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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2년 3월호)

 

  易·中·仁과 한국 신학의 미래-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과 인학(仁學)으로
  

본문

 

2022년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첫 주일 예배부터 전도서를 읽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시지 않고 더욱 심해지는 상황과 대선을 앞두고 지금까지의 상식과 이해를 온통 흔드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한국 정치 마당, 과거 전두환이나 최순실 때의 일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전도서를 읽고 싶은 생각이 났다. 셋째 장을 넘기도 전에 그 안에 인류 문명의 모든 지혜가 들어 있다는 감동을 받았다. 전도서 1장과 2장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고백이 반복해서 나온다. 전도서 저자는 자신이 믿어왔던 ‘하나님’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생의 공과(功課)와 화복을 나누니 더는 믿을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3장에서는 그가 모든 허무를 딛고 다시 신뢰하고 믿음이 생겼음을 토로하니, 그것은 바로 ‘때’(time)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 죽을 때, 울 때, 웃을 때, 흩어버릴 때, 모아들일 때, 말하지 않을 때, 말할 때, 전쟁을 치를 때, 평화를 누릴 때 등등. 이렇게 사람이 애쓴다고 무엇 하나 보탤 수 없는 때가 있으므로, 자신은 이제 그때가 있음(being)을 깨달았기(knowing) 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라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전도서 저자의 고백 내용과 여기 쓰인 단어들(비록 몇 차례의 번역이긴 하지만)을 보면서 이곳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긴요치 않고, ‘때’(歷)라는 것이 훌륭히 그것을 대치할 수 있음을 본다. 물론 저자는 그러한 ‘때’에 대한 고백 이후에 그가 앞에서 실망과 허무로 포기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때에 대한 믿음과 슬쩍 다시 연결한다. 인간은 때에 대한 감각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서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고 고백한다. 또한 이어서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는 속성을 들어서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다시 하나님 대신 ‘때’라는 단어를 넣어도 전혀 무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 한국인들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을 몰랐을 때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 대신 때(曆/易)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그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한국인들의 의식과 언어에는 유사한 나름의 ‘인격적인 神(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뚜렷이 있었다고 종종 주장되곤 했지만, 그 강도와 보편적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의 유입으로 인한 역할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전도서 3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때’라는 언어로 무리 없이 치환되는 선례도 있고, 오늘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유입된 지 200여 년이 지난 후 그 인격적 하나님 신앙의 적실성이 한없이 떨어진 상황이 되었다면, 여기서 다시 과거 한국인의 때(歷)와 역(易)에 대한 신앙과 지혜를 가져와 봄직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 신학과 교회 현실에서 그동안 완고하게 굳어버린 기독교 언어가 더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은 더 유의미할 것이다.

