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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한국전쟁에 대한 국내외 반응-평화운동인가 군비확장인가]
특집 (2022년 6월호)

 

  한국전쟁 발발과 독일교회의 재무장 논쟁
  

본문

 

전쟁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비극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러시아군이 단기간 내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군과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과 서방의 무기지원으로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동유럽 안에서의 헤게모니 갈등을 넘어 전 세계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해석이 곳곳에서 나온다. 독일 통일 이후 유럽연합(European Union)을 중심으로 한 유럽 대륙의 경제 통합과 다자 안보협력체로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대정책이 러시아의 반(反)나토 정책과 충돌하면서 우크라이나 사태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견해이다.
서유럽 국가들, 특히 독일을 비롯한 프랑스,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이 갖는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은 긴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곧 나토 회원국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다. 당장 독일의 슐츠(Olaf Scholz)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밝히며, 독일 연방군의 강화를 위해 특별방위기금으로 1,000억 유로를 증액하고, 향후 매년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 수준으로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계 언론들은 이를 ‘전범국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했지만, 정확히는 ‘독일의 군비확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동·서독의 재무장은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동독은 1949년 정부수립 직후부터 소련의 후원 아래 인민경찰(Volkspolizei)이라는 병영화된 군사조직을 갖추었고, 서독은 1955년 5월 5일 나토에 가입함으로써 전범국의 굴레를 벗고, 주권국가로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 서독의 재무장에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서독의 반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 소식은 동북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의 시대를 갈구했고, 승전국들이 주축이 된 국제연합(UN) 체제 안에서 모든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한국전쟁의 발발은 국제연합 안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전후 동·서로 분단된 독일 역시 한국전쟁 발발 소식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전범국 독일의 분단과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갓 해방된 한국의 분단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승전국들의 전략적 이익과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분단된 국가라는 공통점에서 그 충격과 공포는 가중되었다. 서독의 주요 일간지들은 한국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음을 기정사실화했다. 또한 소련의 스탈린 정부가 미국의 대외전략을 시험하는 ‘테스트 전쟁’(ProbefallKrieg)으로 한국전쟁을 활용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즉, 소련이 동독을 내세워 서독을 침공했을 때 미국의 대응을 살피기 위해 한국전쟁을 허용했다는 해석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첫 몇 주 동안 동독과 서독에서는 새로운 전쟁에 대비한 생필품 사재기가 극성을 부렸고, 베를린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곡에 “한국, 한국, 전쟁이 다가오네”(Korea, Korea, der Krieg kommt immer näher)라는 가사를 넣어 노래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독의 안보 정책

한국전쟁으로 인한 위기감은 서독 언론뿐 아니라 정치인들의 발언으로 인해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 서독의 총리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소련이 한국에서처럼 분단된 독일에서도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언급했다. 물론 이러한 아데나워의 발언은 실제 소련이 유럽에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명확한 근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한국전쟁 발발로 소련의 위협이 고조되는 틈을 활용해 승전국들로부터 서독의 방위를 확실하게 보장받기를 원했다. 더 나아가 서방 국가들이 소련의 위협에 대응해 유럽군 창설을 논의하고 서독의 참여를 언급했을 때, 아데나워는 이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당시 서독은 자국의 군대를 보유할 수 없었고, 국가의 방어는 〈대서양 헌장〉(Atlantik-Charta)에 의거해 점령국의 군대가 책임졌다. 또한 점령국들은 자국의 고등판무관들을 파견하여 서독의 외교·정치 등 다방면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서독이 유럽군에 참여함으로써 재무장했을 때, 완전한 주권 회복, 동독 지역의 병영화된 인민경찰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보장, 서유럽으로의 통합과 연방주의 강화 등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아데나워는 9월 초 뉴욕에서 열린 미국·영국·프랑스 외무장관 회의에 자신의 서독 방위 전략과 재무장 정책을 담은 ‘서독 안보에 관한 건의서’(Memoranden zur Sicherheitspolitik Westdeutschlands)를 비밀리에 전달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서방 국가들이 서독에 대한 강력한 방어의지를 천명하고 점령국 병력을 대폭 증강할 것을 요구하며, 유럽군이 창설될 경우 서독의 군사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와 함께 서독에 무장한 연방 보안경찰대의 창설을 요구했다. 또한 서유럽 방위를 위한 서독의 군사적 참여가 서독의 완전한 주권 회복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에 미·영·프 외무장관들은 독일과의 전쟁 상태를 끝내기로 결정하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서독을 방어할 것을 천명했다.
아데나워의 안보보고서와 뉴욕 외무장관 회의의 결과가 언론을 통해 서독에 알려지자 여론은 재무장 찬반을 놓고 팽팽하게 맞섰다. 한쪽은 재무장에 찬성하여 안보를 보장받고 주권을 회복하길 원했고, 다른 쪽은 서독의 재무장이 동독과의 대결을 강화시켜 분단을 고착화하고 전쟁의 위험을 더 고조시킬 것이라고 염려했다.

