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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성적 지향과 차별금지법]
특집 (2020년 11월호)

 

  성적 지향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차별금지법
  

본문

 

사람을 어떤 종류의 차이에 근거해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같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런 차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든가, 아니면 그 역도 성립한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된다. 남자로 존재한다는 것과 여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왔기에 20세기 들어 각국은 이러한 가부장적인 질서를 해체하고, 양성 평등을 보장하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으며,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법에서도 양성 평등을 명확히 하여 보호하려고 하였다.(헌법 36조 1항, 양성평등기본법)
차이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평등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건강한 사회는 법률을 통해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보호하려고 한다. 장애인들의 경우, 현실적으로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법을 제정한다.(장애인 차별금지법)
이렇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차이 가운데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차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성적 지향에 의한 차이도 우리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만일 성적 지향에 의한 차이가 그저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차이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 사회에 오른손잡이가 많다는 이유로 왼손잡이를 차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듯이 어떤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대개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적 지향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성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간 우리 사회가 소수인 동성애자들을 차별하고 감시하며 억압해왔으며, 심한 경우는 처벌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이것을 어둡고 좁은 공간(closet)에 둘 것이 아니라 공개하여 그저 다양한 차이 중 하나로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성적 지향과 세상
이 세상에서 동성애는 다양하게 취급되었으며,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동성애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플라톤은 『향연』(Symposium)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동성애는 인간의 삶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일의 하나”라고 하기도 하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상당히 일반적이었다는 보고도 있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을 섬길 때 신전의 미동(美童)과 성적인 관계를 하는 방식이 존재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심지어 이스라엘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성전에 ‘미동의 집’이 있었다.
근대에 와서도 차이콥스키(P. I. Tchaikovsky) 같은 사람이 동성애자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할리우드의 배우들이나 미국의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영성 지도자로 알려진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어려워했으나, 이를 실천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1
그렇다면 동성애를 인정하고 인간이 가진 차이의 하나로 인정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장 큰 난점은 일단 이와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이 미끄러운 경사 길에서 과연 어디서 멈출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애의 하나로 인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양성애도 인정해달라는 요구나, 다자성애(polyamory)도 인정해달라는 요구와 밀접히 연관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경우 동성애 요구가 결국 양성애와 다자성애 요구와 같이 나타나는 일이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더 나아가 청소년 성애와 소아성애(pedophilia)도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있으며, 심지어 동물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수간(獸姦, bestiality, zoophilia)을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 2006년 6월 9일 캐나다 대법원에서는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수간도 허용될 수 있다는 판결을 대법관 7 대 1의 판결로 결의하여 대부분의 수간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했다고 한다.2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소아성애를 인정해달라는 요구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고들 논의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성 동성애자들 중 다수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동성애 관계를 맺기 위해서 여러 방도를 사용하고 있고, 이런 식의 동성애 매춘이 초래하는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청소년 보호법으로 처벌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데, 이는 청소년 보호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청소년 매춘 문제가 수없이 발생하고 이를 방치하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적 지향과 성서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이제부터 성서가 자증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성서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느냐에 따라, 또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이 나올 것이다. 오늘날의 퀴어 신학자들과 그들이 펴낸 퀴어 성서주석에 의하면 성서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문서이며, 하나님은 동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인간의 성적인 활동에서 만날 수 있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제시하고 있다.3 성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성서가 동성애를 비판하며 동성애를 금하고 있지만, 이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말이며,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규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논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르게 해석된 성서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이들은 위와 같은 두 가지 접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은 물론 신약 또한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확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4 그 당시 동성애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르호보암 시대에는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왕상 14:21-24), 더 악하게 되었을 때는 예루살렘 성전에도 고대 근동의 종교 관습을 따라서 ‘미동의 집’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는 동성애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하였고, 구약의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하면서 성전 안에 있는 ‘미동의 집’을 헐어버렸다.(왕하 23:7) 또한 바울이 동성애적 행위는 자연적인 방식을 벗어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천명할 때(롬 1:26), 그 사회는 동성애가 만연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성서는 동성애를 잘 아는 상황에서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 진술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셔서 그 남자와 여자의 성적 관계를 통해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게 하셨다.(창 1:28) 아직까지는 생육하며, 번성하며, 땅에 충만해지는 일이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동성애자들조차 자신들은 동성애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것이니, 대다수는 이성애를 하여 이 사회를 유지・발전시켜 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한 채 우리끼리 어떤 견해를 정할 수 없다. 