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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애국가, 개정해야 하나]
특집 (2021년 3월호)

 

  애국가 가사의 변천과 작사자 논쟁
  

본문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일이다. 이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일까?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작사자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사자 논쟁은 자료보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증언과 진술, 전언(傳言)이나 전문(傳聞)을 중심으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논쟁은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데 오히려 혼란을 주고 있다.
필자는 3년 전, 애국가 작사자 논쟁의 과정과 주요 쟁점을 정리한 바 있다.1 이 글은 필자의 3년 전 글을 토대로 주요 내용만 정리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지면이 제한된 관계로 일일이 주를 달지 못한 점은 양해를 구한다.

자료로 보는 애국가 가사와 작사자 변천

애국가 가사의 원형과 흐름, 그리고 작사자 규명에 필요한 노래는 자료상 크게 4종으로 나눌 수 있다. 자료에 등장하는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무궁화가(일명 황실가), 한문애국가와 애국충성가,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 김인식의 애국가 순이다.

1) 무궁화가
시점상 현행 애국가 가사 구절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무궁화가(無窮花歌)이다. 이 노래는 ‘무궁화 삼천리’로 시작되는 후렴구가 현행 애국가의 원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무궁화가 가사의 전문(全文)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1899년 6월 29일 자 「독립신문」이다. 이 기사에는 29일 오후 2시 배재학당 방학식이 정동교회에서 거행된다고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무궁화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전하며 가사 전문을 소개하고 있다. 작사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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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가는 이익채의 유품에서도 발견된다. 이익채는 배재학당 1기 졸업생이자 1898년 협성회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협성회는 1896년 11월 배재학당 학생 13명이 조직한 단체이다. 그의 유품 중 ‘협성회 무궁화’라고 적힌 제목의 가사지가 있다. 바로 무궁화가이다. 「독립신문」에 실린 가사와 거의 동일하며, 가사 끝에 “회원 일동 우음(偶吟)”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협성회 회원이 함께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위 두 자료에는 작사자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위 기사보다 2년 앞선 「독립신문」 기사에 그 단서가 있다. 1897년 8월 17일 자 기사가 그것이다. 한글판 기사에는 8월 13일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 개국 기원절 축하행사에서 ‘무궁화노래’를 불렀다고 하면서 무궁화가 4절과 흡사한 가사만 있다. 물론 이 기사에도 후렴구와 작사자 언급은 없었다. 그런데 같은 날 발간된 영문판 「독립신문」에는 작사자를 밝히고 있다. 영문판에는 8월 13일 기원절 행사에서 “배재학당 소년들이 한국의 계관시인 T. H. Yun 작사한 ‘National Flower’를 불렀다.”라고 나온다.2 ‘T. H. Yun’은 윤치호를, ‘National Flower’는 무궁화가를 가리킨다. 무궁화가를 작사한 사람이 윤치호라고 기록한 최초의 자료이다.
이후 무궁화가 가사는 1908년 『찬미가』라는 책에 다시 실렸다. 이 책은 1908년 6월 20일 발간된 것으로, ‘윤치호 역술(譯述)’의 ‘재판본’(再版本)이라고 쓰여 있다. 1908년 6월 이전 초판본이 발간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초판본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찬미가』에는 총 15곡의 가사가 실려 있다. 이 중 12곡은 찬송가이고, 3곡이 이른바 ‘애국창가’이다. 3곡의 애국창가의 제목은 전부 영어로 되어 있다. 순서대로 보면, 제1은 ‘KOREA’, 제10은 ‘Patriotic Hymn No. Ⅲ’, 제14는 ‘Patriotic Hymn’이다. 제10과 제14의 곡조는 모두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제10이 무궁화가이고, 제14가 바로 애국가의 원형이다.
무궁화가는 자료상 1907년부터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 러시아, 미국 등 국외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의 신문이나 잡지 등에 ‘무궁화가’ 또는 ‘애국가’로 소개되며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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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매체에 실린 무궁화가 가사는 1899년 「독립신문」에 실린 가사와 비교해볼 때, 단어 혹은 구절이 몇 군데 수정되었을 뿐 거의 유사하다.

