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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애국가, 개정해야 하나]
특집 (2021년 3월호)

 

  새로운 애국가, 정말 필요한가
  

본문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의 단체인 광복회와 그 회장이 친일파 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현행 애국가를 폐지하고 새 애국가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공식 석상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으려 한다. 애국가를 둘러싼 이러한 움직임은 많은 국민을 당혹과 혼란에 빠트리고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하고 분노하게 한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김원웅과 광복회)이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 얼과 혼이 밴 애국가를 더럽히고 짓밟는 것을 두고 보기 어렵다.
애국가와 관련된 이런 혼란과 착오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애국가의 역사적·문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애국가를 지은 저자와 애국가를 부른 시대 상황과 맥락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애국가를 폐지하고 새 애국가를 짓는 문제를 생각하고 논의하려고 한다.

애국가의 역사적·문학적 의미

애국가는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고 나라의 주권을 잃었을 때 민족을 깨워 일으켜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그러므로 애국가에는 한민족의 자부심과 긍지, 나라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헌신, 높고 고결한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다.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 하세”는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와 우리 땅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번영에 대한 간절하고 사무친 염원을 담고 있다.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는 자연환경의 변화와 도전에도 굴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꿋꿋하고 강인한 기상을 긍정하고 확인한다.
3절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는 높고 넓은 가을하늘처럼 높고 고결한 신념과 크고 둥근 보름달처럼 온전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음을 노래한다.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강인한 기상과 높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조건과 상황, 욕망과 감정에 매이지 말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다짐을 담고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선진문명을 경험한 서재필과 윤치호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한국 민족과 민중을 무지하고 게으르고 무능하고 더럽다며 멸시하고 불신하였다. 왕과 관리들도 민중을 업신여기고 낮추어보았다. 그러나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최대한 높이고 존중하고 신뢰하고 앞세웠다. 애국가는 민족적 정체성과 민주적 주체성을 고양시키는 노래다.

