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코로나 시대,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다]
특집 (2021년 4월호)

 

  급변하는 시대에도 영속되어야 할 기독교 예배의 요소와 가치
  

본문

 

혹자는 팬데믹이라는 지금의 세상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고,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계속 열릴 것이기에 예배의 회복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계속 열릴 것이라는 예측에는 전적으로 동의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전 1:9-10)라는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감염병의 큰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감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사람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맞이했을 것이며, 예측불허의 두려운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확실한 시대를 견디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장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치는 바로 ‘전통’과 ‘형식’이다. 교회력은 그 예시 중 하나이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비트코인 등으로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통과 형식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기독교 예배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런데 오늘날의 팬데믹 상황에서 그 전통과 형식은 심한 축소, 생략, 변형을 겪고 있다. 온라인 매체로 급격하게 이동하며 예배의 내용과 형식이 변화에 휘말린 것이다. 매체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지금 보이는 변화의 대부분은 기술적인 능력과 장비가 부족한 경우이거나 이것들을 익히는 데 탈진한 목회자들이 예배의 내용과 형식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게 된 경우이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변화를 맞이했다. 필자 역시 예배학자로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여 대규모 집단감염을 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여러 변화들을 기꺼이 수용하였다. 우리는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피하듯 정신없이 ‘온라인’이라는 대피소로 들어갔다. 온라인 예배 가 가능한지, 그래도 되는 것인지 논쟁할 여유나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팬데믹 상황을 1년 이상 경험하면서, 온라인 예배의 가능성과 함께 그것의 한계도 경험하고 있다. 이제 팬데믹 이후의 예배 회복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특히 언제나 개선의 대상이었던 과도한 설교 중심적인 한국교회 예배의 특성이, 온라인 예배에서 더 심화되며 파격적인 변형들을 낳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편의에 따라 예배 순서를 변형하거나 찬양과 기도 형태를 변형하고, 교회력을 축소하거나 생략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 중 가장 우려되는 것은 성례전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급변하는 시대에서도 영속되어야 할 기독교 예배의 요소와 가치에 대해 현재 온라인 예배로 인해 목격되는 현상들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배는 개인이 드리는 예배나 경건회가 아니라, 정한 시간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예배(public worship) 혹은 공동예배(common worship)로 제한한다. 공예배는 사적인(private) 예배와 구별되며, 공동예배는 개인의(individual) 예배와 구별되는 용어이다.

고유의 순서와 형식을 담은 기독교 공예배(public worship)

