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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애국가, 개정해야 하나]
특집 (2021년 3월호)

 

  안익태의 애국가, 한국인의 불편한 자화상
  

본문

 

양분된 안익태

안익태의 친일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열기가 15년 이상의 세월 동안 식었다 뜨거워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2021년에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안익태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주장하며 나치 독일에서 행한 친일, 친나치 활동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싶어 한다. 일장기를 달고 달렸던 손기정처럼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주고자 독일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지휘자로 성공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안익태가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고, 일본 지휘자로서 일본과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기여한 민족 배반자라는 비판이 거세다. 반면, 나라를 잃었던 시기에 안익태가 다른 음악가는 생각하지 못했던 애국가를 작곡한 것과 해방 후 사망하기까지 외국에서 ‘한국’을 알린 유일한 한국 음악가였음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안익태의 애국가 문제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현상은 안익태를 양분해서 보는 모순된 현상에 기인하고 있다. 즉 안익태의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하지만 안익태의 진실은 애국가를 작곡한 애국자이면서 동시에 일본제국과 나치제국의 프로파간다에 기여한 음악가라 할 수 있다. 이 진실을 왜곡하고, 각자 보고 싶은 부분만 보면서 한쪽만 강조하는 한 해결점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그 결과 양쪽의 주장은 팽팽하게 양립하면서 지금까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안익태의 진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가 처음 학교에 가서 배워야 했던 국가는 〈기미가요〉였을 것이다. 한일합병으로 조국이라고 할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애국가를 작곡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아니, 위험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그래서 일본의 입김이 닿지 않는 안전한 미국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한인들과의 만남에서 자극을 받아 1935년 애국가를 출판했다. 오로지 음악적 성공을 위해 고학을 하면서 공부에만 몰두하던 안익태의 꿈은 그러나 미국 유학에 머물지 않았다.
당시 미국 음악가들도 빈, 베를린, 라이프치히 등 유럽으로 유학 가던 시절, 안익태도 헝가리 유학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는 빈과 베를린에 비해 서양음악의 변두리였고, 음악계의 최고 권위는 독일에 있었다. 일본제국과 나치제국이 가까워지는 전쟁 상황은 안익태가 독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히틀러가 동부전선의 승리를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일본은 삼국동맹의 주축으로서 세계 권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관료의 신임을 받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바로 이 시기의 독일에서 안익태는 일본 지휘자로 활동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미국에서 약 7년간 독립을 염원하는 해외 한인들과 접촉하며 고학생으로 음악공부를 했다면,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약 6년 동안은 유럽에서 일본 지휘자로 일본제국과 나치제국의 문화정책에 기여했다. 안익태의 음악적 성과가 최고 절정에 이른 것은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했던 때였다. 그토록 원하던 독일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공을 이루었지만, 이것은 만주국·일본과 독일의 동맹을 선전하는 정치적 행사였다. 안익태가 나치제국에서 일본제국의 선전에 기여한 것은 국내에서 음악으로 천황을 찬미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차원이었다.
그러다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자, 나치 시기의 일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의 대표작품 〈만주국〉 축전곡과 〈에텐라쿠〉는 사라지고, 한국 지휘자 안익태의 작품 〈한국 환상곡〉과 〈강천성악〉이 전면에 나타난다. 나치 시기의 성공을 ‘애국자 신화’로 미화하였던 안익태는 전 세계를 돌며 〈한국 환상곡〉을 연주하다가 1965년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반복되는 국가 교체설

안익태를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보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약점이 없는 완벽한 인간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안익태에게 단점이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가 애국가의 작곡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국가를 작곡하지 않았다면, 그의 친일은 현제명의 친일 정도로 넘어갔을 것이고, 그가 애국가의 작곡가가 아니었다면, 해방 후 나치 시절의 과거를 왜곡·미화하고 과장했던 애국·영웅의 신화도 그리 잘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적·애국적 영웅으로 한껏 부풀려진 안익태 신화는 결정적으로 만주국 국기와 일장기, 그리고 나치즘을 상징하는 문양 하켄크로이츠가 드리워진 연주홀에서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하는 안익태의 영상이 2006년에 발굴되면서 엄청난 굉음을 내고 깨져버렸다.1 애국자의 행보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반대의 영상에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독일의 연방아카이브에서 발견된 ‘일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의 활약상이 드러나고 일순간에 안익태의 이미지는 애국자에서 친일 음악가로 180도 뒤바뀌게 되었다.2 이와 함께 애국가 교체 문제가 제기되었다.3
하지만 이런 충격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이슈에 묻히고 안익태를 칭송하는 반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른 한편, 2020년 광복 75주년에는 다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반쪽이 한바탕 매체를 뒤덮었다. 이와 함께 작곡가의 오류로 인해 애국가도 ‘오염’되었으니 또다시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뜨겁게 제기되었다.
이 문제는 반복현상 외에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국가적 상징이 소위 ‘오염’되었다고 하여 새로운 것으로 교체를 논의한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특히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국토를 폐허로 만든 독일은 피로 ‘오염’된 국가를 전후에 어떻게 했는가. 또한 한국보다 먼저 통일을 이룬 독일의 국가는 어떻게 되었는가.