易과 존재,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온 존재와 의미의 궁극’(the Ultimate)을 매우 친밀하게 의인화해서 ‘하늘 부모님’(天父)으로 껴안게 된 기독인들이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그대로 절대화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만족을 구하는 일이다. 필자는 한국 기독교나 서구 기독교와 그 문명이 빠져 있는 자아 절대주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세속화와 영속화 등이 거기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두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삶에서 영근 ‘역’(易, the Change)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오래전부터 나름의 易 사상을 전개해왔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의 삶과 정신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1
易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줄어들고 늘어나는 등 ‘변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변화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으며, 그 과정을 자세히 살피고 성찰하여 일종의 기호나 도표로, 또는 언어적 풀이로 밝혀내고자 한 것이 易의 괘도(掛圖)이거나 책(易書)일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易(변화) 원리에 관한 탐구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거론하는 고전인 『주역』(周易)은 기원전 11세기경 건국된 중국 주나라에서 연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그 이전의 연산(連山)이나 귀장(歸藏) 역이 있었다고 하고, 특히 19세기 조선의 유학자 김일부(金一夫, 1826-98) 선생이 그리고 해설한 『정역』(正易)에 대한 관심도 요즈음 점점 커지고 있다. 또한 11세기 중국 북송의 주돈이(周敦, 1017-73) 등은 易(변화)의 궁극자에 대한 의식을 ‘태극’(太極) 또는 ‘무극’(無極)이라는 이름으로 밝혔고, 그 언어가 다시 ‘리’(理) 또는 ‘천리’(天理), 혹은 ‘기’(氣) 등으로 보다 보편성을 가지는 언어로 개념화되어서 이후 우리가 많이 들은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역학적 뿌리 역할을 했다.
공자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주역』에 대한 통찰인 〈계사전〉(繫辭傳)에는 “낳고 살리는(生生) 것을 일컬어 易이라 한다.”(生生之謂易)와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한다.”(天地之大德曰生)라는 두 유명한 언술이 있다. 이 말이 잘 밝히는 대로, 易은 천지의 큰 덕으로서 낳고 또 낳으면서 살리는 일을 하고, 만물을 탄생시키고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근원적 생명의 힘으로 파악된다. 필자는 이것이 기독교 언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밝히는 의미와 같은 것이며, 둘 사이의 연결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하나님’이라는 서구의 유신론적 언어가 매우 문제시된 상황에서 ‘생생’(生生)의 힘을 기초로 하는 易의 이름은 큰 의미가 있다.
여기서 특히 한국적 역학에서 이 ‘生’(살림) 의식이 더욱 강조되는 것을 말해야겠다. 예를 들어 조선 성리학의 퇴계 선생은 중국의 주희를 따르면서도 천지의 큰 덕인 리(理)의 속성에서 특별히 그 주체적이고 인격적인 살아 있음과 창발성, 역동성을 강조하며 능동적 생명력인 ‘활리’(活理)라는 개념을 말했고, 태극 또는 리를 인간 마음 가운데의 ‘천명’(天命)으로 강조하면서 정태적인 우주적 존재 원리보다는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발현하고 다가오는 ‘살아있는’, ‘창조자’로 만나는 것을 보여주었다.2 퇴계에 이어서 특히 영조 때의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그 理를 ‘생리’(生理)라는 언어로 크게 강조하면서 이것이 세상의 만물을 낳고 살리는 천지의 큰 덕인 易이며, 우리 몸과 마음에서 사랑하고(精), 공감하고(情), 깨닫고(知), 세상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일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생명근원’(生身命根)이라고 보았다.3
또한 이에 더해서 주목할 점은 한국 상고사의 오래된 정신적 맥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생’(生)이라는 말이나 ‘살아 있는/살리는 마음’을 의미하는 ‘성’(性)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뜨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 이맥(李陌, 1455-1528)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제3 신시본기(神市本紀)에는 “개천지생(開天知生), 개토이생(開土理生), 개인숭생(開人崇生)”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을 열고, 땅을 열고, 인간 삶을 여는 일과 더불어 그 속에서 ‘생명을 알고’(知生), ‘낳고 살리는 일을 다스릴 줄 알고’(理生), ‘그 생명을 귀히 받드는 일’(崇生)에 관해서 밝히는 말이다.4
이렇게 易이나 理, 性 등의 언어는, 고목처럼 굳고 타버린 재처럼 생명력을 잃은 ‘하나님’이라는 언어 대신에 새롭게 우리 의식에서의 궁극이나 초월(the Transzendenz)의 차원을 지시하는 언어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우리’ 의식이나 ‘인간’ 의식의 차원에 한정된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지금 인간 문명이 야기한 기후·생태 위기 등으로 지구 삶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무생명·사물·죽은 것으로 폄하되어온 존재들(物)도 모두 함께 포괄할 가능성의 언어(天地生物之理/心)로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군의 서구 사상가들은 인간 의식과 생각으로 동식물이나 이 세상과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 상관을 넘어서 ‘세상 자체’(world-in-itself), ‘우리 없는 세상’(world-without-us), 곧 “사고로부터 존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일이 가능한지를 파고든다. 세상의 물자체(物自體)를 인정한 칸트까지도 포함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과 물(物)은 인간과 그 의식과 경험으로 ‘파악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진정 넘어서는 일에 관해서 묻는 것이다. 그만큼 세계 존재와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5
오늘에서야 서양에서 제기된 이 물음은, 일찍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자들이 파고들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즉 인간의 性과 인간 이외의 만물의 性이 과연 같은가 다른가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치열하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를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한국 신학이 앞으로 주목해야 할 과제는 바로 오늘 여러 측면에서 선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한국 성리학과의 대화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필자가 그러한 대화로 시도하는 ‘神學에서 信學으로’의 추구는 단순히 소박한 인간론적 물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세계와 존재, 또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묻는 급진적인 존재론적 질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6

