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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여성신학, 한국의 여성신학자들]
특집 (2021년 2월호)

 

  북미 여성신학과 그 흐름에 대한 단상
  

본문

 

이 글에서는 미국에서 시작한 여성신학을 소개하기 위해 이분법을 극복하는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의 여성신학을 소개하고, ‘의심의 해석학’을 주장하며 성서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성서에 드러나 있는 차별적 편견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징을 관계적이고 공감적인 이미지로 다시 상상해볼 것을 권하는 샐리 맥페이그와 엘리자베스 존슨을 통해 하나님이 약자들에게는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이다. 이후 우머니스트신학을 성립시킨 들로레스 윌리엄스의 신학에 대해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현재 여성신학에서 떠오르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는 가톨릭 신앙을 배경으로 한 여성 생태신학자로서 시카고 지역 에반스톤에 있는 게렛감리교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여성 생태신학자들 중에는 자연의 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서 기독교 전통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사람도 있으나, 류터는 가톨릭 신학자답게 자신의 전통을 중시하고 그것의 재해석을 통해 여성생태학적 모티브를 찾고자 했다.
그녀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종교와 성차별주의』(Religion and Sexism, 1974), 『새 여성, 새 세계』(New Woman, New Earth, 1975, 1995), 『여성들을 위한 안내서: 여성신학을 위한 읽을거리들』(Womenguides: Reading toward a Feminist Theology, 1985), 『여성교회』(Women Church, 1985), 『가이아와 하느님』(Gaia and God, 1992) 등 다수가 있다.
로즈마리 류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해서 죄의 존재가 되었다고 정의하는 기독교 담론에서 여성차별의 원인을 찾아낸다. 성서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죄를 지었다고 정의하는데, 류터는 여기서의 죄를 남녀차별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즉 류터는 인간의 타락한 죄를 가부장제라고 보았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 것이 인류의 죄이다. 백인이 흑인을, 왕이 하인을, 아버지가 자녀를 억압한 것 등이 이해 해당한다. 따라서 남성의 여성 지배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로즈마리 류터는 또한 인간성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다는 구분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여성과 남성이 모두 동등한 인간성과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류터는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켰지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창조의 원칙에 따라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주장했으며,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가치가 기독교의 초월적 영성적 합법화로 인해서 더 굳건해졌다고 분석한다. 또한 기독교의 주류 사상만 보기보다는 소종파들의 사상도 발굴할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사회학’의 도움을 받아 신학의 가부장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성서를 이해하는 ‘계시’에 대한 개념도 류터는 한계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계시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류터는 성서 계시를 판단하는 기준을 “여성의 인간성을 촉진시키는 해방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로 제시한다. 여성의 온전한 인간됨을 감소시키거나 거 부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신의 계시일 수 없다. 류터는 “예언자적 전통”을 선호한다. 여성을 포함하여 약자를 억압하거나 차별하는 내용은 성서의 본래 의도에 어긋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아니다. 류터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가부장제에 저항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필요하다. 가부장제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세워져야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신앙은 성서를 포함한 교회,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여성신학을 종교체험에서 떨어진 원시적인 집단으로 추방시켜버린다. 여성들의 신앙은 그러나, 악을 창조하지 않고 선을 창조하며 우리에게 궁극적인 힘을 불러일으키시는 신적 근원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의 형상으로 여성들 또한 창조되었다.1