애국가의 저자와 역사적 배경

애국가는 안창호가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1907년에 지어진 노래다. 민(民)을 나라의 새로운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키려고 조직한 신민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공화의 이념을 명확히 제시한 단체다. 애국가의 첫마디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라를 되찾고 새로 세우려는 간절하고 사무친 심정으로 짓고 부른 노래다.
이 시기에 안창호는 애국가에 담긴 간절하고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1906년 말에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성한 “대한신민회취지서”에도 “심장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려는 간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의지가 나와 있다.1 이에 반해 윤치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빼앗겼을 때, 이를 필연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라의 독립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보았다. 그는 왕과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민중의 무지와 무력함에 환멸을 느꼈고, 선진문명국인 일본의 부강한 힘을 찬양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제의 무력(武力)에 맞서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애국가의 정신과 철학도 윤치호와는 상반되고 안창호와는 일치한다. 애국가 1-4절의 가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바람서리에도 불변하는 기상”, “땅을 초월한 가을하늘과 보름달의 고결함”,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 등은 모두 자연조건이나 현실상황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초월적 의지와 정신을 드러낸다. 애국가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안창호는 어떤 난관과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불사조처럼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자연조건과 현실의 상황에 순응하는 상황주의자였다. 그는 현실을 지배하는 부강한 국가의 군사력(‘칼’)이 곧 정의(正義)라고 생각했다.2 윤치호는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도 교육을 받고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교양을 쌓아서 새로운 문명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민교육운동에는 힘을 썼지만 애국가를 지어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시대의 상황과 맥락에서 보든, 사상과 정신에 비추어보든 애국가를 지은 사람은 윤치호가 아니라 안창호다. 1907년에 안창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신민(新民) 운동을 하려면 민족과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태극기), 나라꽃[國花], 애국가가 필요함을 알았다. 박영효가 만들었다는 태극기는 이미 나라의 깃발로 사용되고 있었다.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꽃은 배꽃[梨花]이었으나 독립협회 시절에 윤치호가 지은 황실찬미가가 널리 불렸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어서 무궁화를 민족의 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안창호는 도쿄를 거쳐서 한국에 왔는데 도쿄에 머무를 때 박영효를 찾아가서 태극기의 의미를 묻고 유길준을 찾아가서는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유길준은 노래를 지을 재주가 없다며 사양하였다.
안창호는 1895년에 나온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읽고 나서 그를 깊이 존경하였다. 같은 해 유길준은 독립경절가를 썼는데, 이 노래의 6-8절에 나오는 “장백산(백두산)과 동해물”, “우리 국민의 기염(氣焰)”, “우리 국민의 진심(眞心)”, “이 기염 이 진심(의 강한 힘)으로 우리 임금을 지키세”3는 각각 애국가 1절의 “동해물과 백두산” 2절의 “우리 기상”, 3절의 “우리 가슴 일편단심”, 4절의 “이 기상과 이 맘으로 님군을 섬기며”4와 상통한다. 애국가와 독립경절가의 이런 일치와 상통은 애국가 작사자가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애국가와 독립경절가의 이런 일치는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결정적인 문헌증거라고 생각한다. 윤치호는 유길준을 학문적·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했으며 유길준을 불신하고 미워하였다. 따라서 윤치호가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를 바탕으로 애국가를 지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에 반해 안창호는 사상적으로 유길준을 깊이 존경했다. 그는 1913년에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인격수양을 위한 단체 흥사단을 조직했는데 흥사단은 유길준이 한국에서 만든 단체의 이름이었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교육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힘차게 전개하였다. 30세의 청년 안창호는 미국과 한국에서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과 선봉에 서게 되었다. 서양의 문명을 일찍 받아들여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서북세력에 대하여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치, 사회, 문화를 주도한 기호세력은 경쟁심을 가지고 경계하였다. 안창호는 신중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 회원들은 주로 독립협회의 청소년 회원들이었다. 안창호는 기호세력의 중심인물이면서 독립협회 회장을 지냈고 당대의 최고 지식인 명망가인 윤치호를 교육운동의 전면에 내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안창호는 윤치호를 대성학교 교장, 청년학우회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안창호는 당시에 널리 불린 윤치호의 황실찬미가와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를 바탕으로 애국가를 지은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1-4절의 가사는 독립경절가를 바탕으로 삼았으나, 애국가의 형식과 틀은 황실찬미가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애국가의 후렴은 황실찬미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애국가의 글자 수도 황실찬미가의 글자 수와 똑같다. 애국가와 황실찬미가의 곡조도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으로 같았다.
오랫동안 널리 불러오던 윤치호의 황실찬미가를 새로운 애국가로 교체하는 것이 안창호로서는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치호의 황실찬미가는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의 이념을 내세우는 신민회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안창호는 민주공화의 이념과 정신을 담은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안창호는 윤치호의 독립협회와 황실찬미가를 계승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윤치호가 지은 노래의 후렴을 그대로 가져올 뿐 아니라 그 노래의 글자 수까지 맞추어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창호가 지은 애국가는 윤치호와 유길준의 노래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지만, 안창호의 정신과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 애국가 1-4절은 안창호가 제시한 흥사단의 4대 정신(무실, 역행, 충의, 용감)을 품고 있다.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몸과 맘이 마르고 닳도록 지극정성을 다하는 무실(務實)의 정신을 담은 것이다. 2절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 바람서리에도 변함없는 우리 기상”은 어떤 시련과 도전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하고 강인한 용감의 정신을 나타낸다. 3절 “높고 넓은 가을하늘, 구름없이 깨끗한 보름달, 우리 가슴 일편단심”은 땅의 물질적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초월한 고결하고 한결같은 충성과 의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4절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어떤 시련과 난관에도 흔들리지 말고 힘써 행동하자는 역행(力行)의 정신을 말해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지은 애국가를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를 통해서 널리 보급하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애국가와 무궁화를 민족의 가슴에 깊이 새겨놓았다. 1907-10년에 안창호는 애국연설을 하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만세를 고창하게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온 겨레가 함께 일어나 태극기를 손에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3·1독립운동 이후 안창호는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애국가를 1-4절까지 함께 불렀다. 애국가는 수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담긴, 얼과 혼을 다해서 사무치게 부르던 노래다.