中과 사유(心思), 그리고 믿음(信)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易은 원래 주술적 의미의 점술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그러한 주술과 점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자 했고, 그 이전의 중국 송유학(宋儒學) 자체가 『주역』과 더불어 『중용』(中庸)에 기반했으므로 좁은 의미의 점술보다는 더 보편적인 인간 사유와 판단에 관한 탐구로 나아갔다. 『논어』 〈요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요 임금이 말했다. ‘아! 순아, 하늘의 역수(天之曆數)가 너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允執其中)’” 그리고 그보다 앞서 『서경』(書經)에는 유교 도통의 시작이라고 하는,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전달한 “인심은 위태롭고(人心惟危), 도심은 미미하니(道心惟微), 오로지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서(惟精惟一),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라.(允執闕中)”라는 말이 나온다. 이후 유교의 道는 하늘의 역수와 깊은 관련 속에서 인간 내면에 생명적 씨앗(性/理)으로 놓여 있는 ‘중심’(中)을 잡으려는 일이 되었고, 한국 사상은 무엇보다도 그 일을 인극(人極)과 인간론으로 전개하여 근본으로 삼았다.7 『중용』 1장에서 말하듯,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성장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는 것을 깊이 믿고 체현하고자 한 것이다.
中이 있음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中 이외의 다양한 경우와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plurality)은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 조건은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고’(心思), ‘사유하며’(窮理), ‘판단하는’(明辯) 일을 요청한다. 즉 인간의 삶이란 심사숙고하는 지적 사유와 함께 中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인식과 실천의 일을 지속하는 일을 통해서 열매가 얻어지고, 생명이 피어나며, 아름다운 공동체와 문화가 자라는 것이다. 中은 이를 강조한 지혜라고 하겠다.
앞에서 易이라는 언어와 기독교의 살아계신 하나님이 잘 호환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中을 얻는 일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영의 목소리’(성령)를 듣는 일과 잘 상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영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일종의 주술이나 도술로 전락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듣고 그 인격적인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온갖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고,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에 더해 점술과 주술을 찾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 조선 성리학이 세상의 다양성에 대한 깊은 인정(敬)과 함께 중심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유의 힘으로 전개되었음을 떠올린다. 함석헌 선생도 유사한 의미에서 앞으로의 종교는 “이지”(理智)의 종교가 될 것이며, “노력”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했다.8 오늘 한국 기독교가 성령의 역사 등을 강조하며 신앙(信)과 사유(理/思)를 대척점에 놓고, 사유하지 않고 묻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믿음이란 한번에 이루어지는 어떤 주술적 작업처럼 여기는 것이 그들의 잘못된 주술적 신앙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는 유교의 가르침을 악마시했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성찰을 눈먼 교사의 잘못된 인식으로 무시하면서 자신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하늘의 궁극자와 소통한다고 자랑해왔다. 그러한 신앙의 최고 주체성 선포자들이 오늘날은 궁색하게도 그 유교의 가르침도 일상에서 경원시할 것을 강조하는 주술과 점술에 종속되어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아이러니라고 여겨진다.
퇴계 선생이 일생 성리학적 탐구의 결정체로 저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여섯 번째 그림인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는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놓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덕의 이치(性理)가 발현되는가를 밝히는 말이 있다. 거기서 특히 ‘믿음’(信)에 대한 서술에 집중해보면, 信은 “참됨의 이치”(實之理)를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 믿음은 “성실한 마음”(誠實之心)”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이를 앞에서 살펴본 中과 연결해보면, 믿음(信)이란 中의 참을 택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열매(實)로 드러날 때까지 성실(誠實)로써 지속하는 실천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믿음(信)은 그저 단번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참과 진실을 구하는 긴장이며 지속하는 노력이고, 구체적인 열매를 창조할 때까지 계속하는 수행적 힘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 그러한 믿음(信)은 『중용』이 中에 더해서 또 다른 핵심 덕으로 가르치는 ‘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용』은 이를 “성(誠)은 하늘의 길이며, 그것을 따르는 일은 인간의 길이다.”(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라고 표현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가르침을 유교로부터 배울 수 있고, 오늘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불성무물’(不誠無物, 성실과 진실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의 통찰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인(仁)과 세계, 그리고 교회 공동체