파란만장한 역사를 안고 있는 독일 국가(國歌)

독일 국가의 생명은 끈질기고,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지금 불리고 있는 독일 국가는 원래 하이든이 1797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를 위해 만든 〈황제 찬가〉의 선율이다. 음악적 유래에서만 보면, 현재 민주주의 국가의 시대적 이념으로 볼 때 전혀 맞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인 셈이다. 이 독일 국가는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의 〈독일인의 노래〉 가사와 〈황제찬가〉 선율이 합쳐진 것인데, 이 노래가 처음 독일 국가가 된 것은 1922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이다.
그 후, 1933년 1월 31일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나치제국의 국기는 하켄크로이츠로 바뀌었지만, 국가는 하이든 선율의 〈독일인의 노래〉를 그대로 불렀다. 1절에서 “모든 민족 위의 독일”을 노래하는 이 국가는 나치들의 애창곡 〈호르스트 베셀 노래〉와 함께 독일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독일인의 집단 광기를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결국 수많은 재산·인명피해를 남기고 독일이 패망한 후, 연합군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상징이 된 모든 나치 노래와 나치 하켄크로이츠 사용을 금지하였고, 미군 점령지에서는 독일 국가 〈독일인의 노래〉를 공식 석상에서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 1949년 서독과 동독 정부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국기·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동독은 1949년 요하네스 베혀 작시·한스 아이슬러 작곡의 〈폐허에서 일어나〉를 새 국가로 공포한 반면, 서독은 처음 한동안 공식 행사에서 하이든 선율을 기악으로만 연주했다. 여전히 나치 시기를 연상하는 기존 독일 국가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으므로, 서독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는 새 국가를 작시·작곡하게 했다. 하지만 새 곡은 다수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결국 1952년 서독은 원래의 국가를 그대로 하되 문제가 되는 1절과 2절은 부르지 않고, 평화를 노래하는 3절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다가 1990년 독일이 통일되었다. 통일된 독일에 맞는 새 국가에 대한 논의가 다시 대두되었지만, 이때도 하이든 선율에 〈독일인의 노래〉 3절, 즉 서독 국가가 그대로 통일된 독일의 국가로 살아남았다. 통일을 추진한 세력이 보수당인 것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기존의 것이 새것보다 국민 다수의 저항을 적게 받았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현재 독일 국가는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근현대 독일 역사를 반영하는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가스실에서 사람들을 학살했던 과거의 암울한 역사도 그 속에 들어있다. 창피하고 보기 싫은 역사를 도려낸다고 도려내지는 것이 아니니 함께 안고 갈 수밖에 없음을 현재 독일 국가는 역으로 말해준다. 여전히 독일 시민들 중에는 국수적이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폐해를 낳았는지 독일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지금도 국가를 부르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미가요〉를 법제화한 일본

일본도 〈기미가요〉를 부르며 동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았지만, 독일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전쟁에 패한 후 일본에서도 새 국가에 대한 논의와 함께 국민 공모운동을 벌였지만,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노래를 찾지 못했다. 결국 전후 일본은 〈기미가요〉를 그대로 국가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특히 젊은 층에서는 〈기미가요〉를 부르는 것이 지겹고 따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우익들은 일본 젊은이들이 〈기미가요〉를 배우지도, 부르지도 않아서 애국심이 결여되었다는 주장을 해오다가, 오랜 작업 끝에 1999년 〈기미가요〉와 일장기를 국기·국가법으로 제정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 관습법으로 불리던 〈기미가요〉는 이제 법에 명시되어 있어서, 학교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는 교사를 처벌할 수 있는 강제력도 가지게 되었다. 일본제국의 과거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본 지식인과 시민운동계, 그리고 진보적 교육계에서는 반대 의사를 표했다. 국기·국가법은 일본인들을 갈라놓고, 오키나와 사람처럼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차별을 조장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침략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미가요〉에 거리를 두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동원해 제창을 강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한국인의 불편한 자화상이 된 애국가