여성신학자 중에서는 기독교가 너무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떠난 이들도 있다. 이에 반해 류터는 여성신학의 가능성을 유대 기독교 전통 안에서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류터는 여성신학이 남성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독교 교리들을 비판하고 (죄와 구원 등)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인간성에 관하여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여성신학적 모델, 방법론, 메타포로 성서와 기독교 역사를 재해석하고자 한 성서학자이다. 1938년 루마니아 태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망명하였고,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북미와 유럽의 교회와 학교에서 활발하게 저작 활동과 강연을 펼쳐왔다. 피오렌자는 성서가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의 배경에서 탄생한 책이라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성서를 ‘신화적 원형’(mythical archytype)으로 바라보는 견해와 ‘역사적 모형’(historical prototype)으로 바라보는 견해 중에서 후자로 볼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성서해석은 해방과 구원의 비전을 성서에서 제공받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직접 끌어오지는 않는다. 피오렌자는 여성에게 복음이 되느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성서를 보며, 성서의 텍스트들을 ‘여성해방의 경험’이라는 제1원칙 아래에 두고 이에 근거하여 엄밀하게 비판한다. 『돌이 아니라 빵을』(Bread not Stone)이라는 책에서 피오렌자는 성서를 여성의 입장에서 의심하며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한다. 여기서 ‘의심’은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서에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해야 함을 의미한다.
피오렌자는 여성해방을 위한 성서해석의 모델을 네 가지로 제안한다. 여기서는 세 번째와 네 번째를 종합하여 설명하겠다. 첫째,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이다. 이 해석은 성서가 남성적 언어로 쓰였고 가부장적 사회구조들을 반영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서를 당연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의심의 해석학은 지배자 중심의 언어와 매체를 통해서 여성들의 실상과 행위가 왜곡되고 잘못 재현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남성 중심적 가치관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다. 이 해석들을 바꾸려면 이러한 수사학-이데올로기적 행위들을 노출시키고,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들을 제거해야 한다.
성서를 해석할 때 성차별적이거나 약자에 대한 폭력의 이야기가 그대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설명될 때가 있다. 피오렌자는 이런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성경을 쓴 저자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성서에 표현된 남성 중심적 언어는 여성들의 자기 이해와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번역과 해석은 여성을 소외시키고 은폐시킨다. 성차별 언어들은 여성을 보이지 않는 존재,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 남성에게서 유래된 존재로 묘사하거나, 여성을 틀에 박힌 고정된 역할들과 이미지로 성격화한다. 의심의 해석학은 원래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서 번역이나 해석에도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지 ‘의심’해야 함을 큰 과제로 제시한다.
피오렌자가 제안하는 두 번째 모델은 ‘회상의 해석학’(a critical hermeneutics of remembrance)이다. 이 회상의 해석학은 역사 실증주의적 해석 방식이 만들어놓은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틈새”를 주목한다. 즉 남성 중심 성서 텍스트들과 가부장 전승들을 ‘역사’ 혹은 문학으로 바라봄으로써 여성을 포함한 피지배자들의 관점으로 성서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이는 성서 안의 여성들의 역사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회상의 방법은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남성 중심적 시공간에서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망을 기억함으로써 여성들의 고통과 투쟁을 들려지게 하여 전복시키는 힘(subversive power)으로 만든다. 이 해석학은 성서 안에서 여성들의 유산을 되찾을 뿐 아니라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희생과 고통)을 되살려서 여성의 역사(Her-Story)를 재건한다. 이러한 해석학을 적용하는 예로 입다의 딸, 레위인의 첩 등의 이야기 중 말해지지 않은 부분을 상상을 통해 이어서 말해 보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드라마 성서읽기, 이야기식 성서읽기)
피오렌자는 여성 등의 피지배 계층을 위한 성문서가 없을 때, 이러한 수사학적 역사학적 재건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피오렌자는 이러한 재건을 사실로 제시하기보다는 유비로 상상력으로 메꿔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다음 관점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상상의 해석학’ 혹은 ‘창조적 실현의 해석학’(hermeneutics of creative actualization)이다. 이 방법은 이상적 비전을 제시하고, 정의와 복지가 재건된 또 다른 세계를 “꿈꾼다.” 상상의 공간에서는 가능성이 자유롭게 탐구되고 시간이 상대화된다. 상황들을 다시 경험하고 새로운 바람을 꿈꿀 수 있는 기억과 가능성의 공간이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상상력’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가장 모범적인 제자였다면, 성서에 언급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상상해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샐리 맥페이그

