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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한국 기독교, 힘을 잃다]
특집 (2020년 12월호)

 

  2000년대 이후 기독교 싱크탱크의 둔화
  

본문

 

1960년대 이후 기독교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교회를 넘어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연구단체로 크리스챤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 한국신학연구소(이하 한신연) 등이 있다. 아카데미는 대화 정신의 생활화, 민주화, 중간집단 육성, 민주문화 공동체 형성 등에 중점을 두고 다양한 대화모임과 연구모임을 가져왔다. 기사연은 한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다양한 보고서를 출간하며 한국 사회와 교회의 실태를 파악하는 일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신연은 학술지 「신학사상」을 통해 민중신학이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1
그러나 오늘날 이런 기독교의 싱크탱크들이 과거의 위상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1970-80년대의 전성기 이후 점차 활동이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 한국 기독교 싱크탱크들의 역사를 살펴보며 2000년대 이후 이들의 활동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활동의 둔화 시점에 어떤 운영상의 변화가 있었는지 검토하면서 둔화의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사례

크리스챤아카데미는 2000년 ‘재단법인 대화문화아카데미’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한동안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가, 다시 2015년 ‘재단법인 여해와함께’로 기구가 재편되면서 부설기구 중 하나로 부활한 한국 기독교 싱크탱크의 대명사이다. 아카데미는 1959년 강원용을 중심으로 사회학자와 신학자가 모인 ‘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로 시작된 이래 대화 운동을 벌이며 한국 사회의 민주적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해왔다. 1962년 7월 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의 실질적 책임자인 강원용 목사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취리히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아카데미운동을 주창한 독일의 에버하르트 뮐러(Eberhard Müller)2와 만난 것을 계기로 아카데미운동이 한국에 도입되었다. 뮐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 이미 연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듣고 도울 길을 모색’하였고 연말부터 활동비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63년에는 뮐러와 일본 아카데미 책임자인 슈미트가 방한하여 한국의 아카데미를 시작하기 위한 점검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의 자주성과 토착화를 주장한 강원용과 뮐러 사이에 갈등이 있기도 하였지만, 1965년 2월 19일 한국기독교학술원 설립으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3 학술원 정관상에 드러난 목적은 (1)조사・연구, (2)대화모임, (3)실무자 훈련 등 세 가지이다. 1965년 5월 7일 이사회에서는 ‘학술원’이라는 명칭이 대중적이지 못하며 이미 유사한 명칭의 기관이 있어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기관명을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로 변경하기로 결의하고 문교부에 등록하였다.
아카데미운동의 기본 이념은 ‘대화’이며, 아카데미의 운영은 대화모임을 기본으로 한다. 대화모임을 통해 사회적 현안과 주제들을 논의하고 그 결론이 다시 다음 활동의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카데미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수많은 대화모임을 진행하였다. 1964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대화모임 통계는 다음과 같다.

[표1] 분야별 대화모임·연구위원회 통계(196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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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통계를 통해 21년간 총 254회의 대화모임을 진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매월 1회 대화모임이 있었다는 뜻으로, 대화모임이 아카데미의 핵심 사업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각 대화모임은 최소 1박 2일 이상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으며, 적게는 20-30명, 많게는 80-9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다양한 전문가들의 발제와 토론이 있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대명사처럼 받아들여지는 중간집단교육 역시 대화모임을 통해 출발하였다. 1971년 4월 2-5일에 “양극화 문제: 인간화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대화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아카데미는 우리 사회에 상명하달식의 왜곡된 정치적 양극화, 다시 말해 “상대방이 갖는 권력의 양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감소시키고 그 대가로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키는”5 권력집중 현상을 ‘정치화’라고 명명하면서, 이를 ‘민주화’를 통해 치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인간화를 위해서는 지식인과 대중을 매개하고 양극단의 대화와 화해를 촉진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중간매개집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6
이 논의를 이어받아 같은 해 5월 22-23일에는 “중간매개집단의 강화”를 주제로 대화모임이 열렸고, 9월 17-19일에는 “정치화와 민주화”를 주제로 대화모임이 열렸다. 대화모임의 종합토론은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양극화의 치유가 중간매개집단의 육성과 민주화라는 두 개의 길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매개집단의 형성이 곧 민주화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결과 중간집단교육은 1974년부터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중단될 때까지 종교・노동・청년・여성·농민의 다섯 분야에 걸쳐 열성적으로 진행되었다.7