그동안 한국인은 애국가를 부르면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동질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국력이 약할 때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외세를 등에 업고 국민 다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세력에 저항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일본 식민지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애국심이었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불렀던 애국가의 역할은 컸다. 해방 후에도 70여 년을 불러오는 동안 애국가는 한국 현대사와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인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국가를 만든 안익태에게 큰 오류가 발견되었으니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안익태의 친일 문제를 70년이 넘도록 모른 채 자랑스러운 국가로 불렀던 우리의 역사적 무지와 안일함, 그리고 이제 보기 싫으니 그것만 도려내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애국가에 투영되어 있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불편하게 된 것은 애국가만이 아니다. 소위 ‘태극기 부대’라고 칭해지는 집단이 태극기를 내세우며 강경 집회를 자주 강행한 후,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부각된 태극기의 통합적 이미지는 퇴색하
였다. 특히 태극기 부대의 참가자들이 대체로 고령인 것은 젊은 세대가 태극기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태극기를 들고 다니면 부정적인 시선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조차 망설여진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태극기에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2021년 1월 6일 미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무리들이 든 성조기를 보며 태극기 부대 집회에서 나부끼던 태극기를 연상한 것은 필자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이런 무리들이 어디 미국뿐인가. 일본에서는 우익들이 재일조선인을 내쫓아야 한다며 확성기를 틀고 시위할 때 어김없이 일장기로 무장한다. 태극기 부대의 등장은 한국에서도 왜곡된 애국심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고, 한국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님을 경고하는 듯하다.

새 국가를 찾는 어려움과 코로나 팬데믹 시대

국기와 국가는 필요하다. 국경일과 외교 행사, 그리고 나라 간의 스포츠 경기에서 국기와 국가는 명패처럼 꼭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일본의 예에서 보듯, 국가적 상징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동일시하는 일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기미가요〉를 법으로 정해서 부르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일 뿐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지금 한국에서는 국가적 상징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는 오류가 있는 애국가를 교체하자는 논의가 뜨겁다. 국가를 교체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오히려 문제는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는 ‘오점 없는’ 완벽한 새 국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국민 다수를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이제 세계는 한 국가만 잘 통제하면 삶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님을 모두가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이동이 동시에 제한되고, 활동도 거의 정지되었다. 국가적, 외교적 행사는 간소화되거나 연기 또는 취소되었고, 졸업식이나 입학식 등 학교의 중요한 행사에 사람들이 모일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더욱이 올림픽 개최도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국가를 부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부른다 해도 혼자 방에서 컴퓨터를 보며 부르는 국가의 의미나 실용성에 의문이 커질 것이다. 국가 교체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생존 문제와 포스트코로나 시기의 새로운 사회변화에 대한 의문들이 산재해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보다 더 큰 ‘기후위기’가 검은 먹구름처럼 다가오고 있는 시기에 국가 교체에 다수가 동의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힘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국가적 상징에 대한 실용적 자세와 거리두기

그래도 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면, 한반도가 통일되어 대다수 국민이 새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자연스럽게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동안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하든 그렇지 않든 비난받지 않았듯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국가를 불러야 하는 공적 행사에서도 애국가는 1절만 부르거나, 〈아리랑〉과 같이 국민 통합에 적당한 국가 후보곡을 하나씩 더 불러보면서 통일 후를 준비하는 것도 서서히 시도해볼 수 있다. 애국가가 관습적인 국가인 만큼, 관습을 한꺼번에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국가에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보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실용적’ 자세를 취함이 어떨까. 국기·국가의 긍정적인 역할은 이미 유통기한이 끝난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할 때가 왔다. 지난날 자랑스러웠던 태극기에 거리를 두듯, 표절 논란과 친일·친나치 음악가의 노래라는 오명을 쓴 애국가 논쟁을 계기로 국가 자체에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 국기·국가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고, 상징의 차원을 일상적 삶의 차원에 적용하여 부작용을 낳고 있는 일본 우익의 전철을 밟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오점을 없애려는 허망한 노력보다는 오히려 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따뜻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노력에서 한국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21세기에 어울리는 애국심은 이런 것이 아닐까.

주(註)

1 “안익태 선생, 만주국 창립 기념 음악 작곡”, 「연합뉴스」, 2006년 3월 8일.
2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휴머니스트, 2007).
3 노동은, “친일 얼룩진 애국가 새로 만들자”, 「한겨레」, 2006년 3월 9일.


필자명 |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나치 시기 망명예술가들에 관한 논문으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안익태의 나치 시기 활동을 추적한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망명음악 나치음악』, 『프로파간다와 음악』 등이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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