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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2년 9월호)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노숙인 문제 해결을 위한 인식 변화
  

본문

 

노숙인, 그들은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노숙인’이라고 하면 ‘알코올중독자, 범죄자’ 같은 단어와 함께 ‘지저분하다, 게으르다, 일하기 싫어한다, 무책임하다’ 등의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노숙인들은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그림자처럼 여겨지거나,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철저하게 소외되어 외로운 섬에서 사회와 분리되어 살아가거나, 때론 잉여 인간으로 취급받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노숙인은 동정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노숙인’(露宿人)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슬을 맞으며 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을 뜻한다. 영어로는 ‘homeless’,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단지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라면 ‘houseless’라고 해야 할 텐데, 왜 ‘homeless’라고 표현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노숙인에 대한 개념이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노숙인의 문제는 단순히 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라는 현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숙의 원인을 한 개인의 일탈이나 능력 부족으로 보기도 어렵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어쩔 수 없이 파생되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노숙인을 단순히 도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 비록 가난하지만 그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그 사회의 당당한 주체로 세워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1998년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위기 상황을 겪으며 갑자기 거리에 많은 노숙인이 발생하자-당시에는 이들을 ‘실직 노숙자’라고 불렀다-그들을 돕기 위해 결성된 단체인 전국실직노숙자종교시민단체협의회(전실노협)에서는 “노숙자도 사람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 이전에는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구호이다.
무한경쟁이 일어나는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경쟁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당연히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가난은 가족관계를 위협하고, 사회적 지지망을 서서히 상실하게 한다. 실패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가난은 곧 노숙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2011년 코레일이 서울역을 노숙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노숙인에 대한 강제퇴거 조치를 시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겨레21」에서는 서울역 노숙인에 대한 특집 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기사에서는 고용이 성장의 함수가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동 능력보다는 소비 능력에 의해 그 쓸모가 가늠되어 어떤 기술을 갖고 있느냐보다 소득이 얼마인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판단된다는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하며, 서울역 노숙인의 강제퇴거 조치는 소비 능력이 시민의 규범이 된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 빈곤층이 위반하는 규범은 고용의 규범이 아니라 소비 능력의 규범이고,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서울역 노숙인은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에 시민도 아니고 서울역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그 배경에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소비 능력이 없기에 범죄자이고, 소비 능력이 있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존재이기에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격리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몰아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이세영 기자는 “지금 서울역 노숙인들의 강제 퇴거를 규탄하고 저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추방돼야 할 ‘쓰레기들’의 목록에는, 노숙인뿐 아니라 소비사회의 규준과 척도에 미달하는 불행한 개인 누구라도 기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노숙인은 가혹한 경쟁에서 상처받고 뒤처질 위험에 처한 이 시대 모든 사회적 약자를 지시하는 대명사와 다름없다. 우리는 모두 노숙인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우리와 같은 사회 구조에서는 누구나 노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숙인 지원정책의 변천 과정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98년 IMF 경제체제로 인해 실직자들이 거리로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부터다. 그 이전에는 노숙인에 대한 관심은커녕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조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에 따르면, 부랑인은 단속의 대상이었고 수용의 대상이었지 인간적인 대우를 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었다.
IMF 이전 노숙인에 대해 일시적으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1987년 3월 22일, 부랑인 시설인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 원생 1명이 구타로 숨지면서 원생 35명이 집단으로 탈출하며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숙인 보호 업무가 내무부가 아닌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로 이관되면서 단속 위주의 내무부 훈령에서 벗어나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 규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숙인에 대한 시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단속의 대상, 격리수용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에 의하면, 부랑인이라 함은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탁한 사람 또는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 보호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등 건전한 사회 질서의 유지를 곤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 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 알코올 중독자, 걸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불구 폐지자 등”이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노숙인은 우리 사회에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청소의 대상, 혐오의 대상이었다.
다행히 1998년 IMF 경제체제 이후 노숙인을 단속의 대상이 아닌 보호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격리수용이 아닌 일자리 제공, 잠자리 제공, 각종 심리·재활 프로그램 제공 등 노숙인에게 어느 정도 인간적인 대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실직으로 인해 거리로 몰려나온 노숙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국에 쉼터를 만들어 잠자리를 제공하고, 공공근로를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직업재활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노숙인 지원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에서도 노숙인을 돕기 위한 활동이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단체로 실업극복시민운동협의회, 전국실직노숙자종교시민단체협의회 등이 있다. 또한 학계에서는 노숙인의 실태, 규모, 노숙 생활의 원인, 자활대책, 탈 노숙 정책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노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위 ‘노숙 예비군’이라고 불리는 쪽방 등 주거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 대책도 수립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노숙인을 지원하는 법적 근거가 미약했고, 수용 중심의 부랑인과 자활 중심의 노숙인으로 나누어 보호 대책을 수립하는 등 여전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노숙인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정책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2011년에 제정되어 이듬해부터 시행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노숙인복지법’)이다. 이 법은 노숙인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함과 동시에 노숙인의 실체를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우선 부랑인과 노숙인으로 분리되어 있던 지원체계를 하나로 통합했고, 단속 위주의 부랑인에 대한 개념이 노숙인으로 통합되면서 낙인과 배제, 단속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분리되었던 노숙인이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주거, 의료, 자활 등 탈 노숙을 위한 각종 지원 대책이 마련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이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일하기 싫어하고, 지저분하다는 편견과 함께 알코올중독자이고 잠재적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현실이다.
노숙인복지법은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노숙인 문제 해결을 임시적 차원으로 여기지 않고 구체적 정책 대상으로 인정하여 국가가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관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노숙인 보호를 국가 정책으로 명시하고, 노숙인의 권리를 명문화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논란이 되었던 노숙인에 대한 명칭은 아직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명칭의 문제는 노숙인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노숙인의 개념에 따라 노숙인의 규모와 이들에 대한 정책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숙인복지법에 따르면, 노숙인이란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 노숙인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동안 노숙인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세 번째로 언급된 ‘주거로서 적절성이 낮은 곳’이란 국토부가 정의하는 ‘비주거시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복지부가 파악하고 있는 노숙인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쪽방을 포함하여 1만 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국토교통부의 2017년 주거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비주거시설에 사는 가구가 37만 명, 그중에 자신이 쪽방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가구는 7만 4,000가구였다. 또한 ‘유엔 적정주거 특별보고관 권고안 이행을 위한 국회 토론회’(2019. 4. 29)에서는 비적정주거(inadequate housing) 가구를 380만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런데 복지부는 주거지로서 적절하지 않은 다양한 장소에 거주하는 인구 중에서도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을 노숙인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복지부가 이들의 명칭을 ‘노숙인’으로 고집하는 것은 노숙인 정책을 현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은 치워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여성 노숙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노숙인 지원정책은 남성노숙인에 집중되어 있었고 여성 노숙인 정책은 남성 노숙인 지원정책의 일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여성 노숙인은 남성 노숙인보다 더 약자이며, 노숙에 이르는 요인에서도 여성 노숙인들에게는 가정폭력이라는 다른 요인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성 노숙인 지원정책은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다행히 최근 들어 여성 노숙인 보호를 명문화했지만, 여전히 지방자치단체는 소수라는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책 대상에서 밀려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숙의 발생 원인과 노숙에 이르는 길

