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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1년 12월호)

 

  일본 극우의 탄생과 종교적 배경
  

본문

 

일본 극우, 그 부활의 징조들

전후 일본 극우의 민낯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은 1960년 10월 12일에 발생한 ‘아사누마 이네지로(沼次) 살해 사건’일 것이다. 대일본애국당 당원이자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지회 회원이었던 극우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 당시 17세)는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 중이던 일본사회당 당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 위원장을 식칼로 세 번 찔러 살해하였다. 야마구치는 10월 4일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을 참배한 후 암살을 실행에 옮겼고, 체포된 후 형무소 방 안에 “칠생보국 천황폐하만세”(七生報 天皇陛下万歲)라고 쓴 뒤 목을 매어 자살했다.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준 일본 우익들 사이에서 그는 현재까지도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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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대 일본 우익의 폭력성은 최근 다시금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1991년 아사히신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金順) 씨의 증언을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는 이후 일본 우익의 표적이 되어 가족 살해 협박 등을 받고 있다. 2015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보장관련법안(이른바 전쟁 가능법안) 개정’에 반대한 대학생 조직 ‘실즈’(SEALDs)의 대표 오쿠다 아키(田愛基) 씨와 그 가족에 대한 살해 협박 사건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쿠다 씨는 기독교인이며 그 부친은 목사인데, 이 점 또한 일본 우익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사건은 2015년 3월 16일, 일본 참의원 국회에서 미하라 쥰코(三原じゅん子) 의원이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말을 전후 최초로 언급한 사실이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에 주둔하던 연합국사령부(GHQ)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을 금지하도록 제정한 용어이다. 미하라 의원은 “(일본의) 건국 이래 소중히 간직해온 가치관인 팔굉일우의 이념 아래 전 세계가 하나의 가족처럼 서로 돕는 경제를 운용토록 하는 숭고한 정치적 합의문서 같은 것을 아베 총리가 세계에 제안해야 한다.”라면서 이 개념을 찬양했는데, 이후 문제가 되자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 등은 “(팔굉일우가 부정적인 말로 쓰인) 종래의 의미와 전혀 다르다.”라고 옹호했다. 이 말은 천황(天皇)을 정점에 둔 일본 야마토 민족의 세계 일원화의 개념으로서 일본의 무한팽창을 궁극적 목표와 가치로 삼는 일본 극우세력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으므로 전후 그 사용이 금지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일본 정계의 공식 석상에서도 언급되기 시작하고 있다.
‘팔굉일우’는 일본 불교 니치렌슈(日蓮宗)에서 파생된 신종교 국주회(柱)를 창시한 다나카 치가쿠(田中智)가 만든 말이다. “전국의 신사에 모셔진 주신들은 모두 황조신에 통일되어야 한다.”(全の神社に祀られる主神はすべて皇祖神に統一されるべき)라고 주장하는 등 신도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천황에 의해 통치되는 세계를 꿈꾸며 1913년에 ‘팔굉일우’를 처음으로 표방하였다. 오늘날에도 국주회는 존재하는데, 일본 극우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일본회의’(日本議)의 행사를 국주회가 진행하는 등 이들은 일본의 우익 세력과의 밀착관계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일본 극우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리 더욱 노골화되어 가는 이 시점에, 그들의 탄생과 변천 과정이 종교, 특별히 기독교와는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 극우의 탄생을 자극한(?) 기독교

