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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아프간의 혼란 속에서 본 이슬람과 우리]
특집 (2021년 11월호)

 

  아프가니스탄과 우리
  

본문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무장 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매체를 통해 자주 들려오지만,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름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다.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일까? 대한민국과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관계를 맺어왔을까?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아프가니스탄은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서남아시아의 국가로, 우리나라의 6.5배 정도인 64만 7,500㎢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서쪽에는 이란, 남쪽에는 파키스탄, 동쪽에는 중국의 신장이 있고, 북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모여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440만 명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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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흐름

1) 아프가니스탄의 시작
두라니 제국의 창건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Ahmad Shah Durrani)는 1747년 아프가니스탄을 독립된 정치체제로 건설했다. 그의 아들 티무르 샤(재위 1773-93, 이하 연도만 표기)는 수도를 카불로 정하고 자산도 옮겼다. 19세기 말 두라니 제국은 형제 간의 제위 다툼으로 하락세를 걸었다.
1800-80년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를 차지하려는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전쟁터가 되었다. 두 제국 사이의 완충국이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외교는 영국이 통제했다. 영국군의 도움과 재정 지원으로 바라크자이 파슈툰족의 아미르 압둘 라흐만(Amir Abd al-Rahman)이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철의 ‘아미르’(지도자)로 불렸다. 그는 부족과 지방 지도자들을 탄압해 중앙 정부를 공고히 하고 근대 국가의 초석을 닦았다.(1880-1901)
그의 아들 하비볼라 칸은 1901-19년 이전 정권의 강력한 조치를 완화했다. 그는 1903년 최고의 근대 학교 하비비아(Habibia)를 세웠다. 9개월 동안의 비파슈툰 통치자 아미르 하비불라(Amir Habibullah) 2세 이후 바라자카이 씨족 무사히반(Musahiban) 가문의 무함마드 나디르(Muhammad Nadir, 1929-33)가 왕위를 주장했다. 나디르 암살 이후 1933-63년에는 무함마드 자히르 국왕이 통치하고 그의 삼촌과 사촌이 총리직을 수행했다. 무사히반 가문은 가문의 지위 보전에만 신경을 썼다. 1935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국내 정치는 권위주의 정책으로 일관하고 외국인 혐오 대외정책과 함께 근대화 정책을 조심스럽게 추진했다.

2) 미국과 소련의 지원
무함마드 다우드 총리(Muhammad Daud, 1953-63) 시절에는 소련의 대규모 군사·경제 지원이 성사되었으며, 이후 미국의 지원도 뒤따랐다. 다우드 총리는 이 지원을 통해 근대화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교육 시스템과 통신설비 확장에 집중했다. 1963년 다우드는 파키스탄에 대한 적대정책과 소련에 의존하는 정책에 따른 의견 충돌로 인해 사임했다. 다우드와 사촌 관계인 국왕 자히르는 평민인 무함마드 유수프(Muhammad Yusuf) 박사를 총리로 임명했다.
자히르 국왕의 마지막 시기 10년(1963-73)은 민주주의 실험이 실패한 시기이다. 국왕이 정당을 합법화하는 법안 서명을 거부했고, 민주적인 절차를 방해하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간 공산당과 이슬람 야권 운동은 이 기간에 형성되었다. 그들은 정부에 반대하며 서로 경쟁했다.
1973년 7월, 총리에서 물러났던 다우드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다우드는 친 소련 아프간 공산당의 분파 중 하나인 ‘파르참’(Parcham)의 도움을 받았다. 곧이어 다우드는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1973-78) 다우드는 권위주의 정책을 폈으며 잠재적 정적을 탄압했다. 특히 이슬람주의 정당이 주요 탄압 대상이었다. 그는 자신과 친한 옛 정치인들에게 의존했고, 자신이 보호하고 조성한 친 소련 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다. 이에 불만이 점차 고조되었고, 1978년 4월 공산주의자 반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우드를 축출하고 죽였다.

