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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1년 1월호)

 

  죽음 교육의 장(場), 장례예식
  

본문

 

개신교는 의례(儀禮)가 그리 발달한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장치들로 간소하게 의례를 구성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이다. 풍부한 상징과 복잡한 절차로 다층적 의미를 생산해내는 의례 중심적 종교와 비교해볼 때,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개신교는 구술 언어와 청각에 의존하는 간단하고 명료한 설교 중심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한계에 주목해서 최근에는 개신교 내부의 예배갱신운동들이 예전적 예배로의 회복을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시도가 기독교의 다른 종파들과 구별되는 개신교의 특이성을 부각하기 위한 좋은 전략인지에 대해서 회의가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단순함과 명료함을 중시하는 개신교 예식의 특징은 장례예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개신교 장례예식은 죽음 자체에 대한 성찰보다는 부활의 소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 죽음과 그에 따른 장례를 부활을 가르치는 계기로 삼고 있다고 하겠다. 전통적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이란 ‘하늘나라에서의 생일’이기에 결코 슬픈 일이 아니어야 했다.
특히 중세의 기독교는 죽음 이후의 심판과 형벌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을 훈계하기 위한 일종의 위협 수단으로도 기능했다. 여기에 연옥의 교리가 발전하면서 죽음은 심판의 두려움이 스며든, 그래서 모두가 피하고 싶은 사건으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연옥에서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그전처럼 인정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중세적 태도를 온전히 떨쳐버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마르틴 루터는 죽음을 보다 강력한 소망의 표현으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더하여 장 칼뱅은 부활의 표지로서 매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존 녹스도 신앙인들에게는 장례가 부활에 대한 훈육의 계기가 됨을 역설했다.
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은 죽음 자체에 대해 성찰하기보다는, 부활의 소망에 초점을 두면서 죽음 너머의 부활을 가르치는 계기로서의 죽음을 언급했을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입장은 이후 개신교의 장례예식이 충분하고 의미 있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1645년에 발표된 웨스트민스터 예배 규범은 신앙인의 주검을 아무런 의식 없이 즉시 매장할 것을 선포했다. 그 결과 개신교 장례예식은 빈약함과 간소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장례예식이 빈약하고 간소하다는 점이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목회적으로는 매우 미흡할 수 있다. 특히 죽은 이와 물리적으로 이별해야 하는 유족과 조문객에게는 충분치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신교 장례예식은 유족과 조문객의 의례적 욕구를 수용하면서, 죽음과 삶에 대한 의미를 풍성히 조명하는 의례로 갱신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애도의 장(場)으로서의 장례예식

한국 개신교에서 ‘죽음’은 상실에 대한 절망보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관련된다. 장로교(예장 통합)와 감리교에서 채택한 예식서에서는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의미의 ‘영결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영결’이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 적합하지 않은 용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개신교의 장례예식은,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현실을 전제로 거행되는 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주제를 정직하게 다루지 못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너무 아프고 슬픈 죽음이라는 인간의 현실을 부활의 메시지로 쉽게 덮어버린 것이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현실을 부활의 메시지로 덮어버리는 것을 개인의 불멸성에 대한 환상이라고 이해한다. 인간 존재의 돌이킬 수 없는 유한성을 집단적 소망의 관념으로 은폐하는 경향으로 본 것이다.
엘리아스가 지적하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장례예식이 우선 죽음에 대한 분명한 선언을 포함해야 한다. 죽음의 선언은 통과의례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분리를 명확히 해주고,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미래를 향한 전이를 시작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고인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진행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애도는 궁극적 상실로 인해 생겨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살아남은 자들이 먼저 고인의 죽음이라는 주어진 현실을 인식해야 하고, 인식한 그 현실과 조정하고 타협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거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들이 섣부른 위로를 받기보다는 애도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애도는 죽은 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고인이 살아 있을 때 그와 맺었던 관계를 공동의 기억으로 저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고인이 살아 있을 때 맺었던 관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이때 장례예식에서는 죽은 사람에 관해 가능한 한 정직하고 온전하게 이야기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분위기 조성은 장례예식을 애도의 장으로 만드는 초석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장로교(예장 통합)의 예식서는, 조사(弔詞) 순서에서 순서를 맡은 이가 먼저 고인에 대한 기억을 추려서 전달하고, “상황이 허락되면, 자유롭게 일어서서, 고인에 대한 의미 있는 기억들을 나눌 수 있다.”라는 지시문을 게재하고 있다. 이 지시문은 장례예식이 애도의 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황적 언어의 사용