놀랍게도 근현대 일본을 지배해온 소위 ‘극우사상’의 탄생에는 ‘기독교’가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예수회 신부들의 선교 활동에서 소개된 뎃포(鐵砲, 조총)와 화약의 힘 덕분에 가능했다.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1567년 중국의 가톨릭 주교인 벨키오르 카네이로와의 협력 속에서 화약을 확보한 것이 이후 조총 생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 등 메이지유신 세력에 의해 주창된 ‘정한론’(征韓論)이 근현대 일본 우익의 근간을 이룬다고 볼 때, 그 원점이라 할 수 있는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 때부터 기독교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우익 사상의 뿌리가 되는 근세 일본의 사상에도 기독교는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는 기본적으로 민간 신앙에 기초한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이다. 하지만 에도시대 중후반기에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을 중심으로 일본의 신도도 본래는 ‘일신교’적 종교라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이른바 복고신도(復古神道)가 발흥한다. 초라해진 신도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종교운동은 일본 근세 사상을 대표하는 국학(国学)을 형성시켰다. 이는 그동안 일본 사상을 지배해온 불교나 유교 등의 외래 종교를 배격하면서 순수한 일본의 고전과 고대사에 주목하면서, 일본만이 갖는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찾는 학문을 추구했다. 특히 모토오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신세칠대(神世七代)의 만물을 창조하는 신비한 힘의 원천인 ‘무스비’(産靈)라는 개념에 집중했고, 이것은 근대 신도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모토오리를 잇는 히라타는 복고신의 신학체계를 확고히 하면서 황국우월론을 주창하였기에 이후 미토학(水)과 더불어 막부 말기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고, 특히 서민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여 다양한 신도계 신종교를 파생시켰다. 이처럼 복고신도 운동에 기반한 일본의 국학은 신도와 천황의 존재를 찬양하면서 일본 국수주의의 미래에 고속도로를 깔아주었다. 이러한 복고신도의 영향하에서 유교에 대한 일본적 재해석을 새롭게 수립한 미토학도 발흥하여 천황의 권위에 집중하는 존왕양이 사상으로서 근대 우익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복고’라는 말 자체가 기독교의 종교개혁자나 유럽 인문학자들이 슬로건으로 사용한 ‘근원으로, 고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의 라틴어 ‘아드 폰테스’(Ad Fontes, back towards an origin)와 유사하다. 실제로 복고신도는 마테오 리치를 통해 중국에서 한문으로 정리된 기독교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이 큰 자극을 주었다. ‘다신교’에만 매몰돼 있던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전 속에서도 ‘유일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 그리고 그것을 설명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책이 다름 아닌 기독교 교리서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국학자들은 아메노미나카누시노가미(天之御中主神)나 그 후에 등장하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등의 일신교적 고대신 개념에 주목하게 된다.1
일부 국학자(복고신도가)들에 의해서만 소통, 공유되던 이 사상이 일본 우익의 대중적 사상으로 발전, 확대된 계기는 메이지유신을 통해서이다. 다수의 유학생 파견과 수많은 번역서 소개 과정에서 19세기에 형성된 종교학 이론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교를 ‘고등종교’로, 힌두교나 신도 등의 다신교를 ‘하등종교’로 분류하는 것을 접하면서 일본의 종교 실태에 대한 집단적 열등감, 굴욕감이 심화되었고 이는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가 되었다. 마침 일본 고전 속에서 유일신적 존재를 탐구하던 국학(복고신도)은 다신교로서의 신도가 일신교로 진화, 발전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처음에는 다신교적 상황을 전제로 한 단일신교(單一神敎, henotheism)적 신도를 추구하였지만, 종국에는 기존 일신교마저 압도하고 초월하는 유일신교(唯一神敎, monotheism)로서의 신도까지 구상하려고 한다. 이는 이후 일본의 모든 신사(神社)를 천황을 정점에 둔 황실신도(皇室神道)의 우산 아래 일원화한 이른바 국가신도, 즉 신사신도의 형성으로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 천황제가 탄생한다. 여기서 천황은 아메노미 나카누시노가미(天之御中主神)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라는 유일신 개념을 이 땅에 드러내 보인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 근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 우익의 역사적 뿌리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무력(조총)의 확보라는 ‘물적 토대로서의 배경’과 근대 천황제를 탄생시킨 ‘일신교적 종교사상의 배경’이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기독교가 중요한 자극제, 촉매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일신교에 대한 왜곡된 수용 과정은 국수주의 및 전체주의와의 손쉬운 결합을 도와준다. 그것은 이후 국가신도에 영합한 일본의 기독교가 극우 군국주의 세력에 부역한 역사, 그리고 독일의 기독교가 나치즘과 한 몸을 이루었던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일본 극우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과 그 후예들

21세기에 접어들어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해온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치적 고향은 혼슈 최남단 야마구치현, 옛 조슈번(長州藩)의 땅이다. 여전히 현대 일본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이 지역 출신 우익 인사들을 ‘조슈벌’(長州閥)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는 인물이 바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근현대 일본의 우익사상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사상적 아버지인 셈이다. 에도 말기 혼란한 정세 속에서 무력한 도쿠가와 막부에 환멸을 느낀 요시다는 존왕양이 사상에 심취하여 1857년에 고향 야마구치로 돌아와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학숙을 세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라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1870년대에 정한론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막부의 탄압으로 요시다는 결국 옥사하였는데, 죽음 직전에 “내 몸은 비록 죽지만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일본혼)는 반드시 세상에 남기리라!” 외쳤다고 한다.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앞서 소개한 복고신도(국학)와 미토학 등이 존재한다.
요시다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었고, 이후 대만과 한국 등 동아시아 침략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 일본의 초대 총리이자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청일전쟁에 직접 참여한 제3대 총리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 을미사변(1895) 당시 명성황후 살해의 배후이자 주도자였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주한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며 조선 침략의 발판을 조성한 외무대신 가쓰라 다로(桂太),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正毅), 조선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荒助),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이 모두 요시다 쇼인의 문하를 거친 야마구치 인맥이다.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야마구치에는 요시다 쇼인을 기념하는 신사(神社)와 학숙 등이 세워져 여전히 성역화되고 있다.