생태여성신학자인 샐리 맥페이그는 하나님에 관한 명칭을 ‘상징’으로 보되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신학자이다. 맥페이그의 논의는 자연 파괴와 여성억압을 인류가 저지른 두 가지 대표적 악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하며, 가부장체계가 여성억압뿐 아니라 생명의 파괴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생태여성신학은 이러한 생태여성학의 문제제기를 성서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영성에 적용시킨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생태여성신학은 근대 인간 중심의 철학과 과학이 상호 관계성을 중시하는 생태계의 법칙을 깨트리고 말았다고 보며, 생명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기독교 언어의 한계를 비판하고 생명력 있는 언어와 상징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의 신학』(Methaphorical Theology, 1982)에서 맥페이그는 가부장적 종교 언어와 상징적인 페미니스트 언어를 분리하고 있다. 종교적 언어는 본래 직유적 표현이나 문자적 표현보다는 상징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의 언어는 문자주의에 갇혀 있었다고 비판한다.
종교는 친숙하지 않은 것을 친숙한 것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친숙한 것은 ‘상징’이어야 한다. 맥페이그는 전통적 기독교의 하나님 이미지가 독재적이고 군주적으로 표상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은 우리가 가족, 교회, 공동체, 우주에서 다른 생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규정하게 되었다. 서열, 지배, 독재적 지도력과 폭력과 파괴가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서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관계적이다. 어머니, 아버지, 연인, 친구, 구원자, 통치자, 하인, 동료, 해방자 등 모두 친밀감과 사랑, 공감과 돌봄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멕페이그는 기존의 하나님 상징, 곧 가부장적 군주적 모델에 대비되는 대안적 인격 모델로 어머니로서의 하느님(God as Mother), 연인으로서의 하느님(God as Lover), 친구로서의 하느님(God as Friend)을 제안한다.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하나님이 어머니, 연인, 친구로 그려질 때, 지배나 독재가 아닌 통합성이나 상호 의존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맥페이그는 『하나님의 몸』(Body of God, 1993)에서 ‘몸’이라는 개념을 생태적 대안 개념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인간이 이해하는 (머리가 다른 기관을 지배하고 지도하는) 일반적인 몸이라기보다는 지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몸들(산, 바다, 숲, 곤충, 새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지구는 하나님의 선택된 체현(구체화)을 의미한다. 즉 지구의 온난화가 해수면 상승과 (약한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여) 자연재해를 일으키듯 지구 전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현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구 생명체의 가장 작은 몸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존슨

엘리자베스 존슨은 『하느님의 백한 번째 이름』(She who is, 1992)과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Quest for the Living God, 2007)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존슨은 여성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교회와 사회의 일원으로 평가받도록 하는 것이 신학적 목표라고 설명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상호 파트너십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말하는 것”이 중요한데, 기존의 하나님은 군주적이고 아버지의 모습을 한 전지전능한 심판자이자 인간과 상호 관계성이 없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었음을 비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은 ‘유비’와 ‘상징’으로 묘사되어야 하지만 ‘아버지’ 혹은 ‘남성’으 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존슨은 이러한 하나님 이미지가 ‘우상숭배’라고 고발하였다. 다양한 사람의 경험과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신비와 다양성의 하나님이 특정한 종류의 사람, 즉 서구 백인 남성의 이미지로만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상’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남성 못지않게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지탱시켜 온 여성도 그들의 경험와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남성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여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번영을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다. 여성들은 기도를 하고 영성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주, 왕과 같은 지배적인 하나님의 이미지에 불편함을 경험한다. 보편적으로 교회에서 남성 하나님의 이미지는 거룩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의 이미지로는 말해지지 않으며, 여성적 이미지로 하나님을 말하면 오히려 마치 무언가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이런 이유로 존슨은 질문한다. “여성성은 신성을 이름짓는 데 장애물이 되는가?” “여성이 처한 현실이 하나님의 임재와 행함을 드러내는 기호로 기능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상징하기 위해 여성의 삶에서 끌어낸 비유를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엘리자베스 존슨에 따르면,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여성들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모습을 뜨겁게 사랑하면 하나님을 표현하는 여성 이미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인식하는 것과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을 어머니로 형상화하는 것은 어머니 하나님이 우리네 삶의 기원과 창조적 공급원이 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모성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존슨이 하나님의 최종적 이미지를 여성이나 어머니로 제안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너무도 오랫동안 남성과 아버지의 이미지로만 하나님을 상상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첫 번째 다른 이미지로 여성의 이미지를 언급한 것이다. 다양하게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 신비와 다양성의 하나님을 만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들로레스 윌리엄스