1950년 독일개신교회 내부의 재무장 논쟁

논란은 서독 내각으로부터 시작했다. 서독의 재무장과 관련한 아데나워 총리의 독단적인 결정 방식에 반대하여 내무장관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은 사의를 표명했다. 나치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자 당시 독일개신교회(EKD)의 회장을 맡고 있던 하이네만의 사의는 서독의 재무장과 관련한 독일개신교회 내부 논쟁에 불을 붙였다.
서독의 재무장에 관한 찬반 여론은 독일개신교회 내부에서도 팽팽하게 맞섰다. 고조되는 위기감 안에서 서독의 안보보장과 주권국가로의 전환을 원하는 다수의 그룹과, 한국전쟁이 촉발한 공포가 ‘안보’라는 코드에 따른 재무장과 전쟁 준비로 이어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서독이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전자의 입장은 독일 루터교 주류의 분위기였고, 후자의 입장은 과거 나치에 맞서 저항을 주도했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를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 회원들이 주도했다.
니묄러 목사는 서독의 재무장과 서유럽으로의 통합정책이 동·서독 상호 간의 안보위협을 고조시키고 분단을 더욱 고착시킬 것으로 보았다. 그는 비단 재무장뿐 아니라 1949년 서독의 단독정부 수립 자체가 독일 민족 앞에 정치적인 범죄라고 보았다. 그에게 독일개신교회는 서독 지역의 기독교인만을 대표하는 교회가 아닌, 동독 지역의 기독교인 역시 대표하는 교회였다. 역사적으로 개신교는 동독 지역에서 시작했고, 당시에도 서독 지역에 비해 훨씬 큰 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
고백교회의 회원이자 1950년대 반핵운동을 이끌었던 헬무트 골비처(Helmut Gollwitzer)는 기독교인의 본질을 강조하며,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갈등에 휩쓸리지 말고 ‘화해의 사람’들로 남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서구 체제의 폐해와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리와 자유의 상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와 함께 아무런 대안 없는 평화주의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독일이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논리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하고, 서독의 안보는 무장한 군대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사회 문제들과 전후 난민 문제를 해결할 때 자연스레 튼튼해진다고 주장했다.2
한국전쟁 발발 몇 주 후에 개최된 독일개신교회의 ‘교회의 날’ 행사(1950년 8월 23-27일, Essen)에서도 ‘한국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보와 재무장’이라는 주제는 뜨거운 화두였다. 행사의 준비위원장이었던 라이놀트 폰 타덴-트리글라프(Reinold von Thadden-Trieglaff)는 “개신교회는 결코 세속적 이념과 동일시되어서도 안 되며, 동서 갈등 안에서 미국의 자본주의와 동일시되지도 않는다. 개신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3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교회의 감독이자 독일개신교회를 대표하는 또 다른 지도자 오토 디벨리우스(Otto Dibelius) 목사는 서독의 재무장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BBC 라디오 연설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독일의 안보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독일은 강대국들의 계획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유럽에서의 새로운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4
독일개신교회 회원으로 정당에서 활동하는 정치인들은 주로 자신들이 소속된 정당의 정치적 방향을 옹호했다. 신학자이자 체데우(CDU) 정당의 정치인 오이겐 게어스텐마이어(Eugen Gerstenmaier)는 통일된 유럽의 틀 안에서 서방을 방어하기 위한 독일연방공화국의 군사적 기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5
서독 재무장에 관한 독일개신교회의 공식 입장은 ‘교회의 날’ 행사에 모인 EKD위원회 성명을 통해 공포되었다. 성명은 먼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으며,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연대하고 계심을 선포했다. 또한 두려움은 불신앙이며, 전쟁의 위험을 더 가까이 가져올 뿐이므로 극동의 전쟁 소식에 흔들리지 말 것을 독일개신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촉구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을 통해 볼 수 있듯 한 나라에 강대국들이 임의로 경계를 긋는 행위만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독일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전쟁과 폭력, 분열을 종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정치세력들 간의 평화 약속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지켜질 수 있는지에 달려 있으며, 각 나라는 질서와 평화를 훼손하려는 자들에 맞서 적절한 경찰 보호가 필요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독일개신교회는 서독의 재무장과 관련하여 서방의 입장도, 동구권의 입장도 지지할 수 없으며, 절망적인 군비 경쟁을 끝내고 정치적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강대국들에 계속해서 호소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해치지 않을 자유가 주어져야 함을 강조했다.6
고백교회의 주요 인사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독일개신교회 내부의 서독 재무장 논쟁은 10월이 되자, 고백교회 전통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좌파 성향의 독일개신교회의 형제위원회(Bruderrat der EKD)가 가세하며 더욱 뜨거워졌다. 10월 4일 마르틴 니묄러를 필두로 형제위원회의 대표들은 연방수상 아데나워에게 보내는 두 통의 공개서한과 성명을 공포했다. 이 공개서한에서 니묄러 목사는 독일개신교회의 교인들은 어떤 재무장 정책에도 실질적으로 반대할 것이며, 이는 연방공화국의 기본법에 의해서 보장되는 권리라고 강조했다. 서독의 재무장은 전쟁의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 정책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연방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며, 국민투표 실시가 어렵다면 현 내각에 대한 신임 여부를 새롭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서한이 공개되자 개신교 안팎에서 지지와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제 독일개신교회 내부의 재무장 논쟁은 더 이상 개신교회의 입장을 묻는 차원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서독의 언론들이 나서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보도했고, 독일개신교회와 주교회들의 여러 위원회와 기관들이 앞다투어 나서 형제위원회의 공개서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논쟁은 개신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와 정책여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개서한의 수신자였던 아데나워 총리는 니묄러의 비판이 잘못된 주장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가 ‘반역’을 행했다고 비난하며, 니묄러를 ‘분열주의자’, ‘국가의 적’ 등으로 표현했다. 이와 동시에 독일개신교회 내부의 CDU 성향의 그룹들은 아데나워의 정책을 지지하고, 니묄러와 형제위원회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독일개신교회 안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친정부 성향의 언론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독일개신교회 안에서 니묄러와 형제위원회에 대한 비판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니묄러의 정치적 투쟁에 대한 평가 역시 양분되었다. 베스트팔렌(Westfalen) 주교회는 니묄러의 정치투쟁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하노버 주교회 총회(Synode der Ev.-luth. Landeskirche Hannover)와 바이에른 주교회 협의회(Bayrische Landeskirchenamt)는 니묄러의 정치투쟁에 대해 비난했다. 10월 24일 바이에른 주교회의 감독 한스 마이저(Hans Meiser)와 주요 대표자들은 니묄러의 주장이 주교회나 EKD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의 일방적인 입장만을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복음의 이름으로 그 어떤 정치적인 결정도 강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노버 주교회 총회는 니묄러를 EKD 외교부장 직위에서 해임할 것을 결의했다.