2) 한문애국가와 애국충성가
‘한문애국가’와 ‘애국충성가’는 개인 소장 자료이다. 한문애국가는 비단에 동양화 그림이 있고, 상단에 붓글씨로 한문으로 된 애국가 가사가 있다. 끝부분에는 “갑진(甲辰) 초여름(初夏) 김수원(金壽垣) 근서(謹書)”라고 쓰여 있다. 갑진년은 1904년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의미는 애국가 가사와 다르지 않다.

東海水兮白頭山兮至於流竭磨盡 萬有主宰保護我們使我國家萬歲
無窮花三千里華麗江山 大韓人民於大韓永遠保護勿怠


애국충성가는 『기설』(幾說)에 실린 것이다. 필사본 『기설』은 “구호연(龜湖硯) 초(抄)”라고만 되어 있어 책의 저자와 작사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말미에 “계묘(癸卯) 오월”이라고 적혀 있다. 계묘년은 1903년이니, 1903년 5월 필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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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는 애국가 가사와 대체로 흡사하다. 이처럼 한문애국가와 애국충성가는 애국가 가사의 원형이 1903년에서 1904년 사이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주요한 근거이나, 1981년 발굴 당시를 제외하면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다.

3) 애국가
현행 애국가의 한글 가사 원형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1908년 6월 간행된 윤치호 역술의 『찬미가』 재판본에 수록된 애국가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14가 애국가 가사의 원형이다.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2.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3.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 가사는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면 현행 애국가 가사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후일 작사자 논쟁의 주요 자료로 거론된다. 이후 애국가 가사는 1910년부터 각종 자료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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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실린 매체는 주로 독립운동 진영의 기관지나 간행본이다. 다만 『불령단관계잡건』은 일제가 국외에서 활동한 한인의 항일운동 관련 첩보를 수집·보고한 문서들이다. 재러시아, 재만주, 재내지 등은 관련 소재지를 말하며, 일제가 한인들에게서 압수한 것이다.
4의 『최신창가집』에는 제일 앞에 애국가 가사가 나오며 제목이 ‘국가’(國歌)로 되어 있다. 가사는 1절과 후렴구만 나와 있으며,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5의 『애국창가집』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등사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된 것이라고 한다.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설립한 학교이다.
8의 「신한청년」은 신한청년당 기관지이다. 주필은 이광수였다. 속표지에 애국가 가사가 실려 있다. 앞의 『찬미가』의 애국가 가사와 비교해볼 때, 1절의 ‘보호’, ‘우리 대한 만세’, 3절 ‘구름업시 놉고’, 4절 ‘님군을 섬기며’라는 구절이 각기 ‘保祐’, ‘우리 나라 만세’, ‘놉고 구름업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었다. 즉 「신한청년」 창간호에 실린 가사는 현행 애국가 가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현행 애국가 가사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9의 ‘모필본(毛筆本) 애국가 가사지’는 1945년 윤치호가 사망하기 전에 자녀들의 요청으로 직접 붓으로 애국가 가사를 써서 남긴 것이라 한다. 이 가사는 『찬미가』 가사와 비교해볼 때, 딱 하나 4절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차이는 후일 논쟁에서도 윤치호설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1907년 작(作)”이라고 적었다.
이처럼 애국가 가사는 윤치호 역술의 『찬미가』에서 처음 선보인 뒤, 1910년부터 만주와 러시아, 미국과 하와이 등 국외 독립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각지로 퍼진 애국가 가사는 단어나 구절이 일부 수정되거나 앞뒤가 바뀌어 있다.

