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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9월호)

 

  네트워크로 연장된 인간: 나는 연결한다, 고로 존재한다
  

본문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그의 책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에서 미디어는 몸의 ‘연장’(extension)1이라고 주장하면서 “최소한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소멸시키며 우리의 중추신경체계 자체를 전 지구적인 것으로 [연장]하고” 있으며,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인간은 “감각과 신경을 [연장]”하고 있다고 말한다.2 1964년에 출판된 이 책의 주장들은 당대보다 오히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준강제적으로 네트워크 사회에 돌입한 2020년의 지구촌에서–사실 매클루언은 56년 전에 발간된 그 책에서 이미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더 호소력을 갖는다.(이하에서 매클루언의 전거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시한다.)
코로나의 전 지구적 유행(팬데믹)으로 인해 지구 문명이 비가역적인 변화에 돌입했다면서, 여기저기서 코로나 이후에 발생할 변화들을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예상과 분석이 대체로 인과율적 분석, 즉 A라는 원인으로부터 B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근대적 도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3
매클루언에 따르면, 문명의 변화는 결코 인과적이지 않다. 매클루언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을 인용하면서 “단순히 연속해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는 인과성의 원리가 없다. 즉 하나의 사건 뒤에 다른 사건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변화가 있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다.”라고 주장한다.(38) 적어도 사회나 문명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과율적 분석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변화의 결과들이 나타난 시점에 역추적하여 그 원인들을 특칭한 사후적 사고의 결과에 가깝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회고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사유 방식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그것이 매우 가까운 미래라 할지라도–도입할 경우, 심각한 오류를 유발한다. 지금 이루어지는 변화의 징후들이 어디로 어떻게 연결되어 연장될지를 분석할 만큼 미세하고 철저한 분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히려 변화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인과적으로 분석하는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개념체계하에서 조명하여 “사물의 원인들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이루어진다. 매클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우리가 세계와 환경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의 한 범례를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말로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현재 개신교는 예배 및 공동체 내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팬데믹 상황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4 이 부적응은 개신교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전통을 성실하게 지켜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종교개혁이 폭발적인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쇄술이라는 테크놀로지 미디어와 우연히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결코 루터의 종교개혁을 의도하여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던 무렵에 기술적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인쇄물 수요가 이어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인쇄 문화의 출현으로 인해 중세의 부족적・공동체적 문화는 개인이 문자를 읽고 사유하는 고독한 이성적 사유의 문화, 즉 개인주의 문화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말씀의 종교인 개신교는 철저히 인쇄 문화와 더불어 출현했고, 아울러 전문 지식을 갖춘 천재적인 개인들을 모델로 문명의 발전을 구가하였다. 그래서 개신교 목사는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가톨릭 사제들과는 달리 전문 지식인을 롤모델로 삼으며,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육하는 모습을 견지해왔다. 말하자면 종교 개혁과 개신교의 출현 이면에는 미디어 혁명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코로나19 자체가 문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팬데믹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언택트 사회를 구축하면서 문명의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출현 중인 네트워크 문화는 개신교의 모태가 된 문자 문화의 종말을 앞당길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위기를 개신교 신앙의 체질개선을 위한 자극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통상 미디어와 메시지를 구별하면서, 미디어를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매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매클루언의 말은 이러한 우리의 통념을 전복한다. 사실 모든 미디어는 그저 텅 빈, 즉 “메시지가 없는” 미디어이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란 ‘언제나 또 다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자 미디어의 내용은 말이고, 인쇄 미디어의 내용은 글로 쓴 말이며, 전보라는 미디어의 내용은 인쇄이다. 그래서 “모든 미디어나 기술의 ‘메시지’는 결국 미디어나 기술이 인간의 삶에 가져다줄 규모나 속도 혹은 패턴의 변화”이다. 예를 들어 철도라는 미디어의 출현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도시들과 새로운 종류의 노동과 여가를 창조”해냈고, 이를 통해 기존 “인간 활동들의 규모를 확대하고 속도를 가속화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철도라는 미디어의 메시지인 것이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것은 결국 미디어의 도입으로 인해 야기된 변화 자체가 메시지라는 말이다.(32)
매클루언에게 미디어는 단지 방송이나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자체의 양상이다. 존재란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통해 존재하고, 미디어의 기술적 발전과 응용은 존재의 양상 자체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미디어는(혹은 기계는) “우리가 타인과 맺는 상호 관계와 우리 자신 내부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며, 바로 이 변화의 방식이 미디어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미디어는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그 자체를 창출해낸다. 예를 들어 인쇄 미디어를 통해 종교개혁이 확산되었고, 이를 토대로 근대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가 창출되었다. 철도의 도입이나 자동차의 등장은 각각 다른 면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디지털 네트워크 미디어의 도입으로 이제 디지털 온라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디지털적 패턴 인식에 기반해 “전자적 참여와 개입이
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25, 31)
인쇄 문화 시대에 지식은 분화되고 전문화된 정보는 쏟아져 나왔으며, 그래서 교육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professional)를 양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제 모든 정보의 교환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방대한 양을 소통할 수 있는 전자 미디어 시대가 다가옴에 따라 지식의 상호 관련성을 파악할 있는 통합적 통찰력을 중시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근대 기계 시대의 정보와 지식은 ‘절단’ 혹은 ‘추상화’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에 파편적이고 고립적이지만, 전자 미디어 시대의 정보는 ‘연결’(connection)을 통해 생성되며, 이는 곧 지식과 정보가 공감능력, 깊이 있는 인식, 그리고 연대를 통해서 형성되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별히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가 연결되어 소통하는 시대에 “우리는 스스로를 인류 전체의 일에 개입시키고, 우리 속에서 인류 전체
의 일이 함께 고려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중추신경 체계를 기술적으로 [연장]시킨다.”라고 매클루언은 말한다.(7) 그래서 이제는 우리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더 이상 타인과 분리되어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서구적 개인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는 곧 “더 이상 정치적인 의미에서, 고립되고 제한된 집단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곳을 연결하는 미디어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삶에 개입하듯, 그들도 우리 삶에 개입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8) 그래서 우리 시대는(매클루언의 시대는) “전체성, 공감능력, 그리고 깊이 있는 인식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10)