결론: 한국교회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물꼬를 튼 서독의 재무장은 1955년 5월 5일 서독이 주권국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완성되었다. 만약 ‘교회가 서독의 재무장을 막았는가? 막지 못했는가?’라는 이분법적 대답만을 구한다면, 우리는 아직 역사를 통해 더 많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독의 재무장 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개신교회는 철저하게 정책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을 찾았고, 멈춤 없이 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데올로기적 분단이라는 아픔 속에서 한국에서는 민족적 비극인 동족상잔이 벌어져 7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북이 그 상처를 안고,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에 비해 독일은 동족상잔의 고비를 넘기며 통일 32주년을 맞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교회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 어떤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변화 속에서도 교회의 언어로, 교회의 말을 전해야 한다. 72년 전 독일교회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한국교회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주(註)
1 Edgar Wolfrum, Die gegluckte Demokratie: Geschichte der Bundesrepubik Deutschland von ihren Anfangen bis zur Gegenwart (Stuttgart: Klett-Cotta, 2006), 131; Joachim Beckmann(Ed.), Kirchliches Jahrbuch für die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vol.76(1949)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1950), 240.
2 H. Gollwitzer, “Der Christ zwischen Ost und West,” Evangelische Theologie, vol.10 no.1-6 (1950): 154 이하.
3 “Kritik an Ausfuhrungen Kardinal Frings,” Frankfurter Rundschau, July 26, 1950.
4 Lutz Hoeth, Die Wiederbewaffnung Deutschlands in den Jahren 1945-1958 und die Haltung der Evangelischen Kirche (Norderstedt: Books on Demand, 2008), 87-88.
5 Joachim Beckmann(Ed.), Kirchliches Jahrbuch für die Evangelische vol.77(1950)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1951), 16.
6 Beckmann, Kirchliches Jahrbuch(1950), 166.


강혁|튀빙엔대학교 개신교학부에서 교회사 및 교회법을 전공하였다.(Dr. Theol.) 효성영광교회 부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Was kann die Kirche für den Frieden tun?(교회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 있다.

 
 
 

2022년 7월호(통권 7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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