유니온신학교의 교수이며 우머니스트 신학자인 들로레스 윌리엄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자신만의 신학적 색깔을 보여준 여성신학자이다. 아프리카계 여성의 신앙 여정과 삶의 경험은 백인 여성의 그것들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밝히면서, 그들만 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신학을 설명하고 있다. ‘우머니스트’(womanist)라는 용어는 앨리스 워커가 자신의 산문집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에서 처음 도입한 용어로,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중상류 백인 여성에게 국한된 용어라 비판하며 생존과 직접적 경험의 여성학으로 제시된 것이다.
우머니스트신학은 해방신학과 흑인신학을 출발로 삼고 있으나, 북미 흑인 여성들의 경험을 더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경험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만나지고 말해져야 하는지를 제안하는 신학이다. 하나님에 대한 언설들(God-talk)은 북미 흑인 여성들의 과거와 현 재의 삶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윌리엄스는 『광야의 자매들』(Sisters in the Wilderness)을 통해 북미 흑인 여성들의 삶을 자리매김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신학적 교리들에 대해 숙고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흑인여성신학은 흑인신학과의 연대(인종차별과의 싸움)를 느끼는 면에서 백인여성신학과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도, 성차별의 문제에 관해서는 흑인신학과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서 출발하였다. 윌리엄스는 흑인신학 안에서 흑인 ‘여성들’의 목소리는 잘 들려지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공교롭게도 북미 흑인 여성들의 삶과 경험은 여성신학(인종차별로 인한 백인 여성의 억압)에서나 흑인신학에서나 소외되었다.
우머니스트신학은 북미 흑인 여성들이 백인 남성뿐 아니라 백인 여성들에 의해서도 억압받아왔음을 밝힌다. 물론 흑인 남성들도 백인 중심 사회에서 노예로 차별받고 억압당했지만, 여성들의 경험은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흑인 여성들은 자신과 가족들, 더 나아가 백인 주인의 가족과 경제를 책임지고 감당해야 했다. 흑인 여성들을 지지한 사람은 남편인 흑인 남성이 아니라 차라리 예수였다. 흑인 여성은 노예로서의 제도적 억압에 더해 육체와 성에 대한 억압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한 현실을 들로레스는 ‘대리모 역할’(surrogate role)로 규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들로레스는 ‘대리모’ 역할을 하는 북미 흑인 여성들의 삶과 아브라함 축복서사에 등장하는 하갈의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은 노예제도에서 오는 부당함과 여주인 사라의 억압을 피해 광야로 도망친다. 광야에서 임신하고 지쳐 있는 하갈을 쳐다 보지도 않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줄 어떤 의사도 없어 보이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님은 다시 돌아가서 여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며 하갈에게 솔깃한 약속을 하는데 그것은 하갈이 낳을 아들이 많은 족속 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갈은 절망 가운데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기념하여 그 이름을 ‘엘로이’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하갈은, 하나님이 사라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번째로 만난 하나님은 하갈을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주신다. 왜냐하면 하갈이 집에서도 쫓겨났고, 먹을 것조차 없는 훨씬 절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갈은 자기 아들을 살게 보살펴준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 광야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 “하나님은 흑인 여성과 그 자녀들의 생존 전략에 반응해주는 존재이다. 이는 해방이 아니라 생존이다. 흑인 여성들과 가족들이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은 아무 길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길을 내주는 분이었다.”라고 들로레스는 북미 흑인 여성들의 하나님을 설명한다. 이러한 하갈과 하나님의 만남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흑인 여성들의 신앙적 체험이라고 해석한다. 하갈은 육체적으로 대리모였고, 흑인 여성들 또한 현재까지 대리모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인해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아이를 대신 낳아주기도 하고 이들의 성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흑인 여성들이 여전히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대리모 역할을 윌리엄스는 자유의지로 죽음을 선택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비유한다. 이것은 자발적 대리모 역할에 해당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흑인 여성이 경험한 고통이다. 흑인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대리모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예수 또한 인종차별과 노예제도 등의 사회 부정의를 감당하면서 그것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는 흑인 여성들의 앞선 모델과 같다. 대리모 등의 고통을 경험하지만, 결국 계속해서 그것들과 싸우며 저항하고 생존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여성신학은 남성에 대비된 ‘여성’의 경험과 현실을 근거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출발했다.(류터, 피오렌자) 그리고 샐리 맥페이그와 엘리자베스 존슨은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로만 말하는 것은 지배적이고 강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관계적이고 돌보는 자로서 여성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말하려고 시도했다. 이후 들로레스 윌리엄스는 북미 흑인 여성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동안 말해지지 않은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시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이 생기고 있다. 하나님을 ‘여성’ 혹은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말할 때 그 말해지는 ‘여성’ 이나 ‘흑인 여성’이 마치 모든 흑인 여성의 이미지인 것처럼 고정화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모성이나 돌봄이 모든 여성의 역할이라고 말해지거나 ‘흑인 여성’은 모두 대리모 역할을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최근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와 같은 여성신학자는 하나님을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테홈(tehom)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남성이나 여성 혹은 흑인이나 백인 등의 인격적 이미지로 하나님을 말하기보다는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존 재로 하나님을 이야기하려고 시도한다.


주(註)

1 Rosemary Radford Ruether, “The Future of Feminist Theology in the Academy”,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53 (1985): 710.



최순양 | 드류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신학의 선구자들』, 『21세기 세계 여성신학의 동향』, 『남겨진 자들의 신학』(이상 공저) 등이 있다. 현재 협성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청년부 담당 목사로 일하고 있다.

 
 
 

2021년 3월호(통권 7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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