나르시스의 신화와 전자 미디어 시대의 감각 마비
개신교인들이 온라인 예배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족은 ‘예배다운 예배가 아니다.’라는 것과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대답이 주를 이룬다. 매클루언의 관점에서 이러한 반응은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으로 인한 나르시스적 감각 마비 현상이다. 사실 모든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연장]”으로서,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 세계와 소통하며 동시에 각자의 의식과 경험을 형성한다.(57) 하지만 생물학적 유기체로서 항상성(homeostatis)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내/외를 구별하여,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는 생물학적 관성을 지닌 인간은 새로운 미디어를 자신의 연장(extension)으로 받아들이는 데 무척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신체의 연장인 미디어를 타자화시켜 자기로부터 분리시키는 ‘자가 절단’(autoamputation)을 시행한다. 모든 미디어는 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새로운 기술의 형태로 확장시키고 절단함으로써 전형적인 나르시스적 자기 마비 상태에 빠져”든다.(37)
매클루언은 나르시스의 신화를 재해석함으로써 이를 설명하는데,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를 타자로 인식하여 사랑에 빠진다. 전통적으로는 이를 자아-도취의 이야기로 해석하지만, 매클루언은 여기서 나르시스가 거울처럼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타자’로 인식했다는 데 주목한다. 즉 자신의 연장(extension)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 상황에 적응하느라 감각 마비가 일어나 폐쇄된 체계에 갇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든 미디어와 기술은 바로 이러한 자기 마비 상태를 동반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발명에 대한 자극이 된다.
감각 마비 상태란 중추신경계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려는 시도로서, “지각의 힘이 불편한 자극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거나 그 원인을 제거하지 못할 때에는 자가 절단의 능력 혹은 전략을 몸에 의지하여 구사”하는 것이다.(98) 도구적 인간(homo faber)으로서 인간은 기술과 미디어를 통해 도구들을 발명하여 몸을 연장한다. 예를 들어 바퀴는 발의 연장인데, 문자 미디어나 화폐 미디어로 인해 교환과 소통이 가속화되면서 이동을 위한 발의 부담이 증가되고, 이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바퀴를 발명하여 발의 기능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중추신경계는 바퀴를 발의 연장으로 수용하는 데 많은 부담을 느낀다. 왜냐하면 발로 이동할 때와 바퀴로 이동할 때 느껴지는 감각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추신경계는 바퀴를 발의 연장이 아니라 몸의 타자로 인식하면서 감각의 차단과 마비를 시도하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경계를 유지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미디어와 기술은 ‘자가 절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 미디어 시대는 이 감각 마비의 원리가 더욱 공고해지는 시대이다. 생물학적 두뇌와 신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자 미디어의 시대에 우리는 중추신경계를 몸 밖의 전기 기술로 개방하여, “우리의 개인생활과 집단생활은 정보처리 과정이 되어”버렸다.(116) 이런 상황에서 만일 인간이 감각을 마비시키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의 중추신경계는 붕괴될 것이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안으로 가득 찬 전자 미디어의 시대는 “무의식과 무감각의 시대”이기도 하다.(108) 어쩌면 온라인 예배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불만족은 생물학적 유기체가 새로운 미디어에 보이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성육신(incarnation) 공동체를 ‘inter-carnation’ 공동체로 연장하기
우리는 지금 코로나 팬데믹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을 염려한다. 애초 올 여름 즈음이면 거의 극복될 것이라던 낙관적 전망이 불가능해졌고, 여전히 많은 곳에서 코로나19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경제에 대한 불안이 더해져, 팬데믹이 극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는 조처들을 시행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이제 디지털 네트워크 미디어에 기반한 비대면(언택트)의 소통방식이 매우 익숙한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짐에 따라 불필요한 대면 만남에 대한 부담도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비대면 만남의 실용적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이 온라인 소통방식과 예배의 방식을 달리 생각해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
는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기술과 미디어는 몸의 연장이고, 전자 미디어 시대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만물을 연결하게 되면서, 인간의 지각이 두뇌를 넘어 몸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따라서 전자 미디어 시대는 인간이 몸을 인터페이스로 사용하여, 몸 밖에서 사유할 수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나르시스적 감각 마비 상태는 여전히 인간을 신체 내부로 국한하면서, 우리 몸의 연장들인 문명의 발명들을 인간에게 타자화된 것으로 인식하는 나르시스적 감각 마비 상태를 지속하려 할 것이다. 이 감각 마비 상태가 우리에게 예배에 대한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항상성 기제가 생물학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생물학적 기제는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전달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의 한계 내에서 세계 실재를 축소・환원하여 전달하면서, 실재를 감각적으로 왜곡하고 비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사물이나 세계의 실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에 대해서, 그리고 기술적 발명과 생산에 대해서 나르시스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기술적 도전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마치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진 것처럼 버둥대다가 결국엔 붕괴하고 말 것이다.”라고 매클루언은 경고한다.(147)