기독교인 우익 정치가, 이시바 시게루의 뿌리

포스트 아베로 한때 주목받았던 자민당 내 인사가 바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이다. 그는 아베와 달리 한일, 중일 관계의 개선이나 역사적 성찰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헌법 9조 개정을 통해 군대를 부활시키고 이른바 ‘보통국가’로 회귀해야 함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우익 인사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인 정치인이다. 일본 인구의 0.5% 안팎에 불과한 기독교인의 비율을 생각할 때 꽤 주목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선조를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아베가 만주국 고위 관료이자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이후 총리 역임)의 외손자인 것처럼, 이시바의 아버지 이시바 지로(石破二朗) 또한 돗토리현 지사, 참의원 등을 역임한 지역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이시바의 외증조부 가나모리 츠린(金森通倫, 1857-1945)은 도시샤대학의 창립자 니지마 조(新島襄)의 제자로서, 일본조합기독교회의 대표적인 초기 지도자이자 오카야마 및 돗토리 지역 전도에 여러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현재의 일본기독교단 돗토리교회의 초기 개척과 1880년 설립 과정에도 가나모리가 관여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가나모리의 장녀가 돗토리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이시바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지금의 이시바 의원의 할머니가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자란 이시바도 자연스럽게 고교 시절 돗토리교회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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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이후 일본 기독교계가 걸어온 참회와 반성의 길은 반세기 이상 한일 관계 회복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고, 이시바 또한 그런 긍정적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아베 세력과 더불어 ‘일본회의’의 상담역 회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면서 왜 그는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에 참여하는 것일까?
외증조부 가나모리 츠린이 속해 있던 일본의 초기 기독교 그룹인 ‘구마모토 밴드’(熊本バンド)는 ‘봉교취의서’(奉趣意書)를 통해 격변하는 근대 세계 속에서 일본 제국에 충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1945년 종결된 일본의 침략사 속에서 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협력한 기독교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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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모니 츠린의 동료이자 구마모토 밴드의 대표자인 에비나 단조(海老名正)는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이른바 ‘조선전도론’(朝鮮道論)을 통해 일본의 황국적(皇國的) 기독교를 이식하려 애쓴 목사이자 신학자였다. 또한 신도와 기독교를 결합하여 야마토 민족에게 신이 부여한 선민의식을 강조하며 일본 제국의 팽창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 따라서 기독교가 일본의 국체에 반하는 집단이라는 국수주의 학자들의 비판에 저항하면서 “기독교가 주창하는 개인의 가치나 평등성은 제국 입법의 정신과 모순되지 않고, … 기독교는 천황제 국가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2라고 항변하였으며, 한층 더 나아가 “기독교는 … 오히려 국가를 발전시켜, 국체에 모순되지 않고, 결코 충군에게도 반하지 않는다.”3라고 강조했다. 즉 기독교의 보편성과 민족(국가)의 특수성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또한 에비나는 히라타 아쓰타네 계통의 복고신도, 그리고 대표적인 교파신도인 구로즈미교(住)와 기독교를 조화,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천황과 직결되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황통이나 황도 이상으로 유난히 강조한다.4 심지어 교회의 설교에서도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 나타나신 광경은 실로 아름다우며 … 그로서 영광스러운 생명이다.”5라고 강조할 정도였다. 또한 천황은 “지존지성(至尊至聖)의 이름의 천신의 황손(天神の皇孫)”6이라면서 신도는 황권과 국권의 옹호자라고 적극 옹호했다.
특히 “죄악과 싸우시는 그리스도혼(クリスチャン魂)과 어떠한 적국과 싸우더라도 반드시 이기게 해주는 일본혼(日本魂)은 모두 생명력 넘치며 역동한다는 점에서 실로 동일한 것”7이라든가, “야마토혼(大和魂)이 깃든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이 야마토혼은 그리스도혼과 일치하고 있다.”8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극우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와 일치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에비나 단조의 영향하에서 활약한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신자이자 법학자인 오타니 요시타카(大谷美隆)는 1930년대에 등장한 독일 나치당의 헌법을 일본도 적극 수용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국체와 기독교: 일본적 기독교의 제창』(と基督: 日本的基督の提唱, 1939)이라는 책을 통해서 일본의 조화삼신(造化の三神) 개념은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론과 동일하다는 주장까지 내놓으면서 일본의 신도와 기독교의 완전한 결합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결국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신의 대표자’라는 선언적, 관념적 존재라면, 일본의 천황은 현존하는 ‘신의 대리자’라 평가하면서 이 시대의 실질적 통치자인 천황에게 복종하고 충성해야 함을 요구한 바 있다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기독교인 정치인 이시바 시게루의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가 보이는 극우적 성향이 결코 새롭게 탄생한 것만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기독교는 1945년 패전과 동시에 인간이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 어떤 사상적 가능성과 철저히 관계를 끊었다. 우익 정치집단이 여전히 지배하는 일본 사회에서 전후 일본 기독교계가 마이너리티로 존속할 수밖에 없는 숙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에 비해 한국교회는 절대 다수가 신사참배에 참여하며 일본의 극우 논리에 영합했는데도 지금껏 제대로 반성하고 회개한 적이 없어 보인다. ‘인간 숭배’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 상태 그대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나가면서 : 일본 극우와 닮은 우리 안의 극우는 없을까