사실 무수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무한히 다양한 의견들과 관점 속에서 中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 일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일(誠/信)은 더욱 힘들고, 거기서 생각하고 사유하는 일(心思/窮理)은 그렇게 간이(簡易)한 일이 아님을 누구나 말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더 직접적이면서도 간이하게 우리 인간됨과 연결되는 ‘인’(仁)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로 ‘인간성’(仁)을 지니고 있음을 뜻하고, 이것은 곧 두 사람(人+二)이 서로 인간답게 기대면서 사랑하고 배려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仁이라는 의식이 전개, 발전된 과정은 길다.
仁은 공자의 『논어』만 해도 무려 105차례나 등장하고, 맹자의 유명한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의 성선설 논의를 넘어서 주희(朱熹, 1130-1200)는 仁에 관한 〈인설〉(仁說)을 준비했다. 주희는 천지 易이 만물을 낳고 기르는 큰 덕이 원형리정(元亨利貞) 네 가지인 것과 그 운행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인 것을 상기시키며, 그것이 인간에게 인의예지 네 덕목의 본성적 씨앗(性)으로 놓였다고 밝힌다. 그중에서 仁이란 가장 처음의 사랑하고 측은히 여기는 감정(情)으로 표현되며, 그것이 모든 다른 덕과 감정을 포괄하는 기초와 원형이 된다고 강조한다.9 퇴계 선생도 그의 『성학십도』에서 제7도로 가져오는 ‘인설도’(仁說圖)를 “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은 마음이요, 사람이 그것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은 것이다.”(仁者, 天地生物之心, 而人之所得以爲心.)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한 문장에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는 유교적 창세기일 뿐 아니라 인간론과 그 감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더 이어지는 설명에서 仁을 “생명의 성”(生之性)과 “사랑의 원리”(愛之理)라고 했으니, 그것은 곧 인간 마음이 천지의 易이 되는 仁을 통해서 만물을 낳고 살리는 창조자가 되고, 그 창조의 작업은 차가운 이성이나 사고보다는 먼저 사랑의 감정과 몸과 마음의 따뜻한 살림의 몸짓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밝히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일찍이 ‘생물’(生物) 또는 ‘생물지심’(生物之心)이라는 말에 주목하여 그로부터 오늘의 반(反)생명적 물질주의 문명에 맞설 수 있는 한국적 영성, 한국적 페미니스트 살림 영성을 드러내고자 했다.20 최근에는 그 일을 한국적 ‘신학’(信學)이나 ‘인학’(仁學)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더욱 급박해진 기후·생태 위기 등으로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면서 지구 집에서의 인간 의식의 ‘제거주의’나 인간 사고와 세계 사이의 어떠한 상관관계도 반대하는 ‘반(反)상관주의’ 등이 거론되지만, 필자는 오히려 우리의 갈 길은 지금까지의 길을 다시 한 번 다듬어서 더 포괄적인 생명의 길, 곧 ‘참 인류세’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11 오늘날 한편으로 인간 의식이 세계를 점령하고 규정하는 것에 대한 급진적 반대는 인간 의식 없이 神은 말할 것도 없고 존재(세계), 생명, 창조가 가능하다는 반(反)인류세적 극단주의로 나가려는 모습도 드러낸다.12 필자는 이것이 또 하나의 서구식 전체주의적 사고이며 전래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실체론이 재현된 것이라고 본다. 여전히 인간과 자연, 사고와 세계, 신과 인간, 마음과 몸 등을 실체론적 이원론으로 나누고, 과정(process)과 명멸(明滅)과 경험으로서의 존재, 즉 易으로서의 생명과 자아에 대한 이해보다는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의 존재 의식에 매달리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주희나 퇴계처럼 인간의 마음 자체를 ‘천지생물’(天地生物)의 易으로 보면서, 자아(주체)와 세계가 깊은 상관성 속에서 함께 서로를 구성해 가는 ‘자기 창조’(autopoiesis)를 지속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함석헌 선생이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는 참종교가 아니고 ‘중보소리 많이 하는 종교’는 협잡종교라고 했다면, 우리에게 좋은 오래된 미래는 동아시아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유불도 삼도의 통합적 사고로 영근, 온 우주 생명과의 깊은 연결 속에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으로서 인간의 근본적인 능동성·창조성·주체성이 강조되는 성리학적 세계 이해와 인간 이해라고 여겨진다.
‘인설도’(仁說圖)의 또 다른 언술 중에는 “공(公)이란 인(仁)을 체득하는 방법이니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면 인(仁)이 된다.”(公者, 所以體仁, 猶言克己復禮爲仁也)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시대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필자는 이 말이 앞에서 천지의 창조주 易으로 밝힌 仁을 얻는 방법 또는 그것이 내 안에 있음을 뚜렷이 깨닫는 의식이며, 더 나아가 그 仁을 내 몸에 키우는 것은 결코 혼자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公)의 삶 속에서 공적(公的) 영역에서의 현현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먼저 이해하고자 한다. 즉 자아와 세계, 나와 타자, 의식과 세계, 마음과 몸, 인간과 우주 또는 神 등은 서로 불이적(不二的)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서로의 존재와 성장이 가능하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창조와 존재는 공동 산물이라는 것을 밝혀준다는 뜻이다.
‘공’(公)이라는 글자에 대한 이러한 해석과 그다음의 ‘극기복례’를 연결하여 보면, 진정 仁한 사람이 되는 길과 그 仁을 깨닫고 체득하는 방식은 바로 ‘공평무사’(公平無私)의 방법, 즉 자기 이익과 자기 입장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中을 잡기 위해서 자기를 넘어서는 일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中은 단순한 양비(兩非)나 양시(兩是)가 아닐 것이고, 그 판단과 선택이 천지를 살리는 마음(天地生物之心)이 되어서 공동체와 관계와 생명을 낳고 살찌우고 증대시키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다시 기독교 신앙의 십자가와 만난다. 그러나 유교적 극기복례의 길은 그 자신을 이기는 힘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 힘이 길러지는 것은 바로 ‘公’을 통해서라는 것이며, 그렇게 자신을 이겨나가는 열매가 어떤 거창한 비의적인 능력이나 도사의 주술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다른 사람과 세계와 관계할 때 자신이 절대의 존재가 아니라 ‘조건 지어진’(conditioned) 존재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공경(敬)과 겸손, 예절(禮)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상과 구체적인 삶에서 초월을 예배하는 것이고, 오늘 포스트휴먼(post-human)과 세속화 이후(post-secular) 시대로 들어선 인류 문명이 요청하는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도 참으로 풍성히 영적인’ 방식의 예배를 드리는 일이라고 본다. 필자는 오늘 한국교회나 그 지도자들이 온갖 주술적 추구에 빠져 있고, 유아독존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끝없는 이익과 사적 욕망에 눈이 어두운 것을 볼 때 이와 같은 우리의 오래된 가르침에 다시 눈을 돌리는 일을 생각한다. 그것이 ‘한국적 인학(仁學)’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마무리하며