기독교의 장례예식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기독교의 장례예식은 또한 기독교의 생사관을 성찰하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시간과 공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기독교 장례예식 안에서의 케리그마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유족과 조문객이 요청하는 의례적 욕구를 가볍게 여길 수도 없다. 여기서 기독교 장례예식에서의 케리그마와 유족 및 조문객들의 의례적 욕구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며, 따라서 둘 사이의 상호 균형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기존 기독교 장례예식에서의 한 가지 문제점은, 케리그마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바람에 장례예식 자체가 예식 참여자들에게 충분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례예식에서의 케리그마는 일반적인 성격을 띠기 마련이어서, 특정 개인의 개별적 상황을 고려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케리그마를 통해 예식 참여자들의 감정을 사려 깊게 고려하지 못할 경우, 장례예식은 기계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사회적으로 처방된 공식적 의례와 형식적 문구는 회피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나름의 표현을 통해 의미를 얻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제시되는 케리그마는 기계적인 장례예식을 낳게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례예식의 케리그마가 예식 참여자들의 개별적 상황을 반영하는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개인의 죽음이라는 개별 상황은 변화하는 화용론적 콘텍스트이기 때문에, 그것이 전통적인 교리에 비추어 형식적으로만 해석되고 상황화되지 못할 경우, 장례예식의 비인격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례 언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의례 언어의 정통성과 권위가 초월성에서 확보되는 것이라는 입장이 대세였다. 의례 언어는 사용자의 개인적 의도나 목적에 따라 변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는 전통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어야만 그 권위가 인정된다는 주장이었다. 의례 언어가, 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적 요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고정된 텍스트라고 여겨지는 과정을 텍스트화(entextualization)라고 부른다. 이런 텍스트화는 언어가 발화되는 상황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확립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입장에 대립각을 세우는 새로운 입장이 등장하고 있다. 텍스트는 현재의 화용론적 맥락과 연결되어야만 그 권위와 유효성이 생겨날 수 있다는 입장인데, 필자는 이 두 가지 입장 중 후자를 지지한다.
필자의 소견에 따르면, 개신교 장례예식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일반적이고 교리적인 언어가 아니라 상황적이고 개별적인 언어이어야 한다. 텍스트화에 갇힌 일반적이고 교리적인 언어로는 고인의 특정한 이야기를 예식 안으로 끌고 들어올 여지가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예식 참여자들의 지금 여기에서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7년에 일본에서 열린 ‘삶의 끝 산업 박람회’에서는 소프트뱅크사의 인간형 로봇 ‘페퍼’가 등장했다. 페퍼는 장례를 주관하는 로봇 승려였다. 검은 승복을 입은 로봇 페퍼는 경전을 읽고 북을 두드렸다. 또한 장례예식을 거행하고 조문객과 대화하며, 장례예식에 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현장을 생중계해 주었다.
당시 페퍼의 등장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영적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로봇이 거룩한 종교 의례를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문제는 일반적이고 교리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텍스트화에 갇혀버린 개신교 장례예식에 대해서도 동일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장례예식 집례자가 일반적이고 교리적인 언어만을 사용한다면, 이런 장례예식 집례자는 페퍼와 얼마나 차별화될 수 있겠는가.

