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세계를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본다면 로마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정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정교회’라는 명칭은 ‘정통 교회’라는 뜻이다. 자부심과 긍지가 이들의 명칭 속에 담겨 있다.
‘정교’(正敎, Orthodoxy)는 ‘정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받은 기독교가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한 초기 7대 에큐메니컬 공의회(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이르기까지)의 결정 사항과 예배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원래대로 지켜오는 것을 의미한다. 지리적 관점에서는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주로 동쪽에 위치하기에 ‘동방정교회’라고도 불린다. 문화와 언어적 관점에서는 ‘희랍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두 같은 것이다.
비잔틴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330-1453)의 정교회를 가리킨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정교회,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정교회도 존재하며, 이들은 모두 동방정교회의 하위 개념이다.
흔히 동방정교회와 동방교회를 혼동하여 사용하는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다른 것이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은 네스토리안들, 단성론(單性論)으로 인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죄 받은 고대 이집트의 콥틱 교회 등은 ‘동방교회’ 혹은 ‘동방의 교회’(The Church of East)라고 불린다. 정교회가 볼 때, 그들은 정통이 아닌 것이다.
러시아정교회의 시작과 이후의 독립
9세기 중엽 비잔틴제국은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여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키릴과 메소디우스 형제, 그리고 키릴의 제자들의 헌신으로 인해 불가리아와 우크라이나 일대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이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988년에 이르러서는 키예프 공국(公國)의 왕 블라지미르가 정교를 국가의 종교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사적인 영역에서 평안과 안전을 기원하는 기복신앙과 같은 민간신앙 수준을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380년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 터졌다.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가 정교회 수도사 세르게이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연합군을 만들어 돈강 유역 쿨리코보(Куликово) 벌판에서 몽고 군대를 최초로 격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승리는 러시아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00년 동안 억압과 착취를 해온 몽고 군대를 물리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드미트리 대공(大公)은 몽고의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러시아인들의 옹호자로 부상하였고, 모스크바 공국은 러시아 통합의 중심세력으로 공인되었다. 동시에 러시아정교회는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방주로서 봉건영주 체제를 극복하고 강력한 하나의 국가통합을 이루게 하는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15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정교회는 비잔틴정교회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1453년 정교회 세계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하여 멸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참에 러시아의 이반 3세(1462-1505)와 이반 4세(1533-84)는 자신의 강력한 군사적 정치력을 이용해서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요하네스 팔레올로구스(Johannes Palaeologus)의 조카를 두 번째 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대공’(大公)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황제’(,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자신을 비잔틴 왕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이제 러시아의 차르는 동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정교회를 보호하고, 정교회를 반대하는 자를 응징하는 ‘제2의 콘스탄틴’이 되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기독교를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수용하지 않는 이단자들에 대하여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는데, 이반 3세와 이반 4세가 그러한 일을 동일하게 행하였다. 덕분에 16세기 러시아제국의 정교회는 어느 시대보다도 강력해졌다.
점점 몰락하는 콘스탄티노플과는 대조적으로 점점 상승하는 모스크바는 마침내 158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로부터 독립을 허락받아 모스크바 총대주교좌(Moscow Patriarchate)를 세웠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하여,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러시아정교회가 비잔틴정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한 교회로 선포되었다.(‘제1의 로마’는 이탈리아의 로마를 가리키며, ‘제2의 로마’는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종교적으로 러시아는 팽창할 채비를 모두 갖추었다.
러시아제국의 팽창과 동행한 러시아정교회
16세기 모스크바 절대왕조 수립 이전의 러시아는 아르한겔스크(동), 키예프(서), 모스크바(남), 노브고르드(북) 등 네 개의 주요 도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영토의 10분의 1 정도의 크기였다. 16세기에 강력한 중앙통치체제를 확립한 이반 3세와 4세 등 러시아 황제들은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가 되어 주변의 이교도 민족들을 정복하여 기독교화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제국은 남쪽으로는 이슬람 신앙을 지닌 타타르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이 사는 카잔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고,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후 약 400여 년에 걸쳐 러시아제국의 영토 확장과 병합의 역사는 부단히 이루어졌으며, 이와 병행하여 러시아정교회의 선교 영역도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1870-80년대에는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거의 완성되었다.