새 애국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몇몇 정치꾼들이나 모사꾼들이 정치공작을 하고 아무리 선전선동을 해도 애국가를 우리 민족의 마음과 삶 속에서 쉽게 제거할 수 없다. 국회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7월에 국회에서 이미 애국가, 태극기, 무궁화를 국가의 상징으로 확정하는 법률안을 상정한 일이 있다. 그러나 국가 상징에 관한 사항은 관습헌법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법제화하는 것은 애국가의 위상을 격하시킬 수 있고 애국가의 존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그 법률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국가 상징에 관한 사항이 관습헌법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애국가의 교체는 국민투표 절차를 밟아야 하는 중대한 문제다.
애국가 교체에 관한 논의는 경솔하게 진행될 수 없다. 무슨 근거로 애국가를 교체하자고 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애국가를 폐지하고 새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친일을 했으며 그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는 불가리아의 민요를 표절했다. 둘째, 애국가의 작사자가 친일파인 윤치호이다. 셋째, 애국가의 가사는 시대정신에 뒤떨어지고 소극적이고 평범하다.

먼저 이 논거들을 하나씩 따져보자. 첫째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을 했으므로 애국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애국가 자체와 애국가의 곡조를 등치시키는 논리의 비약과 오류가 있다. 안익태의 애국가 곡조는 애국가가 태어난 지 20년쯤 후에 애국가에 입힌 옷과 같다. 1907년에 태어난 애국가는 이미 3·1운동과 임시정부에서 열렬히 불렸고, 많은 애국독립 지사들과 국민이 사랑하며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1935년경에 안익태가 새로운 애국가 곡조를 지어서 애국가에 입혔고 점차 그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게 된 것이다. 안익태의 곡이 더럽혀지고 적합하지 않으므로 애국가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마치 옷이 더러워지고 맞지 않는다며 옷과 함께 옷을 입은 아이(사람)까지 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애국가의 곡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 곡조를 지어서 애국가를 부르면 된다.
그리고 안익태가 지은 애국가 곡조에 대한 논의는 보다 객관적이고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안익태의 친일과 나치 부역행위는 그 실체와 진실을 밝혀서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했고 그 행위가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안익태가 애국가의 곡조를 지을 때 민족을 배신하고 친일을 하자는 심정으로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익태의 생애와 활동을 심층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검토한 후에 그의 곡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둘째, 애국가 작사자가 친일파인 윤치호라는 주장은 애국독립운동의 역사적 진실과 애국가의 정신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앞에서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충분히 밝혔다. 흔히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몇 가지 문헌증거들은 현대 문헌비평학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검토를 통과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증거자료는 윤치호가 1945년 9월경에 썼다는 ‘애국가 친필 가사지’와 1908년에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이다.5 해방 전까지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서 굳게 침묵했던 윤치호가 친일파로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딸의 요청으로 썼다는 친필 가사지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더욱이 친필 가사지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시절에 수정한 구절 ‘충성을 다하여’가 나온다. 그리고 윤치호는 친필 가사지에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써놓고는 가족들에게는 1907년이 아니라 그보다 몇 해 전에 애국가를 지었다고 모호하게 말하였다.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총명한 지식인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의 연도를 혼동해서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윤치호가 1897년에 지은 황실찬미가를 바탕으로 안창호가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음을 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안창호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함께 협력했으며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에 자신이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 같다. 안창호가 죽을 때까지 윤치호는 안창호를 친구로 생각하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안창호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였다.
윤치호의 황실찬미가는 황제와 황실에 대한 충성과 찬양을 담은 낡은 노래이고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밋밋하고 평범한 노래이다. 그러나 나라 땅과 한국 민족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담은 후렴구는 애국가 1-4절의 민주공화의 정신, 초월적 정신과 결합하여 새롭고 혁신적이며 높고 풍부한 의미와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에 의해서 그 후렴구는 애국가라는 새로운 노래로 창조된 것이다. 애국가는 안창호의 정신과 신념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며 안창호는 애국가의 창작자이며 주인이다.