3) 타라키의 공산 정권
뒤이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당수인 누르 무함마트 타라키(Nur Muhammad Taraki)가 혁명위원회 의장과 총리(1978, 79)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명을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DRA)으로 바꾸고 헌법을 폐지했으며 모든 야권 운동을 금지했다.
정권 획득을 위해 한 배를 탔던 인민민주당 내부의 두 분파 ‘할크’(Khalq, 인민)와 ‘파르참’의 관계는 2개월도 되지 않아 금기 가기 시작했다. 할크는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파르참 지도자들에게 해외 대사직을 제안하며 군대와 민간 요직에서 파르참 출신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지원으로 타라키는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지만, 1979년 봄 저항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프가니스탄 각 지방에서 저항 세력에 대한 정부의 잔인한 보복이 자행되면서 수천 명의 아프간 난민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피신했다. 그해 9월 당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며 극단적 공산주의 정책을 옹호한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은 자신을 노리는 음모가 꾸며졌다고 주장하며 1979년 크리스마스 기간 타라키 대통령과 그의 부관을 살해하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4) 소련의 개입과 철수
이후 소련은 약 8,000명의 군인을 파견하며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타라키를 죽이고 대통령이 된 아민을 살해하고, 파르참의 지도자인 바브라크 카르말(Babrak Karmal)을 국가수반으로 세웠다. 소련의 개입은 파르참과 할크 간 파벌주의를 강화했다. 소련군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주요 도시에서 저항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전까지 반정부 저항은 반공의 성격을 띠었으나, 소련의 개입 이후 그 저항의 성격은 이슬람과 국가의 해방을 위한 지하드(성전)가 되었다. 1980-86년 카르말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권력 강화, 파벌주의 타파, 국민통합에 실패하고 말았다.
1986년 전 국가보안부대장(KHAD) 나지불라 아흐마드자이(Najibullah Ahmadzai) 박사가 권력을 잡고 카르말을 정당과 정부직에서 해임했다. 그는 일방적인 정전 정책으로 정적과 협상에 임했고, 권력 분할과 국민통합을 위한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다. 또 1987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다당제 정치체제와 양원제 의회를 구성했다. 그렇게 그는 정적이던 좌파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7개 정당이 뭉친 ‘무자헤딘 연정’(아프간 무자헤딘 이슬람 연합)은 아흐마드자이의 정책에 반대했고, 소련의 철수와 공산주의 통치 중단을 요구했다.
소련군의 대(代) 무자헤딘 전쟁은 난항을 겪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무자헤딘 지원 규모가 증가하자 유엔의 중재로 1988년 4월 14일 제네바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이 합의는 소련군 12만 명이 이듬해인 1989년 2월 15일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동유럽의 민주화(1989)와 소련의 붕괴(1991)라는 굵직한 사건들에 밀려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탈레반의 등장과 아프가니스탄의 오늘

1) 탈레반의 등장 배경
소련이 붕괴하며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군사 및 재정 지원도 중단되었다. 하지만 무자헤딘과 정부 간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정부 측 민병대 세력이 탈영하여 무자헤딘과 손잡는 등의 사건은 1992년 4월 16일 나지불라의 축출을 불러왔다. 무자헤딘의 지도자이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ud)가 이끄는 북부 이슬람 연합 세력이 수도 카불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무자헤딘 세력은 안정된 새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전을 벌이고 만다.
50개 회원으로 구성된 이슬람주의 저항조직의 과도 위원회가 폐슈와르에서 구성되고 집권하기 위해 카불로 파견되었다. 이틀간의 파벌 간 전투로 굴브딘 헤크마티야르(Gulbuddin Hekmatyar) 세력이 카불에서 물러나고, 세브가툴라 무자데디(Sebghatullah Mujaddedi) 과도 위원회 의장이 4월 28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국가의 수장으로 두 달 동안 권력을 잡았다.
같은 해 6월 28일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 교수는 무자데디를 이어 과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해외 망명 중인 인물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전 국민을 대변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새로 선출될 대통령은 헌법의 초안 작성과 최초의 총선을 감독하게 되어 있었다. 그해 12월 말 1,335명으로 구성된 슈라(의회)가 소집되어 2년 임기의 임시 대통령으로 부르하누딘 랍바니를 선출했다. 하지만 9개의 이슬람주의 분파 중 5개가 이 결정을 거부했다.
이외에도 인종이나 종파, 지역색 등을 원인으로 한 다른 형태의 분파 다툼도 계속되었다. 이런 다툼은 이슬람주의 정권을 약화시켰고 국가 재건과 법·질서 회복 노력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1993년까지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해 군벌들이 많은 지방을 통치했다.

2) 탈레반의 등장
이런 상황에서 칸다하르와 파키스탄의 파슈툰 부족 지역의 종교학자와 학생들이 치안을 제공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 바로 탈레반이다. 1994년까지 탈레반은 칸다하르 지역을 차지하고 2년 후에는 카불을 포함해 아프가니스탄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1996년 9월 27일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한 후 랍바니 대통령이 이끄는 무자헤딘 정부를 축출했다.
이후 1998년부터는 탈레반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신호가 감지된다. 탈레반의 여성 탄압에 대한 인권단체의 압박, 국제 투자의 부재, 카스피해 인근의 풍부한 석유 자원을 이송하기 위한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려던 미국 기업 유노컬(Unocal)의 철수 등 악재가 이어졌다.
탈레반은 여성과 소수 종파를 탄압하고, 고대 불상을 파괴하고, 연 놀이 등 전통 아프가니스탄 놀이 및 음악·TV·사진을 금지하는 등 엄격한 이슬람법 ‘샤리아’를 적용했다. 이는 파슈툰 부족의 생활방식을 결정짓는 파슈툰 왈리(Pashtunwali)와 인도 데오반드(Deoband) 마드라사 다르 알울룸(Dar al-Ulum)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결합된 산물이었다.(물론 탈레반 일부는 이슬람 통치를 믿었으나 다른 일부는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급진적 아랍인들의 훈련 캠프를 세운 오사마 빈라덴의 존재가 이러한 이슬람화를 가속화했다. 이러한 탈레반의 정책은 새로운 급진 이슬람 형태를 의미하는 ‘탈레반화’라는 개념을 낳았다.