4) 김인식의 애국가
김인식은 근대 서양음악을 한국에 도입한 개척자이자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노래는 1910년 「보중친목회보」(普中親睦會報)에 실렸다. ‘보중’은 ‘보성중학’의 줄임말이다. 제목은 ‘愛國歌, KOREA’로 되어 있고, 작사자는 김인식으로 되어 있다. 가사는 1절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궁화가와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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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인식의 애국가는 국외의 항일무장투쟁 단체를 중심으로 애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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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 원병상은 그의 수기(手記) “신흥무관학교”에서 아침 조회 때 애국가를 불렀다고 하면서 1절과 후렴을 적어 놓았다. 이 애국가는 김인식의 애국가와 내용상 일치한다. 1923년 만주에서 조직된 참의부에서 불렀던 애국가도 2절 뒷부분은 다르지만 김인식의 애국가 가사와 대체로 일치한다. 길림성 반석현(盤石縣)에서 활동한 한족노동당에서 편찬한 국어교과서에도 김인식의 애국가가 실려 있다. 일본어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흡사하다. 이처럼 김인식의 애국가는 1910-20년대 만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신흥무관학교, 참의부, 한족노동당 등을 중심으로 애창되었다.

1955년 작사자 논쟁과 ‘조사위’ 활동

해방 직후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언급은 1947년 5월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에서 발견된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매일 아침 임시정부 요원들과 애국가를 불렀는데, 이 애국가가 ‘안창호 작(作)’이라고 한 것이다. 근거는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일 안창호설의 주요 근거로 작동한다.
1년 뒤인 1948년 10월 박은용은 「동아일보」에 “애국가고(攷)”라는 글을 3회 연재하며 안창호설을 비판하고 윤치호설을 주장하였다. 주요 근거는 『찬미가』와 ‘모필본 애국가 가사지’ 등이었다. 이 두 자료는 지금까지 윤치호설을 주장하는 대표적 자료가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논쟁으로 비화하게 된 계기는 예기치 않은 데서 시작되었다. 1955년 4월 초순, 외국의 백과사전 제작팀이 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우리 정부에 애국가 관련 내용을 문의하였다. 이에 대해 작사가는 안창호, 작곡가는 안익태라고 문교부가 통지할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접한 김인식은 4월 중순, 자신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1907-08년경 진명여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할 때, 학교 창립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본인이 작사하였다는 주장이었다. 후렴구는 ‘황실가’(무궁화가) 가사를 그대로 따랐다 한다. 김인식의 주장은 진명여학교 제자들의 잇따른 증언으로 이어졌다. 이 주장을 계기로 작사자 문제는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 소식에 윤치호의 5남 윤기선은 ‘모필본 애국가 가사지’를 근거로 윤치호가 1907년 작사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이 두 주장을 계기로 작사자가 안창호·김인식·윤치호 3인으로 확대되자, 문교부는 작사자 규명 문제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의뢰하였다. 국편은 즉시 고종·순종 당시 발간된 각종 문헌자료를 수집하며 규명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국편의 규명작업과는 별도로 신문지상에서는 연일 작사자를 둘러싼 보도가 이어지며 논쟁이 벌어졌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위 3인 외에도 민영환과 최병헌이 작사자라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작사자 범위는 5인으로 늘어났다. 최병헌설은 1905-06년 정동 자택에서 애국가 본문을 작사하고 후렴은 무궁화가를 빌렸다고 한다. 