[표2] 1970년대 중간집단교육 시행 통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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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 중간집단교육뿐 아니라 아카데미의 전반적인 활동을 일시적으로 둔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로도 대화모임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90년대의 대화모임은 분야에 따라서는 “가장 활발하게 꽃핀 시기”로 평가받기도, 실질적 성과로 이어졌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종교간 대화모임은 정례화되었고, 모임의 구성원이 젊어졌으며, 모임과 만남의 수가 증가했다.9 방송 관련 대화모임도 199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방송법 개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10
문제는 2000년대 이후이다.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연혁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9년까지 대화모임으로 명명된 행사는 14회이며, 그 명칭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어도 대화모임으로 추측되는 것까지 합해도 19회에 불과하다. 홈페이지 연혁에 누락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1984년까지 평균 매달 1회 정도의 대화모임이 진행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치이다. 모임의 주제도 70% 이상이 개헌과 정치개혁 문제에 집중되어 있어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젠더, 복지 등 다방면의 이슈를 다루던 이전의 다양성이 보이지 않는다.11 전통적 핵심사업인 대화모임의 둔화와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새로운 의제(agenda)의 등장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카데미가 ‘이전만 못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사례

기사연은 1979년 한국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과 한국기독교학술원이 통합되면서 설립되었다. 당시 기독교가 사회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사회과학적 분석에 의한 운동의 근거와 이론을 마련하는 일이 미흡하다는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 과정에서 독일교회와 네덜란드의 개발지원단체인 ICCO(Interchurch Organization for Development Cooperation) 등이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12 기사연의 설립 목적은 “한국 사회가 민주적이며 정의롭게 발전하는 데 교회적 공헌”을 하는 것이었다.13
설립 이후 10년간 기사연은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주 활동 영역은 연구조사, 연구분석, 연구협의회로 이러한 조사・분석・협의의 결과를 보고서 및 단행본, 소식지의 형태로 출간하는 것이 기사연의 핵심 사업이었다. 기사연의 연구조사 사업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진행되어 농촌개발, 여성빈곤, 공업화, 노동, 한반도 주변정세, 남북관계, 자본의 자유화, 실업, 개헌, 지역실태, 신학, 88올림픽, 지방자치에 걸쳐 1988년까지 총 20권의 조사연구 총서가 발간되었다. 그 밖에도 한국의 분야별 실태를 조사한 ‘한국의 사정’ 시리즈도 교회, 노동, 경제, 정치, 농촌 분야를 구분하여 총 24권의 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역사를 다룬 ‘역사와 기독교’ 시리즈 12권, 통일 관련 3권, 기타 연구도서 19권을 비롯하여 무수한 연구 결과물을 출간하였다.
1992년 『기독교연감』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항목에 따르면 기사연은 1990년대부터 각 연구 프로젝트마다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고 계간으로 대중지를 출간하면서 이전의 연구사업을 더욱 확대하는 한편, “명실상부한 사회운동단체의 자료센터”가 될 계획까지 밝히고 있다.14
그러나 이후의 사업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듯 보인다. 계간지 「기사연무크」는 단 세 번만 발간되었다. 2018년부터 새롭게 시작된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조사 통계분석 자료집」의 발간과 영문으로 된 Korea Situation을 제외하면 1990년대 이후 기사연이 발간한 출판물은 10종이 채 되지 않는다. 기사연 홈페이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출판물이 8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이들 중 대부분은 타 기관의 연구나 외국 도서의 번역서를 기사연의 부설 출판사인 민중사에서 출판한 것으로, 기사연 자체 연구의 보고서와는 성격이 다르다.15 19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기사연이 1990년대 들어 급격하게 둔화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활동은 더욱 침체되었다. 이 시기 기사연의 활동은 연대활동과 공동 심포지엄의 개최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연구집단의 정체성을 가진 기사연이 이제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없는 한계에 몰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극단적인 침체는 재정 악화와 그에 따른 인력 감축 때문으로 보인다. 초대 원장이었던 조승혁 목사는 당시 기사연의 실무자가 임원, 연구원, 총무부, 출판부, 자료실 관리인 등을 포함하여 16명에 달했다고 기술하였다.16 1992년 『기독교연감』에는 원장을 포함한 직원이 그 절반인 8명으로 보고되었으며, 그중 연구인력은 연구실장 1명과 연구원 1명, 단 두 명에 불과하였다.17 2000년대의 인력 구조가 어떠했는지 미처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2015년 이후 기사연의 상근직원은 연구실장 1명과 행정직원 1명으로 더욱 악화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기사연의 주요 사업이었던 사료정리와 온라인 아카이브 설치는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위탁받은 사료들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등에 이관하면서 중단되었다. 이때 정리된 일부 자료가 기사연 홈페이지와 운산 김관석 아카이브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지만, 에큐메니컬 아카이브의 설치라는 당초의 목적에 비하면 부족한 결실이다.

