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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한국전쟁에 대한 국내외 반응-평화운동인가 군비확장인가]
특집 (2022년 6월호)

 

  한국전쟁과 일본 교회의 평화운동
  

본문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일본에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후 반전(反戰) 및 반군(反軍) 의식을 갖게 된 일본 국민은, 전쟁 포기와 비무장을 규정한 조항(제9조)이 포함된 신헌법이 상징하는 평화주의를 지지하며 다양한 평화운동을 벌였다. 한국전쟁은 그러한 평화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이 일본의 사회, 특히 기독교의 평화운동에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해 당시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정기간행물인 「キリスト新聞」(그리스도신문)과 일본기독교단의 기관지 「基督教新報」(기독교신보), 월간지 「基督教文化」(기독교문화, 「福音と世界」의 전신) 등을 주로 참고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태평양전쟁 패전 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평화운동을 개관한 뒤,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평화운동에 대해서 고찰하도록 한다.

일본의 패전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일본 기독교계의 평화운동

패전 후 일본에서는 평화주의에 입각한 국가 재건이 추진되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군의 점령 아래 있었는데, 대일 점령 기구였던 GHQ(연합국최고사령부)가 일본의 민주화 및 비군사화를 추진해 나가던 1947년 5월에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1946년 8월 24일에 중의원에서 가결되었는데, 당시 일본 기독교계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는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그리스도신문」 1946년 8월 17일 자에 “평화 국가와 그리스도 정신”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면서, 신헌법 채택을 통해 전쟁을 영원히 포기한 것은 지혜롭고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일본은 “무장을 통한 문화 발전은 인류를 질식시킬 뿐, 결코 인류를 해방시키거나 동란이나 내란의 비극으로부터 구제하지 않음을 자각했다.”라고 하면서, 그러한 “자각은 그리스도적”이며 “그리스도적 평화 국가 건설은 세계 역사를 영구한 혁명으로 이끌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 기독교계의 모습을 살펴보자면, 우선 1947년 3월에 기독교평화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 아래,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 평화를 선양하고 실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신헌법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1 또한 1949년에는 전쟁 중이던 1944년에 해산당한 일본우화회(日本友和會, JFOR)를 재건하여 그 활동을 재개하였다. 일본우화회는 국제적 비폭력 기독교계 평화단체인 ‘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IFOR)의 일본 지부이다.
일본 최대의 개신교 교단인 일본기독교단은 1948년 10월에 개최된 제5회 총회에서 평화촉진에 관한 건의안을 채택하고, 상의위원회(常議委員会) 아래에 평화위원회를 설립하였다. 평화위원회는 “일체의 군비전력을 버리고, 국제문제 해결을 위해서 절대로 전쟁 수단에 의지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 일본이 이후 어떠한 국제적 분쟁에서도 중립을 굳게 지키고 평화 국가로서 일관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그 활동을 시작하였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누어진 냉전시대는 1947년경부터 본격화되는데, 그러한 가운데 일본에서는 1949년경부터 평화운동 및 연합국과의 강화 체결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져 갔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평화운동과 관련하여, 기독교평화협회의 주최로 1949년 8월 14일 ‘그리스도신도평화촉진대회’가 개최되어, 평화기도회·평화행진·평화강연회가 이루어졌다. 일본기독교단도 협찬 단체로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선언문이 채택되었는데, 그 선언문에서는 핵무기 시대에 생존의 기로에 선 인류가 택해야 할 길은 “절대적인 평화 결의로써 일어서는 것 외에는” 없으며, 패전 당시 다짐했던 평화에 대한 맹세를 지켜나가고 전쟁 포기를 관철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1950년에 들어선 뒤, 일본기독교협의회(NCCJ)는 3월 총회에서 일본의 평화헌법은 영구히 견지되어야 한다는 점과 전쟁을 유발하는 군비를 철폐할 것을 세계의 모든 교회와 국민들 앞에 호소한 〈평화 확립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5월 28일에는 전해에 열렸던 평화촉진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한편, 강화 체결에 관한 논의의 쟁점은 모든 연합국과 전면적인 강화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전면 강화는 포기하고 소련 등을 제외한 반쪽 강화(단독 강화)를 맺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냉전이 격화되어 가던 1949년 11월, 일본의 여러 신문은 미국이 대일 강화조약의 초안 작성을 거의 완료하였고, 미국은 강화조약과는 별개로 점령 종료 후 일본에 군사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조약을 체결할 의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강화 체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같은 해 12월 야당이었던 사회당은 단독 강화 및 군사협정 체결은 냉전을 격화시키는 것이라며 전면적인 강화·중립 견지·군사기지 제공 반대 등을 담은 ‘강화 3원칙’을 결정했다.
또한 일본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평화문제간담회’는 1950년 1월 강화 문제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며 전면적 강화를 지지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단독 강화는 미소 양 진영 간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것으로서 평화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되며, 또한 강화 후의 안전보장은 중립 견지와 국제연합 가입을 통해 담보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전면 강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중국과 무역 관계를 구축하는 것인데, 단독 강화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도 전면 강화를 지지하는 이유로 제시되었다. 나아가 이 성명서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협정 체결이나 군사기지 제공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일본과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성명서가 발표된 후, 「기독교문화」 1950년 4월호에는 “강화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라는 제목 아래 서술식 설문조사의 결과를 실었다. 설문조사는 평화문제간담회의 성명서에 대한 의견 및 감상을 일본 기독교계 지도자 및 지식인들에게 물은 것으로, 응답 요청을 받은 102명 가운데 3월 17일까지 답변을 보내온 26명의 응답 내용이 소개되었다. 그 응답을 보면, 전면 강화가 어려울 경우에는 단독 강화를 체결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소수 있었지만, 성명서에 찬성의 뜻을 표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 기독교계의 평화운동