바른 신학은 성서가 자증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에 따른 신학은 인간의 성적 지향을 그저 다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의 빛에서 보았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그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셔서’(창 2:22)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도 창세기의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에 근거해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4-5)라고 물으셨다. 결국 예수도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명확히 하신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영혼과 삶의 모든 것을 부패시켰다. 그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우리의 성(性)도 타락시켜 온갖 음행이 우리 안에 있게 되었다. 이 음행은 매우 폭넓은 것이어서 그 가운데 잘못된 성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있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음행은 인간의 다른 죄악과 함께 우리 안에서 계속 나타난다. 바울은 그런 온갖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μαλακοὶ)나 남색하는 자(ἀρσενοκοῖται)나5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바울은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드러내는 바이고, 이런 일을 행하는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행하는 다양한 죄악의 목록이기에 ‘그러면 우리는 다 하나님 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낸 대상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과 절연된 상황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복잡한 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가(“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그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이 은혜이다. 교회 공동체는 죄악이 전혀 없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 모든 죄악 속에서 이 모든 죄악을 행하던 자들이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교회 공동체의 성원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이 말씀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교회의 지체들
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이 세상의 온갖 죄악 속에 있으면서 자신들이 행하는 바가 죄악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구속의 적용하심을 받아 이 구절이 말하는 대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구속의 빛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관련 없이 행하며 하나님의 명시적인 뜻에 반해서 행하면 그것을 죄악이라고 파악하고, 이전에 그런 행위를 한 것을 회개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그런 모든 잘못을 끊어버리고, 성령에 의존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성서가 말하는 원칙에 따라서 이전에 우리가 행하던 것이 죄라고 말하고, 그 죄를 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역시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는 바를 구현하려고 애쓰게 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에 대하여
지난 6월에 장혜영 의원 외 9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소위 포괄적 차별 금지법안은 성적 지향에 의한 차이도 다른 모든 차이와 마찬가지로 여기며, 차별이 발생한 경우에 다양한 처벌 방식을 마련해놓고,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이런 차별을 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워 실천하게 하는 법안이다. 즉 소위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행위가 발생했다고 하면,
(1)“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차별행위의 피해자”)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다.(제41조 1항)
(2)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 “피해자의 신청에 의하여 또는 직권으로 시정명령을” 할 수 있다.(제42조 1항) 그러므로 어떤 차별 피해 사례가 진정되면, 일차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에 의한 권고가 주어지는데, 이때 피진정인이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면 시정명령이 주어진다.
(3)“시정권고를 받은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권고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시정명령 및 시정명령 불이행시 3,000만 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제41-44조) 이 이행강제금이 반복해서 부가될 것으로 여겨지기에 앞으로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어떻게 나타날지 짐작할 수 있다.
(4)이 법안에는 “위원회는 차별행위로 인정된 사건 중에서 피진정인이 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당해 사건의 소송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제49조) 이에 비해서 소위 차별 가해자는 자신이 모든 소송 비용을 감당하여야 한다.
(5)그리고 “법원이 피해자의 청구에 따라 차별의 중지 등 그 시정을 위한 적극적 조치 및 손해배상 등의 판결을 할 수 있도록 함”이라고 했으니(제50조), 앞서 언급한 이행강제금뿐만 아니라 나중에 법원이 다른 법들, 특히 이 법에 근거하여 내릴 판단에 근거해서 손해배상금도 지불해야 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고의성, 지속성 및 반복성, 보복성, 피해의 규모 및 내용을 고려하여 판단),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을 지급할 수 있도록”(제51조) 되어 있다.
더구나 이 법안에서 말하는 피해의 입증 책임은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한 진정인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입증 책임의 전가) 제52조는 “이 법률과 관련한 분쟁해결에 있어, 차별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주장하면 그러한 행위가 없었다거나,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는 점은 상대방이 입증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법안은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차별을 낳는 법안이다. 그래서 어떠한 현안에 대해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건전하게 논의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런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대한민국의 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가면서
그렇다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통과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반대하는 것일까? 아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어느 개인을 차별하거나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동성애자들을 인격적으로 모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서를 중요시하고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는 측면에서 동성애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끼리 서로 용인하는 것은 다 좋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느냐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신관과 성서관의 차이가 모든 차이를 만든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서가 말하는 그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그 하나님이냐, 아니면 (무신론을 포함한) 다른 신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1 이런 문제를 포함한 포괄적 논의를 위해 이승구, “헨리 나우웬에 대한 개혁신학적 한 성찰”, 『우리 이웃의 신학들』(나눔과섬김, 2014), 51과 그 글에서 인용한 다른 글들을 보라.
2 Feliks Garcia, “Most Bestiality is Legal, Declares Canada’s Supreme Court”, In- dependent(9 June, 2016). www.independent.co.uk/news/world/americas/bestiality-legal-canada-supreme-court-a7073196.html.
3 이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이승구, “퀴어 신학의 주장과 그 문제점들”, 「성경과 신학」 89(2019): 27-56을 보라.
4 동성애와 관련하여 성서의 여러 구절을 어떻게 주해하느냐의 문제는 이승구, “동성애”, 『광장의 신학』(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10), 57-81을 보라.
5 이런 어구들의 의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승구, “동성애”, 75 이하를 보라.



이승구 |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한국 교회가 나아갈 길』 등이 있다.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20년 12월호(통권 7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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