민영환설을 제외하면 윤치호설과 최병헌설은 후손들이, 안창호설은 지지자들이, 김인식설은 본인이 주장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최병헌설과 김인식설은 후렴구에 무궁화가 가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안창호설은 한두 구절만 수정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작사자 범위 확대로 국편에서도 문헌자료 수집과 조사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 4월 중순 주요한은 윤치호 원작에 안창호 수정설을 제시하였다. 수정설의 근거는 ‘충성을 다하여’라는 구절이다. 이에 대해 윤치호의 동생 윤치왕은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의 한영서원에서 발간한 팸플릿에 황실가와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애국가가 있었다고 하면서 주요한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처럼 갈수록 논쟁이 확산되고 언론의 비난이 지속되자, 국편에서는 4월 하순 그간 수집된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작사자를 심의할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를 구성하여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작사자 문제가 제기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구체적 입증 자료는 발굴되지 않았으며, 관련자들의 주장과 증언만이 난무한 상태였다. 이에 문교부 장관은 5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조사위에서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틀 뒤인 9일 조사위 구성, 11일 위원 19명 선임에 이어 13일 조사위를 개최하였다. 13일 1차 회의에서는 윤치호와 김인식이 유력 작사자로 거론되었으나, 자료 불충분으로 확정짓지 못했다.
이때 조사위에 보고된 자료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이하 조사자료)이다. 조사자료는 4월 초 작사자 문제가 불거진 후 30여 일 동안의 조사를 거쳐 정리된 것이다. 조사자료에는 애국가와 관련한 각종 자료와 30여 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5인의 작사자설이 정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행 애국가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무궁화가, 백종섭 소장 창가집에 실린 애국가와 무궁화가 등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와 주요한의 주장도 정리되어 있다.
1차 보고 이후, 김인식은 또다시 자신이 작사했음을 주장했다. 이즈음 회사원 김도협은 부친의 유품에서 발견된 『한영서원용 창가집』을 동아일보사에 제공하였다. 이 창가집에는 무궁화가와 애국가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김인식설과 윤치호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문교부는 6월 15일 생존자 김인식을 비롯하여 윤치호와 최병헌 가족들을 대상으로 증언 청취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김인식은 조사위 참석은 거부한 채 자신의 작사설만 되풀이하여 주장하였다. 또한 각종 인사들의 증언 등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작사자 논쟁은 김인식설과 윤치호설로 점차 굳어졌다.
조사위는 6월 2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는 없이 작사자 4인의 가족과 증언자들의 주장과 반박만 난무하였다. 이에 언론에서조차 ‘자파(自派)의 영수(領袖)’가 작사자라는 설전만 계속될 뿐, 이렇다 할 증거는 제시하지 못한다고 하며 비판하였다. 결국 2차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3차 회의는 7월 28일에 열렸다. 이에 앞서 7월 4일경 윤치호의 후손은 ‘모필본 애국가 가사지’를 사진으로 찍어 국편에 제출하였다. 이 가사지는 그동안 후손들에 의해 언급된 것으로 사진 판본이나마 제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100여 일간의 자료조사 결과, 입증 자료로는 윤치호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조사위 해체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입증 자료가 없었던 다른 작사자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날 경우, 조사위를 다시 소집할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이로써 4월 초 시작된 작사자 논란은 100여 일간의 조사를 마쳤다.

