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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코로나 시대,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다]
특집 (2021년 4월호)

 

  예배, 공동경험과 공동기억의 사건
  

본문

 

들어가는 말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고 난 후 사람들은 ‘뉴노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게 될 터인데, 이는 곧 비대면의 방식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예배를 비대면으로 행한 지가 1년이 되었는데, 과연 비대면 방식이 예배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게 될까? 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이는 단지 예배 방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예배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배의 본질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목도한(경험한) 것을 내용으로 하는 예배 의식을 고안해냈고, 그 예배 의식을 통하여 신앙을 선포하고 후대에 계승 해나갔다. 따라서 찬송, 기도, 성서봉독, 설교 등으로 구성된 예배 의식 안에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 있고, 매번 그 예배 의식을 행할 때 자신들이 누구이며(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세상에 선포함) 다시 인식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이 강화되고 또 후대에 전승되었던 것이다.

예배-‘공동기억’의 행위

기억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체이다. 즉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나의 부모와 형제, 친구,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일, 자신이 살았던 장소 등을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서 반복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해가는 것은 그 사람의 기억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인도에 떨어져 홀로 살게 된다면, 그의 기억은 점차 흐려지게 되고 종국에는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이탈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찬양과 감사,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그럼으로써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하여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뚜렷이 인식하기 위해, 또 그것을 대대로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누구신가와 자신들은 누구인가를 기억해야만 했다. 신명기 6장 4-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쉐마’(shema)로 불리는 이 구절은 유대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후손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기독교 예배에서 ‘기억’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첫째, ‘아남네시스’(anamnesis)라는 말이 의미하듯,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예전적 실행(ritual process)의 과정을 거쳐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1 따라서 ‘그때 그 사건’은 저 멀리 과거에 존재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에서 살아서 효력을 발생하는 현재적 사건이 된다. 이는 과거에 있었던 ‘그때 그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재현’하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유대인의 행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유월절 식사는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과거에 출애굽을 통하여 구원과 해방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처럼, 현대의 유대인도 매년 유월절이 되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유의 백성이 된다. 유월절 만찬이 라는 예전적인 행동은 단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하는 수단이다. 유월절 규례를 어기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민 9:9-13)라는 유월절 규정이 이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유월절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은 과거에 고정된 사건이 아니다. 기억을 지금 여기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고 예전적 과정을 통하여 실행할 때 그것은 다시 살아서 현재의 사건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쉐마와 유월절 서사를 통해서 과거의 사건들을 반복해서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현재의 사건이 된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이다.2 그래서 ‘과거 그 사건’에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되풀이해서 말하며 생생하게 기억을 떠올리는 그분의 백성에게도 동일한 은총으로 함께하신다.
예배에서 ‘기억’이 가지는 두 번째 특성은 그것이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본래 유대인의 출애굽 사건은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민족의 사건, 즉 집단적 사건이었다. 출애굽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어른도 있었지만 아이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죽고 없어지게 되었을 때에 아이들이 커서 장성하게 되었고, 그들이 늙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 다음 자손에게 자신의 출애굽 경험을 전해주었다. 그 자손이 장성하여 어른이 되면 그들은 또 자신의 자녀에게 그것을 전수해주었다. 이렇게 처음의 출애굽 경험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고, 따라서 출애굽은 ‘공동의 경험’(common experience)으로부터 비롯된 ‘공동의 기억’(common memory) 으로 살아나게 된다.3
유월절 만찬이 행해지는 과정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마다 유월절 식사를 하는데, 이때 그 가정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되어 있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밤들과는 다릅니까? 다른 모든 밤들에는 우리는 누룩이 들어있는 떡이나 누룩 없는 떡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누룩 없는 떡만을 먹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밤들에는 우리는 온갖 종류의 나물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우리는 쓴 나물만 먹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밤에는 우리는 구운 고기나 삶은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으나 오늘 밤에는 구운 고기만을 먹어야 합니까?4

이 질문을 받으면 가장은 신명기 26장 5-9절의 내용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우리가 부르짖었다.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식사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되풀이하여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음 세대에도 전해준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생생하게 현재의 삶에서 재현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들과 함께하시고 과거 그들의 선조들과 함께하신 것처럼 지금도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믿는다.
‘기억’의 이 두 가지 개념, 즉 재현과 공동의 기억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다. 최초의 기독교 예배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눈’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이러한 제자들의 ‘떡 뗌’ 행위는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독교 예배는 예수에 대한 이 반복된 ‘기억 모임’으로부터 발전해 정착된 것이었다.
이 ‘기억 모임’은 ‘모여서’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예전적인 절차에 따라 특정 행위를 ‘실행’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관찰’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 팔을 뻗으면 다른 참가자에 닿고, 예복을 입은 목사와 행진하는 예배위원들의 움직임을 눈앞에서 보고, 예배당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공기를 느끼며, 목소리를 함께하여 공동의 기도와 찬송 을 하는 경험은 결코 모니터 앞에 앉아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신약의 예배-예수에 대한 ‘공동경험’과 ‘공동기억’