유교가 말하는 예(禮)의 훌륭한 가르침도 지나친 이론화와 관념화로 인해 ‘사람 잡는 예(禮)’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 치달아 밖에 내던져 짓밟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국 사상은 그에 대한 대안의 길로 기독교 복음을 받았고, 서학(西學)과의 씨름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섰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동학’(東學)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이 동학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개벽’(開闢) 내지는 ‘다시 개벽’의 기치를 걸고 21세기야말로 진정한 ‘후천개벽’의 때로서 지금까지 지구 문명이 서구 기독교 가치 중심적 ‘근대’였다면, 오늘날은 한국의 동학사상과 같은 비서구 국가들에 의한 “토착적 근대”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창된다.13 하지만 필자는 앞에서 살펴본 조선 성리학적 사고에서 이미 서구적 근대를 넘어선 ‘근대 이후’(postmodern)의 정신을 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러한 조선 성리학적 뿌리에서 나온 동학을 단지 ‘토착적 근대’라고 명하는 것은 타당치 않으며, 오히려 서구 근대도 넘어서는 ‘근대 이후’, 포스트모던의 한 표현으로 보고자 한다. 동학의 최제우 선생은 자신 가르침의 결정체로서 성(誠), 경(敬), 신(信) 이 세 글자를 지목했고, 이것이 필자가 추구하는 ‘한국적 신학(信學)과 인학(仁學)’과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한국 사상의 전일적이고 회통적인 사고는 20세기의 동학만이 아니라 이미 원효(617-686)나 통일신라의 최치원(857-?)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서 뚜렷이 추구되었다. 특히 최치원은 중국인들과는 다른 ‘동인’(東人) 의식을 가지고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방인이란 따로 없다. 그러므로 동인의 자식들은 불교도 할 수 있고 유교도 할 수 있다.”(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 東人之子 爲釋爲儒必也)라고 강술했다.14 그는 동인(한국인)들이 큰 회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고유한 정신적 뿌리로서 ‘풍류’(風流)를 들었지만, 필자는 여기서 풍류라는 단어보다는 ‘살림’(生)이 더 적실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짧게 지적한 대로, 한국적 창세기 이야기에 나타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 등을 따로 들지 않더라도, 아주 오랜 고기(古記)에서부터 나타나고 강조된 ‘낳고 살리는 정신’(生/性), 그것이 더 전개되어서 ‘생리’(生理), ‘생물’(生物), ‘생의’(生意) 등으로 표현되면서 한편 감정(情)으로, 이지적 성찰의 정신(理)으로,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생명적 의지(意)나 상상력(思) 등의 영적 힘으로 분출되는 이러한 한국적 마음과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앞으로도 계속 또다시 융화하고 회통하는 생명과 살림의 易과 中과 仁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은 한국 정신사적 바탕에 근거해서 우리가 가장 늦게 만난 20세기 서구 개신교의 예수 정신을 또 다시 창조적으로 융섭한15 초현실주의 영(靈)의 신학자 이신(李信, 1927-81)의 시 〈나사렛의 한 목수상(木手像)-새 그리스도로지〉 중 일부를 가져오면서 이 성찰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얼마든지 지혜롭게 / 얼마든지 힘차게 / 얼마든지 착하게
얼마든지 아름답게 살 수 있느니라고 / 부르짖으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 억울한 일은 /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도
그것이 두고두고 / 다른 물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는 / 같지 않지마는
하나의 자유로운 인격의 주체자로서 / 행한 하나하나의 일들은
그대로 사실로서 삭여가고 /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 하나의 결정적인 인간상을
“사실”이라고 하는 엄격성 속에 / 담아 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 삶으로 본 것이
부활에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분이 신이었다는 결론은
죽음을 몰랐다는 데 / 있는 것보다
그처럼 죽음으로 / 삶에 /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은 데 있습니다.
‐ 1968년 11월 6일,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16