팬데믹 상황에서도 기독교 공예배가 지속될 수 있도록 여러 온라인 플랫폼이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온라인 예배가 아니었다면 완전히 닫혀버렸을 교회 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 열 수 있었다. ‘온라인 예배도 예배인가’라는 토론조차 불필요해 보일 만큼 우리는 이러한 대체물에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팬데믹이 극복된 이후에도 교회로 돌아가지 않고 온라인 공간에 남아 예배드리고 싶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온라인 예배가 오프라인 예배를 완벽하게 대체하고 있어 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1년 넘게 지속된 온라인 예배가 오히려 더 익숙하고 편하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라인 예배가 완벽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프라인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데 불편함이 거의 없을 만큼 빈약했기 때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 예배는 설교 중심, 아니 설교에만 치중된 예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씀의 위치는 개혁 전통의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중심에 놓이지만, 그렇다고 설교가 예배의 모든 것은 아니다. 말씀 외에도 예배의 다른 요소들이 각각의 역할과 메시지를 가지고 배치되어 또 다른 요소들과 유기적으로 관계하며 하나의 서사, 이야기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하시길 간구하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갖고, 용서의 말씀이 선언된다. 이렇게 용서받은 사람들은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배 안에서 화평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순서들은 말씀 선포 전에 행해지며, 죄와 용서와 화해의 문제가 해결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예배의 각 구성 요소의 유기적 관계와 그 메시지가 살아 있는 예배가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기독교 예배이며, 신앙의 전통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예배이다. 즉 예배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요소와 그 배열이 구원의 드라마를 구성하기에, 무엇 하나 빠뜨릴 수 없다. 예배의 형식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우리는 그동안 설교에만 집중된 예배를 드려온 것이다.
게다가 팬데믹이라는 비상 상황은 설교의 앞뒤에 배열된 여러 다른 순서를 목회자의 재량껏 축약하거나 생략할 수 있는 면죄부를 제공하였다. 물론 예배의 요소나 형식은 상황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가능하다. 비상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응급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변형된 형태가 계속 유지되어 향후 새로운 예배문화로 고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온라인으로 실시간 방송을 해온 교회들의 경우에는 형식의 과도한 파괴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되지만, 기술이나 인력이 부족한 교회들에서는 형식의 파괴와 변형이 고착되는 듯 보인다.
코로나19가 심각해짐에 따라 정부는 행정명령을 내려 교회의 예배 행위를 제한하였고, 우리는 성가대의 찬양이 예배 순서에서 빠지는 상황을 경험했다. 이러한 일시적 축소나 생략은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술적인 부분이나 인력 적인 부분, 혹은 목회자의 신학적 입장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변형은 기독교 예배를 역사와 전통에서 멀어지게 할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기독교 공예배의 형식은 초대교회에서 시작해 발전해온 것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후손들에게 그 신앙을 전수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 형식과 구성 요소 자체가 메시지를 담고 있고 역사와 전통을 담고 있기에, 과도한 변형은 온전하고 풍부한 기독교 예배의 재현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회중의 상황에 따라 예배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기독교 공예배의 특징을 나타내는 순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혹자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방식을 원초적이고 바람직한 예배 형식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박해로 인해 가정예배의 형식을 취한 그들이 성전과 회당 중심의 공예배를 포기했다고 볼 수 없다. 박해가 끝났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실행한 것 중 하나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를 짓는 일이었으며, 모범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여러 공적 의례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박해와 전염병의 혼란 속에서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항상성을 유지하며 의례와 의식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집회나 부흥회, 혹은 강연과 큰 차이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예배, 집회, 부흥회, 강연회 등의 차이는 내용의 차이보다도 형식의 차이가 그것들을 구분한다고 볼 수 있다. 예배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인데, 형식은 그 예배를 돕는 훌륭한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형식을 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다. 북미의 저명한 예배학자 루스 덕(Ruth Duck)은,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이 우리에게 형식을 제공해주었기에, “우리는 이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상호 간에 말해야 할 내용에 집중할 수 있다.”1라고 말하며, 교회의 역사가 물려준 순서와 형식의 전통을 잘 활용하여 각 시대에 맞는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를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또 기독교 고유의 예배 순서와 형식이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뼈대에서 강연이 아닌 진정한 예배의 특성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시대와 문화에 맞게 형식이 발전할 수 있으나, 과도한 변형은 지양해야 한다. 과도한 형식의 파괴는 역사와 신학과 전통, 그리고 그 메시지의 파괴까지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중의 능동적 참여가 일어나는 기독교 공동예배(common worship)