신약성서에 의하면 최초의 예배 모임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공동경험을 기억해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다녔고 함께 먹었으며, 함께 잠을 잤다. 병자를 고칠 때도, 오천 명을 먹일 때도,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그들은 함께 있었다. 최후의 만찬에도 함께 참여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비록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어도 멀리서나마 그를 지켜보았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예전처럼 그렇게 떡을 구워 식탁을 차려주셨다.(요 21:12-14, 눅 24:13-35)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이 모인 이유는 바로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열두 제자의 예배 모임에서 좌장은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 하신 것처럼 그렇게 떡을 집어 감사의 기도를 올린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전 11:23-25)
그런데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를 기억하여 함께 나눈 식탁은 단지 승천하셔서 지금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분을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성찬을 나눌 때에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경험하였다.5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들’을 기억함으로써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그들도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6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기억’ 의 행위는 참여자들에게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느끼고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다. 한국정교회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초대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며 주님 사랑을 다시 살고 있지 않은가. 기억하지 않으면 상실한다. 잊으면 잃는다.”7
기독교 신앙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주의 만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고린도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바울이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현하는 근거는 바로 역사적 전승이다. 다시 말해서 공생애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앉으신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주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고(24절), 또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5절) 명하셨다. 그 자리에 있었던 열두 사도는 이 명령을 따라서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주님을 ‘기억’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마다 이 내용을 함께 전했던 것이다.
주의 만찬은 이렇게 역사적 예수로부터 열두 사도에게, 그리고 열두 사도로부터 바울에게, 그리고 바울로부터 모든 기독교인에게 전승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시작하는 고린도 전서의 기록은 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너희는 나를 기억하라.” 하시지 않고 빵을 떼어 주시면서 “너희가 ‘먹을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상황이 왔을 때 제자들이 그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냥 기억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신 당신을 기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빵과 잔을 사용하신 것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는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의 말씀은 이를 입증한다.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주의 죽으심’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것이다. 주의 만찬을 통하여 예수를 ‘기억’하는 일은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주의 만찬(예배)을 통하여 그분의 기억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 승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합하면, 1세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에 관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예배는 다름 아닌 이 ‘기억’을 떠올리고 ‘현재화’하는 행위였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여기에서 생생하게 떠올리고 언급함으로써 그 사건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화하여 다시 경험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 문헌들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 흩어진 교회들이 예배 중에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예수의 생애, 즉 그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죽으심과 매장되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말하고 행동하였음을 보여준다.8

나오는 말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 공동체의 공동의 기억행위이며, 이 공동기억의 내용은 예수 사건에 대한 제자 공동체의 공동경험으로부터 대대로 전승된 것이다. 진실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반복하여 ‘기억’하고 ‘재현’하며 ‘실천’하고 ‘경험’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예배에서 행하는 찬양과 기도, 성서 봉독과 설교 등은 모두 이를 위한 장치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많은 경우 성찬이 결여된 채 행해진다. 설교가 중심인 한국교회 예배의 특징이 코로나19 상황에서 비대면 예배를 용이하게 만든 측면이 있으나, 설교 중심의 예배는 십자가와 부활을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는 온갖 주제를 모두 다루기 때문에 그 초점이 십자가와 부활에서 벗어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예배가 초대교회의 예배와 본질적으로 같은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근원인 예수사건, 즉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공동체적’인 행위가 되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매주일 예배에서 ‘말씀’과 ‘성찬’의 균형을 확보하는 일이다. 2,000년 동안 이어져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내려온 예수에 대한 ‘공동의 경험’과 ‘공동의 기억’을 우리는 다시 다음 세대로 전수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행전(行傳)’이다.

주(註)

1 이에 관해서는 다음 책을 보라. 로렌스 훌 스투키, 김순환 옮김, 『성찬, 어떻게 알고 실행할 것인가?』(대한기독교서회, 2002), 43-53.
2 돈 E. 샐리어스, 이필은 옮김, 『예배와 영성』(은성출판사, 2002), 22.
3 20세기 후반에 결실을 맺은 ‘예배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은 예배의 초대 교회적 정신과 공동체적 정신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을 참고 하라. John Fenwick and Bryan Spinks, Worship in Transition: The Liturgical Movemen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Continuum Publishing House, 1995).
4 윌리엄 바클레이, 이희숙 옮김, 『성만찬』(종로서적, 1992), 21.
5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 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61.
6 돈 E. 샐리어스, 앞의 책, 25.
7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정재원 옮김, 『위대한 선교사 성 사도 바울로』(정교회출판 사, 2011), 17.
8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Jasper R.C.D. and G. J. Cuming, Prayers of the Eucharist: Early and Reformed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2).



조기연 | 한국예배학회 회장, 한국실천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기독교 세례예식』, 『묻고 답하는 예배학 Cafe』, 『한국교회와 예배갱신』 등이 있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부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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