1) 한국전쟁과 일본 사회의 재무장 논의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다음 날부터 수일간 일본의 각종 신문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기사를 1면에 계속 실어나갔다. 패전 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시작된 이웃나라의 전쟁 소식은 ‘또다시 전란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과 불안감을 일본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전쟁은 일본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미군이 군수물자 등을 대량으로 일본에서 조달함으로써 일본 경제는 되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진행된 공산주의자 숙청 작업, 소위 ‘레드 퍼지’(Red Purge)가 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평화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다음 달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4개 사단 가운데 3개 사단이 한반도에 파견되었다. 그때 주둔군이 빠져나간 구멍을 메워 치안유지 활동을 벌인다는 명목으로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반(半)군사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로부터 지령을 받은 일본 정부는 국회의 심의도 거치지 않고 경찰예비대 령(令)을 1950년 8월에 공포 및 시행하였다. 경찰예비대는 이후 강화조약이 발효된 뒤인 1952년 10월에 보안대로 개편되었고, 1954년에는 자위대로 다시금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찰예비대의 창설은 재군비를 향한 첫걸음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실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처음 떠올라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재군비에 대한 연구자인 시바야마 후토시(柴山太)는 그의 저서 『일본 재군비를 향한 길』에서 워싱턴의 미 군부는 1946년의 시점에 이미 일본의 재군비를 구상하였고, 경찰력을 치안부대처럼 만든 후 육군으로 강화해 나가는 형태로 이를 실현하려 했음을 밝힌 바 있다. 시바야마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미국의 행정부와 군부는 일본의 재군비를 강화조약 체결 후 서서히 진행시켜 나갈 것을 합의하였는데,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러한 구상이 앞당겨지는 결과를 낳았다.2
한국전쟁 발발 후, 8월경부터 일본의 각종 신문은 미국이 일본과 서독의 재군비화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7일 자 「朝日新聞」(아사히신문)은 미국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대일 강화에 대한 미국의 방침은 “일본의 재군비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같은 신문이 9월 후반에 전국적으로 실시한 강화 문제 및 재군비 등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재군비에 관하여 찬성 53.8%, 반대 27.6%로 찬성이 반대를 크게 웃돌았다. 이웃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 보도를 접한 다수의 일본 국민은 재군비를 현실적인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보게 된 것이다.
이후 맥아더 사령관이 1951년 1월 신년 메시지에서 일본의 재무장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뒤, 일본에서는 강화 체결 후의 재무장 여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1월에는 사회당이 앞서 언급한 ‘강화 3원칙’에 ‘재군비 반대’를 더한 ‘평화 4원칙’을 결의하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강화조약 체결이 앞당겨져,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발효일은 1952년 4월 28일) 이는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을 제외한 연합국과 체결된 단독 강화였다. 또한 같은 날 미․일 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후 쟁점은 재군비 여부에 집중되었고, 헌법 개정 반대가 일본에서의 평화운동 가운데 큰 축 중 하나가 되었다.