셋째, 애국가는 시대정신에 뒤처진 것이고 시시하고 평범한 것인가? 애국가는 주권재민과 민주공화의 정신과 이념을 담은 노래이고,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추구하는 노래이다. 애국가에는 지역감정, 신분과 남녀의 차별, 진보와 보수의 대립, 좌익과 우익의 갈등을 조장하는 요소가 조금도 없다. 또 애국가에는 국가주의적 요소나 잔재가 조금도 없다. 안창호의 정신과 사상이 그렇듯이 애국가는 민주공화의 정신과 함께 세계의 정의와 평화로 나아가는 세계대공의 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안창호라는 인물과 더불어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이면서 또 내일이기도 하다. 애국가를 부름으로써 우리는 지역감정과 당파주의를 청산하고 남북분단을 극복하여 자주독립과 통일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고, 한반도와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다.
애국가의 가사가 소모적이고 소극적이며 시시하고 평범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한민족 5,000년 정신과 문화의 역사에서 가장 간절하고 사무치는 구절이다. 이것을 어떻게 소모적이고 소극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나? 몸과 맘이 마르고 닳도록 정성을 다하고, 산과 바다가 마르고 닳도록 간절하고, 사무치는 얼과 혼이 살아 있어야 생명과 정신도 깊고 크고 풍부해지며 산업과 문화도 융성할 수 있다. 돈과 기계, 무기와 권력에 짓눌린 정신과 혼을 가진 나라는 쪼그라들고 말라버릴 것이고, 그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과 혼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는 갈수록 크고 아름답고 진실하고 장엄한 나라가 될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는’ 나라는 망하려 해도 망할 수 없고 쪼그라들려 해도 쪼그라들 수 없는 강인하고 웅장하고 존엄하고 장엄한 나라가 될 것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평범하고 시시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민주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우리나라 어느 동네에나 있는 ‘앞산의 소나무’이다. 이런 소나무는 평범하고 소박한 민중, 시민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어디나 흔하게 있는 소나무는 평범하지만 꿋꿋하고 강인한 절개와 의지를 상징한다.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누비고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큰소리를 쳐야 웅장하고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낡은 소영웅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다. 민주시대는 평범하고 소박한 민중의 생활과 모습에서 비범함과 위대함을 보는 시대이다. 작고 낮아 보이는 민중의 일상생활 속에서 크고 깊고 풍성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민주시대의 인문학과 철학이 되어야 한다.
무궁화는 일본 꽃이고 남산의 소나무도 일본의 나무이며 일편단심은 일본의 천황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고 애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헛소리다. 애국가가 오늘 이처럼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된 것은 애국가의 잘못이 아니라 민족분단과 군사독재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기구한 운명 탓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정권이 국민을 짓밟으면서 애국가를 부르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 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애국가를 독재정권과 결부시켰고,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반감이 애국가에 대한 저항과 반감으로 이어졌다. 독재정권이 애국가를 강요했다고 해서 독재정권과 애국가를 등치시키고 애국가를 폄하하는 것은 애국가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애국가는 독재자의 노래가 아니다.
애국가는 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주며 민주공화의 신념을 새겨주는 민주의 노래다. 애국가는 오로지 한민족의 민주적 주체성,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높이고 민족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노래다. 민족이 통일될 때까지, 그리고 민족이 통일된 후에도 애국가는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불러야 할 우리의 노래다. 애국가는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신문화의 유산이며 소중히 간직할 보물이다.

주(註)

1 안창호, “대한신민회취지서”, 주요한 편저, 『安島山全書』(흥사단, 2015), 1068-1070.
2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한울, 1994), 79-80.
3 유길준의 ‘독립기념경절회 창가’는 일본어로 1895년 6월 18일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12절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요미우리신문」의 원문은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database.yomiuri.co.jp)
4 최초의 애국가 4절에서 “임군을 섬기며”는 훗날 임시정부 시절에 안창호가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하였다.
5 애국가 작사자와 관련된 문헌자료들과 그 자료들에 대한 문헌비평에 대하여는 박재순,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 건국 100주년, 애국가 작사자 확정을 위한 연구』(종문화사, 2020), 86 이하, 98 이하를 참조하라.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ᄋᆞᆯ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 등이 있다. 현재 씨ᄋᆞᆯ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유튜브 강의 ‘박재순의 씨ᄋᆞᆯ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2021년 11월호(통권 7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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