그렇다면 누가 노숙인이 되는가? 어떤 요인에 의해 노숙 생활자로 전락하는가? 홈리스1를 연구한 많은 논문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하는 요인은 바로 빈곤과 주택 문제이다. 빈곤은 저임금 일자리에서 발생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이런 구조적인 모순과 더불어 개인의 부가적인 요인들이 결합할 때 노숙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보자. ‘홈리스를 위한 전국연맹’(National Coalition for the Homeless, NCH)의 1998년 보고서에 따르면, 노숙에 이르는 요소를 (1) 부적절한 의료보호, (2) 가정폭력, (3) 정신질환, (4) 약물의존의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리치(Leach) 교수는 홈리스에 이르는 원인을 내생적 원인과 외생적 원인으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노숙의 원인을 개인의 정신적·신체적 능력 손상이나 장애로, 후자는 실직이나 빈곤과 같은 외부의 상황적 요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신과 와이츠만(Shinn & Weitzman)은 홈리스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을 홈리스로 밀어 넣는 요소들을 다차원으로 구분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1) 개인적 차원, (2) 사회적 조직의 차원, (3) 사회경제적 상황의 차원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1) 개인적 차원의 요소들은 개인의 특성, 경험, 행위들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개인의 특성은 연령, 소득 수준, 인종,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지위, 정신적·신체적 질환으로 인한 장애, 교육 수준 등이다. 또한 개인적 경험 중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퇴거로 인한 주거의 상실, 임신 등의 이유로 인한 주거 수요의 증가, 실업 혹은 복지급여의 상실에 따른 물질적 자원의 감소, 약물 남용과 가족해체, 가정폭력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사회적 조직의 차원은 사회적 관계망을 의미하는데, 홈리스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망 역할을 하는 요소를 뜻한다. 즉 사회적 관계망의 구성원들은 주거를 유지하거나 주거 공간을 획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자원의 부족에 대처할 수 있는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홈리스들은 사회적 유대가 결핍되어 있고, 특히 친척과의 밀접한 유대가 결여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회적 조직의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3) 사회경제적 상황의 차원에서는 저렴한 주택의 부족, 특히 저소득 가구와 저렴한 주택 비율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가장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학자들은 노숙인이 되는 경로가 단순히 개인적 요인에 기인하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요인에 의해 노숙으로 밀려난다고 분석한다. 다음 표는 이런 사회구조적 요인이 개인적 요인과 결합할 때 어떤 상황에서 노숙으로 전락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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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흐름도에서 설명하는 노숙에 이르는 경로를 증명이라도 하듯, 미국의 사회학자 스티븐 맥나미와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교수 로버트 밀러 주니어는 『능력주의는 허구다』3라는 책에서 사회의 경쟁을 릴레이 경주로 표현했는데, 이 릴레이 경주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결승점에서 혹은 결승점 근처에서 출발하는 반면, 가난한 부모를 둔 사람들은 한참 뒤에서 출발하므로 당연히 경쟁이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이들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개의 큰 기둥, 즉 ‘능력적 요인’과 ‘비능력적 요인’을 비교했는데, 계층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 차별적으로 분배되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부의 세습과 무형의 상속 자산이랄 수 있는 특권과 특혜의 대물림, 편견에 의한 차별 등과 같은 비능력적 요인들이 진학과 취업, 승진, 소득, 부의 격차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노숙으로 전락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보다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노숙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