일본 극우사상의 뿌리를 보면 의외로 기독교와의 인연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사상을 기초로 기독교의 핵심 가치에 대한 관심이 희박했다. 오히려 원시적 민간신앙에 뿌리를 둔 신도(화혼)를 일신교적 고등종교로 진화, 발전시켜 서양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와 겨루어도 뒤지지 않도록 만들고자 애썼다. 기독교의 자극 속에서 탄생한 복고신도(국학)는 이후 메이지유신 세력을 잉태했고, 그들은 근대 천황제라는 ‘초종교’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현인신’(現人神)으로서의 새로운 천황상(天皇像)을 통해 기독교를 압도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였지만, 결국 패전과 제국 해체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망상을 지탱했던 일본의 극우사상은 전후에도 여전히 거대 여당과 보수 종교 세력 등에 암약하며 재기의 순간을 노려왔고, 최근 십 수 년 동안 현저하게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우익의 탄생에 기독교가 처음부터 자극제 역할을 하였듯이, 1930년대 이후 극우 강화의 배경에는 독일이라는 기독교 세계와의 동맹을 통해 전체주의로 경도되는 과정도 존재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극우사상의 세계사적 민폐 현상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일까? 한국 사회, 특히 한국 기독교계에도 이러한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치며 ‘친일 부역 정당화’와 ‘반공 이념’ 등을 통해 한국과 한국 기독교계의 극우사상에도 일본 신도가 품었던 종교적 욕망이 이식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독일 나치스와 그에 부역한 서구 기독교의 시대적 오판과 죄악 또한 오늘날의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한국교회 안에도 과거부터 널리 퍼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종, 종교, 민족, 소수자 등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계의 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극우 바이러스’의 팬데믹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위드(with)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며 코로나 백신 접종과 치료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with 극우’로 인한 오랜 비극과 여전한 현실을 생각할 때, 극우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도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주(註)
1 이에 관해서는 山本達編, 『比較文化の試み』(究社, 1977)에 실린 에비사와 아리미치(海老有道)의 글 “복고신도와 기독교”(復古神道とキリスト)를 참조할 수 있다.
2 土肥昭夫, 『天皇とキリスト』, 405-406.
3 砂川万里, 『海老名正』, 加藤正夫, 『明治期基督者の精神と現代』, 99.
4 海老名正, “新論,” 「六合誌」, 第210, 1898年 6月 25日, 5-10.
5 海老名正, “復活の福音,” 「新人」, 第8 第5, 1907.
6 海老名正, “神道の宗的精神,” 「六合誌」, 第198, 1897.
7 古屋安雄·大木英夫, 『日本の神』 ヨルダン社, 1989, 133-134.
8 海老名正, “予が最も愛するもの,” 「新人」, 1905.


홍이표|연세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교회사를 전공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교토대학(京都大学)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일본종교사상사를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야마나시에이와대학(山梨英和大学) 인간문화학부 준교수 겸 종교주임으로 일하고 있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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