새로운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이교도 민족들과의 병합으로 인해 러시아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 러시아제국의 주된 과제는 국민통합이 되었다. 1815년에 약 4,500만 명이던 제국의 인구는 1851년에 약 6,7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897년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실시된 최초의 공식적인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의 총인구는 1억 2,266만 6,500명이었고, 이 중 약 6,800만 명이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러시아 전체 인구의 55.7%에 이르는 숫자이다.
19세기 말 100여 개 이상의 민족들을 가지게 된 러시아제국의 국가적 통합과 발전을 위하여 당시 러시아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재위 기간(1825-55)에 ‘관제국민주의’(the Russian Official Nationality)라는 국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니콜라이 1세 치하 러시아제국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대표했으며, 제국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정부 정책의 지도적 원칙으로 남아 있었다.
이 정책의 3대 원칙은 러시아정교회(正敎信仰), 전제주의(專制主義), 러시아 민족주의적 국민성(國民性)이었다. 즉, 모든 러시아 국민들로 하여금 러시아정교회를 믿게 함으로 하나의 러시아 문화와 국민성을 형성하며 황제에게 충성을 약속하게 함으로 러시아제국의 단합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 관제국민주의 정책의 목적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국가는 정책적으로 정교를 강조하였고, 니콜라이 정부는 서구적인 교육 정책을 억압하고, 대신 지방의 신학교와 신학생 수를 크게 증대시켰다.
특별히 1880년부터 1905년까지 신성종무원 총감을 지낸 포베도노스쩨프에 의하여 러시아제국의 변방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소수민족들의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는 곧 러시아화(Russianization)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는 정교회 영세(침례)를 받지 않는 이민족들에게 여러 가지 불이익과 압력을 가하였다. 대신 영세(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혜택을 주며 러시아인과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러시아정교회의 특성
러시아제국의 역사 속에서 러시아정교회는 중세 이래 러시아의 정치, 문화, 대외정책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세기 동안 정교회는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정체성 형성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예술과 문학, 음악 등의 문예활동을 촉진하였다. 영토가 팽창하는 등 국가적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정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구체화하는 상징이었으며, 반대로 국력이 쇠퇴하여 외침의 시련을 당할 때에는 정치 지도자 및 국민들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힘을 제공해 주었다. 이렇게 러시아정교회는 러시아 민족과 함께 천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러시아정교회의 특성을 형성하였는데, 그 특성을 비잔틴정교회와 비교하면서 기술하자면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비잔틴정교회는 수도원적이지만, 러시아정교회는 대중적이다. 둘째, 비잔틴정교회는 신비주의적이지만, 러시아정교회는 신비주의와 사회적 이상(理想)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셋째, 비잔틴정교회는 개인적이지만, 러시아정교회는 민족적이다. 넷째, 비잔틴정교회는 교부들의 전통을 중요시하지만, 러시아정교회는 러시아적 전통을 중요시한다. 비잔틴정교회가 이러한 특색을 지니게 된 배경은 동로마제국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은 기본적으로 사변적이고 개인적이고 귀족적인 성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러시아정교회가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5년간 거주한 경험을 토대로 언급하자면, 몇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기후 환경의 영향이다. 러시아 영토는 대부분 추운 지역이다. 집단으로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생존할 수도 없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의식이 발전하기 어렵다.