기독교 예배를 가리키는 많은 용어 중 예배학에서 가장 선호하는 용어는 ‘리터지’(liturgy)이다. 헬라어로는 ‘레이투르기아’인데, 사람들이 함께 행하는 노동을 뜻하는 말이다. 즉 예배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하는 거룩한 노동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예배의 의의는 함께 모이는 공동예배에서 더 커진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은 공동예배의 중요도와 우선권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모인다는 것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접속한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한 것인가? 이제 우리는 온라인에 접속한 예배자가 참석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것이 참석이 아니라면, 말씀을 듣고 깨닫고 감동하는 주체들은 누구인가?
앞서 언급했듯, 한국교회 예배의 중심이 일반적으로 설교에 있기에 팬데믹 상황에서는 무난하게 설교만을 송출하고 예배가 완성되었다고 간주하곤 한다. 목회자나 회중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족한다면, 팬데믹 이후에 다시 전통적인 방식의 오프라인 예배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정말 온라인 예배가 완벽한 예배일 수 있을까?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의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기존의 예배에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가 결여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회중은 그저 보고 듣고 응답하는 수동적인 모습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드리는 온라인 예배와 교회 회중석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는 예배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온라인 예배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회자 중심의 오프라인 예배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전 세계의 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예배회복운동이 주창하는 것은 평신도의 능동적인 역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예배의 정신과 실행을 회복하자는 것인데, 바티칸공의회는 전례에 관한 헌장에서 평신도의 “완전하고(full) 의식적이며(conscious) 능동적인(active) 참여”라는 말로 기독교 예배의 참 정신을 구현하려고 했다. 이러한 헌장이 종교개혁 당시 성직자 중심의 예배를 비판했던 개혁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대상이었던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물론 강력한 성직자 중심의 예배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실제로 로마가톨릭의 예배는 성직자 고유의 역할이라고 여겨온 의례 행위 중 몇몇을 평신도가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고 평신도들의 능동적 예배 참여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종교개혁 500년의 역사를 지닌 개신교 교회의 예배는 더욱더 전문 목회자 중심으로 재구성되었고, 기도와 성가대 정도에서만 평신도의 참여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평신도들의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설교에 집중하기 위해 예배의 다른 요소들을 모두 한꺼번에 실행하고 남은 시간에 느긋하게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목사의 설교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남은 순서들이 모두 희생되거나 변형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예배 형식이다. 이처럼 회중의 능동적 참여가 결여된 기존의 예배는 완벽하게 온라인 예배로 대체될 수 있었다. 이제 회중에게 온라인에서 나와 오프라인으로 모이자고 우리가 말할 때, 그 말에는 어떤 설득력이 있는가?
초대교회에서는 회중이 직접 준비해온 떡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성찬에 사용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예배회복운동 이후 로마가톨릭은 물론 개신교 교회에서도 평신도가 성서를 낭독하거나 성례전을 제외한 여러 순서를 맡아 예배를 돕기도 한다. 때로는 전체 회중이 기도문을 읽거나 인도자의 권유나 기도에 적극적으로 화답할 수 있도록 하여 보다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해오고 있다. 북미나 남미 등에서는 찬양의 시간에 경우에 따라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여 능동적 참여를 권장하기도 한다. 모인 회중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예배하며,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예배에서 우리는 기독교 공동예배의 ‘레이투르기아’ 정신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능동적 참여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는 교회가 있다면, 집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예배하던 소극적 참여자들은 능동적 참여가 권장되는 현장 예배로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기획할 때 평신도의 “완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인 참여”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의식적’이라 함은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능동적 참여를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목회자 입장에서가 아니라, 평신도 입장에서 분명히 인식될 수 있는 능동적 참여를 위해 끝없이 그들과 대화하며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언급한 ‘레이투르기아’, 즉 ‘리터지’로서의 예배는 신앙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그들의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참 예배임을 말해준다. 기독교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이기 때문에 말씀의 자리는 양보될 수 없다. 하지만 예배는 그 계시에 대한 응답의 자리이기도 하기에, 성직자가 회중을 대신하여 응답하기보다 회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능동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직접 응답할 수 있도록 예배의 순서, 형식, 내용을 기획해야 한다. 계시(설교)만 전달하려는 것을 예배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야 능동적 참여라는 새로운 장을 열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북미 예배학자 드와이트 보겔(Dwight W. Vogel)은 리터지에 대해 “‘만인제사장직’의 진수로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사장적 공동체에 참여하며, …예배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함께 맡는다.”라고 정의한다.2
이처럼 예배, 즉 리터지는 참여적 예배자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전문 목회자 홀로 기획하고, 홀로 준비하고, 홀로 통제하고 진행하는 예배는 글자 그대로 ‘공연’에 불과할 수 있다. 통제된 예배 속에서 수동적으로 앉아 있는 예배가 더는 가능하지 않을 미래가 곧 다가올 것이다. 사회는 계속해서 탈중앙화, 탈권위적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목회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대정신을 반영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와 평등한 리더십은 성직자 권위의 소멸과 동의어가 아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교회의 제사장적 청지기 사역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이 권위로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와 평등한 리더십을 세우며, 평신도의 “완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모여든 회중, 예배 공동체는 안수받은 성직자들이 행하는 목회의 ‘대상’ 혹은 피동적 수혜자만이 아니며, 오히려 예전적 행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3이기 때문이다.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확대하는 것만이 다가올 기독교 예배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성에 기초한 영적인 예배

