의 축이 되어야 할 에큐메니컬 기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함에 따라 소위 ‘에큐메니컬 운동의 겨울’이 도래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에큐메니컬 기구의 난립으로 인해 ‘에큐메니컬 운동의 한겨울’까지 도래한 셈이다. 심지어 정부를 포함한 한국 사회가 과연 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로 누구를 상대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고민할 정도이다.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봄은 올 수 없을까? 이제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에큐메니컬 기구와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 기구라는 조직의 한계를 넘어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제와 역할을 논할 수 있는 열린 대화 공간을 제공하는 에큐메니컬 마당이 필요하다. 가령 ‘세계기독교포럼’(Global Christian Forum)을 들 수 있다. 이 모임은 “지구촌 교회의 지속적인 일치를 위해, 기존의 구조와 독립적으로, [열린] 장소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17 지금 한국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기구보다 대화이다.
주(註)
1 노만 P. 탄너, 김영식·최용감 옮김, 『간추린 보편 공의회사』(가톨릭출판사, 2010), 39. 칼케돈 공의회 전에도 ‘에큐메니컬’이라는 단어가 공의회와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 고정된 것은 이때부터다.
2 V. S. Azariah, “The Problem of Co-operation between Foreign and Native Workers,” in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Vol. Ⅸ, The History and Records of the Conference: Together with Addresses Delivered in the Evening Meetings (Edinburgh: Oliphant, Anderson&Ferrier, 1910), 315;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Vol. Ⅱ, The Church in the Mission Field, Report of Commission Ⅱ (Edinburgh: Oliphant, Anderson&Ferrier, 1910), 359.
3 이하 몇 단락은 필자의 졸고, “한국기독교와 연합 활동,” 김흥수·서정민 편, 『한국기독교사 탐구』(대한기독교서회, 2011), 153-158을 토대로 했다. 기구명은 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것을 따른다.
4 장로교회의 단일 선교협의회 명칭은 계속 변했다. ‘장로교선교부연합공의회’(1889), ‘장로교회 치리기구 준행 선교부공의회’(1893), ‘장로교선교부공의회’(1898), ‘대한예수교장로회공의회’(1901, 합동공의회; 이 공의회부터 현지 지도자가 참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해방 이전 기독교연합공의회 회록]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1918-1937』(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9), 9. 이 책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라고 표기했지만, 당시는 대한제국 시대이기에 ‘대한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맞다.
5 William Richey Hogg, Ecumenical Foundations: A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and Its Nineteenth Century Background (New York: Harper&Brothers Publishers, 1952), 333.
6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Addresses and Other Records: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Meeting at Tambaram, Madras, December 12th to 29th, 1938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189. 참석한 선교사는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방혜법, H. E. Blair), 호주장로교 선교사 커(거이득, E. A. Kerr), 미국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영명실수학교(永明實修學校) 교장 윌리엄스(우이암, F. E. C. Williams) 등 3명이다.
7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자료집 제1권』, 11.
8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홈페이지 참조.(www.koreaef.org → KEF소개)
9 한국로잔위원회 홈페이지 참조.(www.lausannekorea.org → about → 역사)
10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Ⅲ: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173-174.
11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홈페이지 참조.(www.koreaef.org → KEF소개)
12 『한국기독교의 역사 Ⅲ』, 175.
13 한국기독교총엽합회 홈페이지 참조.(www.cck.or.kr)
14 한국교회연합 홈페이지 참조.(www.ccik.kr → 한국교회연합 소개 → 연혁)
15 한국교회총연합 홈페이지 참조.(www.ucck.org)
16 이 점을 지적해준 변창배 목사에게 감사드린다.
17 세계기독교포럼 홈페이지 참조.(https://globalchristianforum.org/what-we-do)
안교성|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아시아 신학 산책』, 『한국교회와 최근의 신학적 도전』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