이 감각 마비의 무의식 상태를 깨는 것은 바로 “미디어의 잡종화 혹은 이종교배”이다. 인간의 몸은 ‘미디어’이고,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연장’으로서, ‘나’라는 존재가 생물학적 신체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사물과 존재들로 연장하여 함께 ‘행위 주체성’(agential subjectivity)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근 앤디 클라크(Andy Clark)나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같은 철학자들은 증언해주고 있다. 따라서 모든 미디어는 본래 혼종적이다. 이렇게 한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를 만나 하나의 행위 주체성을 구성하는 순간을 매클루언은 “진리와 계시의 순간”이며 또한 “미디어가 우리의 감각들에 가했던 실신 상태와 감각 마비 상태로부터 풀려나는 자유의 순간”이라고 표현했다.(112, 123)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단지 개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물과 더불어 공동의 삶을 구성해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미디어의 혼합과 연장을 구현하는 공동체였다. 그래서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성육신(incarnation)의 개념을 서로가 서로 ‘사이’(between)에 있는 차이와 간격을 의식하면서도 한 몸의 행위 주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공동체 혹은 집단체의 개념으로서 ‘inter-carnation’을 제시해주었다.5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 우리는 우리 자체가 “점점 더 정보 형태로 번역되어 의식 자체의 기술적 [연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127) 말하자면 미디어는 우리를 넘어 우리 자신을 다른 형태의 표현들로 번역하여, 우리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매클루언의 말처럼) 감각 마비 현상을 일으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개신교적 신앙을 21세기 언택트 사회에 맞게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발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참여할 수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 세상은 때로는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의 부족주의적 마인드 때문에 정치적 갈등과 공방의 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갈등과 투쟁을 서로를 보다 더 건전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로 삼는다면, 이 온라인 시대는 성육신 공동체를 ‘intercarnation’ 공동체로 연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extension’을 ‘확장’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역이다. 이 단어는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의 경우처럼 정신과 구별되는 물질적 구성을 가리키며, 화이트헤드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용례에서 ‘연장’을 의미한다. 앤디 클라크가 Supersizing the Mind(2011)를 내놓으면서 ‘연장’을 ‘확장’으로 오역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정신의 거대화’를 가리키는 것이지, 연장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장’이라는
뜻은 물질 구성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결코 A라는 개체가 거대화되어 확장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연장은 새로운 존재나 장치와 연결되어 몸을 넘어선 새로운 정신성의 창발적 출현을 의미한다. 그래서 클라크는 ‘몸의 확장’이나 ‘연장의 확장’이 아니라 ‘정신의 거대화’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확장’이라는 번역은 존재를 개체(individual)로 고정해서 사유하는 근대의 습벽이 잘못 전용된 것으로서, 네트워크 시대의 연장의 의미를 오독하고 있다. 박일준, “인간/기계의 공생의 기호학: 클라크(A. Clark)의 ‘연장된 정신’(the Extended Mind) 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신학논단」, 제92집(2018): 122 이하를 참조하라.
2 마셜 매클루언, 김상호 옮김,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5.
3 예를 들어, 최재천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을 인간이 자연을 난개발하고 착취한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원인 분석에 근거하여 우리 삶의 방식을 생태 친화적인 방식으로 전향하면서, 다양성의 증가로서 진화의 흐름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담론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간과하도록 만들 뿐이다. 과거의 생활방식을 분석하는 데에는 유익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고 다가오는 변화들을 예측하는 데에는 매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최재천, 김은실 인터뷰, “코로나 이후, 여성의 공존과 생태적 전환도 다양성에서 출발한다”, 「한겨레」, 2020년 7월 25일)
4 김성호, “현장예배 필요 더 강조한 개신교, 거리두기 일상 익숙해진 천주교”, 「서울신문」, 2020년 7월 23일 참조.
5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Exercises in Theological Possibility(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17), esp. 174-192.



박일준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보스턴대학교(S.T.M.)와 드류대학교(Ph.D.)에서 학위 과정을 마쳤다. 『정의의 신학: 둘(the Two)의 신학』, 『인공지능시대, 인간을 묻다』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자 연세대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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