한국신학연구소의 사례

한신연은 1969년 안병무 교수가 독일교회와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후, 1971년 1월 이사회 구성, 1973년 2월 기획위원 선정의 과정을 거쳐 1973년에 출범하였다. 출범 당시 한신연의 목적은 (1)세계 신학적 성과를 한국의 상황에서 재조명하고 세계 신학 동향과 호흡을 같이하는 데 이바지하고, (2)자주적인 신학적 사고와 표현을 위해 노력하고 주체적인 한국신학 정립의 기틀을 마련하며, (3)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구조에 대한 연구와 통일을 전망하는 신학적 연구를 수행한다는 세 가지였다.18 초기의 목적은 이후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신앙과 생활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문화’의 계발을 위한 연구 및 훈련, 범교단적인 목회자 및 평신도의 신앙훈련 및 교육, 한국 기독교와 한국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신학 연구, 종교다원사회에서 종교간 협력에 이바지하는 연구 및 선교, 종교 및 신학사상의 국제 교류를 통해 기독교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연구 교류를 수행”으로 확대되었다.19
한신연은 학술연구와 교육, 출판의 영역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한일신학협의회, 동아시아 역사연구모임, 신학 교재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 집필팀 운영과 같은 연구 영역과 평신도 신학강좌, 월요신학서당, 각종 공개강좌, 외국학자 초청강연과 같은 교육 영역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한신연은 가톨릭과 공동 신학연구도 진행하였는데 그 결과가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와 공동으로 편역한 『하나인 믿음』(분도출판사, 1990)의 출간이었다. 한신연의 활동이 교회일치운동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은 것이다.
논문집 「신학사상」과 각종 신학서적의 출판 역시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학사상」은 1973년 8월 10일에 창간된 최초의 에큐메니컬 신학 전문 학술지로서, 한국 신학과 교회의 발전 및 기독교의 사회책임적 역할 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신연에 따르면 「신학사상」은 2005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등재학술지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신학 분야에서 최초의 사례였다.20
한신연이 발행한 도서는 300여 종을 넘어선다. 한신연이 출판에 주력한 분야는 신학 교재, 민중신학, 해방신학, 정치참여신학, 성서주석이었다. 한신연이 가지고 있는 에큐메니컬 신학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민중신학에 대한 기여는 한신연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국제성서주석』의 발간은 민중신학을 넘어 한국의 신학계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제성서주석』은 “한국 교계의 주석설교의 풍토를 조성하고 성서연구의 학문성을 자극하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세계적으로 매우 정평 있는 주석서를 엄선”하여 번역한 것으로 구약 26권과 신약 22권으로 완간되었는데, 1981년부터 1992년까지 12년 동안 순차적으로 발간되었다.21
한신연은 1994년부터 건축에 들어간 ‘영성과 평화의 집’이 1995년 말 완공되자 천안으로 이전하면서 재단 명칭을 ‘아우내재단’으로 변경하고 미래문화연구원, 한국디아코니아공동체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한신연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거기에 각 신학대학과 신학 관련 학회의 학술지들도 등재지가 되면서 「신학사상」의 위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학사상」은 2006년 구독료를 인상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2018년부터 정간을 결정하였다. 다행히 한신대학교학술원에서 「신학사상」의 출판을 승계하면서 폐간은 면하였지만 연구소가 자체 학술지를 발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재정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단행본의 발간도 점점 줄어들더니 2009년부터 올해까지 출판된 책은 11권에 불과하다. 단순 계산하면 그래도 매년 한 권은 발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도 변찬린이 1970-80년대에 출간한 책 4권을 2019년에 재출간한 것을 제외하면 더욱 초라해진다. 현재의 한신연은 연구소로서의 활동이 거의 정지된 상태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나가며