죽음 교육의 장(場)으로서의 장례예식

한국 개신교의 경우 평소에 죽음을 교육할 기회가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장례예식이야말로 죽음을 주제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교육한다는 것은 물론 죽음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통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분리하면,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는 개인들에게 삶과 죽음의 분리를 강요한다. 오늘의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체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사회체계 안에서 개인의 죽음은 지극히 파편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 입장에서 개인의 죽음은 보상되어야 할 일종의 경제적 손실을 뜻할 뿐이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개인의 생애와 죽음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와 관계를 맺었는지, 어떤 신앙공동체에 속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병원의 입장에서 죽음은 삶과 연결된 과정이 아니라 의술의 한계를 드러내는 치부일 뿐이다. 이렇듯 여러 사회체계로 분화된 오늘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죽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떠한 파장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놓고 이렇듯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체계에서는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생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미란 기본적으로 전체성의 맥락에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과의 관련성 속에서 의미를 생성할 수 있고, 죽음 또한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 개신교는 신앙인들에게 죽음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 교육이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죽음을 준비시키는 교육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전체적인 맥락에 죽음을 정위시킴으로써 삶을 보다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함양하는 교육까지를 포함한다.
전통적으로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너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라.”라고 교육해왔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시행해야 할 죽음 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교육적 핵심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 개신교는 이제껏 시행해온 죽음 교육의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는 인간의 죽음이 파편화되고 개별화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으로 하여금 죽음과 삶을 연속적이고 통전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을 의미 있게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런 확장된 의미에서의 죽음 교육을 실시하기 가장 좋은 기회는 물론 장례예식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는 장례예식을 죽음 교육의 장(場)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별예식의 사전 교육

요즘은 권위 있는 주례자를 세우는 대신 가족과 친구를 초대하여 조촐하게 치르는 주례 없는 결혼 파티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다시 말해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적이고 고착된 유형의 결혼예식보다는 구조화되지 않고 유동적인 유형의 결혼예식을 더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향후 장례예식도 이런 경향을 띨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실제로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서구 사회의 경우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장례예식을 집례해줄 사람과 제대로 된 장례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개신교도 전통적이고 고착된 형태의 장례예식을, 집례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할 경우를 대비해서, 신앙인들에게 구조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유형의 장례예식을 준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의 일원이 숨을 거두기 직전 목회자를 불러 임종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형태의 임종예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가족끼리 모여 비공식적인 형태로 죽음을 앞에 둔 이와의 이별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
이별예식에서는, 모인 가족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미안했던 일과 고마웠던 일을 차례로 이야기해주고,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확인해줄 수 있다. 이를 통해 죽어가는 사람의 삶을 정리해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별예식은 임종예식의 평신도 버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이별예식은 공식적인 장례예식이 안고 있는 비인격화라는 문제도 해소해줄 수 있다. 이별예식은 지극히 일상적인 형태의 모임이긴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과 가족 구성원들을 평안하게 이끌어주고, 나아가 죽어가는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도록 인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가족들 서로의 삶을 회고하고 전망하며 일종의 특별한 다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엄숙하거나 장엄하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의례로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별예식도 신앙인들에게는 사전 준비나 교육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적절하고 필요한 사전 준비나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가족 구성원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슬피 울며 당황하기만 할 뿐, 의미 있는 이별예식을 진행할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평소 신앙교육 시간에 죽음 교육과 더불어 이별예식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목회자 없이 이루어지는 이런 이별예식은 종교개혁 정신에 충실한 예식이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르틴 루터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였다. 신앙인은 누구나 사제라는 만인사제설에 따르면, 목회자만 아니라 평신도도 사제이다. 따라서 사제인 가족 구성원이 목회자 없이 이별예식을 진행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신교의 강점을 드러내는 지극히 신앙적인 태도일 수 있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코로나 사태로 사망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대면으로 장례식을 치러주는 온라인 장례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데, 온라인 장례업체들의 도움으로 유족들은 고인의 묘지 안장을 실시간 온라인 중계로 지켜보면서, 화상채팅을 통해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환송한다고 한다.
이런 온라인 장례사업의 등장과 성황은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온라인 장례사업이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는 상업성과 비대면성의 문제를 냉철히 들여다보아야 하고,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한국 개신교는 목회자 없이 가족 구성원끼리 장례예식을 치르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장례예식을 비롯한 모든 의례가 공식성을 띠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들만 담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안선희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기독교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평신도를 위한 예배지침서 『예배돋보기』, 예배학 이론서 『예배이론·예배실천』, 기도집 『참 보기 드문 아름다운 사람』 등을 저술하였다. 『예배, 신비를 만나다』, 『예배, 사회과학을 만나다』, 『예배, 디지털 세상을 만나다』 등을 번역하였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2021년 2월호(통권 7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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