3)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성(펜타곤) 공격을 지휘한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 주도 연합군의 공격으로 탈레반 정부는 붕괴하고 빈라덴이 이끌던 테러조직인 알카에다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도피했다. 9·11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항구적 평화 작전’(OEF)은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단계로 먼저 아프가니스탄 주변국에 주둔한 미군은 침공 준비에 착수하고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공조했다.
두 번째 단계는 아프간 목표물을 공습하고, 아프간 반군과 특수작전을 통해 알카에다의 거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 개시 전에 이미 미국의 CIA는 반군 단체인 북부연합과 공조를 시작했다. 이 두 번째 단계는 2001년 10월 7일에 시작했고 영국군의 도움으로 전개되었다. 같은 달 이 작전의 목적은 대부분 달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알카에다의 은신처를 파괴하기 위해”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2001년 12월 초까지 영국군의 도움을 받은 미군 주도의 연합군과 북부연합군은 아프간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빈라덴과 탈레반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이어 미국은 “안전과 안정화 작전”이라는 네 번째 단계를 진행했다. 2001년 12월 22일에 이 단계가 시작됨에 따라 탈레반 정권과 거리를 두고 망명해 있던 하미드 카르자이는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를 통해 탈레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박멸되다시피 했으나, 몇 년 뒤 탈레반은 다시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4) 네오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 재장악
2001년 12월 독일 본(Bonn)에서 열린 회담에서 아프가니스탄 야권 지도자들은 유엔 관리들과 회동을 갖고 새로운 상임 정부 구성을 논의했다. 이 합의에서는 ‘안전’, ‘재건’, ‘정치 안정’이라는 세 가지 주요 목표가 결정되었다. 이를 위해 유엔은 다국적군이 수도 카불과 그 주변 지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국제안보지원군(ISAF)이 창설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군(ANSF)과 공동 작전을 전개했다.
미국의 작전으로 아프간에서 박멸되었던 탈레반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2000년대 초반 새로 형성된 이슬람 무장 조직은 ‘네오 탈레반’이라 불리며 자살 공격과 테러 전술에 의존했다. 네오 탈레반은 과거의 탈레반과 달리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한 집단이라기보다는 여러 분파가 느슨하게 연합된 조직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와 통치를 위한 공통의 비전을 공유하며 연합된 조직이 아니라, 이슬람 가치의 엄격한 적용을 위해 뭉친 자들이었다. 2003년 봄 탈레반은 이미 소멸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IEA)의 국호 아래 재집결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남동부 지역에서 아프간 정부군과 미국 주도 연합군을 공격하고 동부와 남부지역에서 군사 공격을 강화했다. 2006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급증했다. 무장 조직원은 주로 다양한 파벌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전 탈레반 지도자, 군벌, 마약 밀매업자, 파키스탄 마드라사 졸업생과 급진 이슬람주의자 등이었다.
이후 2008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미군 추가 파병과 네오 탈레반과의 전쟁이 전개되고, 2011년에는 빈라덴을 사살하기에 이른다. 2014년 오바마는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다가 이듬해에 그 계획을 연기하기로 했으며, 새롭게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는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이후 2020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평화 합의에 서명하고 미군의 아프간 철수를 선언했고, 이후에 당선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 약속대로 2021년 8월 31일까지 미군 철수를 완료했다.

대한민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1

1) 최근의 경제적 도움
미군 철수 후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구호단체의 지원이 끊기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데, 생필품의 물가가 10%에서 많게는 20%까지 뛰면서 주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최근 이러한 인도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내년 232억 원 규모의 무상 공적개발원조(ODA) 지원 사업을 계획 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지난 7월 의결한 2022년도 종합 시행 계획상 아프간 ODA 사업 예산(요구액 기준)은 모두 231억 7,000만 원이다. 외교부가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는 ‘대(對) 아프간 경제·사회 분야 지원 강화’ 사업 예산으로 가장 많은 183억 6,500만 원이 배정되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아프간 지원을 위한 6개 프로젝트에는 47억 2,100만 원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카불 바르치 지역 식수 개발, 직업기술 교육훈련 선도모델 구축(UNESCO), 성평등·성주류화 역량 강화, 공무원 역량 강화를 위한 연수 사업 등이다. 행정안전부도 아프간 새마을운동 초청 연수 명목으로 8,400만 원을 신규 예산으로 책정했다. 그러나 KOICA 예산은 대폭 감축돼 원 사업 예산의 80%인 10억 5,300만 원만 정부안에 반영되었다.