한국 기독교의 싱크탱크들은 모두 외국의 자금으로 설립된 후 운영 역시 상당 기간 외원에 의지해오던 곳이다. 아카데미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물적 기반을 확보했다. 아카데미하우스 건립 비용의 78%, 훈련센터 건립 비용의 75%가 독일의 보조금이었다. 기사연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았고 기사연의 초기 사무실은 전액 ICCO의 지원으로 마련되었다. 한신연 역시 1969년 안병무가 한국에 신학과 교회 발전을 위한 연구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일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보다 신학적인 지원을 요청한 결과 한국교회를 지원할 방법을 모색 중이던 독일교회가 이에 합의하면서 1973년 출범한 기관이다.
따라서 이 기관들의 창립과 운영에서 외원의 존재는 절대적인 요소였으며, 1990년대 이후 이 기관들의 활동이 둔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외원의 중단 이후 안정적 재정구조 마련에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진보적인 기독교 기관들에 대한 외국의 원조는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거의 중단되었다. 이는 이 기관들이 둔화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재정의 악화는 곧 인력의 감축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연구인력의 감축으로 싱크탱크로서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다.
다만 기사연에 비해 아카데미는 약 10년 정도 더 활발한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강원용이라는 인물의 명망과 강력한 리더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강원용의 존재는 다양한 후원을 이끌어내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1960년대부터 동양그룹의 이양구 회장과 한국판유리공업의 최태섭 사장, 1980년대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강원용 목사의 후원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00년 강원용 목사가 이사장에서 은퇴하면서 아카데미 활동의 둔화가 가시화된 것은 정재계에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가 아카데미의 운영에 얼마나 중요한 조건이었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강원용 목사가 은퇴한 이후 아카데미가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한국의 기독교 기관들이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를 암시한다. 권력의 집중과 세대교체의 실패가 그것이다. 일례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기사연의 원장을 맡았던 성해용 목사는 2010년 다시 원장으로 취임하여 2017년까지 원장직을 수행하였다. 개인의 거취야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이는 기독교계가 새로운 지도력을 세우는 일에 오랫동안 소극적이었던 구조적 문제에 따른 것이었다.
학원선교나 직장선교 등의 특수한 목적을 가진 다양한 선교단체의 활동인 파라처치 운동이 전반적으로 둔화된 현상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같은 학원선교 기관들의 둔화는 조직 내에서 성장하기 힘든 교계보다 상대적으로 기회가 열려 있는 일반 사회 조직으로 기독청년들이 이전한 결과이기도 하다.
기독교 싱크탱크들의 둔화는 해당 기관의 문제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 저하와 연관이 있으며 그에 따른 대사회적 이미지의 실추, 사회와의 학술 교류와 대화 가능성 차단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인문학의 열풍 속에서도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식인의 리스트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현실은 교세나 공신력의 약화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신학자나 목회자 또는 부유한 대형 교회의 자금력이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는 일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기반 위에 다시 집을 짓겠다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 지속가능한 연구와 담론의 재생산 구조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주(註)

1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Ⅲ』(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161-162.
2 뮐러는 독일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책임자이자 유럽평신도연합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민경배, “아카데미운동의 형성과 한국 사회”, 크리스챤아카데미 편, 『민주사회를 위한 대화운동』(문학예술사, 1985), 14.
3 이사회 구성은 당시 한국교회가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역량의 총집결이었다. 자세한 인적 구성은 민경배, 위의 글, 20-21 참조.
4 서굉일, “민주화의 길과 아카데미운동”, 크리스챤아카데미 편, 앞의 책, 167.
5 이항녕, “동의 없는 권력의 확대”, 『양극화시대와 중간집단』(삼성출판사, 1975), 193.
6 이정자, “1970년대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여성인간화 교육”, 「젠더연구」 19호(2014): 4.
7 1979년 3월 9일 크리스챤아카데미 중간집단교육 간사들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불법 비밀 용공 서클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공안사건.
8 크리스챤아카데미 편, 앞의 책, 299-419에서 정리.
9 김진, “1965년 ‘용당산 모임’에서 ‘평화 고리’까지”, 크리스챤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운동사: 열린종교와 평화공동체』(대화출판사, 2000), 325-357 참조.
10 오원한, “시민사회 공론장의 방송담론에 관한 연구: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방송대화모임을 중심으로”, 「언론과학연구」 제18권 4호(2018. 12.): 145.
11 (재)여해와함께 홈페이지-연혁, www.daemuna.or.kr/ko/history#12(2020년 11월 9일 접속).
12 조승혁, 『이런 세상에 예수님의 몸이 되어』(정암문화사, 2005), 174-175.
13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한국종교연감』(1995), 747.
1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편, 『기독교연감』(1992), 230.
15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홈페이지-출판물-90년대 이후, http://jpic.org/books/pub8(2020년 11월 9일 접속).
16 조승혁, 앞의 책, 175.
17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편, 앞의 책, 230.
18 임태수, “한국 신학과 교회 발전에 기여한 한국신학연구소 30년”, 「신학사상」 122호(2003): 59-60.
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온라인), ‘한국신학연구소’ 항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667(2020년 11월 10일 접속).
20 한국신학연구소 소식, “신학사상 학진 등재학술지로 선정,” 한국신학연구소 홈페이지, http://ktsi.or.kr/bbs/view.php?id=t_notic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2020년 11월 11일 접속).
21 임태수, 앞의 글, 68-69.



손승호 |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신체제와 한국기독교 인권운동』, 『기독교, 한국에 살다』(공저), 『한국시민사회운동 25년사』(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로 재직 중이며,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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