그렇다면 이런 노숙인들에게 교회는 어떤 관심을 보였을까? 성서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성서 전체에 나타난다. 특히 율법서에서는 가난의 문제를 다루면서 땅을 소유하지 못한 채 땅의 소출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경제 상황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부자들이 탈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부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의 곁에 살면, 너희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레 25:35-37)

가난한 사람들이 밭과 과수원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는 식물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안식년을 제정(레 25:1-7)한 것은 농부로서 실패한 사람들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땅을 담보로 잡았던 부자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희년을 제정(레 25:8-55)한 것은 다시 가난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관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한 경제적 약자들, 즉 레위인, 이민자, 고아와 과부들은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 생존권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규정이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가 전한 복음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고, 어디에서 예수와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를 찾을 것인가? 예수의 오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할 수 있는데, 예수의 오심은 이사야 35장과 61장의 버려지고 병든 사람을 온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마 11:5, 10:8, 눅 4:18 이하) 것이다. 환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몰아내고, 포로 된 자들을 풀어주고, 정의에 굶주리고 눈먼 자에게 빛을 주고, 억압받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이런 것들은 제자들의 선교 관점이기도 했다. 즉, 이사야서 61장에 나타난 인간의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전인적, 전체적,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당면한 영적, 육적, 사회적 삶의 총체적 구원을 뜻한다.

한국교회와 노숙인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노숙인을 향해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야 한다. 예수께서 나의 형제라고 선포하신 노숙인을 향해 값싼 동정을 베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또 다른 영혼임을 인정하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주체로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노숙인은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능 때문에 노숙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피해자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교회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환대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어야 한다.
자크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4라는 책에서 진정한 환대는 조건을 묻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로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5라는 책에서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히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그를 다시 한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오늘 우리 교회는 노숙인을 향해 손을 내밀어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그들의 아픔에 철저하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 7장 12-13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상여가 나오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동네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다. 주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가엾게’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ξομαι)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로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마음속에서 움직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과부의 고통에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픈 마음으로 공감하셨다.
교회는 노숙인의 절망과 아픔에 예수처럼 공감해야 한다. 더불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웃의 모든 아픔에도 ‘스플랑크니조마이’ 하며 함께 울어주어야 하는 것이 오늘 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까지 공감하지 못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우는 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역사의 한복판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만나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참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우는 자 곧 노숙인과 함께 울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 정의의 승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고통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하신 하나님의 공감이 오늘 교회가 공명해야 하는 모습이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긍휼은 비를 맞는 이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교회가 노숙인의 절망과 아픔을 외면한다면 그 자체가 불의요,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가는 길은 노숙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의 아픔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이다.

주(註)
1 통상 노숙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나,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다. 현재 홈리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명칭은 노숙인복지법에 명시된 ‘노숙인 등’이다. ‘노숙인 등’은 개념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리, 노숙인 시설, 쪽방에 사는 일부 홈리스만을 정책지원 대상으로 하고, 여타 주거 취약계층, 즉 고시원, 여관, 여인숙, 만화방, PC방, 찜질방 등 비주거시설에서 사는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노숙인 관련 단체와 학계,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노숙인에 대한 명칭을 ‘홈리스’로 변경하자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2 김수현·서종균, 『노숙자 재활 프로그램 개발 연구』(서울시정개발연구원, 1999), 8; 김수현, 『서울시 중장기 노숙자 대책 연구』(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3), 60에서 재인용.
3 스티븐 맥나미·로버트 밀러 주니어, 김현정 옮김, 『능력주의는 허구다』(사이, 2015)
4 자크 데리다, 남수인 옮김, 『환대에 대하여』(동문선, 2004)
5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 지성사, 2015)


원용철|목원대학교에서 신학을, 한남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였다. 저서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벧엘의집 이야기』, 『정의, 평화, 교회』(공저)가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에 소속된 사회선교센터 벧엘의집 목사로 일하고 있으며, 대전광역시 쪽방상담소, 노숙인 자활시설 울안공동체, 희망진료센터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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