2) 한국군 파병
과거 한국은 파병부대를 보내 10년간 아프간 재건을 지원해왔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직후 한국을 비롯한 여러 동맹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한국은 그해 9월 23일 파병을 결정했다. 파병 부대로는 수송 작전을 위한 해성부대(해군)와 청마부대(공군), 의료지원을 위한 동의부대를 창설하여 그해 12월부터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갔다.
해성부대는 상륙함 4척을 투입해 군수물자 15회 4716톤, 재해물자 2회 580톤 등 총 17회에 걸쳐 임무 수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청마부대는 다국적군 병력·물자·환자·인도적 지원 물자공수 및 자국민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총 81회 작전에 나서 지구 둘레 35바퀴에 해당하는 144만여㎞를 비행했다. 동의부대는 키르기스스탄을 거점으로 카불을 비롯한 아프간 현지로 의료진을 보내 의료지원 및 현지 주민 계몽을 위한 보건교육도 맡았다. 동의부대는 파병 기간에 791명의 의료진이 25만 9,569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2002년 8월 미군은 공병부대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듬해 2월 건설공병대대인 다산부대는 바그람 기지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해 8월에는 민사부대를 추가 창설하고 동의부대를 합류시켜 한국군 지원단으로 재편성했다. 한국군 부대는 아프간 재건에 힘을 더했다. 다산부대는 활주로 확장 및 항공기 계류장 공사 등 바그람 기지 내 각종 시설 공사의 절반 정도를 수행했으며 기지 운용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다산부대는 지역 내 토목공사와 유치원 보수 공사에 힘을 보탰다.
한국에서 파견된 병력들은 전투작전이 아닌 현지 재건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 가운데 희생자가 나오기도 했다. 2007년 2월 자살폭탄 공격으로 다산부대 통역병인 윤장호 하사(사후 병장에서 추서)가 현지에서 전사했다.

3) 샘물교회 선교단 피랍과 파병 철수, 그리고 코이카
2007년 7월 샘물교회 선교단 23명은 아프간 현지에서 탈레반 세력에 피랍되었다. 탈레반은 한국군의 아프간 철군을 요구했다. 40여 일 동안 협상이 진행되어 인질 21명은 순차적으로 풀려났지만 2명은 살해되었다. 파병부대는 그해 12월, 작전을 종료하고 철수했다.
한편 한국 정부는 미국의 추가 요청으로 2009년 10월 오쉬노부대 파견을 결정했다. 이전과 달리 전투부대 중심으로 꾸려졌으며 아프간 수도 카불과 인접한 파르완주 차리카시에 독자적인 기지를 설치한 뒤 한국 지방재건팀(PRT)의 호송 및 경호작전을 맡았다. 지방재건팀에 참여한 KOICA는 행정 재건 및 개발원조 사업을 추진했고, 경찰파견단은 아프간 경찰의 훈련을 담당했다. 2014년 6월 임무 종료까지 4년간 2,500여 명이 투입돼 병원 및 직업 훈련소 등에서 아프간 재건에 매진했다.

마치며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으며, 우리와는 전혀 다른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이질적인 나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외세의 침입이라는 슬픈 역사적 경험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다. 오랜 기간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도와온 우리는 이미 그들의 친구인 만큼 이제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선교와 소명의 관점에서도 그들을 도와야 함은 물론, 국내로 피신한 아프간 특별 기여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딜레마가 남아 있다. 고통받는 아프간 주민을 돕기 위해서는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 탈레반이 통치하는 국가를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시간이다.

주(註)
1 이 부분의 서술은 세 개의 신문기사를 참고하였다. “한국, 아프간 무상 ODA사업에 내년 232억원 지원 계획”, 「연합뉴스」, 2021년 9월 22일; “아프간 미군 철수에 ‘파병 한국군 10년’ 재건 노력도 물거품”, 「중앙일보」, 2021년 8월 22일; “KOICA, 탈레반 집권 아프간 원조 80% 감액”, 「연합뉴스」, 2021년 10월 11일.


성일광|텔아비브대학에서 중동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Mamluks in the Modern Egyptian Mind: Changing the Memory of the Mamluks, 1919-1952 (Palgrave Macmillan, 2017)가 있다. 현재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스라엘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12월호(통권 7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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