1955년 이후 작사자 논쟁

1963년 주요한은 『안도산전서』를 출간하며 다시 안창호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1955년 당시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주요 근거는 홍재형(안태국의 사위)이 장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즉 안창호가 대성학교 대리교장 시절, 서울에서 내려온 윤치호에게 무궁화가 1절이 적당하지 않으니 고쳐 부를 것을 제안하자, 윤치호는 안창호에게 생각한 바를 물었다 한다. 이때 안창호가 미리 써놓았던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노래가사를 보여주자, 윤치호는 좋다고 하면서 찬성하였다. 그러자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주요한의 주장은 안창호설의 주요 근거로 거론된다.
이처럼 1955년 논쟁 이후 잠잠하던 작사자 문제가 다시 제기되면서 1960년대에는 전언 등에 근거한 주장이 주를 이루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그나마 자료에 입각한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1975년 10월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독서신문」에 윤치호 작사설을 실었다. 이 글은 작가가 윤치호의 일대기를 연구하기 위해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이 소장하고 있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동안 주장만 나왔던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에 반향은 컸다. 그 자료는 다름 아닌 1908년 『찬미가』, ‘모필본 애국가 가사지’, 재미동포 양주은이 소장하고 있던 애국가 원본이 든 사진집 등이었다. 양주은 자료를 제외하면 이미 1955년 당시 언급된 자료이나, 원본이 발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던 중, 1981년 서지학자 안춘근이 애국가 관련 자료 3편을 발굴하여 발표하면서 작사자 논쟁을 확산시켰다. 안춘근이 발굴한 자료는 앞서 언급한 한문애국가와 애국충성가 등 세 가지였다. 안춘근은 이 세 자료를 근거로 애국가 가사 원형이 1903-04년 사이에 나타나므로 1907년 윤치호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지를 이어받아 1986년 김연갑은 안춘근이 발굴한 3종의 애국가들을 근거로 현행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1990년에는 「시사토픽」에서 안창호설에 무게를 두는 듯한 글을 실었다. 주요 근거는 『애국가와 안익태』(김경래 저, 1966)의 내용이었다. 김경래는 안익태가 자서전을 쓰기 위해 메모한 것을 그대로 옮겼다고 하면서 안창호설을 주장했다. 1930년 미국으로 유학간 안익태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황 목사로부터 애국가가 안창호가 지은 것이라고 들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그러면서도 「시사토픽」 측은 이 주장이 하나의 ‘설’일 뿐,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된 것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작사자 논쟁에서 정돈된 견해들이 나왔다. 1991년 국어연구원은 애국가를 분석한 끝에 윤치호 작사의 무궁화가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후렴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무궁화가를 현행 애국가의 원형이라고 발표하였다. 1992년 김연갑은 애국가의 후렴이 「독립신문」에 실린 무궁화가에서 최초로 나타나며 1908년 윤치호 역술의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 가사가 현행 애국가의 최초 원형이라고 주장하면서 윤치호설을 주장하였다. 다만, ‘역술’이라고 표시된 점을 들어 윤치호를 저자가 아닌 기록자로 표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8년 단행본 출간을 계기로 김연갑은 윤치호설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윤치호설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1994년에는 공동창작설이 새롭게 나왔다. 대표적 연구자는 노동은과 이명화이다. 주장의 핵심은 “애국가의 노래 가사와 표현법은 당시 많이 쓰였던 다른 애국가류에 쓰인 관용적인 표현들의 조합”이므로 “애국가 작사자는 한민족 구성원의 공동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2010년 이후에는 주로 흥사단을 중심으로 안창호설이 제기되고 있고, 최근에도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글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최근 안창호설은 독립운동가 후손인 윤정경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증언의 요지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1907년 선천예배당에서 불렀던 ‘백두산과 두만강물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찬미가를 듣고 착상을 얻어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되는 ‘애국찬미가’(애국가)를 지었으므로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라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애국가 가사에 관한 주요 자료는 1890년 후반 「독립신문」에 실린 ‘무궁화가’, 1903-04년 필사된 ‘한문애국가’와 ‘애국충성가’, 그리고 1908년 『찬미가』에 실린 ‘무궁화가’와 ‘애국가’, 그리고 윤치호 친필로 알려진 ‘모필본 애국가 가사지’, 1910년 김인식의 ‘애국가’ 등이다. 이 가사들은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으로 전파되어 불리곤 했다. 물론 가사는 약간 변형되거나 수정되었다.
애국가 가사의 원형은 1890년대 후반 대한제국 시절 무궁화가 후렴에서 비롯되었다. 1903-04년경에는 후렴구뿐 아니라 본문 가사와 유사한 애국가 가사가 필사본에 나타나며, 1908년에는 『찬미가』를 통해 현행 애국가와 거의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는 1919년 현재의 애국가로 정리되는 형태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몇 가지 자료밖에 없던 상황 탓인지, 1955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작사자 논쟁은 자연스레 자료보다는 증언과 진술, 전언과 전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한 양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경험과 전해 들은 이야기는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하듯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 변형되곤 한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회고록 등을 인용할 때, 반드시 사료 비판을 통해 언급된 사실을 검증해야 한다. 회고록 등에 언급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 나라의 상징인 국가(國歌)를 다룬다면, ‘비과학적 억측’이 아닌 ‘과학적 잣대’라는 기준으로 엄정하게 풀어야만 할 것이다.
노래는 구전(口傳)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다. 입으로 전해지는 것은 전파력이 강하다. 그러나 노래에 담긴 정확한 지식 정보까지 담보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추체험적(追體驗的) 이해’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추체험적 이해’란 현재의 입장이 아닌 당시 상황과 조건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지적소유권이나 표절의 개념이 없던 시절, 과연 ‘역술’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주(註)

1 김도훈, “애국가 작사자 관련 논쟁에 대한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4(2018).
2 “EDITORIAL NOTES”, THE INDEPENDENT, 1987년 8월 17일.



김도훈 | 독립운동사와 정치사상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새로운 하나된 한국을 꿈꾼 유일한』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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