온라인 예배를 통해 우리는 만남 혹은 참석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쌍방향 온라인 플랫폼으로 회중이 서로 마주 대하며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비대면 예배냐고 반문하는 목회자를 만난 적이 있다. 사실 필자도 강의실에서의 수업보다 쌍방향 온라인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얼굴을 더 쉽게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필자는 온라인 환경이었지만 학생들을 만난 셈이고, 그들은 수업에 참석한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몸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켰고, ‘웹바디’ 혹은 ‘웹몸’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그렇다. 웹에 접속되어 있는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실체를 가진 존재이다. 온라인의 가상 공간에서 각 웹몸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즐기며 위로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또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예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상 공간에서 아무리 수많은 만남이 이어진다 해도, 우리는 육체를 돌보기 위해 가상 공간에서의 만남과 활동을 잠시 중단해야 한다. 먹고, 운동하고,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야만 웹에서의 활동도 이어갈 수 있다. 즉 인간은 육체 없이 웹몸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의 웹몸은 전원이 꺼지면 사라지고, 그 웹몸들이 활동했던 공간도 사라진다. 그러면 웹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몸이 된다. 웹몸은 전원과 클릭에 의존하는 가변적 공간 속의 몸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이나 영혼만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의 기준은 무엇보다도 육체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육신 원리와도 같다. 육체인 우리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은 성육신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이 바로 육체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지만, 그러한 영적인 활동 역시 육체를 벗어나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온라인의 웹몸으로 참여하는 것과 실제 공간에서 육체로 참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비록 가상 공간과는 달리 부피와 면적의 제한을 받는 공간이지만, 우리는 이 공간이 보다 진정한 공간이라고 느끼게 된다. 생물학적 몸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모든 육체적 감각을 동원한다. 이는 가상 공간에서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거나 실제 공간에서의 예배는 비경제적이며 비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속성과 필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가상 공간에서만 형성되는 신앙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의 신앙공동체라 할 수 없다. 가상 공간에서 웹몸을 빌려 구성된 교회와 예배는 육체를 가진 인간을 전인적으로 담아내는 완벽한 교회와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예배와 성찬에 몸으로 참여하지 않고 상상으로 참여한 것이 진정한 참여인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상상으로 참여한 것은 진정한 참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독교 역사는 오직 물질을 통한 성례전만이 진짜 성례전이라고 정리했는데, 이는 우리가 반드시 육체와 물질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과도하게 영적인 세계만 강조하면 이 세상의 물질과 공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간과하기 쉽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해석과 응답에 관한 것이다. 제한된 공간과 시간이지만 육체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만남이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신 것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의 자리가 신앙고백의 진정한 자리임을 깨닫게 된다.
현재 기술로 가상 공간에서 재현되는 세상은 우리의 시각과 청각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인지될 수 있지만, 인간은 그 두 감각만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시각과 청각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전부가 관여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 실제 공간에서 우리의 신체적 몸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보다 더 전인적이고 더 완벽한 예배는 있을 수 없다. 정교회의 예배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은 기독교의 진짜 비극은 세상이나 진보 적 “유물론”과 “타협”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기독교가 “영성화”된 것이라고 지적한다.4 세월이 지나도 변할 수 없는 인간에 대 한 진리, 그것은 바로 육체성이다.