2) 한국전쟁과 일본 기독교의 평화운동
한국전쟁 발발 뒤, 일본 기독교의 평화운동은 어떤 양상을 보였을까? 여기서는 이에 대해 강화(講和) 문제와 재군비 문제에 초점을 맞춰 개관해 보고자 한다.
일본기독교단은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에 개최된 제6회 총회에서 평화위원회가 작성한 〈평화에 관한 결의〉(이하 ‘결의문’)를 채택하였다. 사실 평화위원회는 1950년 4월에 〈평화에 관한 선언〉(이하 ‘선언문’)을 작성하고 이를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은 상의위원회에서 어떠한 반대에 부딪혀 발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평화위원회는 〈평화에 관한 결의〉를 건의안으로서 교단 총회에 제출하였다.
선언문과 결의문은 강화 문제 및 재군비 문제에 관하여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선 강화 문제에 관하여 선언문은 “전면 강화를 통해 독립국가로서의 평화적 확립을 노력한다.”라고 된 반면, 결의문은 “하루라도 빨리 강화조약이 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하여 단독 강화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재군비 문제에 대해서 선언문은 “헌법의 전쟁 포기 입장을 견지하여, 무방비·비무장에 대한 결의를 관철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결의문에서는 평화헌법의 견지는 주장하지만 ‘무방비·비무장’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자위’를 위한 무장을 용인할 여지가 있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적 변화는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그러한 측면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4월의 시점에서 선언문 발표가 무위에 그쳤던 것을 고려하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당시 일본기독교단의 체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화위원회의 위원이었던 오무라 이사무(大村勇) 목사는 「기독교문화」의 주최로 1951년 1월에 개최된 “재무장 문제와 기독교인”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평화위원회가 선언문과 결의문을 작성한 과정을 언급하며 논의가 갈리는 문제에 대해 교단 차원의 입장을 공표하는 것은 의미 없는 최대공약수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이 되므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뒤, 교단의 기관지 「기독교신보」에 1951년 여름부터 재군비 문제에 관한 찬반 의견이 간간이 게재되는 등 교단은 해당 문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재군비나 헌법 옹호를 포함한 평화 문제에 대한 교단 차원의 명확한 입장 표명은 1962년 10월의 〈헌법 옹호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할 때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NCCJ와 관련하여서는, 강화 문제를 놓고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덜레스(John Foster Dulles) 특사에게 국제문제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정리한 〈일본 기독교인 유지의 강화문제에 대한 의견서〉(1951년 2월 6일)가 제출되었다. 이 의견서에는 강화 방식에 관하여 전면 강화가 바람직하지만, 점령 상태를 오래 끌지 않기 위해서는 단독 강화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또한 안전보장에 관해서는, “우리 기독교인은 전쟁 포기를 명기한 헌법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굳게 지키고, “평화 국가 건설에 힘쓰고 싶다는 희망에 대해 일치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는 한편, “자위를 위해서는 군국주의가 재연되는 것을 막는 조건 아래, 경찰예비대 … 의 증강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내용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전년도 3월에 채택된 〈평화 확립에 관한 결의〉로부터 후퇴해 있다고 볼 수 있다.3
이상의 두 가지 사례에서는 전면 강화에 전적으로 매여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기독교 안에서도 전면 강화를 계속 주장해 나간 단체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일본우화회’나 ‘그리스도자 평화회’ 등이었다. 일본우화회는 강화조약 체결 후 개최된 대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여, 강화조약의 비준과 재군비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리스도자 평화회는 전술한 「기독교문화」 주최 좌담회에서 오무라 이사무와 스즈키 마사히사(鈴木正久)가 했던 발언을 계기로, 이 잡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도쿄신학대학교의 교원 이노우에 요시오(井上良雄) 및 오무라가 중심이 되어 1951년 4월에 결성된 단체이다. 전면 강화·재군비 반대·평화헌법 옹호를 주장한 평화회는 도쿄에 거점을 둔 단체였는데, 이후 도쿄의 평화회에 호응하여 일본 각지에 지역별 그리스도자 평화회가 설립되었다.
이 중 재군비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기독교문화」에는 1950년 12월호부터 재군비 문제에 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호와 1951년 1·2월호에는 기독교계 지도자 및 지식인을 대상으로 진행된 재무장 관련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고, 1951년 3월호에는 전술한 좌담회인 “재무장 문제와 기독교인”이 실렸다. 그 밖에도 독일교회 안에서 일어난 재군비 문제에 관한 논의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언급한 설문조사나 좌담회에서 표명된 의견 중 대다수는 재군비에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반대 의견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절대적 평화주의를 추구하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 필요함을 부정하진 않지만 현시점에서 일본이 재무장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다. 후자의 입장을 드러낸 인물로는 1967년에 일본기독교단이 〈제2차 대전하 일본 기독교의 책임에 관한 고백〉을 발표할 당시 교단 의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스즈키 마사히사 목사 등이 있었다.
당시의 일본 기독교 단체 가운데, 그리스도자 평화회는 “어쩔 수 없는 전쟁도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후자에 가까웠으며, 일본우화회는 전자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평화주의의 입장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이는 기관으로는 「그리스도신문」이 있었다. 이 신문은 1951년에 들어서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재군비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51년 1월 27일 사설 “재군비와 크리스천”에서는 “주 예수의 말씀을 성서에 근거해 연구했을 때 크리스천이 가야 할 가장 순진하면서도 정당한 길은 퀘이커 교도가 몸소 보여주는 것같이, 전쟁을 부정하고 어떠한 무기도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타국으로부터 침략과 박해를 당하는 경우에는 그 침략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신문에서도 재군비 문제를 둘러싼 독일교회의 동향이 종종 거론되었는데, 재군비에 반대한 입장에 섰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언동 등 재군비 반대의 입장이 주로 소개되었다.