주(註)
1 류승국, “한국 易學思想의 특질과 문화적 영향”,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유교문화연구소, 2009), 257-282.
2 류승국, 위의 글, 260; 최봉근, “退溪의 ‘天命圖說’에 비친 理의 全一的 生命性”, 「陽明學」 11(2004. 2): 257-285.
3 이은선,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 교육철학』(동연 2018), 277 이하.
4 이기동·정창건 역해, 『환단고기(桓檀古記)』(도서출판 행촌 2019), 292.
5 스티븐 샤비로, 안호성 옮김, 『사물들의 우주-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갈무리 2021), 130.
6 이은선, “코로나 팬데믹 이후 종교와 교육-한국 信學과 仁學의 관점에서”, 「종교교육학연구」 66(2021. 7): 97-113.
7 류승국, 앞의 글, 265.
8 함석헌, 『(함석헌 저작집 14) 새 시대의 종교』(한길사, 2009), 74, 이은선, “仁의 사도 함석헌의 삶과 사상”,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동연 2016), 232에서 재인용.
9 주희, 임헌규 옮김, 『인설』(책세상, 2014), 53.
10 이은선, 『한국 생물(生物) 여성영성의 신학: 종교聖·여성性·정치誠의 한몸짜기』(모시는사람들, 2011).
11 이은선, “왜 오늘 다시 인격인가?-우리 시대의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에큐메니안」, 2021년 3월 21일.
12 퀑탱 메이야수, 정지은 옮김, 『유한성 이후: 우연성과 필연성에 관한 시론』(도서출판b, 2010), 스티븐 샤비로, 앞의 책, 126 이하에서 재인용.
13 조성환·이병한, 『개벽파선언: 다른 백년 다시 개벽』(모시는사람들, 2019).
14 최치원, 「진감화상비명(眞鑑和尙碑銘)」, 류승국, 앞의 책, 234에서 재인용.
15 이은선, “참된 인류세(Anthropocene) 시대를 위한 李信의 영(靈)의 신학-N. 베르댜예프와 한국 신학(信學)과 인학(仁學)과의 대화 속에서”,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동연 2021), 130.
16 이신, 이경 엮음, 『돌의 소리: 李信 詩集』(동연, 2012), 65-73.


이은선|조직신학과 한국 유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신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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