상징과 예술언어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예배

팬데믹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는 정보전달에는 뛰어난 역할을 했지만, 상징과 예술의 영역을 드러내는 데에는 매우 취약함을 드러냈다. 온라인 예배가 다양한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이목을 끄는 화면들을 제공하더라도, 배너와 그림, 혹은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시각예술이나 건축과 같은 공간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체험하게 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아직까지는 설교를 중심으로 내용 전달에 더 치중된 온라인 예배가 다수를 이루기에 예배 예술과 상징의 영역이 급격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서 상징과 예술의 영역이 둔화된 현상은 온라인 예배 때문은 아니다. 사실 그동안 대부분의 예배에서는 상징과 예술이 결여된 채 언어적 표현이 과도하게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을 보여왔다. 예배에서 심미적 차원이 거의 고려되지 않는 것이 한국 개신교 예배의 현실 이다.
아름다운 예배당에 앉아 기독교의 상징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갖는 영적인 고요함을 생각해보라. 그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상상해보라. 종교개혁자 루터가 지은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독일의 토르가와 예배당은 색유리부터 설교단,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들이 아름다운 상징으로 적절히 채워져 있다.(물론 로마가톨릭의 화려함과는 달리 절제된 아름다움이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을 강조하던 종교개혁자도 상징과 예술로 자신의 예배신학을 반영한 예배당을 지은 것이다. 루터에게 예배의 심미적 요소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제한적일지라도 온라인 예배에서도 최대한 예배예술과 상징들을 제공하여 단순한 송출이나 소통의 기능을 넘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상징과 예술은 인간의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드러내기도 하며, 언어와 언어가 부딪치며 깨진 틈을 메워주고 치료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은유적이기에 그 어떤 언어도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줄 수 없다. 바로 거기서 상징과 예술이 기능한다. 음악, 그림, 조각, 직물, 색유리 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며 그 영광을 찬양한다. 물론 상징과 예술 역시 인간의 언어처럼 하나님을 드러내고 설명하는 데 완전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개신교 전통은 말씀 전통이다. 명료성을 생명으로 한다. 상징과 예술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면, 우리는 명료성의 결여로 중세 말기처럼 큰 혼란과 타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감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해 명료하게 모두 설명해낼 수 있는가? 명료성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은 분열과 불신앙, 심지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언어가 해결하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을 상징과 예술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신비를 밝히고 인간의 경험의 높이와 깊이를 표현하는 데 인간의 예술에 의존한다. …예술은 느낀 경험(생각, 감정, 인지감각, 운동감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과정이다.”5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사명은 예배예술을 발전시키는 일까지 포함한다. 예술은 분열을 통합으로 이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세상의 많은 것이 변하고 심지어 예배의 형태까지 변할지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 예배는 초대교회부터 전승되어온 성서적 상징과 예술에 의존하여 회중이, 그리고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다.
성찬에서 하나의 빵 덩어리를 찢는 행위는 단지 희생제물로서 찢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가 길어지며 각 가정에서 빵을 구워 온라인을 통한 사제나 목사의 축성기도를 통해 각자가 준비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기독교 2,000년의 상징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상징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찬은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성찬의 이행은 전승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며 후대에 계속 전해주겠다는 의지이다. 그런데 전승된 상징을 빠르게 변형시켜 새로운 창의적 의례들을 실행하는 것은 기독교 의례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한시적인 의례로 전락시킬 수 있다. 세월이 변하고 극심한 분쟁의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 예배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상징과 예술이 모든 언어를 뛰어넘어 성도의 교통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로 우리는 이미 많은 변화를 겪었고, 앞으로 더 급격한 변화들을 겪게 되리라 각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드론, 무인 자동차,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이 통합적으로 만들어낼 초현실적 세상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쩌면 비트코인으로 헌금을 하고 각자의 아바타들이 가상 공간 속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곧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초현실적인 교회는 아닐지라도 이미 온라인에서만 만나는 온라인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온라인으로만 출석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온라인 교구를 편성한 대형 교회들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서두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매체에 불과하다. 잘 활용하면 편리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한다 해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전수받은 핵심 상징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연약한 육체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부서진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육체가 되셨고, 우리처럼 부서졌으며, 다시 살아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우리 곁에 다가올 인공지능 반려 로봇이 가장 완벽한 음정과 멜로디로 찬송할 수 있다 하여도, 거기에는 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해준 것에 대한 감사가 결코 담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 가운데 머무르신 하나님께 소리 높여 찬양할 것이다. 손뼉 치고 춤을 추면서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할 것이다. 우리가 전해받은 신앙의 상징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주며 그 안에서 서로 교통하며 다 함께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이다.

주(註)

1 루스 덕, 김명실 옮김, 『21세기 예배학 개론』(대한기독교서회, 2021), 248.
2 루스 덕, 위의 책, 49.
3 네이선 D. 미첼, 안선희 옮김, 『예배, 신비를 만나다』(바이북스, 2014), 395-396.
4 알렉산더 슈메만, 이종태 옮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복 있는 사람, 2008), 71.
5 루스 덕, 앞의 책, 166.


김명실 |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99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안수를 받고 5년간 교구목회를 하였다. 이후 프린스턴신학교와 드류대학교에서 예배와 설교 분야의 석사 과 정을 마치고, 루스 덕 교수의 지도 아래 게렛복음주의신학교에서 예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