둘째, 그들이 대항하며 투쟁해야 했던 적(適)들의 영향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대항하여 싸워야 했던 주요 대적자들은 14세기 샤머니즘으로 무장한 몽고 군대, 16-17세기 이슬람 신앙으로 무장한 타타르 군대, 19세기 가톨릭 신앙으로 무장한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20세기 개신교 신앙으로 무장한 독일 군대였다. 이러한 외적들의 침략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러시아정교회는 종교적으로 적들과의 차별화를 강조하면서 러시아 민족주의를 구현하는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매년 5월 9일이 되면 국가공휴일로 정한 ‘승리의 날’ 기념행사를 모스크바의 크렘린 붉은광장에서 대대적으로 거행한다. ‘승리의 날’은 1812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 싸워 이긴 날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나치즘의 항복을 받아낸 날이기에 러시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날 행사의 종교적인 구심점에는 항상 정교회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진정한 러시아인은 모두 정교회 신자’라는 집단 무의식이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정교회 신자는 러시아의 국가적 이익을 위하여 무비판적으로 충성 봉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소련 시절의 러시아정교회
러시아 혁명(1917)으로 인하여 러시아제국이 멸망하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이 수립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러시아정교회는 소련의 지배(1917-91)하에서 큰 고난을 겪었다. 러시아정교회는 그 시절을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70년에 비유한다. 무신론을 기반으로 한 공산당의 지배는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에게 큰 고난이며 시험이었다.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선포되었으며, 수많은 교회당과 수도원이 폐쇄되었으며, 수천 명의 성직자들이 시베리아 수용소로 끌려갔다. 살아 남은 고위 성직자 대부분은 공산주의 시절 국가안보위원회(KGB)와 협력한 인사들로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알렉세이 2세 총대주교(Patriarch AlekseyⅡ, 1990-2008)이다. 지금은 알렉세이 2세 밑에서 외무부 장관직을 수행했던 키릴(Kirill)이 2009년부터 총대주교직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다.
약 천 년 동안 정교회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러시아 역사는 70년 동안 공산주의를 시행하며 정교회를 탄압하면서도 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러시아 언어 자체가 정교회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버리지 않는 한 정교회를 완전히 제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어로 ‘일요일’은 ‘바스크레세니예’라고 하는데, 이 말은 ‘부활’이라는 뜻이다. 또한 ‘고맙습니다’는 러시아어로 ‘쓰빠씨바’인데, 이 말은 ‘하나님(보흐)이 구원해주셨다(스빠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게 러시아 언어의 많은 부분이 신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소련을 지배한 공산정권은 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개신교 신앙으로 무장한 독일과 전쟁을 하면서 위기를 느낀 스탈린은 러시아 국민을 단합하기 위하여 정교회에게 다시 자유를 주면서 정교회를 중심으로 국민단합을 강조한 적이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종교를 반대한다고 선포하였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아기가 탄생했을 때 몰래 유아세례식을 거행하고, 사람이 죽었을 때 정교회 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만큼 러시아정교회가 국민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정교회의 현황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15개 국가로 각각 분리되었다. 가장 큰 부분인 러시아는 러시아정교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러시아 헌법에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러시아 정부는 국가의 석유와 광물을 수출할 때 수익금의 일부를 자동적으로 러시아정교회 계좌에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그 돈으로 러시아정교회는 교회 건물을 수리하고 신학교를 운영하고 선교비로 사용한다. 이렇듯 러시아정교회가 재정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다 보니 국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시아정교회는 동방정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방정교회 신자 전체는 약 2억 9,3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IBMR, 2021년 1월호) 그중 러시아정교회 신자가 약 1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 교단을 기준으로 했을 때, 로마가톨릭 다음으로 큰 교단이 러시아정교회이다. 조사 기관이나 연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2010년 기준으로 러시아 국민의 약 75%가 러시아정교회 신자이며,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인구 중 65%가 러시아정교회 신자이다.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청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www.patriarchia.ru/en), 2021년 기준으로 러시아정교회의 주교구(Dioceses)는 323개이며, 교회당은 3만 8,649개이며, 수도원은 41개이다. 성직자(clergy)의 수는 4만 514명이며, 주교(bishop)는 382명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러시아정교회 안에도 정교회의 이름으로 독립된 교단이 10여 개 있다. 이들은 교리적인 이유 때문에 분리된 경우도 있고, 소련 공산당 시절에 서방 세계에서 피신 생활을 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교단도 있고, 유럽이나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교단도 있다. 그 숫자는 다 합쳐도 10%를 넘지 못한다.
남정우|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파송선교사로 모스크바에서 5년간 사역하였으며, 귀국 후 러시아정교회의 선교역사를 연구하여 장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동방정교회 이야기』, 『동방정교회 선교역사 연구』, 『이야기로 푼 선교학』 등이 있다. 장신대 선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대구 하늘담은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