나가며

패전 후 평화국가로 재출발한 일본에서는 다양한 평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그러한 평화운동에 대한 도전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그때까지 구상하였던 일본의 재군비 행보를 앞당겼고, 후에 자위대가 되는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이웃나라의 전쟁에서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낀 일본 국민 사이에서도 재군비를 지지하는 사람의 수가 반대하는 사람의 수를 상회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의 평화운동도 본래의 주장에서 후퇴하는 경향도 엿보였지만, 그리스도자 평화회나 일본우화회, 「그리스도신문」과 같이 계속해서 재군비에 반대한 단체도 있었다. 이러한 조직은 현재에도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자 평화회는 이후 1964년에 각 지역의 그리스도자 평화회를 규합하여 전국 조직인 일본그리스도자평화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신문」은 1953년 8월 15일 자 신문부터 제호 아래에 신문의 표어 “평화헌법 수호, 재군비 절대 반대”를 내세우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주(註)
1 森下徹, “戦後宗教者平和運動の出発”, 「立命館大学人文科学研究所紀要」 85(2004. 12): 138.
2 柴山太, 『日本再軍備への道』(ミネルヴァ書房, 2010) 참고.
3 森下徹, “戦後宗教者平和運動の出発”, 141-142 참고.


이상훈|연세대학교에서 선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관서학원대학 교원으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 “5·16과 군사정권에 대한 일본 기독교계의 반응: ‘한국 문제 그리스도자 긴급회의’ 결성까지(1961-1974)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2022년 7월호(통권 7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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